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Colored Steps

이토록 조화로운 이방인 : 아티스트 프루프 최경주

여기는 작은 이방인의 방이다. 색색의 스텝으로 다채롭게 물들여진 그런 방이다. 천장에, 책상 위에, 마네킹에, 심지어는 싱크대까지, 방 안 구석구석에 색들이 고여 있다. 판과 판 사이에 이야기를 쌓아가다가 가끔은 엉뚱한 작업자들과 손을 잡고 판 밖으로 색깔을 퍼뜨리는 사람. 그녀가 있는 곳엔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걷고 또 걸어도 다시 거닐고만 싶어지는 뭔가가 있다. 이방인이 만든 세상이 이토록 조화로울 수 있는가. 어제도 오늘도 마냥 감탄하기 바쁘다.

아티스트 프루프가 되기까지

아티스트 프루프를 한마디로 소개하는 건 쉽지 않네요. 직접 소개해주실래요?

저도 어려워요(웃음). 판화 레이블이라고 하는 게 가장 쉬울 텐데, 어느 순간 판화의 개념적인 부분까지 확장되어 다양한 창작자와 협업하는 플랫폼으로도 기능하고 있어요. 특히 요즘에는 레이블과 플랫폼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설명하기가 더 애매해졌어요. 유형의 숍이나 작업 공간도 따로 두고 있지만 협업자와 함께하는 작업들은 무형의 새로운 것이어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죠.

 

느슨하게 정리하면 레이블은 혼자 하는 작업, 플랫폼은 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보면 될까요?

맞아요.

 

조금 더 꼬치꼬치 물어볼게요(웃음). ‘최경주’ 본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레이블로서의 아티스트 프루프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아, 역시 애매해요(웃음). 드로잉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한 작업은 제 이름을 걸고 있는데, 거기에서 파생된 2차 생산물과 상품 같은 건 아티스트 프루프 이름으로 나가고 있어요. 상품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은 아니거든요. 얘기하다 보니 더 복잡해지는데, 지금부터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려고요.

 

아티스트 프루프를 하나로 정의하는 데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아요. 

맞아요. 오히려 규정지으면 이상하게 규정에 반대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하나로 정의하는 게 제 성향상 좋은 방향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약간… 이쪽저쪽을 줄 타듯이 작업해나가고 있거든요. 제 작업에는 이방인의 정체성이 있어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아티스트 프루프의 유일한 규정은 ‘규정짓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게 아티스트 프루프의 매력일 테고요. 순수예술을 전공했다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걸 공부했나요?

대학 때는 서양화를 배웠어요. 미술에 확신이 있어서 서양화과에 간 건 아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에서 그림 그리는 걸 선택한 거였어요. 그렇다고… 믿었어요(웃음). 제가 할 수 있는 게 미술밖에 없다고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였어요.

 

전혀 다른 분야라면…?

미대를 졸업하고 아예 다른 쪽으로 취업했거든요. 해외 영업이었어요.

 

영업이라니 의외네요. 어떤 점이 잘 안 맞는다고 느꼈나요?

우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었어요. 제가 하던 일은 CCTV 렌즈 회사의 해외 영업 파트였는데요. 광학 전공이 아니어서 업무 내용도 어려웠고, 담당 국가가 유럽이어서 밤낮이 바뀐 패턴도 힘들었죠. 그래도 영업 일은 재밌었어요. 수주를 따고 대량으로 판매하는 게 적성에 맞더라고요(웃음).

 

그만두고 미술로 돌아온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출장으로 포르투갈에 가게 됐는데 온통 미술 관련된 것들만 보이더라고요. 유럽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호텔을 봐도, 풍광을 봐도,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봐도 그런 쪽으로만 시선이 갔어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중에도 제가 미술만 생각한다는 걸 깨닫게 됐죠. 그런 생각을 하다 한국에 와서 보니 제 자리 엔 온통 예술가나 작품 사진들만 붙어 있더라고요. 제 모습을 새삼스레 인지하고 다시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회사에 다닐 땐 작업을 전혀 하지 않으셨나요?

네. 다른 일을 하면서야 저에게 미술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동안은 저도 저를 잘 몰랐던 거예요(웃음). 그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판화과를 알아보면서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어요.

 

이때부터 판화 생활이 시작되는군요. 그런데 서양화가 아니라 판화를 선택하셨네요?

대학 졸업 전시를 판화로 할 만큼 판화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판화에는, 교과서에서 보셨을 텐데 간접성, 복수성, 고유성이라는 특성이 있어요. 판화는 하나의 판으로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다는 복수성이 있지만, 핀이 나가면서 미묘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고유성도 가지거든요. 그런 아이러니함이 특히 좋았어요. 정교한 작업이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변수는 많고 준비 과정은 번거롭죠. 그렇다고 과정에 소홀하면 망친 결과물을 보게 되니까… 정직하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이네요.

판을 찍는 건 고작 30초예요. 그 30초를 위해 판을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고, 도수를 올리는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 과정을 대충 해버리면 찍다가 판이 망가질 수도 있고 어설픈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동판화 같은 경우엔 판을 만들기 위해 외곽을 갈고 부식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판을 찍는 거에 비하면 열 배 이상 수고로워요.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될 것 같아요. 처음 판화 작업을 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요?

그럼요. 판을 찍던 30초가 굉장히 강렬했어요. 대학 졸업 작품이 첫 판화 작업이었는데, 그때 사용한 재료가 매우 큰 아크릴판과 찐득거리는 PVC 물감이었거든요. 판을 들어 올릴 때 ‘쩍’ 소리가 나면서 제가 상상하던 이미지가 딱 나오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색은 아티스트 프루프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색상 활용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작업할 땐 일단 색깔 하나를 정한 뒤 즉흥적으로 조합하고 있어요. 저는 형광색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방적인 형광색은 제 작업의 정체성과 닮아 보이기도 해요. 이렇게 눈에 띄는 색이 다른 색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궁금해서 자꾸만 손이 가죠. 원색, 파스텔톤, 노랑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지만 마무리는 항상 검정으로 하고 있어요. 워낙 오래 해온 작업이어서 이제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 색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 특유의 색이 아티스트 프루프 고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아요. 제품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고요. 판화를 활용한 제품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예전에 앤디 워홀 전시의 일환으로 작가들이 제작한 굿즈를 판매하는 기획전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그때 판화 작업으로 가방과 책, 그리고 파지를 모아 노트를 만든 기억이 나요. 상품을 판매해보니 전시와는 다른 짜릿함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제 눈앞에서 물건을 사는 모습을 볼 때 특히 그랬어요. 전시의 피드백은 말이나 글로 한 번 정리해서 받게 되는데, 상품은 구매로 직결되잖아요. 이런 직접적인 피드백에서 오는 즐거움이 인상 깊었죠.

 

직접적인 피드백이 부정적일 땐 그만큼 타격도 클 것 같아요.

물론 달갑지 않은 반응도 있었어요.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통해 시각적으로 많은 게 노출되고, 또 노출시키는 시대인 것 같아요. 한동안은 노출되는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피드백도 현시대의 문화적인 반응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짜 두려운 건 반응이 없을 때예요. 긍적적이건 부정적이건 어떤 반응들이 없을 때는 왜 없는지 고민하게 돼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악플보다 무서운 건 무플이라고…. 아티스트 프루프는 꾸준히 새로운 재료들로 작업을 선보이고 있어요. 패브릭, 러그, 점토, 나무… 또 도전해보고 싶은 재료가 있나요?

도전해보고 싶은 재료는 늘 많아요. 한동안 실리콘에 빠져 있어서 실리콘으로 작업하다가 지금은 다시 판화로 돌아온 상태예요. 지우개를 파는 고무판화나 목판화 같은 작업을 하는 중인데, 판화 중에서도 복수성이 없는 모노타입에 특히 관심을 두고 있죠. 모노타입은 이전에도 도전했다가 어려워서 보류한 작업이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예전 작업물을 보곤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해볼까 생각 중이죠. 최근엔 산업 소재에도 관심이 많아졌는데요. 실리콘이나 시멘트 같은 차가운 소재들을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풀 수 있을지 고민하며 공공미술 작업도 진행하고 있죠.

 

어, 공공미술이요?

윤라희 작가와 팀을 이뤄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데, 공공미술 중에서도 주상복합 단지 안에 설치되는 커다란 조형물 작업이에요. 이 작업을 위해 요즘은 새로운 재료를 찾느라 공장에 자주 드나들고 있어요. 낯설고 차가운 재료들이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 저도 너무 기대돼요.

아티스트 프루프는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것 같아요. 도전해본 작업 중에 막상 해보니까 별로였던 작업도 있었나요?

음… 캐릭터를 만들었던 거요. 고비가 있을 때 제 얘기를 해줄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해서 분신 같은 캐릭터를 만든 적이 있거든요. 캐릭터를 활용하니 저의 속내를 직접 표현할 수 있게 됐지만 어느 순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졌어요. 그 캐릭터로 3년을 작업해왔는데 벗어나는 데도 꼭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캐릭터와 밀접한 관계였던 것 같은데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너무 그 안에 함몰되는 느낌이었어요. 캐릭터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갉아먹히는 기분이 들었죠. 캐릭터를 만들었을 땐 감정적으로 해소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똑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게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3년 동안 해오던 걸 갑자기 버리자니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질문해가면서 이것저것 그려보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다듬어지면서 지금의 형태가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것과 멀어지고 또 어떤 것과 가까워지면서 바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3년을 함께했으니 캐릭터가 그리워지는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없어요(단호). 그 캐릭터로는 할 만큼 했고 그걸로 더는 할 말이 없거든요.

 

아름다운 이별이네요(웃음). 아티스트 프루프의 작업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아티스트 프루프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민함? 형태나 선, 색감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작업 곳곳에 여러 감정이 섞여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의도한 것과는 반대의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따뜻한 분위기를 표현했다고 해서 따뜻하다고만 느껴지지 않는 게 그런 예민함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계속 작업 얘기를 나누었으니 휴식할 때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쇼룸 옆 작업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 공간에서 쉴 땐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휴식과 작업이 특별히 구분되지는 않아요. 아이디어가 나올 때 바로바로 작업하는 타입이어서 계속 움직이고 있거든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해결되고 작업이 풀려야 해방되는 기분이어서, 작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온종일 붙들고 있는 편이죠. 판화 작업은 아무래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하는 일이 많아서 에너지 소모도 큰데요. 체력이 좋아서인지 힘들지는 않아요. 오히려 집중할수록 단순해지죠.

 

일상이 작업이로군요. 이런 걸 천직이라고 하나 봐요(웃음).

천직이란 표현은 조금 과하지만 미술과 저는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제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미술뿐이어서 하게 된 일이니까요(웃음).

유영하는 공간, AP SHOP

쇼룸 에이피숍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어떻게 만들게 된 공간인가요?

쌓여가는 작업물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상시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건 한시적이기 때문에 갈증이 생긴 거죠. 아티스트 프루프에서 이름을 따서 에이피숍AP SHOP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아티스트 프루프만의 분위기를 담아내려고 했어요. 만들 당시에는 동업자가 있었는데, 작년 하반기부터 저 혼자 운영하게 됐죠.

 

이름을 짓는 데 고민은 없었나요?

AP(Artist Proof)가 판화 용어라는 건 계속 밝혀와서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데요. 용어를 모르는 분들에게 종종 용감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영어를 직역해서 “작가인 걸 증명하는 거예요?”라는 질문도 있었고요(웃음). 별생각 없이 지은 이름인데 도전적이라고 하니까 재미있기도 했죠. 뭐든 이름 따라간다고 하니 점점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하게 되고요.

 

에이피숍은 조용하고 평범한 동네에 있어요. 오래된 북창동에 자리 잡게 된 이유가 있나요?

약간 생뚱맞은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긴 주로 사무실만 있기 때문에 평일 저녁이나 주말엔 한적한 동네예요.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죠. 이 건물을 선택한 건 건물주가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인데요. 보통 새시를 새로 하면 오래된 창을 떼어내곤 하는데, 여긴 낡은 창을 그대로 살려 두었더라고요. 외부에서 보면 옛 창이 그대로 보이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코앞에 한국은행이 있어서 풍경도 멋졌고요. 근데 요즘엔 다른 장소를 생각해보기도 해요.

 

불편한 점이 생겼나요?

공간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공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는 중이에요. 에이피숍을 만들 땐 제 작업만 하던 때였는데, 지금은 협업하며 관계도 맺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형의 관계가 유형의 플랫폼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진 거죠. 이 공간을 없애려는 건 아니고, 형태나 위치를 바꾸는 걸 생각해보고 있어요. 여기에 자리 잡은 지 4년이나 되었으니 이젠 어떤 방식으로든 바꿀 때도 된 것 같고요.

 

에이피숍은 올 때마다 설레요. 밖에서 한 번, 안에서 한 번 비밀번호를 누르는 시스템 때문인지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거든요.

지금은 마스코트가 된 비밀번호 시스템이 처음엔 난제였어요. 손님이 드나들어야 하는 숍인데 문이 잠겨 있는 거니까유영하는 공간, AP SHOP요. 손님이 올 때마다 매번 3층에서 내려갈 수도 없어서 공간 디자인을 맡은 스튜디오 씨오엠이랑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누었죠. 홈페이지를 통해 비밀번호를 공개하고, 아는 분들은 누르고 들어오되 모르는 분들은 무전을 칠 수 있도록 무전기도 설치했어요. 어려운 문제를 상황에 맞춰서 재밌게 풀자는 마음이었어요.

이 건물에 에이피숍만 있는 게 아닌데 비밀번호를 공개해도 괜찮은 거예요?

건물주가 쿨하게 오케이 하시더라고요. 합리적인 건물주를 만났죠(웃음).

 

어쩐지 안심이네요(웃음). 에이피숍은 1년 주기로 리뉴얼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어요. 지금이 2020년 리뉴얼 시즌이고요.

다른 창작자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주기적으로 협업 전시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리뉴얼 프로젝트인데, 처음 이 명칭을 공개했을 땐 사람들이 “인테리어 또 바꿔?” 하고 묻더라고요(웃음). 에이피숍의 리뉴얼은 인테리어 용어가 아니라 새롭게 한다는 뜻의 리뉴얼이에요. 숍의 내용물이 바뀐다는 의미죠. 매년 다양한 작업자와 협업하며 선보여요.

 

2020년 리뉴얼은 어떤 내용인가요?

인터뷰하는 시점으로는 바로 내일 공개될 텐데 아쉽게도 책이 나오면 전시는 끝나 있겠네요. 하지만 이번 리뉴얼 때 공개하는 모빌은 에이피숍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을 거예요. 올해 리뉴얼은 아티스트 프루프의 모빌과 모빌이 파생된 드로잉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로 구성돼요. 이번 작업의 원동력은 ‘결핍’이었는데요. 결핍이라는 요소에서 출발해 나 자신에 집중하며 드로잉 작업을 진행했어요. 다 그리고 보니 원초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돌아가 몸과 정신의 균형을 생각하며 모빌을 만들었고, 모빌이 지닌 형태적인 균형감에 제 이야기를 덧입히게 되었죠.

 

‘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나요?

결핍이자, 원동력이자, 여성이자, 자아이자…. 저를 깊이 탐구하고 도출한 결과물인데, 그 사이에 균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형태적인 부분보다는 기능적으로 균형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균형이란 키워드가 모빌로 표현된 거네요.

맞아요. 사실 그동안 모빌에 대한 문의를 많이 받기도 했어요. 저도 모빌은 좋아하지만, 요즘엔 상품으로 많이 출시되고 있어서 만드는 데는 흥미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제 생각과 균형이라는 키워드가 맞닿는 순간 모빌의 의미가 확장되어 다가왔어요. 나무와 유토로 모양을 만들고, 아크릴로 연결하고, 케이블 타이로 매달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필요에 의해 생겨난 산업 재료들을 제 작업에 다른 용도로 조합해보는 시도가 너무 즐거웠어요.

 

만들고 보니 어땠어요?

매력적이었어요. 모빌을 매달면 장식품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아요. 다른 세계로 제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가 제 세계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죠

아티스트 프루프가 확장하는 세계

그러고 보면 에이피숍도 종종 다른 세계로 변하곤 해요.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특히 그렇죠.

대표적으로 ‘도시시’ 프로젝트 때가 그랬어요. 작업 공간을 오가며 본 이미지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는데요. 자동차에 짓밟혀 널브러진 곰돌이 목도리를 비롯해 도시 속에 숨어 있는 물건들을 수집해왔고, 조금씩 쌓아온 작은 이미지들이 이 프로젝트의 모티프가 되었죠. 도시시는 ‘도시를 감각하는 현대인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여러 겹으로 중첩한 일종의 추상시’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에요. 리뉴얼 프로젝트가 한두 명의 창작자와 협업하는 방식이라면, 이번에는 더 많은 창작자와 한데 모여서 더 큰 협업을 이루고 싶었어요. 다양한 창작자를 모으다 보니 사진, 패션, 향, 음식, 상품부터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까지 콘텐츠가 점차 확장되었죠.

 

다방면에 관심이 있어야 기획할 수 있는 프로젝트 같아요.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보다 다른 분야, 정확히는 경계에 걸쳐진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미술 하는 사람이 음악을 하거나 그래픽 디자이너가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것처럼 작업자가 여러 분야를 오가는 걸 볼 때, 더 나아가 엉뚱한 이력의 작업자들을 볼 때 매력을 느끼게 돼요. 제가 만일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곧장 판화과에 진학했다면 미술하는 사람들이랑만 협업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중간에 전혀 다른 분야, CCTV렌즈를 영업했기 때문에(웃음) 저부터가 다른 분야와 걸쳐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획부터 진행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네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땐 기획부터 결과까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여요.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었죠(웃음). 프로젝트만을 위해 따로 돈을 모아 두기도 하는데, 때로는 프로젝트가 확장되어 수익이 나는 경우도 있어요. 도시시 프로젝트도 2월 말부터 SSC 서울숲에서 팝업 전시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어요. 도시시 콘텐츠와 더불어 사진 작가 하시시박이 사진으로 기록한 프로젝트의 숨은 과정도 선보일 예정이죠.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대중성이나 상업적인 면도 놓치지 않고 있어요.

계속 작업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예요. 긴 시간 작업해오면서 늘 생각해왔지만, 제 작품을 구입하는 분들을 보면 여전히 신기하고 감사해요. 구매한 분들이 아티스트 프루프의 작품을 낯선 공간에 연출한 걸 종종 보기도 하는데, 제가 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서 놀랄 때도 많죠.

작품들이 에이피숍을 벗어나면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질 것 같아요.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제 작업이 다른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아티스트 프루프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이방인이 다른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거든요. 우스갯소리로, 종종 제 작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데요. 100년 뒤쯤 어쩌다 발굴된 유물로 아티스트 프루프의 패브릭이 박물관 같은 데 걸려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웃음).

 

내 작품이 다른 장소에 있는 걸 보는 것만큼, 나의 장소에 낯선 사람이 오가는 기분도 남다를 것 같아요. 에이피숍을 운영하면서 손님들에게 바라는 점도 생겼을 것 같고요.

지금까지는 동업자가 숍 매니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저는 손님들과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혼자 운영해나갈 앞으로는… 글쎄요. 바라는 건 크게 없어요. 오히려 제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객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게 맞는 거니까요. 듣기로는 셀카를 100여 장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는데(웃음), 저는 그런 것도 그 사람이 이해한 에이피숍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제가 바꾸고 싶은 건 손님이나 제 태도가 아니라 형태적인 부분이에요. 앞으로는 에이피숍이 상시 매장이 아니라 오픈스튜디오 형태로 운영될 것 같아요.

 

엇. 오픈스튜디오요?

새로운 계획이 많은데, 우선 지금 에이피숍 자리에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들어올 예정이에요. 에이피숍은 그 옆에 있는 이 작업 공간과 합쳐질 거고요. 운영 시간도 매달 마지막 일주일만 오픈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바꿔볼 생각이죠. 운영 시간에도 변동이 있을 예정이고요. 그 외에는 온라인 숍과 비공식적 예약제를 시행해보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어요.

 

숍 운영 면에서는 대대적인 변화네요.

쇼룸의 느낌보다는 아티스트 프루프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청소는 할 거고요(웃음). 작업을 위해 썼던 재료가 그대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오픈스튜디오 형식으로 일정 기간만 공개하려고요. 그게 지금의 아티스트 프루프가 추구하는 모습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만일 진행 중인 작업이 협업과 어울린다면 오픈스튜디오 때 프로젝트팀을 꾸려 색다른 걸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콘텐츠의 내용에 집중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기대되는데요! 올해 또 어떤 작업들을 계획하고 있나요?

진행 중인 일이 많은데, 우선 여성복 브랜드과의 협업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기밀 유지를 약속해서 브랜드 이름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곧 백화점 여성복 층에서 아티스트 프루프의 작업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참, 올해 좋은 기회로 LP 커버 아트워크도 진행하게 되었어요. 에이피숍에서의 발매 기념 공연을 상상해보기도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웃음). 

이 외에도 내부적으로 기획자 김나나와 함께 아티스트 프루프의 ‘AP.T’라는 라인을 준비 중인데요. AP.T는 에이피타입AP.Type의 약자로, 좀더 대중적으로 풀 수 있는 자체 라인을 선보일 예정이죠. 기업과의 협업이나 문화 행사 기획 등 큰 프로젝트가 될 텐데요. 첫 번째 작업으로는 브랜드와 협업하여 양말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또 매거진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구상도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비주얼을 넘어 더 큰 영역에서 활동해볼 예정이죠. 표현 수단으로 시각적인 걸 사용하고 있지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용에 집중할 계획이에요.

아티스트 프루프
판화가 최경주의 프린팅 레이블로, 다양한 창작자와의 협업을 통해 전시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한다. 에이피숍AP SHOP은 아티스트 프루프의 작품을 감상하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쇼룸인 동시에 프로젝트 공간으로 기능하는 공간이다.

AP SHOP
A. 서울 중구 남대문로5길 9 3층
H. instagram.com/artistproof_shop
O. 수-토요일 13:00-18:00, 월-화요일·일요일 휴무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