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를 넘어선 힘을 따라가며

복잡하고 기묘하며 신비에 휩싸인 여성들은 이곳에 없다. 경제적 자유를 원하는 여성, 원하는 바를 이루는 여성, 주장을 맘껏 표출하는 여성이 있을 뿐이다. 원해서,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살아가는 여성들. 이들은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픽션과 논픽션이 어떻게 자리하는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인 곳에 서 있다. 우리는 장면이 넘어갈 때 비로소 주위에 실재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

Book—《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 | 윌북

결코 아름답지 않은 가난에 저항하기

<작은 아씨들>

어릴 적 너도나도 돌려가며 읽던 단란한 자매들의 이야기 《작은 아씨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가족상을 알려주었다. 돈보다 사랑과 우애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동명의 드라마 장르는 스릴러로, 원작이 주는 따스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원작을 모티브로 삼아, 우애 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한 가문을 상대로 맞서는 이야기를 담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가난이 유독 뼈저리게 다가온다. 가난하면 죽을 수 있다. 위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매들은 사건의 실마리를 파헤치러 나선다. 동생들을 돌보면서도 허영심이 있는 첫째 메그 역할의 ‘오인주’는 원령그룹 산하 오키드건설에서 의문의 돈다발을 가지게 되면서 문제에 얽히기 시작한다. 작가였던 둘째 조는 ‘오인경’으로 기자로서 원령그룹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을 조사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막내 에이미는 돈을 받고 원령그룹 박재상 딸의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오인혜’가 되어 등장한다. 가난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들은 연대한다. 우리는 동생을 걱정하는 오인주의 “야!” 한마디에서 나의 언니를 보고, 회사에서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라는 말을 듣는 오인경과 함께 눈물을 삼킨다. 행복한 이야기는 없다. 공감하며 저항하는 여성들만이 살아남아 서사를 이어간다.

“난 너희들이 가난하더라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 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중에서

Book—《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 문학동네

어쩌면 당연한 거짓

<안나>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는 이들은 어떤 희망을 품는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안나는 그렇게 거짓이라는 세계 안에서 새로이 태어났다. 극 중 이유미는 양복집을 하는 아버지와 농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말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그렇지만 원하던 미대 입시에 번번이 실패하고, 급기야 합격했다는 거짓말로 미대생으로 위장해 살아가게 된다. 그때부터 모든 생이 허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거짓에 거짓을 더해 ‘안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연애, 결혼, 직업까지 위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원작은 보다 거대하고 파격적인 거짓을 다룬다. 이유미는 안나, 이유상, 엠이라는 여러 이름을 거쳐 살게 된다. 이유미가 썼다고 하는 소설의 주인인 ‘나’는 실체를 알기 위해 다양한 인물을 좇아 대화를 나눈다. 의문스럽게도 그 과정에서 이유미와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삶이 언제는 진실이었고 거짓이었는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지어낸 거짓을 떠올려본다. 안나는 그렇게 친밀한 이방인이 되어 이야기 너머 우리 곁에,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 정한아, 《친밀한 이방인》 중에서

Book—《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 민음사

선하면서 강한 초능력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의 이야기를 읽으면 웃음 지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특히 《보건교사 안은영》은 오로지 쾌감을 위해서 쓴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이토록 맹렬하면서도 이로운 쾌감이라면, 정세랑이 만들어낸 세계가 끝없이 넓어졌으면 한다. 아마 이런 바람으로 드라마가 탄생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그린 장면으로 느낀 쾌감은 드라마를 통해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증폭된다. 상상한 젤리와 괴물, 괴상한 배경이 모두 CG로 구현되었을 때, 무엇보다 등장인물을 실제로 만났을 때 말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귀신을 보는 퇴마사처럼 세상에 해로운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통통 튀는 젤리를 향해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은영은 그저 엉뚱하고 어리바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괴물이 나타난 순간, 귀여운 외모의 안은영 입에서 거친 욕이 발사된다. 욕쟁이 안은영은 지하에서 올라온 거대한 괴물을 전사처럼 물리친다. 한 여성이 가진 힘이 이렇듯 발랄한 방식으로도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모자란 힘은 충전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도움을 받는 장면은 왠지 모를 위안을 준다. 선한 기운이 한데 모인다. 우리에게도 명승지의 탑 같은 장소나, 한문교사 인표 같은 든든한 동료가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함께 해결하는 학교폭력이나 청소년 우울증 같은 사회문제는 더 이상 판타지 소설과 드라마 안에 머물지 않는다. 정세랑은 이야기로 친절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공감하며 주위에 모인 사람들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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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