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Curation

안부를 묻는 식탁

집들이만 300번 한 굉장한 사람. SNS로 봐온 것보다 훨씬 알록달록한 모습에 머리가 기분 좋게 띵했다. 갓 만든 팥빙수를 입에 한가득 넣은 것처럼.

볼 게 엄청나게 많은 집이에요! 

뭐가 좀 많죠? 좁은 복층 오피스텔이어서 물건을 깔끔하게 두기가 쉽지 않아요. 이 집은 이렇게 꾸미려고 했다기보단 이것저것 모으다 보니 이런 모양이 된 건데요, 요즘 자취 인테리어 하면 온통 새하얗거나 우드 톤인 경우가 많잖아요. 누구나 하는 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피하다 보니 알록달록한 집이 되어버렸어요. 

 

오늘 입은 옷이랑 집이 꼭 하나의 퍼즐 같아요. 

색이랑 패턴이 좀 강하죠(웃음). 원체 색이 많은 걸 좋아하는데, 이런 성향이 더욱 강해진 건 쿠바 여행을 다녀오고부터예요. 첫 회사를 퇴사하고 쿠바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채도 높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거든요. 모든 아이템이 알록달록한데 가구들은 점잖은 색, 검은색이더라고요. 거기서 영감을 얻어 이 집에도 한가운데 검은 테이블을 두었어요. 

 

집 분위기를 딱 잡아 주네요. 집과 옷, 그리고 머리 색까지 에리카팕에게 참 잘 어울려요. 이 희끗희끗한 머리가 자연 모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원래 이렇게 흰머리가 나는데, 회사에 다닐 땐 억지로 검은색으로 염색해야 했어요. 퇴사하고 염색을 그만두니까 이렇게 자리를 잡더라고요. 엄청 편해졌죠. 한때는 저도 외모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감추고 싶어 했거든요. 고3 땐 수능 마치고 친구들이 너도나도 성형을 하니까 저도 안 할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빠한테 “나 코 수술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빠가 “너 자체가 우준데 왜 너를 바꾸려고 하니?” 그러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있는 그대로 제 모습을 긍정하게 됐어요. 아빠는 늘 ‘네가 없으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렇잖아요, 제가 죽으면 이 세상이 남은들 제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 티브이에 출연하셔서 퇴사와 집들이 이야기를 나누셨죠.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요새 더 바빠지셨을 것 같아요. 

저도 방송 나오면 부쩍 바빠질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바쁘지 않네요. 제 근황은 ‘예상보다는 덜 바쁘다.’예요. 백수처럼 지내고 있는데 지난주에 코로나19에 걸려 앓아누워만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겨우 직립보행을 하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요 며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살고 있죠. 코로나19에 감염된 시즌에 원데이 클래스나 요리 프로젝트 스케줄이 정말 많았어요. 그걸 다 취소해야 해서 좀 속상했거든요. 요즘은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제 힘차게 움직여 보려고요.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에리카팕의 요리 프로젝트 ‘잇어빌리티’와 ‘함바데리카’ 소개부터 들어보고 싶어요. 

잇어빌리티는 어렵지 않고도 있어 보이게, 멋지게 만들 수 있는 메뉴 레시피를 소개하는 원데이 클래스예요. 회사에 다닐 때 퇴근하고 혼자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있어 보이게 차려서 SNS에 올리면 반응이 오는 게 좋더라고요. 얼마 안 하지만 갖춰 놓으면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는 조리 도구를 소개하기도 하고, 주스로 5초 만에 샹그리아 만드는 법 같은 걸 이야기해요. 함바데리카는 함바집과 까사데리카가 합쳐진 이름인데요. 요리를 좀더 열심히 하게 된 후에 여성 노동자를 집으로 초대해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어요. 세상엔 정말 많은 직업군이 있지만 우리는 그 속내를 다 알진 못하잖아요. 수많은 노동자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마련한 자리예요. 이 프로젝트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뉴스레터 원고로 묶어 ‘에리카팕의 중구난방’으로 발행하기도 하고요.

근데, 아까부터 헷갈렸는데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죠(웃음). 에리카’팍’, 에리카’파앍’. 

팍이라고 발음하면 돼요(웃음). 제 본명이 박지윤이어서 어릴 때부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어요. 연예인만 해도 가수, 아나운서….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부터 유니크한 이름을 만들고 싶었죠. 온니 미, 저스트 미가 되고 싶어서요. 에리카팕은 독립출판을 하면서 갖게 된 이름인데, 저만 검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있었어요. 제가 명예욕이 좀 있어서(웃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잖아요. 근데 지윤은 너무 많으니까 저만의 이름이 필요했던 거죠. 

 

에리카는 《분홍 돼지》 원서 제목에서 따왔다고 들었어요. 

그 책이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아! 이거예요. 베로니카라는 여자가 주인공인데, 본인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인형을 사요. 그게 돼지 인형 에리카죠. 두 눈에 사파이어가 박혀 있고, 몸통은 아주 보들보들한 인형이에요. 주인공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인형인데 사람 크기만 해요. 하도 크니까 비행기에 탈 땐 에리카의 좌석을 만들어 주려고 티켓을 따로 끊을 정도인데, 어느 날 자기보다 행복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 인형을 건네주는 이야기예요. 

 

에리카팕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서 이 이름을 선택한 거죠? 

꼭 그렇게 되고 싶다기보단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생긴 편이에요. 저희 가족이 천주교 성골 집안이라(웃음), 공부는 안 해도 성당은 꼭 가야 했거든요. 종교적인 영향 때문에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정신을 많이 접하며 자랐죠. 그래서 베푸는 삶에 관해 옛날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요. 에리카라는 이름을 가진 후 제 삶이 송두리째 변한 건 아니지만 이름 이야기를 할 때면 천주교 정신을 되새기게 돼요. ‘나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지.’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하고요. 요리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래요. 계속 재미를 주고 싶어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는 아무래도 현장 체질 같다고 많이 느껴요. 사람들 대면하고 직접 요리를 알려주고, 차려주고, 리액션하는 게 항상 재미있어서요. 갑자기 윙크를 날려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도 즐겁고요(웃음). 돌발 상황이 생겨도 대처하는 게 재미있으니 천직이다 싶죠. 

 

함바데리카는 친구가 샐러드나 샌드위치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운다고 하니까 “우리 집 와서 밥 먹고 가.”라고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문득 샌드위치나 샐러드는 디저트 같기도, 식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디저트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어요? 

어쨌든 ‘단 거’! 샐러드나 샌드위치가 디저트는 아니지만 정식으로 먹는 식사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요. 든든한 느낌은 아니니까 가벼운 식사 같달까요. 하루 한 끼는 밥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마인드가 있는 편이라, 친구한테 제대로 한 상을 차려주고 싶어서 밥 먹고 가란 말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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