나부끼는 사랑을 따라

정다운DQM — 다큐멘터리 감독

다운이 찍는 다큐멘터리 ‘다운큐멘터리’는 감정을 따라 흔들린다. 마음껏 나부낀다. 누군가의 떨리는 귓불 위로, 새하얀 양말 너머로, 빛나는 금색 손목시계 속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운 여자들의 머리카락 곁으로. 영상 속에서 들려오는 다운의 웃음은 해사한 표정을 연상케 하고, 무심하게 던지는 질문은 그때 가장 선명할 감정을 닮아 있다. 정제되지 않은 영상에 안온함을 담아내는 다운의 공식은 언제나 하나다. ‘사랑’. 더도 덜도 말고, 오로지 그것이다. 

저는 제가 보고 싶은 걸 보고, 그걸 찍어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면 입술을 찍고,

조명이 반사되는 머리색이 아름다워 보이면 머리카락을 찍죠.

불안한 모습을 발견하면 까딱거리는 손가락을 찍기도 하고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집 구조가 특이하네요. 

어제 열심히 치운 건데, 보여드릴 게 별로 없어서 머쓱해요(웃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무만 봐도 좋은데요(웃음). 요새 어떻게 지내요? 

요즘은 새로운 사람을 찍기 시작했어요. 세 달째 진행 중인데, 이젠 카메라 의식을 안 하는 시점이 와서 조금 편해진 상태로 작업하고 있어요. 처음엔 어떤 인물이든 카메라가 있다는 자체로 긴장하고 신경 쓰거든요. 경계가 풀릴 때까지 보통 한두 달은 걸리는 것 같아요. 지금 찍고 있는 분은 20년째 엠비언트 음악을 하는 분인데요. 요새는 좀 친해져서 전시도 함께 하고 텀블벅도 같이 준비하고 있어요. 지원 사업도 같이 알아보는 중이고요. 

 

이번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제가 먼저 찍고 싶다고 연락했어요. 팀으로도, 개인으로도 활동하는 분인데, 팀으로는 이름을 알렸지만 개인 작업을 아는 사람이 한국엔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만나자고 했죠. 엄청 아름다운 여성분이어서 만나자마자 놀란 기억이 나요. 하고자 하는 게 정확하게 있는 분이었고, 음악에도 힘이 강력해서 꼭 다큐멘터리로 찍고 싶었어요. 올해가 데뷔 20주년이라 동화책이랑 앨범이 같이 나올 예정인데요. 처음엔 발매까지 촬영해 보려고 했는데 찍다 보니 호흡이 잘 맞아서 내년까지 이어 가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에요. 

 

이번 작업은 호흡이 긴 것 같은데, 보통은 작업 기간이 어떻게 돼요?

별다른 작업이 없을 땐 한 달에 두 명 정도 찍는데, 규칙적인 건 아니에요. 찍다 보면 이야기가 계속 생겨나서 좀더 찍고 싶어지는 인물이 있거든요. 그럴 땐 작업 기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좀더 밀도 있는 작업을 하게 돼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촬영 기간이 정기적이거나 규칙적이진 않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달라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다큐도 많고요. 

 

좀더 찍고 싶다는 생각은 어떨 때 들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야깃거리가 많고 너무 열정적인 사람들은 길게 촬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찍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물리는 느낌도 있고,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오히려 “난 재미도 없는데 왜 찍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관심이 가요. 자연스럽게 더 오래 찍게 되고요. 특이한 직업인을 찍기도 하지만, 직업이 뚜렷하지 않은 분을 촬영한 적도 있는데요. 특히 그런 분들이 종종 “난 보여줄 게 없다.”고 하시는데, 그 생활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생겨나요. 같이 뭔가를 발견하게 될 때도 있고요. 

 

다운 씨는 다큐멘터리가 뭐라고 생각해요? 

기록이요. 저는 기록을 좀 강박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얼마 전에 울산 본가에 내려가서 제 일기장을 다 가지고 왔는데요(웃음). 이거 보실래요?

이게 다 일기장이에요? 어림잡아도 50권은 훌쩍 넘는 것 같은데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일기는 꼭 쓰도록 가르치셔서 다섯 살 때부터 썼어요.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녁 8시가 되면 일기를 쓴 것만큼은 생각나요. 제 방문을 열면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양치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와서 엎드려 쓰곤 했거든요. 그때 노트를 여백 없이 꽉꽉 채우는 버릇이 생겨서 지금도 첫머리부터 맨 마지막까지, 깜지처럼 채워서 쓰곤 해요. 그래서인지 촬영할 때도 테이프를 정말 많이 써요. 녹화 버튼을 누르면 끄질 않으니까 한 번 촬영할 때마다 엄청난 기록이 쌓이죠. 그러고 보니 일기와 영상을 합치면 기록해 온 양만 해도 어마어마하네요. 어릴 때부터 쭉 이어진 걸 보면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요. 

 

조금 다른 방향을 시도해 보고 싶진 않아요? 이야기를 만든다거나,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다거나. 

저는 제가 창의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뭔가를 연출하거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렇게 있는 걸 기록해 나가는 게 잘 맞는 것 같아요. 매일 일기를 쓰고, 아무 때나 캠코더를 드는 식으로요.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거든요. 

 

일기는 지금도 자기 전에 써요? 

아니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쓰는데 보통 시간대별로 써요. 강박적으로 쓰는 거기도 하지만, 기억력이 안 좋아서이기도 해요. 얼마 전엔 집 비밀번호도 까먹었어요(웃음). 분명히 제가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는데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다시 누르고, 또다시 눌러도 안 되니까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일기장을 들고 다니면서 몇 시에 뭐 했고, 몇 시엔 뭐 했는지 쓰면서 지내고 있어요. 한두 줄만 쓰더라도 일상을 죄다 기록해 두는 거죠. 

 

그러고 보니 만나자마자 영상 얘기부터 했네요(웃음). 좀 늦었지만 소개해 주실래요?

안녕하세요, 정다운이에요. 요즘엔 작업 분야가 다양해져서 촬영 감독이나 상업 패션 필름 일도 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제 정체성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 같아요. 

 

왜일까요? 

가장 재미있어서요. ‘다큐멘터리’가 꼭 저를 설명하는 단어면 좋겠어요.

감독이라는 단어는 참 여러 분야에서 쓰이잖아요. 다운씨는 ‘감독’을 뭐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너무 어려워요. 잘 모르겠어요. 어떤 분야의 대장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감독이라는 단어와 제가 잘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본인을 감독이라고 소개하지 않아요? 

캠코더 찍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촬영하는 사람… 보통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누군가 저를 감독이라고 부를 때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요. “다운아.” 혹은 “다운 씨.” 하고 불러주는 게 훨씬 편해요. 

 

그럼 오늘은 다운 씨라고 불러 볼게요. 말하는 동안 햇빛이 계속 눈앞에서 흔들리는데, 눈동자가 엄청 갈색이네요. 

눈동자가 좀 밝죠. 근데 에디터님 눈동자도 그런걸요? 

 

서로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묘하네요(웃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어요.

저희 엄마는 위암 판정을 받고 악화 속도가 빨라 굉장히 일찍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반년 동안은 제가 옆에 계속 붙어 있었는데요. 그때 이야기도 많이 나눴지만 솔직히 지금은 제가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모든 게 허무하더라고요. 근데 어느 날 엄마가 찍힌 영상을 봤는데 꼭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글도, 사진도 그렇지 않았는데 영상만큼은 엄마가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영상이 단 두 개밖에 없다는 게 아쉬워서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찍어놓을걸….’ 후회도 했는데요. 문득 제 곁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을 기록하는 게 남은 인생의 숙명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찍기 시작했어요. 친구들이랑 보내는 일상을 계속해서 기록해 나간 거죠. 쉬지 않고 찍다 보니 순식간에 자료가 쌓여서 윈도 무비 메이커로 조금씩 편집하면서 정리를 시작했어요. 이 파일들을 어디에 보관해야 하나 싶을 때쯤 유튜브를 알게 됐죠. 그땐 유튜브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여서 공짜로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죠. 보통은 친구들이랑 노는 영상에 제가 즐겨 듣는 음악을 입히는 식이었는데, 특별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다 같이 마포대교를 걷거나 집에서 춤추는 걸 찍었거든요. 그런 영상이 지금의 다큐멘터리로 발전한 거예요. 

 

다운큐멘터리의 뿌리엔 엄마가 있는 셈이군요. 다운씨한테 엄마는 어떤 존재였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사랑받은 기억이랑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같이 떠올라요. 저는 엄마를 좋아했어요. 고등학생 때까지 뽀뽀하고, 친구보다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죠. 엄마는 저를 일찍 낳으셔서 생각이 열려 있고 이야기도 잘 통했어요. 제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할 때도, 모델이 되고 싶다 할 때도 편견 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한 번도 틀에 박힌 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대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호되게 혼이 났어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셨죠. 저는 어릴 때 할아버지·할머니부터 육촌까지 함께 살았는데요. 그 누구도 제가 맞고 자라는 줄 몰랐대요. 혼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다운이가 착하게 크는구나.’ 생각하셨다는 거 있죠(웃음)? 

 

그런 엄격함도 애정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엄마는 제가 주도적으로 자라길 바랐어요. 학원을 보내거나 억지로 진로를 정하려고 하신 적도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엄마한테 진짜 멋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졸업 사진 찍을 때 친구들이랑 옷을 사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가 그러시는 거예요. “라코스테 피케를 입는 게 진짜 멋있는 거다.” 초등학생 땐 딸기 운동화를 갖고 싶다고 졸라도 나이키 코르테즈를 사주던 분이셨어요(웃음). 그땐 코르테즈가 얼마나 신기 싫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그거 신고 맨날 1등 했어요. 어릴 때 육상부여서 달리기를 꽤 열심히 했거든요. 

 

엄마가 정말 멋쟁이셨군요. 근데 다운 씨, 엄마 얘기를 하는 내내 눈이 웃고 있는 거 알아요(웃음)? 저는 ‘다운큐멘터리DQM’라는 이름이 참 좋아요. 한 번 들으면 찰싹 달라붙어 잊히지 않는 이름이어서요. 

이 이름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면서 짓게 된 거예요. 다큐멘터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이름, 저 이름 생각해 봤는데 다운큐멘터리가 제일 좋겠더라고요. 처음엔 ‘downqmentary’였어요. 근데 친구들이 ‘dawn’이 더 멋있다고 해서 2-3년 전에 ‘dawnqmentary’로 바꿨죠.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초등학생 때 쓴 일기를 올렸죠. 초등학생 때 방송반에서 카메라를 담당했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웃음). 

제가 초등학생 때 전학을 가서 학교를 두 군데 다녔는데, 두 번 모두 방송반을 했더라고요.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일기를 읽으니까 방송실에 들어간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어요. 근데 일기장엔 체육대회 날 영상을 찍었다거나 6밀리 캠코더로 촬영했단 내용이 있는데 그런 기억은 전혀 없어요. 읽으면서 엄청 신기하고 재미있었죠. 

 

어릴 때부터 카메라와 가까이 지낸 셈인데, 다운큐멘터리를 시작하기 전까진 영상에 관심이 없었어요? 

전혀요. <인간극장>을 챙겨 보는 것 말고는 드라마나 영화에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럼 다큐멘터리가 내 업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겠네요.

이걸로 돈을 벌었을 때요. 마포대교에서 친구랑 노는 영상 올리던 시절인데, 아디다스에서 그 포맷 그대로 영상을 찍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 제안을 받고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저는 책상에서 작업할 때 굉장히 산만해지는 편인데, 유일하게 영상을 편집할 땐 몇 시간, 며칠이고 앉아 있을 수 있어요. 마음에 들 때까지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영상이라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땐 이름을 알리기 전인데 어떻게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계속 주변 사람을 찍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촬영하게 됐어요. 포토그래퍼나 보더도 있었죠. 그때 한창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주목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제가 눈에 들어왔나 봐요. “로우파이 하게 촬영하는 애가 있는데, 짧은 다큐멘터리 같은 걸 찍어.”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요(웃음). 브랜드가 선정한 인플루언서를 촬영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당시 활동하는 힙스터 언니·오빠들을 찍는 게 재미있었어요. 디제이 360사운즈, 포토그래퍼 구영준 씨, 스튜디오 콘크리트 식구들도 있었어요. 잡지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궁금한 걸 물어볼 수도 있으니까 신기하면서도 긴장됐어요. 

 

친구를 촬영하는 거랑은 다른 느낌이었겠어요. 

청 달랐죠. 저는 지금도 촬영할 때 손이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찍고, 앵글도 제 마음대로 정하면서 묻고 싶은 걸 막 질문하면서 찍거든요. 친구를 찍을 땐 반말로 이것저것 거침없이 얘기하는데, 그분들한테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질문 내용도 한 번씩 더 고민해야 했어요. ‘이런 걸 부탁해도 되나?’ 싶어서요. 브랜드 영상엔 분명히 목적이 있거든요. 어디에 어떤 식으로 업로드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찍히는 사람들이 일단은 호의적이에요. 유대 관계가 깊은 사람을 촬영할 때의 내밀함은 없지만 그래도 제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고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느 인터뷰에서 “픽션은 픽션 나름대로 재미와 멋이 있지만 픽션보다는 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는 게 목표다.”라고 했어요. 

(웃음)머쓱하네요. 그때랑은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아요. 작년에 영화 <너와 나>(2021)를 촬영하면서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짠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보는게 정말 사실인지, 제가 경험한 게 진짜인지, 허상인지… 문득 아무것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좀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제가 찍는 다큐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지, 아닌지도 의심이 되더라고요. 그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바뀐 것 같아요. <너와 나>를 찍으면서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만드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성격이 투영된다는 걸 배웠거든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실과 픽션을 나누는 걸 이젠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사실 쪽에 관심을 두었다면, 지금은 그 경계가 약간 허물어진 거네요.

맞아요. 

 

그럼 지금은 작업하는 이야기가 픽션이어도 괜찮아요?

네. 완전요. 엄청 많이 바뀐 거죠. 그렇다고 해도 영화는 못 만들 것 같아요. 글을 잘 못 써서요(웃음). 그렇지만 영화 현장에서 함께하는 건 너무 좋아요. 

 

그런데 또 다른 인터뷰에서 “다운큐멘터리는 어떤 대상을 주관대로 바라보고 마음껏 바꿔나가며 찍는 자기중심적인 작업”이라고 했죠. 이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처음 인물을 찍기 시작했을 땐 제가 굉장히 객관적으로 촬영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찍다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저는 제가 보고 싶은 걸 보고, 그걸 찍어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면 입술을 찍고, 조명이 반사되는 머리색이 아름다워 보이면 머리카락을 찍죠. 불안한 모습을 발견하면 까딱거리는 손가락을 찍기도 하고요. 찍는 순간부터 촬영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편집할 땐 더 하죠. 제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작업이니까요. 예컨대, 피사체가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찍다 보니 웃기고 유쾌한 사람인 거예요. 그럼 편집할 때도 후자 이미지로 편집하게 돼요. 그러니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다큐멘터리는 편집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봐요. 

그럼요. 마음만 먹으면 악마의 편집도 가능해요(웃음). 제가 하는 다큐멘터리는 간단하게 말하면 인물의 일상을 관찰하는 거잖아요. 근데 한 사람을 계속 찍다 보면 생각보다 마가 많이 떠요. 계속 대화를 나누고 연달아 사건이 발생하는 게 아니니까 틈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근데 저는 그럴 때조차 녹화 버튼을 안 꺼요. 그러다 보니 소스가 엄청나게 쌓이죠. 저는 한 사람당 테이프를 스무 개 정도 사용하는데, 그럼 스무 시간이거든요. 근데 이걸 20분짜리 영상으로 만드는 거니까 어떻게 자르고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뉘앙스나 흐름이 바뀌어요. 편집과 밀접한 관계일 수밖에 없어요. 

 

요즘엔 다들 영상을 즐겨 보는 것 같아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다 보면 거의 다 유튜브나 OTT 플랫폼으로 뭔가를 보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왜 이야기가 있는 영상을 좋아할까요? 

이야기들이 나와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것들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요. 어떤 일들은 절대 나한테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고, 반대로 저 일이 내게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런 믿음 외에도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거든요. 그것들을 영상으로 경험하고, 또 나와 엮어가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이야기가 없으면 절대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럼 이야기가 없어지면 어떡해요?

이야기가 없어질 수 있을까요? 저에겐 저만의 이야기가 있고, 친구에겐 친구만의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모르지만 친구는 아는 제 이야기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엮어 나간다면 결코 이야기가 없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걸 깨닫고부터 저는 이 모든 일을 병적으로 적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많죠. 

 

요새는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얼마 전에 에디슨 송Edison Song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면서 두 여자가 나오는 영상을 만들었어요. 저는 항상 여자와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진 않아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거든요. 근데 이번 작업을 준비할 때 갑자기 제 경험담이 떠오르더라고요. 예전에 포토그래퍼인 친구가 한 여성 디제이를 촬영하는데 그 친구를 안고 있는 등을 찍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스스럼없이 옷을 다 벗고 촬영에 참여했거든요. 처음엔 별 느낌 없었는데 디제이와 제 몸의 생김새가 비슷하단 느낌이 들면서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거예요. 둘 다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뜨거워졌고 묘한 기분이 들었죠. 그때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서 이번 뮤직비디오는 동성과의 첫 스킨십을 떠올리면서 작업했어요. 저는 이런 식으로 제 경험을 작업에 연결해서 생각하는 편이에요. 백지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제 이야기, 혹은 제 친구들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연결하는 식이죠. 

 

그렇게 하나씩 끌어오다 보면 내 이야기가 바닥나는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큰 목소리로) 아니요! 없어요. 

 

으악, 깜짝이야(웃음).

제가 <너와 나>를 찍을 때 놀라운 우연을 많이 겪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가 얼마나 끊임없이 엮여 나오는지 알게 된 경험이었죠. 한번은 혁오 공연 촬영으로 L.A.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촬영한 영상에 <너와 나> 스크립터 언니가 있는 거예요. 그 시절엔 전혀 모르던 사이였거든요. 언니는 L.A.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였는데, 혁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 뮤지션이 공연하러 왔다니까 줄을 섰다가 제 카메라에 잡힌 거였어요. 서로 관계가 없을 때인데 이런 걸 이번 작품 하면서 하나둘 알게 됐어요.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이런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적다 보면 절대 이야기가 고갈될 일은 없어요. 

 

그럼 타인과의 대화가 무척 중요하겠네요.

맞아요. 저는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책 한두 장 읽는 것보다 사람이랑 대화할 때 배우는 게 더 많다고 느껴요.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궁금한 사람이 생기면 계속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그래서 인물 다큐멘터리를 고집하는 거군요. 그 뿌리는 사람을 향한 애정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하는 작업의 뿌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에요. 개개인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걸 알려주는 작업이니까요. 

 

그럼 ‘정다운’보다 내가 촬영한 사람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요? 

그럼요. 촬영할 때 ‘재미있는 작업이 나와서 내 유튜브가 잘 됐으면 좋겠다.’보다 ‘이 사람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애한테 보여줘야지.’ 같은 생각을 훨씬 많이 해요. 혁오 멤버들한테도 “너네 자식들이 너네처럼 말썽 피우고 그럴 때 이 영상 다 보여줄 거야.”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죠(웃음). 저는 언제든 다 같이 모여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찍고 싶어요.

혁오 다큐멘터리는 정말 오랫동안 찍어오고 있죠. 다운 씨를 세상에 알리는 발판이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친구들만 촬영하다가 처음으로 친구가 아닌 사람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게 혁오의 ‘오혁’이죠. 밴드를 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촬영 좀 해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근데 처음엔 비주얼에 압도당했고 좀 무서웠어요(웃음). 긴장한 채로 첫 촬영을 갔는데 공연장에 사람도 얼마 없고…. 이번 주만 촬영해 봐야겠다, 싶었는데 그다음 주에 신기하게도 공연장이 꽉 차는 거예요. 사실 혁오 노래가 제 취향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촬영하다 보니까 노래가 좋게 들리고, 멤버들이 귀엽게 느껴지더라고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돼서 ‘조금만 더 찍어볼까.’ 하고 그다음 주로, ‘조금만 더 찍어볼까.’ 하고 또 다음 주로 넘어가다가 어느 날 <무한도전>에 나간다고 해서 ‘더 찍어보자.’ 하면서 지금까지 찍어오고 있어요. 벌써 7년이 넘어가는 작업이네요. 

 

작업해 오면서 많은 게 바뀌었고, 또 바뀔 테지만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에요? 

누굴 찍든 털털하게 다가가는 스타일이라 상대가 원치 않을 때 깊숙하게 들어가는 걸 경계하려고 해요. 밝히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을 텐데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집요하게 찍는다든지… 그런 실수를 주의하려고 하죠. 한 사람을 촬영하다 보면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영상에 등장하는데요. 그 관계를 제가 다 파악할 수 없으니까 그런 점도 많이 생각하게 돼요. 

 

찍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잘 살피면 느껴져요. 다큐멘터리라는 게 계속 그 사람의 일상을 쫓는 거다 보니까 사람과 상황, 그리고 감정을 관찰하게 되거든요. 그럼 아주 작은 지점까지도 느껴져요. 특히 저는 관찰도, 질문도 좋아하니까 좀더 알아채기 쉬운 것도 같고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죠. 

 

사람이 아닌 것도 관찰하곤 해요?

네. 직접 소통할 순 없지만 반응을 기대할 수는 있거든요. 식물 키우는 걸 생각해 보세요. 관심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필요한 영양분을 적시에 주느냐에 따라 성장이 달라지잖아요. 돌이라고 해도 그걸 쓰다듬느냐 발로 차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거고요. 저는 무생물한테도 반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관찰한 것 중에 흥미로운 거 있었어요? 

나무요. 저랑 가까운 친구들이 나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친구들 덕분에 나무도 관찰하게 됐죠. 그 친구들은 나무의 감정이랑 호흡까지 느낀대요. 저는 아직 거기까진 어렵지만 친구들처럼 되기를 기대하면서 나무에 대한 책이나 나무 자체를 유심히 보고 있어요. 

 

다운 씨는 이야기가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은데, 인물에 집중해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유는 뭐예요? 

자극적이어서요. 저는 고자극을 굉장히 즐기는 사람인데, 아마 성질이 급하고 반응이 빠른 편이라 더 그런 것 같아요. 

 

고자극이라는 게 유혈이 낭자하는 그런 건 아니죠?

아니죠(웃음). 저는 친구들과 있을 때면 꽤 하이텐션이에요. 함께 걸어 다니거나 뭔가를 먹을 때 제 텐션에 친구들이 맞춰주는 게 고자극처럼 느껴져요. 제 빠른 반응이나 급한 성격, 하이텐션을 함께해 줄 때 일어나는 자극인 거죠. 

 

결국 인간과의 유대와 사랑인 셈이네요􏘛 인간을 계속 사랑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에요? 

사랑이요. 

 

사랑의 원동력은 사랑이다…. 근데 촬영하는 대상이 지인이 아닐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땐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요?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을 찾으려고 해요. 제가 그 인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보려고 하죠. 어떤 걸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걸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지. 자신이 무언갈 사랑하게 되면 그걸 타인과 나누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발견하는 게 좋아요. 

 

다큐멘터리는 각본이 없는 장르니까 오히려 더 계획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웃음). 

 

일기장 쌓아온 걸 보면서 계획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그래서 촬영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가 정말 많거든요. 갑자기 다리가 아플 수도 있고, 누군가 찾아오기도 해요. 다큐멘터리는 상황을 연출하거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니까 돌발 상황이 정말 많아요. 

 

그럼 당황하지도 않아요?

엄청 당황하죠. 누군가 다치거나 아픈 상황을 촬영한 적도 있는데 이 모든 게 돌발적이기 때문에 막상 닥치면 되게 당황스러워요. 이 외에도 자잘한 상황은 많죠. 사람들이 커피를 얼마나 많이 쏟는지 아세요(웃음)? 아이스크림이 옷에 흐르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데요. 

 

사람뿐만 아니라 상황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것 같아요.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주요 화두로 오른 적이 있어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때 ‘이해할 수 있다.’와 ‘그럴 수 없다.’로 나뉘었는데, 저는 그럴 수 없다는 쪽이었어요. 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음, 그럼 다큐멘터리를 찍는 중에 피사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 어떡해요? 

애초에 이해를 안 하려고 해요. 사람도, 상황도 기록하는 데만 집중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인물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촬영할 땐 자의식을 완전히 없애고 인물에게만 집중하거든요. 그러니까 비교적 이해할 준비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그냥 녹화만 하는 거예요. 기록만 하는 거죠.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은 제가 편집하면서 도려내지 않을까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작업이니까요. 

 

애초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큰 스트레스는 아니겠네요. 

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엔 무조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제가 어떤 사람 때문에 버스를 놓쳤다면 무조건 이유가 있을 거고, 그 버스를 못 탄 상황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생겨날 거예요. 누군가 제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데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가 생겨난다 믿고요. 사람마다 다사다난한 시기가 있잖아요. 그런 시절에도 무조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울산 본가가 태풍으로 무너졌거든요. 온 가족이 고생했는데, 그때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버텼어요. 아빠랑 할머니랑 집을 고치면서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집 문제로 울산에 내려간 덕에 엄마도 만나고 돌아올 수 있었어요. 결혼 전에 식구들을 모두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모든 게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흘러온 걸 거예요.

아, 맞아! 결혼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웃음). 결혼에도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참 많아요.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이 친구가 저희 엄마랑 닮은 점이 참 많아요. 저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친구들이 많으니까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을 의심해 본 적도 없고요. 근데 이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제가 엄마 빈자리 때문에 외로웠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됐어요. 그렇다는 걸 알아가던 어느 날, 이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앞으로 계속 저랑 잘 지낼 수 있겠냐고요. 그랬더니 당연하게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처음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을 땐 싫다고 했는데요. 남자친구가 “그럼 결혼하지 말고 그냥 같이 살자.”고 하는 순간 제 안의 청개구리가 발동하는 거예요. 고자극을 원하는 청개구리(웃음). 결국 마지막엔 제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올해 3월부터 같이 살고 있는데 엄청 편해요. 정말 엄마랑 같이 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예비 남편을 촬영하기도 해요?

많이 찍었어요. 엄청나게 아카이빙 되어 있죠(웃음). 

 

어때요? 같이 사는 사람 찍는 거. 

처음엔 어색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결혼식 준비 과정도 찍고 있어서 꽤 촘촘한 아카이브가 될 것 같아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서 그 과정 역시 남겨 보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찍고 싶은 게 또 많아지겠죠?

 

계속 이야기를 쫓아가는 거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곱씹어 봤는데, 다운 씨가 말하는 다큐멘터리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장르는 아닌 것 같아요. 

네. 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누군가의 진실을, 사실을 기록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요?

아니요. 

 

우리가, 또 제가 사실과 사실이 아닌 걸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자리도 그래요. 우리가 만난 건 사실일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역할 놀이일 수도 있잖아요. 저 혼자 있을 때랑 에디터님이랑 이야기할 때, 친구랑 이야기할 때가 너무 달라서 제 모습도 어떤 게 진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에디터랑 만난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제가 찍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절대 얘기할 수 없는 거죠. 

 

그럼 나는 나의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사실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네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렇게 생각하니 좀 무서워요.

그렇죠? 저는 가끔 제 기분을 정확하게 알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분기마다 제 상태를 기록해요. 지금 제일 많이 드는 생각, 지금 제일 좋아하는 음악, 지금 제일 보고 싶은 사람…. 이 리스트를 무조건 정리하는데, 그렇게 작성해 놓아도 금세 또 바뀌어요. 쓰자마자 바뀔 때도 있고요. 

 

생각할수록 묘하네요. 모든 게 픽션 같기도 하고요. 

제 왼팔에 있는 나비 타투가 그런 생각을 담은 거기도 해요. 이게 ‘허상 나비’거든요. 라인으로 면이 채워져 있는데, 라인이 결코 연결되진 않아요.

타투가 많이 보이는데, 전부 붉은색이네요?

맞아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첫 타투를 붉은색으로 해놓으니 그 뒤에도 붉은색으로 맞추게 되더라고요. 하나만 검은색인데, 이건 ‘엄마’라는 뜻이에요. 여기 (왼쪽 팔을 걷으며) 용 타투도 있어요(웃음). 아, 그리고 눈썹 위에 한 것도 타투예요. 붉은색 두 개요. 같은 곳에 대칭으로 찍었는데, 사실 눈 아래에 하고 싶었어요. 제 왼쪽 눈 바로 아래 붉은 점이 있는데, 오른쪽도 맞추고 싶어서요. 근데 타투이스트 친구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눈동자를 건드릴 것 같다면서 눈썹 위 똑같은 부분에 대칭으로 점을 찍어줬어요(웃음). 

 

타투야말로 이야기가 있는 흔적 같아요.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는 것 같아서요. 다운 씨, 요새 재미있게 본 영상 있어요?

얼마 전에 <카메라퍼슨Cameraperson>(2016)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주 인상 깊었어요. 여성 감독의 다큐멘터리인데요. 모든 장면을 파편처럼 편집한 게 특히 좋았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이 춤추는 장면이 잠깐 나오다가 끊기고 블랙 화면에 날짜, 바람 부는 공간에 서 있는 엄마 뒷모습만 몇 초 보여주다가 끊기고 블랙 화면에 날짜, 뻥 뚫린 고속도로를 촬영하다 갑자기 번개가 치고 끊기고 블랙 화면에 날짜…. 이런 식으로 두 시간이 흘러가는데 넋을 놓고 봤어요.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고 해서 큰 스크린으로 다시 한번 보려고요. 

 

다운 씨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형태는 아닌 것 같아요. 

전 사실 기승전결을 잘 몰라요. 어디서 사건이 터지고, 고조되고, 마무리되는지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장편 영화를 작업하면서 서사를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사건의 흐름보다는 인물의 행동에 좀더 관심을 갖게 돼요. 인물이 취하는 사랑스러운 이미지나 행동 같은 거요. 

 

사람들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드라마에 빠져들잖아요. 제작자는 일부러 더 궁금한 지점에서 끊기도 하고요. 

저한텐 그게 너무 큰 스트레스라 무조건 결말을 알고 봐야 해요. 얼마 전엔 남자친구가 <수리남>을 보자고 하는데, 제발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보자고 졸라서 모든 내용을 검색해 보고 줄거리를 파악한 뒤에 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야만 편하게 집중할 수 있거든요. 

 

뭐가 불편한 걸까요? 

궁금한 걸 못 참아서? 

 

그럼 다운큐멘터리를 만들 때 궁금해지게 만드는 기법은 사용하지 않아요?

네. 제 작업도 여러 화로 구성되는 것들이 있는데요.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끝을 내진 않아요. 그저 계속 보게 만드는 영상이길 바라면서 만들고 있죠. 제 작업은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 때문에 계속 보게 되는 영상이면 좋겠어요. 

 

처음 다운큐멘터리를 볼 땐 ‘이게 뭐지?’ 싶었거든요. 근데 나중엔 집중해서 보지 않아도 일하면서 틀어놓게 되더라고요. 더 보고 싶다는 마음과 계속 보게 되는 현상이 맞물리면서 끌 수가 없었어요. 

최고의 칭찬이에요.

(웃음)작업할 때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감정이요. 찍히는 사람의 감정. 그게 좋든 나쁘든 카메라가 계속 따라가는 것 같아요. 

 

카메라가 감정을 어떻게 따라가요? 

예를 들어 엄청 슬픈 상황이면 자연스럽게 사람의 눈을 찍게 돼요. 눈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이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거나 뭔가를 만지고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럼 그 대상을 또 쫓아가는 거죠. 제 촬영 방식이 직관적인 것 같긴 해요. 저는 클로즈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누군가 화가 났다면 화난 얼굴이 아니라 새빨개진 귀를 촬영하는 식이에요. 사람의 감정은 이런 작은 지점에서 특히 더 잘 드러나요. 슬플 때도, 화가 날 때도요. 물론 기쁠 땐 더 그렇고요. 

 

다운 씨는 어떤 인물을 찍든 사랑을 찾아내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도 그렇고, 다운 씨가 그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습도 그렇고요.

부끄럽지만 맞는 것 같아요. 계속 그러고 싶고요. 

 

그 사랑을 일상에서 찾아내는 게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상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집스러울 만큼 노력해요. 이를테면 을지로에서 재미있는 간판을 발견하면 무조건 찍어놓는 식이죠. 그거랑 다른 영상을 연결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끊이지 않는 이야기보따리네요. 

네. 저는 그걸 계속 기록하고 싶어요. 

 

본인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지금 하는 작업들이 전부 제 다큐멘터리인 것 같아요. 영상을 촬영하면서 제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거든요. 웃기도 많이 웃고요. 제 다큐멘터리를 자주 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제가 보인대요(웃음). 제 목소리나 웃음이 나오는 것들만 모아 뭔가를 해봐도 재미있겠단 생각도 해요. 가끔 인물이 카메라를 빼앗아 들고 저를 찍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제 다큐멘터리 소스가 되겠죠. 

 

다운 씨가 이렇게 이야기를 기록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요?

사랑이요. 

 

역시 애정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겠죠? 

그럼요. 싫은 사람을 기록할 순 없으니까요. 

 

그럼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상 계속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겠네요.

네!

다운은 느린 말투와 씩씩한 음성을 가졌다. 중강의 강도로 찬찬히 흘러가던 대화에 강의 중점이 찍히는 지점은 명확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랑’을 외칠 때였다. 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누구보다 용감한 목소리로 사랑을 꼭꼭 눌러 발음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 사랑은 반드시 선한 곳을 향하리라고 믿었다. 다운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나는 천천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랑이 가장 많이 고여 있는 그곳으로.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