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마시고 비운 것들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다. 음악, 요리, 여행, 달리기 그리고 술. 그의 소설 속 사람들은 예외 없이 술을 마신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시는 방법까지 다양하다. 에세이에서도 술에 관한 철학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에게 술이란 무엇일까. 어쩐지 하루키가 만드는 술 속엔 좋아하는 마음 그 이상을 넘어 비밀스러운 무엇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마치 그의 소설 속 또 다른 세계처럼.

MBC 조승원 기자는 유명한 ‘하루키스트’이자 ‘미주가’이다. ‘매력적인 술을 좇으며 즐기는 사람’ 이라는 뜻의 미주가라는 명칭은 스스로 작명한 수식어다. 술을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대학 시절, 모두들 《태백산맥》을 들고 당당히 캠퍼스를 누빌 때 그는 자신의 방에서 하루키 소설을 펼쳤다. 책 속의 인물들이 자주 마시는 수입 맥주를 들고 나름의 사치를 부렸다. 칵테일을 독학한 것,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딴 것 모두 순수하게 술을 사랑해서, 조금 더 나은 술 문화를 이끌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토록 열정적으로 술을 연구한 사람이 자신의 청춘을 바쳤던 하루키와 술에 관해 말한다.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는 그의 술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오목조목 하루키가 책 속에 술을 어떻게 녹였는지 밝혀낸다. 우리는 홍대의 바, 팩토리에서 하루키가 좋아하는 술들을 주문했다. 가끔씩 잔을 부딪치며 그에게 술은 어떤 존재인지 묻고 답했다.

와인,

콜로세움 유적과 나오코

“와타나베, 컵 하나 더 갖다 주지 않겠어?”

“네, 그러죠. 그런데 뭘 할 건데요?”

“지금부터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는 거야.”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쓸쓸하지 않은 장례식을.”

내가 컵을 가져오자 레이코 씨는 거기에 가득 포도주를 채우고 

정원의 석등 위에 갖다 놓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하루키는 대부분 와인을 여자 인물들과 함께 등장시켰어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와 ‘레이코’,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뮤’, 《양을 쫓는 모험》의 ‘키키’, 《1Q84》에서 ‘아오마메’도 그랬죠. 아오마메가 자주 마시던 와인은 ‘샤블리Chablis’예요. 그녀가 1Q84라는 세계를 자각한 뒤 곧바로 마신 와인이죠. 샤블리는 주로 흰살 생선과 같이 묘사되는데 아마도 하루키가 좋아하던 안주와 술의 조합이었을 것 같아요. 그 밖에도 여러 여성 캐릭터들의 중요한 장면에 와인을 빠트리지 않았어요. 가장 돋보였을 때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에요. 나오코의 스무 번째 생일날이었죠. 그날 와타나베는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준비하지만 가는 길에 콜로세움 유적처럼 찌그러져 버려요. 하지만 엉망이 된 케이크는 그녀가 좋아하는 와인 덕에 다시 근사해지죠.

와인은 오래전부터 진귀한 술로 여겨졌어요. ‘귀족의 술’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정도죠. 그렇다고 하루키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와인을 사용했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그저 이렇게 고귀한 와인을, 기념일같이 특별한 장면을 그릴 때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죠. 볼품없는 케이크도 그럴싸하게 만들어주고 두 사람의 관계에도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것이 와인이에요. 이후에 그와 그녀가 만나는 몇 안 되는 장면에도 와인이 자주 등장해요. 끝 무렵 나오코의 장례식 장면에서도 레이코와 와타나베는 그녀를 추억하며 와인을 곁에 두죠.”

위스키,

온 몸에 퍼진 치유제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스키 성지여행》 중

“와인이 여성 캐릭터의 특별한 날을 장식했다면 위스키는 남자 주인공들에게 치유제, 진정제와 같은 역할을 했어요. 여기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야기를 할게요. 어느 날 ‘나’의 집에 괴한 두 명이 침입해요. 심하다 싶은 정도의 표현들이 오가죠. 괴한들은 그에게 가장 아끼는 것을 말하라고 해요. 그것만은 부수지 않겠다고 하면서요. 그는 텔레비전, 비디오, 그리고 위스키를 말하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괴한들은 무자비하게 위스키 병을 망가트려요. 공격을 받은 그는 배에 난 상처를 7센티나 꿰매고 나서도 깨진 유리 조각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마셔요. 그에게 위스키는 그런 존재였어요. 고통을 달래는 진통제 같은 거죠. 

그 밖에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위스키는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으로 등장해요. 주인공은 자신을 ‘태어났을 때부터 고독한 존재’로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이혼을 당한 후 고립된 산중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죠. 그때 그의 마음을 진정시킨 게 위스키예요. 하루키는 혼자서 상처받고 고독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스키를 마시게 했어요. 위스키가 몸속을 타고 내려갔을 때 무언가 씻기는 기분을 본인도 느꼈을까요?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이 위스키를 좋아하도록 그린 걸까요.”

칵테일,

그럭저럭 실력의 바텐더

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유롭게 주위 분위기에 녹아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피아노 트리오의 연주에 귀 기울이며 마치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듯이 칵테일을 조금씩 홀짝이고 있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와타나베와의 첫 데이트에서 ‘보드카 토닉Vodka Tonic’을 마셔요. 이 대목을 읽은 이래로 보드카 토닉 하면 미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죠. 보드카는 본래 무색, 무향, 무취의 술이에요. 일부는 플레이버드Flavoured로 가향 보드카가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특징이 전혀 없는 가장 순수한 술이죠. 그래서 베이스로 쓰기에 아주 적합해요. 미묘한 맛의 차이를 내기에 제격이고요. 보드카 토닉은 보드카에 라임 향을 첨가해서 독한 베이스를 라임의 향이 감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향에 취해 계속 마셨다가는 금새 취해버릴지도 모르죠. 

이런 점에서 미도리라는 사람은 보드카 토닉과 닮았어요. 그녀의 현재 상황은 긍정적이지 않아요. 아버지를 병시중하느라 지쳐 있고 남자친구와는 자꾸만 어긋나요. 미래도 불확실하고요. 그런데도 미도리는 늘 밝아요. 때로는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하면서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고 있죠. 힘든 현실을 특유의 맑음으로 숨겨내요. 독한 보드카를 상큼한 라임 향이 감춘 것처럼요.

하루키는 자신이 운영하던 재즈 바 ‘피터캣’에서 오너이자 바텐더로 일했어요. 본인을 ‘그럭저럭 실력의 바텐더’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겸손하기로 유명한 그가 ‘그럭저럭’이라는 수식어를 쓴 것에는 사실 꽤 큰 자신감이 담겨 있을지도 몰라요. 피터캣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여러 작품에 담아내기도 했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주인공 ‘하지메’는 고급 재즈 바 로빈스 네스트의 주인이에요. 손님으로 찾아온 그의 오랜 사랑 ‘시마모토’에게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대목을 보면 하루키의 바텐더 경력이 여실히 드러나죠. 그는 그녀에게 시그니처 칵테일을 추천하면서 럼Rum과 보드카를 섞은 칵테일을 내놓아요. 여기서 흥미로운 건, 럼과 보드카의 섞임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거예요. 보통 그런 조합은 흔하지 않거든요. 맛을 상상할수록 두 사람의 엇갈린 인연을 상기하게 되죠. 미지의 술 같아요. 술과 그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관계가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어요.”

맥주,

한 청춘의 허무

“목이 마른데.”

“맥주 마실래요? 아니면 물?”

“맥주가 좋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과 함께 거실로 가지고 오는 사이에, 

나는 소파 뒤에 팽개쳐 있던 손목시계를 주워 시각을 보았다. 4시 16분이었다. 

이제 한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날이 밝기 시작할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

“역사적으로 맥주는 물보다도 일상적이었어요. 술이 아니라 거의 음료처럼 여겨졌죠. 이런 배경처럼 하루키도 맥주를 아무 곳에서나 자유롭게 등장시켜요. 기차나 잔디 같은 곳이요. 특히 기차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인상적인데 이건 하루키 본인의 취향을 담아낸 거예요. 남들에게도 기차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흔한 일이니 본인이 그래도 튀지 않는다는 이유로요.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맥주라는 단어를 무려 61번이나 사용해요. 하루키와 맥주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 ‘나’와 ‘쥐’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된 것도, 파트너가 된 것도 모두 맥주 때문이니까요. 둘이서 팀을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도 처음 한 일은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어요. 그들이 들이켠 맥주의 양을 모두 합치면 25미터 풀을 가득 채울 만큼이고 함께 깐 땅콩 껍질은 넓은 바의 바닥에 5미터는 쌓일 정도죠. 상상이 되나요? 이렇게 긴 시간이 맥주와 땅콩으로 채워질 동안 어떤 일들이 두 사람을 스쳐 갔을까요. 

쥐는 맥주가 좋은 점으로 ‘모두 오줌으로 변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요. 하루키가 그리는 청춘들은 자주 허무에 빠지고 상실감에 허우적대죠. 맥주를 그렇게 많이 마셨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해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루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나와 쥐가 맥주를 마실 때마다 한잔하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려웠어요. 하루키 본인은 얼마나 마시고 싶었을까요(웃음).”

하루키의 술 추천

하루키의 와인

‘토스카나 와인Toscana Wine

하루키에게 와인을 추천받는다면 아마도 이탈리아 토스카나 현지의 와인이 아닐까 해요. 1980년대에 하루키는 이탈리아에서 3년을 보냈어요. 그의 여행 에세이를 보면 토스카나를 자주 방문하면서 차 트렁크에 와인을 가득 실어 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도 토스카나의 몬테풀치아노 근처 마을에서 한 달간 살아보기도 했는데 거의 매일 와인에 취해 있었어요(웃음). 하루키 역시 이렇게 소담스럽고 정감 가득한 마을에서 와인에 빠졌을까, 상상하기도 했죠. 나중에 한번 꼭 가서 현지 와인을 마셔보세요. 정말 추천해요. 숙소 문을 열면 바로 앞에서 포도를 따고 계신다니까요(웃음)! 아, 그리고 그곳의 스테이크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도 강력 추천해요.

하루키의 위스키

‘주라 섬의 위스키’

하루키는 세계 주요 산지 위스키들을 무척 자주 등장시켰어요. 모두 18개의 특정 상표 위스키를 말하죠. 그 중에서도 하루키는 ‘라프로익Laphroaig’을 가장 좋아해요. 하지만 주라섬의 위스키도 그가 만만치 않게 아끼는 술이죠. 주라섬은 조지 오웰이 《1984》를 작업한 곳이기도 해요. 하루키는 실제로 2014년에 주라의 증류소를 방문했고 그곳의 위스키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렇게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아주 상세하게 주라 위스키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죠. 하루키가 언제, 어느 곳을 방문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아가는 작업은 아주 즐거웠어요. 작품에 본인의 경험을 어떻게 녹여내는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와 술을 연구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였죠.

하루키의 칵테일

팩토리의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하루키는 시마모토가 칵테일 마시는 장면을 공들여 묘사했어요.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죠. 칵테일이 얼마나 훌륭하면 저런 묘사가 가능할까요. 여기서 시마모토가 마시는 칵테일은 ‘다이키리Daiquiri’예요. 쿠바의 탄광촌에서 이름을 따온 다이키리는 럼과 설탕, 라임주스가 잘 어우러진 칵테일이죠. 두 번째로 추천할 칵테일은 하루키가 좋아할 만한 술을 상상하면서 만들어졌어요. 바로 팩토리에서 맛보실 수 있죠. 메뉴에는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존재해요. 이 칵테일의 조합은 보드카와 진Gin, 그리고 라프로익이에요. 모두 하루키가 좋아하는 것들로 섞여 있죠. 강렬하고 드라이한 느낌의 칵테일이에요.

하루키의 맥주

‘하이네켄Heineken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맥주는 하이네켄이에요. 하이네켄과 관련된 단편 소설 <하이네캔 맥주의 빈 깡통을 밟은 코끼리에 대한 단문>에서는 엄청난 상상력이 펼쳐지죠. 주인공은 늙은 코끼리에게 하이네켄 깡통을 밟는 일을 시키는데 초록색 깡통들이 납작하게 밟힌 모습을 ‘태양 아래 하늘에서 내려다본 아프리카 평원’ 같다고 묘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무척 근사한 표현이에요. 초록색은 자연과 활력을 대표하는 색이기도 하죠. 하이네켄에서 이 색깔을 브랜드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무렵이에요. 그 당시 다른 맥주 브랜드들은 주로 갈색 병에 맥주를 담아냈어요. 하이네켄은 새로운 시도를 한 거죠. 하루키의 묘사대로라면 버림받은 늙은 코끼리는 아프리카 평원을 만들어냈어요. 이건 하이네켄의 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조승원 | 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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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Hae Ran 장소 협조 팩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