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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싸 ㅡ 녹기 전에

작은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떠올려본다. 눈으로 한껏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형태를 잃어버려 녹기 전에 한 스푼 떠먹어야 한다. 이윽고 퍼지는 달콤함, 그 충분한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은 ‘녹기 전에’로 향한다. 녹기 전에가 건네는 컵에는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만 담기지 않는다. 오는 이를 향한 환영, 자신을 지키는 일상과 가치, 존재의 유한성까지. 어느 한 가지 맛도 허술하게 대하지 않는 녹싸로부터 흐르는 두 스쿱의 시간을 듣는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 열기 전에 와본 적은 처음이에요(웃음). 정오에 오픈하는데 언제쯤 출근하세요?

보통 9시쯤 오는데요. 오픈 준비를 한 시간가량 하고 남은 시간엔 책 읽거나 빈둥거리거나 산책을 해요.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부스스하게 시작하고 싶지 않거든요. 일찍 와서 가게 상황에 몸을 충분히 적시고 에너지를 끌어올린 상태로 일하는 걸 좋아해요.

 

일종의 예열이네요. 먼저 호칭을 정하고 싶은데 ‘박정수’와 ‘녹싸’ 중 어떤 게 좋으세요?

음, 녹싸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녹싸 씨의 소개를 듣고 싶어요.

마포구 염리동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를 운영하고 있어요. 연초에 《좋은 기분》이라는 책을 내서, 작가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쓰는 말은 아니고요(웃음). 저는 여전히 상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작가라는 건 잠깐의 즐거운 일탈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에 관해 바빴던 일들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서 이제 다시 본업에 충실해야 하는 시기죠.

 

준비된 맛이 매일 달라지던데 오늘의 메뉴는 정해졌어요?

아, 오늘은 메뉴가 꽤 좋은 편에 속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스타치오’가 있거든요. 맷돌처럼 생긴 콘칭기라는 기계에 피스타치오 원물을 사흘에서 나흘 정도 갈아요. 진한 페이스트로 만들어서 쓰다 보니 시간과 공, 마음도 필요한데 아주 맛있습니다.

 

이따 한번 먹어볼게요. 오는 길이 한적해서 좋았는데 염리동은 어떤 동네인가요?

되게 특이해요. 지도로 보면 가로 500미터, 세로로 1.5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어서 위아래로 긴 지형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위쪽부터 상염리, 중염리, 하염리라고 부르는데 여기는 중염리예요. 동네 재개발이 덜 되어서 시장과 집, 경의선숲길 공원이 엎치락뒤치락 공존하는 동네이기도 하죠. 옛날에는 소금 장수들이 살았던 터라 ‘소금 염鹽’과 ‘마을 리里’를 써서 염리동이라 불리는 거래요.

 

굉장히 자세하게 알고 있네요.

어디 놀러 가거나 이사 갈 때 동네를 많이 살펴보거든요. 지도에서 찾아보거나 실제로 가보기도 하고 동네 이름의 유래부터 역사, 총 인구수, 지도의 형태도 보곤 해요. 포털 사이트 거리뷰를 보면 10년 전 모습도 볼 수 있어서 이곳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알 수 있어요. 저는 그게 삶을 좀더 다채롭게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그랜드 캐니언을 떠올려보면, 아름답고도 엄청난 퇴적층이 시간의 누적을 나타내고 사람은 그걸 보며 멋진 감정을 느끼게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 주변 대부분은 끊임없이 모습을 갈아엎으니까 현재성밖에 느낄 수 없죠.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면서 어떤 동네인지 알아보게 돼요.

 

덕분에 새로운 방식으로 염리동을 알게 되었어요. 보통 어떤 손님들이 오는지 궁금해요.

오픈부터 오후 2시까지는 직장인이 대부분이라면 오후 5시 정도에는 학생들이 찾아와요. 초등학생 친구들도 가끔 있고 중·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와서 개강했다고 인사하고요. 저녁에는 퇴근길에 아이스크림 포장해 가는 분들이라면, 주말에는 ‘을밀대’에 평양냉면 먹으러 온 분들이 들르시더라고요.

녹기 전에는 손님을 위한 이벤트가 있잖아요. 주변 학교의 개교기념일을 챙기고 보물찾기도 한다고요.

맞습니다. 개교기념일이 다가오면 그 학교만의 맛을 만들어줘요. 그중 한번은 하교 시간이 되니까 가게 앞에 200명 넘게 줄 선 적도 있고, 교장 선생님을 뵙거나 학생회장 친구가 찾아와서 인터뷰한 적도 있어요. 보물찾기는 경의선숲길에 쪽지를 숨겨두고 찾아오는 손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건데요. 아이스크림 관련된 할인, 무료 증정 혜택은 물론이고 저와 동료들과의 식사권도 들어 있어요. 애장품 증정으로 제가 정말 아끼는 돌멩이를 드린 적도 있고요. 물론, 돌멩이라고 해서 실망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떤 절 앞에 흐르는 시냇물에 있던 돌이라 힘들 때마다 꼭 쥐며 질량을 느꼈던… 아주 소중한 겁니다.

 

(웃음) 녹기 전에만의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겠어요. 팬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 저는 ‘팬’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경계합니다. 내가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생각해 보니, 그 단어를 쓰려면 팬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기 어려워야겠더라고요. 그런데 저희는 언제나 여기 있잖아요. 팬보다는 편하게 단골손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단골손님의 디저트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야기 나눠볼게요. 녹기 전에는 어떻게 떠올린 이름이에요?

당시만 해도 젤라토를 파는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들이 이탈리아어라 어려웠어요. 저는 이태리 유학파도 아니고 마트에서 투게더 먹던 사람인데 굳이 그런 이름을 쓰고 싶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아이스크림에 시간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서 일상적인 단어 중 ‘녹다’와 ‘전에’라는 말을 붙인 거죠. 둘 다 시간의 흐름이 내재된 말이고 줄여서 ‘녹전’이라고 부르기도 좋으니까요. 처음에는 영어로 생각했는데 구청에서 신청서를 내기 직전에, 줄 긋고 한글로 적어 냈어요.

 

왜 시간이라는 가치를 아이스크림에 담은 걸까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이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산다는 건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 사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잖아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도 언젠가 죽을 거니까 점과 점 사이를 어떻게 잇는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인 거죠. 그리고 삶뿐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 소비처럼 모든 것의 근원을 파고들면 시간의 유한성이 드러나거든요. 이런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으니까 늘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까운 이의 죽음이 있거나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는 등의 계기는 없지만요.

 

특별한 계기보다도 자연스럽게 감각되는 게 시간인가 봐요.

감각이라는 표현이 되게 중요한데 제 감각 방식에는 시간도 포함돼요. 흐르는 강물을 시간에 비유하듯 물을 만지면 시간을 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후각과 미각, 촉각처럼 시간을 느끼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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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