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뭘 하고 온 거지? 대화를 정리하는 내내 골치가 아팠다. 인터뷰를 이어가다 말고 “이 술 진짜 맛있다.”, “와, 여기 친구들 데리고 와야지!” 감탄과 대꾸를 가장한 주정이 뭐 이리 많은지.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취했다. 맥주 한 캔이면 하루 치 알코올을 꽉 채우는데, 막걸리 세 통이라니. 미쳤지, 미쳤어. 작가 김혼비와 함께라면 나 같은 술 바보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술꾼이 된다.
술이란 테마에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작가 김혼비’였어요. 직접 소개해줄래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을 쓴 김혼비예요. 제 소개를 할 때마다 왜 이리 어색하고 머쓱할까요(웃음).
책에 있는 작가 소개가 그래서 간결했군요. 인생의 삼원색 술, 책, 축구로 간단히 설명한 게 인상 깊었어요.
책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제 인생을 만든 요소라면, 축구는 이십 대 중반부터 지금까지의 저를 만들어준 요소거든요.
그럼 술은요?
얼마 전에 술친구랑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책이랑 축구가 없었다면 술 마실 일이 확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 술이 없다고 해서 책을 안 읽거나 축구를 멀리하진 않을 것 같다고요. 책과 축구는 그 자체가 저에게 이벤트이지만 술은 마셔서 다른 이벤트를 불러오게 하는 요소란 생각이 들었어요. 혹은 어떤 이벤트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되기도 하고요. 결국 술은 저를 다른 일로 가게 해주는 통로라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마시고, 마시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세 요소 중 술이 압도적인 0순위일 때가 있을 것 같아요. ‘나, 이럴 때 술이 제일 당긴다!’
마감 끝났을 때! 술이 모든 요소를 무조건 이기는 순간이에요. 저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해요. 집중해야만 업무를 마칠 수 있어서, 일할 땐 휴대폰도 서랍에 넣어두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제 답장보다 택배가 빠르다고 놀리기도 하는데요(웃음). 그러다 보니 일이 딱 끝났을 때 눌러놨던 게 한꺼번에 터지면서 ‘놀아야 해!’라는 기분이 들어요. 종일 글을 썼으니 책도 보기 싫고, 축구도 자극적이기 때문에 멀리하고 싶어요. 그래서 마감 직후 0순위는 무조건 술이에요.
술은 자극이 아닌가 보네요.
술은 온전한 휴식!(웃음)
“재작년부터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 김혼비, 《아무튼, 술》, <지구인의 술 규칙>, 93쪽.
대화에 앞서 책에서 언급한 ‘지구인의 술 규칙’을 토대로 체크 테스트부터 해보려고요.
아, 이번 달에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번 달은 진짜 잘 지킨 편이거든요. 지난달이었으면 점수가 엉망이었을 거예요.
5점 만점으로,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4점.
마시더라도 새벽 한 시 전에는 끝낼 것.
4점.
소주 한 병, 맥주 세 병, 와인 한 병, 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1점.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3점.
20점 만점에 12점…. 이거 고득점 맞나요?
네. 이번 달에 회사 일도 많고 원고 마감도 바빠서 술 마실 시간 자체가 없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셋째 항목이 1점인 건 한 번 어길 때 꽤 크게 어겼기 때문이에요.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마셨거든요. 음… 거기에 맥주 한 캔 추가(웃음).
“나도 주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떠올랐다. 주酒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술에 대해 쓰자. 술책을 쓰는 술책을 쓰자.”
– <프롤로그>, 11쪽.
《아무튼, 술》은 단숨에 후루룩 읽은 책이었어요. 말맛이 굉장해서 내내 웃으며 읽었죠.
많은 분이 그 말맛을 두고 아재 개그와 영국식 유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웃음). 평소에 말장난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안 하고 싶어도 자꾸 떠오르거든요. 그래도 책을 쓸 땐 맥락 속에 적절히 녹여내려고 고민하니까 말맛이 되는 것 같은데, 일상에서는 생각나는 대로 던지다 보면 근본도 없는 말장난이 될 때가 많아요. 보통 반은 웃고 반은 어이없어하고 그래요. 그래서 친한 사이가 아니면 웬만하면 안 하려고 자제해요(웃음). 속으로만 생각하다가 따로 적어놓기도 하고요.
말놀이의 대가라 불리는 오은 시인과 쌍벽을 이루는데요!
안 그래도 오은 시인 시집에 힘을 많이 받았어요. 말장난을 칠 때 누가 아재 개그라고 하면 오은 시인 시집을 보여주며 “이건 시야~” 하고 우기곤 했죠. 오은 시인 시집으로 정당화하면서 살아왔달까요. 근데, 또 모르죠. 오은 시인은 제 책을 보고 ‘이건 나랑 달라, 이건 아재 개그야.’라고 생각하실지도요(웃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수능 백일주’라는 문화가 있었다.”
<첫 술>, 17쪽.
수능 백일주라는 거, 처음 들어봤어요. 첫 술이 소주였다니!
네? 수능 백일주를 모른다고요? 와, 수능 백일주 모르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지금과 달리 제가 고등학생 땐 여러모로 허술했어요. 단속에 걸려도 친구네 언니 주민등록번호만 외우고 있으면 통과할 수 있었거든요. 술집 주인이나 경찰은 느낌으로 미성년자인 걸 알지만, “수능 백일주 먹으러 왔어요.” 하면 허용해주는 분위기가 있었죠. 고등학생 신분으로 비싼 술을 먹을 순 없으니 대부분 소주를 마셨어요. 수능 백일주 먹으러 왔다고 하면 할인해주는 소주방도 있었거든요.
이럴 수가…. 성인이 된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첫 술이 있나요?
첫 술이라는 거 되게 의미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운명이 이끄는 대로 만나면 좋겠어요. 원하지 않은 술이 첫 술이 될 수도 있고, 그 술이 의외로 너무 좋을 수도 있겠죠. 일찌감치 첫 술로 마실 술을 점찍어둔 사람도 있을지 몰라요. 첫 술은 돌잡이 같으면 좋겠어요. 아기에게 잡을 물건을 추천해주지는 않는 것처럼, 아기가 뭘 잡느냐가 재밌는 거니까 첫 술이 무엇이 될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