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준이치다 너는 이랑이고 3

나는 열여섯 살이다

나는 열여섯 살이다

2021년이 되고 나는 열여섯 살이 됐다. 몇 년 전부터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는 것도 어느새 정기적인 행사가 됐다. 작년엔 별일 없었지만 2019년 가을에 난 많이 아팠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밥도 물도 먹지 못하는 날이 며칠간 계속됐다. 그때 왜 그렇게 아팠는지 모르겠다. 이랑이 밖에서 병균을 묻혀온 걸까. 모르겠지만 일단 이랑 탓을 하고 본다.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이랑은 안절부절못하고 매일 난리였다. 평소라면 자주 먹지 못하는 별별 간식과 음식들을 내 얼굴 앞에 막 들이밀었다. 그래도 내가 아무것도 못 먹으니까 나중엔 주사기로 축축하고 씁쓸한 것들을 입에다 쑤셔 넣었다. 괴로워서 그만하라고 해도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 다시 목소리가 나오기까지는 몇 주가 더 걸렸다. 목소리를 내는 데 그렇게까지 힘이 필요한지 나도 그때 알게 됐다. 지금도 가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고 쉰 목소리가 나오는 날도 잦아졌다. 나이 드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이랑은 종종 내 꿈을 꾼다. 자다가 일어나 울면서 나를 찾을 때가 있다. 낮에는 선잠을 자지만 이랑이 자는 밤에는 나도 깊이 잠들기에, 이랑이 울면서 갑자기 깨우면 당황스럽다. 자다 깨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나에게 이랑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는다. (들어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랑이 이야기하는 꿈속에서 나는 자주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고양이들 사이에 숨는 모양이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 수십, 수백 마리 가운데 진짜 나를 찾기 위해 꿈속에서 고군분투한 이랑은 잠에서 깨도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며칠 전에는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랑이 큰 소리로 울면서 잠에서 깼다. 그날 나는 옷장 밑 박스 안에서 자다가 이랑의 울음소리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일어나 이랑이 있는 방까지 건너갈 기운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랑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이어나갔다. 한 10분 정도 침대 위에서 울던 이랑은 네발로 엉금엉금 기면서 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박스 앞에 앉아 여느 때처럼 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꿈에서 외국 여행을 가면서 엄마한테 준이치를 맡겼는데, 엄마가 준이치를 어떤 동물보호센터에 맡기고 나를 따라서 여행을 온 거야. 근데 내 핸드폰 부재중 통화에 한국 번호가 찍혀 있길래, 뭔가 하고 전화를 걸어봤더니 안내 음성이 나오면서 엄마가 맡긴 고양이가 죽었다고 하는 거야. 아니, 엄마가 준이치를 어디 모르는 데다 맡긴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준이치가 내가 없는 사이에 이상한 데서 혼자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서 죽었으면 나는 엄마를 평생 용서 못 할 거고. 아니, 그리고 내가 애초에 준이치를 엄마한테 맡길 리도 없잖아. 근데 너무 화가 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꿈에서 엄마한테 막 소리를 지르면서 우는데,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거야. 근데 준이치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내가 막 울면서 그랬어. 진짜야. 준이치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나는 내 나이에 큰 신경을 쓰지 않지만 이랑이 자꾸 내 나이를 말하고, 내 죽음을 상상하고, 그 후에 자기도 죽을 거라고 말할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랑이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전에는 준이치가 ○○도 하고, ○○도 했는데.’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이랑이 현재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열여섯 살이다.

파리를 잘 잡는 고양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냉장고나 옷장 위를 한 번에 뛰어 올라가는 고양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움직이는 끈이나 작은 공, 쥐 모양 인형에 금세 반응하는 고양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되도록 혼자 있는 게 좋고, 그게 난로 옆이면 더 좋다. 갑자기 움직이는 것들을 보면 관심이 가기는 하나 손을 뻗고 싶지는 않다. 이가 불편해서 간식은 묽은 게 좋다.

 

이런 나의 ‘지금’을 이랑이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랑도 내가 과거의 이랑 이야기만 계속한다면 듣기 싫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랑은 내게 쓰레기 같은 맛의 사료를 줬지만 지금은 아니다. 빛도 잘 들지 않는 춥고 작은 집에서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게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불쑥불쑥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을 집에 데려오는 번잡한 행동도 지금은 잘 하지 않는다. 다만 병원, 그놈의 병원은 지금이 훨씬 더 자주 가는 것 같다. 젠장.

 

요즘은 쭉 혼자 자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 새벽에 문득 잠이 깨서 이랑이 자고 있는 침대로 가 누워 보았다. 어젯밤에 이랑이 “전에는 준이치가 항상 내 옆에서 잤는데… 베개도 같이 베고 잤는데….”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랑의 베개를 함께 베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내가 침대에 올라와 눕는 기척에 잠이 깼는지, 이랑은 자기 머리를 베개 끝으로 옮겨갔다. 그리곤 내 몸 위에 팔을 둘렀다 내렸다 들썩대기에 헛기침을 몇 번 했더니 곧 팔을 거두고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두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랑의 기쁜 숨소리가 점점 편안한 숨소리로 바뀌고 우리는 다시 잠들기 시작했다. 가끔은 이렇게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랑
1986년 서울 출생 아티스트. 자칭 준이치 엄마.
[욘욘슨], [신의 놀이] 등의 앨범을 냈고, 《오리 이름 정하기》,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등의 책을 썼다.

 

Hirokawa Takeshi

1981년 센다이 출신 판화가.

글 이랑

그림 Hirokawa Takes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