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She Touches The Soil

천천한 마음으로, 가까이 : 식물 연출가 서서히, 한진아

식물을 함께 사는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잎을 만지는 손길이 늘 조심스럽지만은 않다. 때로는 터프하게, 때로는 눈길을 멀리하며. 하나의 관계를 키우고 그 관계를 믿고 살아간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식물과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음. 조금은 느릴지 몰라도 길고 깊게, 식물과의 삶을 그린다.

‘서서히’라는 이름으로 식물 연출 일을 하고 있어요.

맞아요. SNS를 처음 시작할 때 지은 이름이에요. 서서히 식물과 가까워지고, 서서히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 지었어요. 본명을 모르시는 분들은 온라인상에서 저를 ‘서서히 님’이라고 불러 주시더라고요(웃음). 저를 단순하게 식물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봐주시는 것 같아서 듣기 좋았어요. 또 다른 이름이 생긴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이전에는 슬로우파마씨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식물 연출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식물과의 첫 인연이 궁금해요. 듣기로는 퇴사 이후부터 시작했다고요.

네, 맞아요. 큰 불만 없이 회사를 다녔지만 항상 고민이었어요. 늘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고 주말을 기다리고 평일엔 다시 일하고. 주관이 뚜렷한 성격인데,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미래에 관한 걱정이 늘어나다가 우연히 일 때문에 떠난 제주도에서 예정에 없던 여행을 했어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있다가 숙소에 있는 해먹에 누워서 쉬어 보기도 하고. 나 자신에 관한 고민을 이어갔어요. 그러다 문득 단순히, 자연이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세뇌한 것에 가깝기도 해요. ‘나는 자연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웃음).

 

자기합리화 같은 거네요(웃음).

맞아요. 자연스럽게 흐른 게 아니라 좋아하자고 마음먹은 거죠. 좀 억지스럽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괜찮은 방법 같아요(웃음). 지금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유년 시절에 식물과의 거리가 어땠나요?

전혀 관심 없었어요(웃음). 딱 하나 떠오르는 기억은 아버지가 난을 좋아하셔서 잎을 열심히 닦던 장면이에요. 성인이 되어서 식물과 가까워진 거죠. 자연스럽게 이어진 느낌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에요.

 

오히려 의도를 가지고 선택했기 때문에 더 의미를 둘 수 있겠어요. 슬로우파마씨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무작정 식물과 관련된 일을 찾다가 슬로우파마씨를 알게 됐어요. 상수동에 있는 쇼룸에 찾아갔는데 아이처럼 좋아하는 저를 발견한 거죠(웃음). 뭔가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표현해 본 적이 없는데 처음 겪는 감정이었어요. 그 길로 퇴사를 결정하고 슬로우파마씨의 채용 공고만 기다렸어요. 우여곡절 끝에 입사해서, 식물 판매 일도 배우고, 공간에 식물 연출도 하면서 식물을 소재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처음엔 합리화였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으로 일을 즐기게 된 거죠.

오래전부터 관심 가진 분야가 아니라서 업으로 삼으며 고충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식물을 좋아만 한 거지,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엔 식물 이름도 잘 몰랐죠. 매장에 오시는 분들께 설명하고 판매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워갔어요. 사진 찍고 메모하면서(웃음). 후에는 식물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어서, 원예 복지에 관해서 공부하기도 했어요.

 

신혼여행으로 발리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식물을 그곳에서는 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실내 관엽식물들을 비롯해, 야생화, 선인장들도 다양한 원산지들에서 보내져 우리나라에 들어와있어요. 그렇지만 선인장들은 우리나라 기후와 잘 맞지않아 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 자라나가는 힘들어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건, 우연히 길을 걷다가 마주친 선인장이에요. 누군가의 관리 없이 척박한 땅에서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던 그 아이가 잔상처럼 마음에 남아 있어요. 한국에서도 길을 걷다 보면 콘크리트 바닥 사이에 꽃을 피우고 돌담 틈새에서도 생명을 보여주는 아이들과 마주하는데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잘 살아내는 애들을 보면 뭐랄까,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뭉클한 마음도 들어요.

 

발리의 식물들! 궁금하네요. 집에 있는 식물들도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따로 이름도 지어줬나요?

스무 종류 남짓의 식물을 키우는데요. 이름을 따로 지어준 건 아니지만 혼자서 사람 이름처럼 불러요. 예를 들어 대봉룡, 청하각 같은 식물은 ‘봉룡이’, ‘하각이’ 이렇게요(웃음).

 

식물이 더 귀여워 보여요(웃음). 식물을 대하는 혼자만의 방식도 있을 것 같아요.

최대한 자연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도와주는 일이 중요해요. 당연하지만 제때 물 주고 충분히 바람을 맞춰주는 거죠. 물 주는 방식은 좀 거칠기도 한데요(웃음). 일단 식물을 샤워실로 데리고 가서 샤워기 수압을 이용해서 뭉친 흙을 풀어줘요. 잎에 묻은 먼지도 씻어주고요. 거의 병적으로 환기를 해서, 이럴 거면 나가 사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남편에게 꾸중을 듣기도 하지만(웃음) 포기할 수 없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잖아요. 저는 식물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관심의 정도를 알맞게 유지하면서 서서히 다가가는 게 제일 중요해요.

 

이렇게 열심히 식물을 가꾸는 이유는 뭘까요?

저에게 식물은 가꾸기만 하는 것보다는, 같이 사는 존재에 가까워요. 동시에 나이 들어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함께 느낀다고 생각해요. 식물을 보면서 지나간 시간을 추억할 때가 있어요. 처음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일들이 스쳐 가면서요. 이런 순간이 쌓여서 식물과의 삶을 계속하는 이유가 돼요.

같이 살면서 식물의 존재감을 선명히 느낄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이 흔들릴 때 우직하게 바로잡아 줄 때가 있어요. 저는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향이라 바깥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일을 안고 오기 십상인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새순이 돋기도, 꽃을 피우기도, 키가 크기도 하죠. 바빠서 관심을 주지 못할 때도 혼자서 잘 자라는 식물을 보면 미안하고 고맙고,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여러 감정을 나눠요. 사람인 우리는 자연 속에 있거나, 자연과 가까운 것을 봤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잖아요. 태초에 우리도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해요. 어쩌면 출신이 같아서 더 가까운 마음을 느끼는 것 같고요.

 

키우는 모든 식물이 다 소중하겠지만, 그중에서 특히 애정이 가는 아이가 있을 것 같아요.

아라우카리아요. 사실 성장이 더디고, 키우면서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종이기도 해요.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 저 모습 그대로네요(웃음). 어쩔 땐 저를 보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사람 간의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질서나 예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면 조금 민감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이 아이도 그런 모습이 있어요. 결대로 잘 만져주면 한없이 보드랍지만, 반대 결로 만지면 따갑게 아플 수도 있거든요. 이런 점들이 저와 닮아서 좀더 눈길을 주게 돼요. 잘 자라지도 않지만 늘 변함 없는 모습으로 저를 지켜주고 있어요.

 

서서히, 식물과 함께 꾸려갈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요. 언젠가 식물을 주제로 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식물을 바라보면서 제가 느꼈던 마음, 식물과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 일로써 만난 식물과의 경험을 녹인 책이요. 그 책이 식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주길 바라요. 개인화되어 가는 이 사회에 서서히 따뜻한 기운을 불어 줄 수 있는, 그런 변화를 꿈꾸고 있어요. 그리고 아주 먼 미래에는 바닷가나 산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요. 텃밭도 가꾸면서 채소도 직접 키워서 먹으며 사는 일상을 상상해요. 남편은 작살로 물고기도 잡아 오고요(웃음). 그때도 저희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제가 키운 토마토를 맛보실 수도 있겠네요!

 

그녀에게 식물은 예쁘게 바라만 보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 빠진 무언가를 채워주는, 그렇게 우리 하루의 일부로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요즘은 사람들 간의 거리가 특히 더 멀어졌어요. 소통도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시대죠. 그 사이에서 윤활제가 되어줄 수 있는 게 식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식물을 통해서 사람을 배우고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갔던 것처럼요. 식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시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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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유래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