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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지 않지만 너무 친절한
유승보라는 이름 안에는 너무나 많은 세계가 있다. 그는 스스로 ‘친절하지 않은 예술을 한다.’ 말하지만, 아름답게 포장된 세상만을 진실이라 말할 수는 없을 터. 나는 그에게서 우주 곳곳의 진실을 본다. 커피와 술로 목을 축이며 그림과 음악과 전시와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연장선에 놓인 그들의 틈새에서 예술의 행간을 듣는다.
오늘 커피와 술이란 주제로 이야기 나누게 되었어요. 주제를 듣고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우선은 반가웠어요. 결혼 후 15킬로그램 가까이 살이 쪄서 최근엔 씹지 않는 커피, 차, 주스, 술 등 음료를 많이 마시고 있거든요.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생활과 닿아 있어서 그런지 반갑더라고요.
일러스트레이터, 뮤지션, 책방 주인, 기획자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근황이 궁금해요.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최근에 아트워크 작업을 많이 했어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페스티벌 포스터 작업이 두 건이나 있었죠. 부산국제록페스티벌과 잔다리페스타 작업이었어요. 그 외에도 뮤지션 프롬, 스마일리스마일의 앨범 아트워크와 조나단 브리Jonathan Bree의 유럽 투어 머천다이즈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했어요.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는 밴드 포니PONY는 포스터를 작업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 출연하게 되어서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지냈어요. 포니는 공연을 자주 하는 밴드는 아니어서 예전 노래를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타리스트의 새로운 리프에 맞춰 합주할 시간이 필요해요.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포니가 공연을 즐기는 방식이죠.
그림 책방이자 뮤직 레이블인 베로니카 이펙트는 어때요?
책방 베로니카 이펙트는 올해 초에 오프라인 매장을 종료하면서 온라인 책방만 운영하고 있어요. 최근엔 새로운 매장을 고민하는 중인데요. 그림 책방이란 타이틀로 5년 동안 운영한 베로니카 이펙트는 손님에게 전문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데 집중했거든요. 이 책은 어떤 종이로 만들어졌고, 이 일러스트는 어떤 재료로 그려졌는지 세심하게 설명하기 바빴죠. 그러다 문득, 손님들에게 이런 설명은 유의미하지 않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작업할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활동이 어렵기도 했고요.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는 중이에요.
오프라인 책방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 컨디션에 맞춰 운영하고 시스템까지 두루 갖춘 두 번째 매장을 구상 중이에요. 또, 뮤직 레이블로서의 베로니카 이펙트는 해외 뮤지션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기 때문에 머천다이즈 제작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관객들이 머천다이즈를 구매하고 공연을 기억하는 게 좋아 보여서 다음 매장은 라이프스타일숍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기대되는데요! 다시 홍대 부근에 자리 잡을 예정인가요?
아뇨. 그전과는 달리 여의도 같은 회색 도시를 생각하고 있어요. 홍대엔 아기자기하고 반짝거리는 가게가 이미 많은데, 그 사이에 베로니카 이펙트가 있으니 돋보이지 않는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다른 분야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취미생활을 제안해보고 싶어요. 시각적으로 구경거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취향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저는 친절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사랑받는 것에 거리감을 느끼는데, 두 번째 매장을 오픈하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관심도 받아보고 싶어요. 대중이 이런 저에게도 관심을 보인다면 문화를 넓게 보는 시각이 생겼다는 방증이 될 것 같아 기쁠 거예요.
EP [태평양]
포니 노래에도 술이 떠오르는 곡이 있어요. “불타오른 이 마음속에 물 한 방울 끼얹어줘요. 차오르는 갈증 속에 물 한 방울 달라니까요.” 하는 노래, ‘목이 말라 죽겠어요’죠. 어떤 술을 한 방울 떨어뜨려 볼까요?
샷 한 방에 끝나는 테킬라!
포니는 커피보다 술과 가까워 보여요.
술과 포니 하면 할 말이 정말 많은데요. 술 마시고 공연하다 중간에 싸운 적도 많아요. 저도 보컬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고 무대 위에서 능숙한 사람들도 아니다 보니 술의 힘을 자주 빌리곤 했어요. 특히 저는 틀리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걸 싫어해서 노는 느낌을 내기 위해 공연 중에 자주 술을 마시곤 했죠. 다들 새빨간 얼굴로 무대에 오르곤 했는데, 어떤 날엔 보컬이 취해서 제 장비에 술을 쏟은 적도 있어요. 그날 공연은 엉망이 됐고요(웃음).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인지 아티스트는 작업하면서 술 마시는 게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 않아요. 술 마시면서 작업한 경험이 있나요?
아뇨. 저는 작업할 때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아요. 객관적인 눈이 필요할 때 어쩌다 한 잔 마시는 정도죠. 일러스트 작업이든 곡 작업이든 술의 힘을 빌려본 적은 없어요. 사실 술 마시고 작업을 해보고 싶어도 마시면 일단 놀자 판이 되어서 풀어져 버리거든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서 지양하려고 하죠.
작년 11월엔 오랜만에 포니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어요. [태평양]이었죠.
이 앨범은 보컬이 주도해서 만든 앨범이에요. 그래서인지 포니 앨범이라기보다는 보컬이 만든 앨범에 포니 멤버가 참여한 느낌이 더 강해요. 저는 앨범 작업 당시에 일러스트 작업과 결혼 등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베이스 연주자 개념으로만 함께했어요. 포니에게 의미가 강한 앨범은 아니지만, 앞으로 이런 방향은 피해야겠다는 귀감이 된 작업이긴 했어요.
다음 앨범이 더욱 기대되는 얘기네요.
최근엔 다음 앨범에 관해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이전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 될 거예요. 이전엔 백 명의 리스너가 두루 좋아하기보다는 한 명의 리스너가 백 번 듣게 하자는 주의였는데, 언젠가부터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거든요. 1집부터 쭉 내세웠던 우울이란 테마를 버리고 작업하게 될 것 같아요. 어느 날 보컬이 그러더라고요. 다음 앨범부터는 웃는 얼굴로 관객과 마주 볼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다고. 그 말에 멤버 모두 동의했어요. 다음 앨범은 하우스 느낌에 댄서블한 음악이 되지 않을까 해요.
동료 뮤지션의 아트워크 작업도 하고 있는데, 뮤지션 겸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점이 작업에 미치는 바가 클 것 같아요.
맞아요. 뮤지션 아트워크 작업의 장점은 그림체보다도 제가 뮤지션이라는 점 같아요. 어느 정도 음악적 지식이 있으니까 이들도 제게 부탁한 걸 거고요. 최근에 한 아트워크 작업은프롬과 스마일리스마일이었는데요. 두 팀 모두 음악의 세계관을 비주얼적으로 표현해주길 바랐어요. 사실 스마일리스마일 같은 경우엔 멤버가 둘 다 미대생이거든요. 그런데도 제게 작업을 맡긴 건, 제가 그들과 그들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음악을 모르는 백지상태의 일러스트레이터는 제가 보지 못한 점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거든요. 저는 뮤지션과 이들의 음악, 그리고 이들의 이전 아트워크까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일종의 장벽을 탈피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적 장점을 잘 발전시켜 작업하는 게 중요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지금 막 떠오르는 카페가 있나요?
원두에 관심이 생겨 감상 노트까지 작성하며 커피에 재미를 붙일 즈음, 베로니카 이펙트 옆에 듁스커피가 들어왔어요. 오프라인 책방을 닫을 때까지 3년간 붙어 있었으니 제법 오래된 인연이죠. 저는 지난 3년간 듁스커피에서 매일 데일리 커피를 마셨어요. 그러다 보니 바리스타와도 가까워져서 종종 듁스커피의 테스터 역할을 하기도 했죠. 새로운 커피를 만들 때마다 “승보야 이거 어때?” 하고 넌지시 건네주었거든요. 듁스커피의 재밌는 점은 카페보다 쇼룸에 초점을 맞춰 운영한다는 건데요. 홍대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카페들 사이에서 독특한 개념으로 꾸려간단 느낌이 들어 신선했어요.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주며 중량, 온도 등을 세세하게 이야기해주곤 하거든요. 마치 워크숍 같기도 하죠.
감상 노트를 쓰면서 정을 붙인 원두가 있을 것 같아요.
그때그때 다른데, 데일리 커피로 꼽자면 아이스는 케냐Kenya, 따뜻한 커피는 예가체프Yirgacheffe를 좋아해요. 커피를 고를 때 기준은 딱 두 가지예요. 온도와 밝기죠.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땐 밝은 맛, 차가운 커피를 마실 땐 어두운 맛이 좋아요. 여기서 밝다는 건 산미가 있는 산뜻한 맛이고, 어둡다는 건 묵직하고 다크한 맛을 뜻해요. 바리스타와 로스터 친구를 여럿 둔 덕분에 많은 원두를 맛보면서 이 조합이 저에게 가장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는 커피를 만날 때가 있죠.
맛으로 기억에 남는 건 일본 시모키타자와의 라이트업 커피Light Up Coffee에서 마신 스페셜티 커피 게이샤Geisha예요. 마시자마자 입안에 벚꽃이 핀 것 같단 느낌이 들었는데, 커피와 함께 내준 작은 플라이어를 뒤집으니 원두 설명과 함께 게이샤가 벚꽃 잎을 맞으며 서 있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더라고요. 제가 머릿속으로 그린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해서 무척 신기했어요. 또 듁스커피에서 마신 배치브루Batch brew도 기억에 남아요. 한 번에 여러 잔 분량의 커피를 추출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먹는 커피인데요.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들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데일리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종종 마시기에 좋은 메뉴였어요.
저는 일을 시작하자는 각성의 의미로 커피를 마시곤 하는데, 커피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요?
처음엔 간단한 음료라고 생각해서 생각날 때마다 마셨어요. 그러다 커피에 크게 덴 적이 있었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카페인이 몸 속에 쌓이니 잠도 못 자겠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해지더라고요. 커피는 생활 음료가 아니라 일종의 아이템이라는 걸 깨달은 후 함부로 남발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조심하고 있지만, 종종 카페인성 불안감을 작업에 이용할 때도 있어요. 당장 한 시간 뒤가 마감인데 이게 과연 될까 싶은 찰나에 커피를 마시는 거죠. 불에 기름을 끼얹어 서두르는 의식을 하는 셈이랄까요(웃음).
카페 로고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경주에 있는 ‘고도 커피바’였죠.
경주에 카페를 열게 된 한 친구가 괜찮은 바리스타나 로스터를 알고 있는지 물었어요. 그때 저에게 커피 감상 노트 쓰는 법을 알려준 로스터 친구가 떠오르더라고요. 카페에 관해 말하지 않은 채 그 친구와 함께 경주 여행을 떠났고, 경주라는 도시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결국엔 그 카페의 헤드 바리스타가 되었어요. 그 이후 고도 커피바라는 이름이 정해지고 로고 의뢰도 받게 됐죠.
단정하고 명료한 로고라고 생각해요.
한 번에 완성한 로고였어요. 한글로 쓰고 보니 ‘고’와 ‘도’가 대칭을 이루는 게 보였어요. 그 모양이 꼭 기왓장이 마주 보는 형태 같았고, 기와지붕이 있는 고도 커피바와 잘 어울리는 로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멀리서 보면 원두 모양 같기도 해서 빨간색으로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클라이언트는 천마총이나 화랑단 같은, 좀더 깊은 의미를 담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활자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고, 결국 첫 번째 시안으로 진행하게 됐죠. 고도 커피바 로고 작업으로 다른 작업 의뢰도 많이 받게 된 걸 보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대화에 앞서 좋아하는 술을 물었을 때 ‘오이를 꽂은 헨드릭스 진’을 꼽았죠. 어쩐지 어른의 술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이와 헨드릭스 진Hendrick’s Gin의 조합은 세브달리자Sevdaliza라는 뮤지션 덕분에 알게 됐어요. 그 친구 내한공연을 기획했을 때 케이터링 메뉴를 확인하는데 ‘헨드릭스 진에 오이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더라고요.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 친구 말대로 마셔보니 그냥 마시는 거에 비해 상큼하고 맛있었어요. 오이와 진이 만나니 향이 증폭되었고, 오이를 씹으니 취기가 확 올라오는 게 시원하고 상쾌하더라고요.
어떤 술을 가장 자주 마셔요?
쉽게 마실 수 있는 건 역시 캔맥주죠. 블루문Blue Moon을 좋아하는데, 얼마 전부터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원으로도 살 수 있게 되었더라고요. 프리미엄 맥주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기했죠. 블루문은 이름도 어쩐지 환상적이지 않나요? 디자인도 멋지고요. 편의점에서 네 캔을 고를 때 보통 블루문과 호가든Hoegaarden을 선택해요. 둘 다 목 넘김이 부드러운 맥주죠.
술만 마시면 진심을 술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취중 진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술을 마실 땐 가능하면 긴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웬만해선 취중 진담은 하질 않죠. 누구에게건 비밀이 없는 편이기 때문에 술에 기대 진심을 말하는 사람은 잘 믿지 않아요. 평소에 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좋아해요. 저도 그러려고 하기 때문에 술 마시고 털어놓는 진심은 그리 달갑지 않죠.
수제 맥줏집인 기와탭룸의 일러스트를 담당하기도 했어요. 술과 관련된 작업은 어땠어요?
기와탭룸은 한옥을 개조한 술집인데, 한국적인 이미지가 담긴 로고를 만들고 싶다고 요청해왔어요. 전래동화를 이야기하듯 옛날에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와집의 특성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주었고, 그 내용을 토대로 기와와 맥주를 연결한 작업을 진행했어요. 기와지붕 끝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과 처마 끝에 연결된 줄 위를 맥주로 균형을 맞추며 걷는 사람을 그렸죠. 이 작업을 시작으로 기와탭룸 식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맥주 탱크가 갖춰져 있는 브루어리 겸 펍을 운영하는 게 이들의 꿈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이 친구들이 진짜 그 꿈을 이루더라고요. 덩달아 뿌듯했어요.
그렇게 이룬 꿈이 을지맥옥이군요. 을지맥옥에도 벽화를 그렸다고 알고 있어요.
꿈을 이야기할 때부터 기와탭룸 작업을 함께한 제가 벽화를 그려주면 의미 있을 거란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벽화라는 건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거야.’ 하고 낙인을 찍는 거잖아요. 을지맥옥이 생기자마자 제게 벽화를 제안해왔는데, 이 모든 일이 현실이 됐다는 게 근사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무얼 그려도 상관없다고 하기에 기와탭룸 캐릭터로 페스티벌 느낌을 내보기로 했고, 블랙 라이트를 설치한다기에 형광 안료를 사용하기로 했어요. 불이 꺼지면 초록빛 잔디만 쨍하게 보이고, 블랙 라이트를 켜면 사람들만 팡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였죠.
일러스트 작업에 모티프가 된 인물이 있나요?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를 쓴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조니 뎁이 헌터 톰슨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영화 <럼 다이어리>(2011)의 폴 켐프도 헌터 톰슨을 모티프 삼아 연기한 거라고 알고 있어요. 워낙 좋아하는 작가여서 흥미롭게 조사했는데, 그의 하루 루틴이 특히 재밌게 느껴졌어요. 헌터 톰슨은 일어나자마자 위스키 시바스 리갈Chivas Regal을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한 대 피웠대요. 그 후 산책하러 나가선 마약을 했고, 예민해진 감각으로 그날의 공기를 만끽했다고 해요. 산책이 끝나면 종일 집필 작업, 그러고 나서 다시 시바스 리갈 한 잔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 뒤 잠드는 일상을 매일 반복한 거죠. 뮤지션 블러Blur의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도 모티프가 됐어요. 그는 지금 치즈 농장을 하면서 그 농장에서 페스티벌까지 개최하고 있는데, 와인 하면 또 치즈를 빼놓을 수 없잖아요
최근엔 혼자 술 마시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음주 문화도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술이 많아지면서 그 정의가 모호해졌단 생각이 들어요. 진정한 혼술은 집에서 혼자 마시는 걸 뜻한다고 생각해요.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거나, 아무것도 없는 방에 오도카니 앉아 강소주를 마시는 것처럼요. 최근 이야기되는 혼술은 혼자 바에 가서 혼술하러 온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혼술 문화가 정착된 건 어떻게 보면 음주 문화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과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게 아니라 술을 음미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니까요. 혼자 술을 마시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건, 술을 가운데 두고 토론하는 게 더는 주류가 아니게 됐다는 뜻 같기도 해요.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한다는 측면에서는 문화 수준이 높아졌다는 생각도 들고요.
힘들 때, 기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술을 찾게 되는데, 우리에게 술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종의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그날의 상황이 각인된다고 보거든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술을 진탕 마셨어.” 하게 되니까, 좀더 강력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체 같달까요. 때로는 내 안에서 어떤 상황을 더 진실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요소 같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냉정하게 보고 싶을 땐 술을 한 잔 마시고 ‘자,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하기도 하죠. 그럴 땐 잘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거든요.
IPA 맥주 | 기와탭룸
클라이언트로 인연을 맺게 된 덕분에 초창기부터 개발 중인 맥주를 많이 맛볼 수 있었어요. 시원하게 먹지 않는 맥주는 맛이 없다고 알고 있던 저에게 IPA 맥주를 제대로 알려준 곳이죠. 개발 중인 안주나 맥주를 맛보며 피드백을 주곤 했는데, 그 메뉴들이 자리 잡아 판매되고 있다는 게 내심 뿌듯해요.
A. 서울 종로구 율곡로1길 74-7
O. 월-금요일 16:00-24:00, 토-일요일 및 공휴일 14:00-24:00
위스키&칵테일 | EP 바
메뉴를 주문하면 세세한 팁을 주는 장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이 술은 5분 후에 마시면 맛이 제일 좋아요.” 같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주죠.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EP 바의 음악인데요. 지금 나오는 음악이 무엇인지 물어본 일도 많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가게죠.
A.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29길 40-6
O. 월, 수, 목요일 17:00-02:00, 금요일 17:00-03:00, 토요일 15:00-03:00, 일요일 15:00-02:00, 화요일 휴무
아이리시 카밤Irish Car Bomb
바에서 이 메뉴를 주문하면 술과 베일리스 샷을 따로 주는데, 베일리스를 술잔에 퐁당 빠뜨리고 원샷하는 메뉴예요. 베일리스는 무겁기 때문에 빠뜨리면 넣자마자 가라앉거든요. 그래서 원샷했을 때 베일리스가 제일 나중에 목구멍으로 들어와요. 결국 폭탄주를 꾸역꾸역 넘겼다는 사실보다 베일리스의 달곰한 맛만 기억에 남으니 깔끔하게 잘 마셨다는 느낌이 들죠. 하지만 두세 잔 마셨다간 큰일 나요. UFO 타기 십상이거든요(웃음).
쿠앵트로Cointreau
오렌지 껍질로 만든 프랑스의 리큐어예요. 달콤하지만 도수가 40도나 되어서 확 올라오는 술이에요. 이 술을 잼에다 절여 먹으면 정말 맛있죠. 언젠가 친구가 블루베리 잼에 절여주어 빵에 찍어 먹어봤는데, 맛있다고 마구 먹다가는 확 갈 것 같더라고요.
파이어볼Fireball
캐나다에서 처음 만들어진 계피 향의 달콤한 위스키예요. 미국인 친구가 선물해줘서 먹게 됐는데, 함께 준 미국 훈제연어와의 조합이 정말 좋았어요.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
부드럽고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메이커스 마크에 티백을 우려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제가 우린 건 꽃향기가 나는 재스민 티백이었는데, 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죠.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김연경 장소 협조 블루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