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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해
WHEN YOU FEEL
NOBODY BESIDES YOU
파니 핑크,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해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 말은 쉽다. 하지만 외로움을 견뎌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리스 도리의 영화 <파니 핑크>,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는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한 작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혼을 하면, 외로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게 된다. 한동안은 외로울 틈이 없다.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하는 말은 유부녀에게는 사치다. 대파나 두부, 감자로 가득 찬 장바구니에 든 마카롱 같은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마카롱에 곰팡이가 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 없이는 못 살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걸음마를 시작하고 각종 교육기관에 입소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화장실에 가고 혼자 친구 집에 놀러 다닌다. 그제야 덜컥, 두려움이 밀려든다. 제발 좀 외로워 보고 싶다고 징징대던 나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20대 중반에 혼자 살 때였는데,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가려다가 문득 2층 내 방 창문을 올려보았다. 당연히 불이 꺼져있었다. 그 순간 발부터 땅 밑으로 쑤욱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사는 게 몸서리치게 지겨워졌다. 도저히 열쇠를 돌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켤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전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경기도 평택의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다시 전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출근을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 그때처럼 외로워질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외로워질 것이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었지만, 이제 나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잃어갈 것이므로. 아이들은 점점 나를 찾지 않을 것이고,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어깨가 무거운 마당에 내 외로움까지 짊어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님은 더 이상 늙은 딸을 반기지 않을 테고, 건강하게 살아나 계시면 다행일 것이다. 친구들은 각자 자기 문제로 바쁠 테고 틈만 나면 징징대는 나를 지겨워할 것이다. 세상은 나란 존재를 기억조차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고 외로운 우리는 먹을 것이다. 먹는 데 생사라도 걸린 듯 먹을 것이다. 입이 찢어지라 쑤셔 넣고 땀을 뻘뻘 흘리고 “크아, 시원하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것이다. TV를 켜고 말도 안 되는 설정의 드라마를 혀를 쯧쯧 차며 볼 것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복수 같은 건 이제 궁금하지도 않다만, 악녀의 눈빛(으로만 하는) 연기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똑같을 테지만, 그런데도 오매불망 그 시간만 기다릴 것이다. 배가 점점 불러와 단추가 잘 안 잠겨도,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당겨도 그 순간만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 핑크는 공항 검색대 직원이다. 늘 독특한 모자를 쓰고 해골 귀걸이에 검고 커다란 코트로 온몸을 감싼 그녀는 ‘서른 넘은 여자가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말에 존재론적 공포심을 느끼는 29살의 애인 없는 여자다. 파니 핑크는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직접 만든 관을 집에 들고 와 그 속에서 ‘나는 강하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말을 되뇌며 명상을 한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혼자라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충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런 파니 핑크가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파니 핑크,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해.”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파니 핑크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묘한 흑인 남자 오르페오에게 점을 보는데, 오르페오는 그녀에게 긴 금발에 푸른 눈, 고급 양복을 입고 차 번호판에 23이라는 숫자가 있는 남자를 잡으라고 말한다. 파니 핑크의 눈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그 남자는 새로 온 아파트 관리인 슈티커다. 그는 그녀처럼 죽음에 사로잡힌 남자, 고기를 먹지 못하는 남자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리를 잘하는 여자가 사랑받는다는 소리를 해 산통을 깬다. 그와 반강제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파니 핑크는 드디어 시작된 사랑에 들뜨지만, 슈티커는 혼자 있는 게 두려워 이 여자 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바람둥이일 뿐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그만큼 상대에 대한 기대가 크고, 또 상대를 오해하게 될 소지도 크다. 누군가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 데 서툴렀던, 그리고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다 못해 관절이 꺾일 지경이었던 20대의 나는 상대의 행동이나 말투, 편지에 쓰인 글귀 하나하나를 프로파일러처럼 분석했다. 이를테면 그가 르 클레지오라는 프랑스 소설가의 소설 속에 나온 어떤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나에 대한 감정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천경자가 그린 타히티 여인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을 때는 그 여자가 나를 닮은 건지 아닌 건지 며칠을 뜯어보기도 했다.
어느 때는 그가 무척이나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괜찮은 남자인 것처럼 느껴졌다가, 또 어느 때는 자기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번드르르한 말이나 글로 사람을 홀리는 찌질한 남자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5분 일찍 나온 이유는? 내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발과 내 발이 테이블 밑에서 맞닿았는데도 그가 발을 떼지 않은 이유는? 나에 대한 육체적 갈망을 그것으로라도 채우려고. 그가 먹는 게 귀찮아서 식사대용 캡슐 같은 게 발명됐으면 좋겠다고 한 것은?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니라는 증거. 그가 아픈 여동생 때문에 집에 빨리 가야 한다고 한 것은? 나보다 여동생이 더 중요하다는 증거. 어쩌면 그때 나는 이름 획수 궁합을 들이대도 그 결과에 휘청거렸을 것이다. 그는 나의 진정한 짝일까, 아닐까? 그게 내게는 너무나 중요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끔찍한 외로움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외롭다. 외로워서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깽판을 치고, 싫다는 사람을 쫓아다니고, 결혼하고, 바람을 피우고, 노인정에 나가고, 옥매트를 사러 간다. 누가 혼자인 채로 죽고 싶겠는가. 나만 해도 혼자 살면서 그렇게 외롭지 않았더라면 당 시 내 타입은 아니었던 (그때 내 눈은 심신의 ‘건강함’보다는 ‘멋짐’에 맞춰져 있었다) 남편을 한 번 더 볼 생각도 안 했을 거고, 결혼은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김애란의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렸던 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난 죽을 거예요. 나도 알아요. 누구나 죽죠. 하지만 난 오늘 죽을 거예요. 진짜 웃기죠? 근데 이거 알아요? 저 아직도 무서워요. 진짜 무서워요. 아무도 날 위해 슬퍼해 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해주지 않을 거예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 라이언 스톤은 우주탐사선의 임무전문가다. 우주의 가장 좋은 점이 고요함이라 말하던 라이언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던 중 러시아 위성의 미사일 폭파 사고 때 생긴 잔해가 날아오는 사고로 우주미아가 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이런 종류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공간에서 혼자 죽어간다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그 와중에 라이언은 고백한다. 저 아래 지구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 같은 건 없다. 네 살짜리 딸은 어이없는 사고로 죽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그저 잠을 자고, 일어나고, 출근하고, 운전하는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런 이유로 <그래비티>는 한 여자의 우주 탈출기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이야기가 된다. 겁에 질리기도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를 잃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하기도 하고 다 포기하기도 하지만, 끝내 마음을 고쳐먹고 힘을 내어 살아가려는 이야기 말이다. 굳이 배경이 우주공간이 아니고 라이언이 우주인이 아니라도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제 라이언은 이유 같은 것은 없이, 저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도,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에서의 평범한 인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개를 기르고 노래를 부르는 그런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뭘 더 원하는 것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 중력이 있는 곳으로.
라이언의 동료 매트는 용기를 잃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사는 거야? 아니, 산다는 게 뭐야? 자식을 먼저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어.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한 거야.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 땅에 두 발로 딱 버티고서 살아가는 거야.”
내게는 그런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인 것 같다. 우리가 힘을 내어 살아가려는 이유는 누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중력 때문이 다. 그저 땅에 두 발로 딱 버티고 살기 위해서란 얘기다. 꼭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살아갈 이유가 생기는 게 아니라, 살아 있으니까 담담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매트가 떠나기 전 당황하고 공포에 질려 있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라이언이(물론 그녀가 정말 그런 여자였다면 우주까지 오지는 않았겠지만) 용기를 내어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파니 핑크>에서 게이인 데다 병을 앓고 있던 오르페오는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월세가 밀려 아파트에서도 쫓겨나자 파니 핑크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어느덧 상처받은 두 사람은 서로를 안아주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언젠가 말했다. “삶은 어두운 밤바다에 나 혼자 타고 가는 작은 배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운명이 아니며 다른 배들의 불빛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은 견딜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파니 핑크에게 오르페오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과 꼭 맞는 사람,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겪는 불완전한 존재,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숨을 거둔 오르페오는 생전에 말했던 대로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그리고 불빛과 함께 아르크투스 혹성으로 사라진다. 파니 핑크는 슬퍼하지만 더는 예전처럼 외롭지 않다. 그녀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아파트를 청소하고, 고장 나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예전에 오르페오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이 출 것 같은 춤을 추어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게 하고, 이웃의 괜찮은 남자에게 수줍음을 무릅쓰고 커피 한 잔을 청하려다 다른 이웃 모두를 초대하고 만다. 이웃들은 모두 그녀의 아파트에서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웃집 남자는 그녀에게 “수줍음이 많아 사귀자는 말을 못했다.”라고 고백한다. 남자가 입은 티셔츠의 등 뒤에는 ‘2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파니 핑크는 관을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외로움을 떨칠 방법 같은 건 별로 없다. 있다고 해도 별 효과가 없다. 아무리 외로워도 그냥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살 떨리게 외로운 날도 있겠지만, 또 그럭저럭 견딜 만한 날도 있을 것이고, 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날도 있을 것이고, 또다시 비참해질 날도 있으리라는 것. 그래도 아직 내게는 “네가 필요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말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
어쨌거나 홀로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다른 배들의 불빛을 느끼기 위해서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돌아가서 살아보는 것이다. 매트의 말처럼 ‘착륙은 곧 발사’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돌아가는 것 자체가 다시 시작하기 위한, 삶을 되찾기 위한 시작이니까 말이다.
파니 핑크 Nobody loves me
도리스 도리 감독 | 드라마 | 독일 | 104분
주인공 파니 핑크는 나이 서른에 좋은 남자를 만나기란 길을 걷다 원자폭탄을 맞기보다 더 어렵다 생각하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찾는 사람은 “날씨가 너무 좋아.”, “열쇠 잊지 마.”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남자, 그보다 “나는 네가 필요해.”라는 말을 해줄 남자다
그래비티 Gravity
알폰소 쿠아론 감독 | SF, 드라마 | 미국, 영국 | 90분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 박사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우주에 홀로 남겨진다. 지구로부터 600km, 소리도 산소도 없는 곳. 아이를 잃은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도 여전히 혼자이지만 중력이 있는 곳에서 두 다리로 서서 살기 위해 다시 지구로 향한다.
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윤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