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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
팀포지티브제로 김시온·윤지원
지인이 전시 작업을 한다며 보여준 공간이 있다. 벽돌로 둘러싸인 고전적인 입구를 지나 오래된 테이블 옆에 앉아, 바이닐과 빈티지 음향기기를 사이에 두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 층을 오르면 전시가 열리고 내려가면 팝업스토어가 펼쳐지는데 여기가 카페라고? ‘카페포제’를 그렇게 알게 되었는데 ‘로스트 성수’, ‘보이어’도 같은 이들이 꾸려간다고 들었다. 그들이 공간에 담고 있는 존재는 무엇이며, 어떤 크고 작은 점들이 지금으로 이어져 온 걸까. 최근 오픈한 ‘먼치스 앤 구디스’와 코워킹 플레이스‘플라츠’를 보며 호기심은 더 커졌다. 가장 일상적이며 날 것 그대로를 말해줄 수 있는 집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나처럼, 공간 너머 그들이 꾸려가는 집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기지 하우스
형태 아파트
거주 1년
나이 7살
반가워요. 여러 공간을 기획하고 숨을 불어넣는 두 분의 집이 정말 궁금했어요.
지원: 저는 제가 바라보는 집의 시선이 중요한 사람이에요. 방에서 방으로, 부엌에서 거실로, 현관에서 집 안으로, 다양한 곳에서 바라보는 장면이 중요해서 자주 구성을 바꾸는 편이에요. 부족하고 어색해도 내가 보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이 한곳에 엉켜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아이들 장난감과 가구가 어울리지 않아도 그 생경한 느낌이 재미있어요. 안락함과 온기가 느껴지거든요. 저희 둘 다 소파가 있는 자리를 좋아하는데,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공간을 활용하며 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고, 저는 저기 놓인 저 장면을 좋아하는 게 좀 다른 거 같아요.
시온: 둘째를 출산하기 일주일 전에 이 집으로 들어왔어요. 태풍 부는 날, 천둥 번개가 칠 때 혼자 집을 보러 와서 동영상으로 아내에게 보여줬죠. 너무 어두워서 볕이 잘 드는지도 모르고 계약을 했는데 다행히 채광이 좋고, 바깥 풍경도 만족스러워요. 집 앞에 100년 된 나무가 있거든요.
만들어 가는 공간도 하는 일도 참 많아서 두 분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소개되고 싶거나, 나를 소개하기에 알맞은 단어를 꼽아본다면요?
시온: 저는 성수동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그룹 팀포지티브제로(이하 ‘TPZ’)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예요. 명함에도 그렇게 썼어요. 팀포지티브제로는 생산성이 없거나 쓸모없다는 의미의 ‘제로’에 포지티브의 긍정성과 플러스의 개념을 넣어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말하고자 해요. 음악과 커피, 와인과 패션, 예술처럼 삶을 좀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들로 누군가의 삶에 가치를 전하고 싶어요.
지원: TPZ는 재즈바인 포지티브제로 라운지, 카페 포제, 보이어, 로스트 성수, 플라츠 등의 공간에 콘텐츠를 채워가고 있는데요, 저는 브랜드책임자CBO지만 개인적으로 ‘찰나의 순간을 장면으로 기억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싶어요. 일도 삶도 내가 보는 신Scene으로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거든요.
신선한 소개를 들으니 궁금한 게 많아져요. 전개하는 브랜드가 많은 편인데요, 공간의 성격도 달라 보여요.
시온: 우리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스토리나 성격에서 출발해요. 자연스러운 공간을 보고 여기에 무엇을 넣을지, 누구와 함께할지를 고민하다 보니 공간의 형태가 모두 달라졌어요. ‘로스트 성수’는 오래된 건물의 외관과 구조를 살려 마치 예전부터 자연스럽게 성수동 골목길에 있던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자연스럽게 레코드바가 떠올랐죠. 1층에서 바이닐을 직접 경험하거나 구매할 수도 있고, 2층에서 내추럴 와인을 즐길 수 있어요. ‘보이어’는 김태민 셰프와 함께하니, 만드는 음식이나 공간 분위기에 그의 캐릭터가 녹아들었죠. 공간마다 재미있는 지점이 달라서 개성 있게 여겨주는 것 같아요.
지원: 경계 없이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최근 ‘플라츠’라는 코워킹 플레이스도 열었어요. 지하에는 카우보이라멘 등의 푸드코드가 있고, 1층에는 먼치스앤구디스라는 커피가 있는 편집숍과 야외 정원이 있죠. 2층에는 포스트포에틱스가 꾸리는 아트서적과 개인 크리에이터를 위한 워킹 공간이 있어요. 그동안 만든 공간은 로컬정서에 맞는 콘텐츠를 하나의 브랜드 안에서 채워 왔다면, 더 확장해서 건물 전체의 콘텐츠와 브랜딩까지 기획했어요.
지금의 일을 이어오기까지 크고 작은 선택과 전환점이 있었을 텐데요.
시온: 가장 큰 전환점은 음악을 전공했다는 것과 게이머로 살았던 거예요. 음악으로 진로를 정하고 서울에 혼자 올라와 일을 하면서 레슨받고 대학에 진학했어요. 대학에 다니다 군악대를 갔고, 휴학하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대학을 햇수로 8년을 다녔어요. 그때 게임 테스팅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엔씨소프트에 입사하게 되었죠. 저는 주도적으로 삶을 선택하며 살았어요. 제가 중학생 때 종교인인 부모님이 선교를 한다고 해외로 이주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부모나 사회가 정해주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상이 없었어요. 딴짓을 정말 많이 했고, 보통 음대생들이 선택하는 루트에서 많이 벗어난 삶을 살았어요. 어떻게 하면 스펙에 도움이 되는지도 몰랐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없었으니까요. 주변에 아티스트친구들이 많으니까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는 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과학자, 게임 개발자,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인 창작 집단 ‘신 랩Syyn Lab’에 영감을 받아서 ‘플레이스 사이’를 만들었어요.
플레이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을 했어요?
시온: 처음에는 감각적이고 재미있는 걸 창작하는 이들의 스튜디오 공간이었어요. 따로 잘할 수 없어서 같이 하려던 건 아니었고요. 혼자서도 ‘만렙’을 찍는 친구들, 평소에 자기 것도 이미 잘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다른 것들과 잘 결합할 수 있는 친구들을 모았죠. 그때도 제가 길드 마스터였어요. 외부에서 일이 들어오면 프로듀싱을 해서 역할을 정하고 의논해서 재미있는 일을 찾아 나갔어요. 그런데 개인 창작자들을 이끄는게 쉽진 않았어요. 같이 모여서 노는 건 좋아하는데 운영에 기여하려고 노력하진 않는 거죠. 저도 비즈니스를 하던 게 아니어서 우리의 목표나 미래에 대해 약속하지 않았고요. ‘내가 이 배의 선장인데 우리는 보물을 찾아갈 거야. 근데 그 보물이 뭔지 모르고 언제 갈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괜찮으면 같이 있자.’ 이거였거든요. 굉장히 모호한 단체였어요. 공간의 형태를 고민하다가 ‘오피스 쉐어 공간은 여기까지 하겠다.’ 선언했고,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이벤트를 열기로 했어요.
‘사이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열 팀 가까이 참여해서 공간을 채우고, 다양한 공연을 3일 동안 했어요. 그게 재미있어서 복합문화 공간으로 형태를 바꾸게 된 거예요. 해외의 전통 무용수가 다른 공연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춤을 꽤 춘다는 현대 무용수나 챔피언 비보이들이 춤을 추고 있으니까 즉석에서 같이 춤을 췄어요. 그러면 옆에 있던 기타리스트가 곡을 연주하고 대각선에 있던 디제이가 디제잉을 하고 거문고 연주자가 거문고를 튕겨요. 그걸 지켜보는 친구가 소스를 따서 프로젝션한 뒤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송출하는 거예요. ‘익스체인징 컨템포러리 아트 파티Exchanging Contemporary Art Party’ 같은 프로그램이었고, 우연히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어요. BTS가 [화양연화] 앨범을 냈을 때 오프라인 전시를 저희 공간에서 하기도했죠.
와, 정말 열정적으로 살아왔네요.
시온: 재미있고 보람 있었거든요. 하지만 소모적이고 미래가 없어 보였어요. 내 젊음과 우리의 에너지는 나가는데 쌓이는 건 없다고 생각한 거죠. 입장료 만 원 정도 받아 행사를 진행하고, 뒤풀이까지 하고 나면 마이너스가 돼요. 그런데도 1년에 100여 번의 이벤트를 풀타임 직원 한 명과 꾸렸으니 참 무모했죠(웃음). 많은 창작자가 자신의 재능을 흔쾌히 낭비해 준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어요. 창작자와 관객 사이의 간극을 줄여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 가려는 미션에 울림을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다양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작전을 바꾸기로 했어요. 문화 공간에서 문화 콘텐츠를 유통하지 말고, F&B나 리테일 시장처럼 기존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에 문화 예술을 더하는 형태로 전략을 바꾸는 거죠. 그렇게 포지티브제로 라운지를 열었어요. 같은 지향점을 갖고 같은 일을 하면서 방법을 바꿔 가는 건 지금도 계속하고 있죠.
이제 지원 씨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지원: 저는 소비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걸 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했어요(웃음). 의상디자인을 배우면서 오프라인 유통에 관한 리서치가 재미있어서 이대 앞에 옷가게를 열었어요. 그 이후 남성복 쇼핑몰도 운영했는데, 당시에 남자 옷을 파는 쇼핑몰이 거의 없어서 지마켓이나 옥션에서 옷을 살 때였어요. 일반적인 옷은 팔지 않고 처음으로 스키니를 팔았죠.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외국 모델을 써서 룩북을 찍고 사진 편집, MD, CS도 다 직접 했어요. 그러다 옷이 좀 지루해졌어요. ‘나는 구두를 좋아하니까 신발을 만들어볼까?’ 해서 성수동에서 신발 만드는 걸 배웠어요. 프로모션 회사에 완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었는데 신발 만드는 게 그렇게 복잡한지 몰랐어요. 옷은 패턴만 있으면 여러 공장을 나눠서 가동할 수 있는데 신발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수제화라 판매하는 데 한계도 있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일하는 분들을 컨트롤하는거였어요. 오래 일한 분들이고 자신만의 성향이 뚜렷하시거든요. 브랜드에 납품을 해야 하는데, 다음 날 술 드시고 안 나오시면 일정이 미뤄지는 거예요. 애를 많이 태웠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혼자 이렇게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건 없었거든요. 다른 사람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좀 내려놓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지금 일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요.
좋아하는 것에 깊이 열망하다 보니 일로 이어진 거네요.
지원: 맞아요. 먹고 마시고 놀고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했어요. ‘와 여긴 내 취향이다. 여긴 이게 좋고, 저기는 저게 좋구나.’ 하면서요. 시온 대표가 포지티브제로 라운지를 연지 1년 정도 지나 만났는데, 물질이나 외적인 것보다 낭만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게 참 좋았어요. 포지티브제로 라운지도 흐르는 분위기나 감도는 공기, 조도 등이 너무 조화롭다고 느꼈죠. 뒤이어 카페 포제를 준비한다고 해서 가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기본 골조나 마감은 좋은데, 내부에 가구가 없고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거기 앉아서 커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시온: 저는 오픈 할 날짜를 정해놓고 역산해서 공간을 만들어요. 게이머적 문법이니까 우리가 설계하는 것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걸 반복적인 프로세스로 배워서 어떻게 빨리 다음 단계로 성장할 건지가 더 중요한 로직이에요. 충분한 예산이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벌어서 발전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지원이는 완성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거죠. “이 상태로 커피 팔아도 돼?” 하더라고요.
지원: 당시는 시온 씨 일에 제가 관여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오픈하면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텐데, 좀더 갖추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줬어요. 저는 가구나 오브제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믿거든요. 좋아하던 편집숍 ‘사무엘 스몰즈’ 에 함께 가서 몇 개는 구입하고, 몇 개는 예산에 맞춰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가구 디자인을 디렉팅했어요.그러다 점점 도와달라는 게 많아져서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TPZ가 꾸리는 공간들은 다양하고 가변적이고 의외성이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두 분 성향이 호기심이 많고, 틀을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은 편 같아요.
시온: 제 성격도 게임의 세계관에서 형성되었어요. 다양한 환경이 기본적이고 다음 에피소드가 나오면서 계속 업데이트가 돼요. 과거에는 A 캐릭터가 약했는데 다음 패치에서는 스킬이 좋아지고 나아져서 다시 조명을 받거나 판이 바뀌는 것들이 게임 세상에선 일반적이죠. 그때 저는 클래식한 전술을 주로 썼어요. 가변적인 환경에서도 대응 가능한 전술이요. 지금 B가 강력하다고 해서 B에 맞게 열심히 전술을 파다 보면 나중에 판이 바뀌어 경쟁력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다양하고 가변성 있는 환경에서 클래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클래식은 나만의 엣지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요. 또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위트예요. 공간마다 좋아하는 포인트, 디테일이 있으면 좋겠고, 사람과 조직에도 담겨 있길 바라다 보니 의외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지원: 둘 다 호기심도 많고 긍정적인 편이라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경험하는 걸 좋아해요. 취향은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가 아날로그적인 낭만, 클래식을 좋아한다는거죠. 저희가 새로운 형식과 다양하고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입소문이 났다고 생각하실 텐데, 저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움보다 지속 가능성을 더 고려하죠. 사라지는 공간이 많잖아요. 오래 버티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느껴요. 공간마다 크리에이티브가 다르고, 고객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만 고집하려고 하지 않고, 이슈가 생기면 유연하게 대처하는 편이에요. 또 저희는 낮은 효율성에 거부감이 크지 않아요. 바이닐이나 오래된 골목길 같은 무드를 좋아하고, 음악이나 예술이 주는 무쓸모의 가치를 믿고 좋아하거든요. 이런 취향들이 연결되어 경계가 없는 브랜드를 꾸려가게 되는 거 같아요.
공간이 주는 힘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지원: 화려하고 세련된 공간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거나 그곳만의 분위기와 진정성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우리가 꿈꾸는 삶의 모양 에너지를 받는 편이에요. ‘우에노공원’과 ‘베를린 유대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 박물관’에 갔을 때 그 힘을 느꼈어요. 걷는 길, 보는 시선, 전경이나 조경까지도 사용자의 동선을 고려한 걸 보며, 공간을 꾸리기 위해 설계된 계획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특히 우에노공원 안에 자리 잡은 ‘국립서양 미술관’이 기억에 남아요. 르코르뷔지에가 만든 건축물이나 작품 외에도 동선과 조도가 주는 감흥이 컸어요. 두 번을 방문했는데, 햇살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인상 깊어요. 공원 안의 모든 식물이 진하고 뚜렷한 초록빛이었고 실내의 조도도 날씨와 잘 어우러졌죠.
지속 가능한 공간을 꾸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어떤 공간이 오래 지속될까요?
지원: 공간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건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삶 자체잖아요. 형태나 성격과 상관없이 다양한 경험과 관계를 연결해 주는 곳이죠. 내가 이걸 하고 싶어, 이게 있었으면 좋겠어, 하고 흉내만 내고 싶진 않아요. 친숙하거나 오래되고 깊이 있는 키맨이 필요하죠. 저희의 키맨은 음악이에요. 커피와 바이닐로 연결되어 진정성과 깊이를 넣어줄 좋은 파트너들이 있고요. 어떤 공간을 기획할 때, ‘여기서 어떤 음악을 틀어야 하지?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을 듣게 할래?’라는 이야기를 많이해요. 저는 공간이 전부가 되는 걸 원하진 않아요. 그곳에 오는 사람이 중심이 되면 좋겠어요.
시온: 공간이라는 단어는 넓게 쓸 수 있잖아요.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콘텐츠를 담기 좋은 바탕이 되는 것을 공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제공하는 진정성, 소울이 잘 전해져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Space가 Place가 되고, 이야기가 쌓인다고 생각해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저는 콘솔레이션 홀이 인상 깊었어요. 어디에서 들어가든 공간의 벽면 자체가 떠 있어요. 접근 방식이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곳에서 관계를 맺는 형식인 거죠. 그리고 그 안은 순교자들의 성지에 알맞은 비디오 아트로 채워져 있어요. 레퀴엠 같은 음악에 영상이 흘러나왔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건축이나 인테리어 스타일링에서 끝나는 분할적인 느낌이 아니라 콘텐츠와 운영에 따라 지속성이 생기고 고객과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관계로 맺어진 공간을 사람들이 더 오래 사랑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만들고 있는 공간은 성수동을 기점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성수동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시온: ‘플레이스 사이’ 때는 성수동이 꿈틀꿈틀할 때였어요. 감이 있었다기보다는 필요한 공간의 조건과 잘 맞았어요. 운이 좋았죠. 최근 글로벌에서 서울의 위상이 높아졌어요. 대중문화 사이드만 봐도 <기생충>(2019), <미나리>(2020), BTS 등 글로벌한 영향력을 갖는 콘텐츠와 아티스트들을 보유하면 서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의 크리에이티브가 돋보이죠.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곳이 성수동이라 생각해요. 맛집이나 문화공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올드 앤 뉴와 다양성이 공존하는 생태계에서 여러 상업 시설, 문화 공간, 업무 장소, 주거 공간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죠.
지원: 공간들이 모여서 타운이 되고 도시가 되잖아요. 거리에서 만나는 작은 숍과 카페 같은 공간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타운 자체의 매력이 생기는 거라 저희도 성수동에서 중심을 잘 잡으려고 해요.
그럼 살고 싶은 동네도 성수동이에요?
시온: 네. 저는 개인적으로도 성수동을 정말 좋아해요. 집도 성수동에 구하고 싶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가까운 동네를 골랐거든요.
지원: 저는 좀 한가하고 자연이 있는 곳에 살고 싶어요. 부암동 같은 곳이요.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여러 제약이 있지만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은 꿈이 있어요.
사람에게 가장 가깝고도 큰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집이라고 생각해요. 집을 꾸리는 과정은 어땠어요?
지원: 여기에 살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렌트해서 살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거예요. 나중에 집을 사면,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면, 하고 미루지 않아요. 이전 집에 살 때는 내가 산 집이 아니다 보니, 못도 박지 않고 액자 하나도 걸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처음 그 집에 왔을 때의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가구도 마찬가지예요. 이사가면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 자가라면 가구에 많은 돈을 들여서 살 텐데, 하면서 계속 미루는 거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져야 나만의 공간이 되는데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삶도 미완성의 느낌이었어요. 다음 집의 형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미루지 않아요. 특히 의자를 좋아해요. 지금 사지 않으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놔둘 데가 없으면 쌓아두면 되죠. 그렇게 집을 구성하니까 집에 애착이 생기고, 꾸릴 수 있는 삶의 폭이 넓어진 거 같아요.
함께 누리고 싶은 가치를 담기 위해 공간을 만들었듯이 집에 담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듯해요.
지원: 가정을 갖기 전엔 하고 싶은 것들과 일이 우선인 삶이었어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집은 거의 잠자는 공간이었죠.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내가 보고 싶은 신을 조금씩 만들어 갔어요. 예전에는 일반적으로 잘 만든다고 알려진 디자이너의 가구들로 집을 채워 왔어요. 그런 가구들이 보여주는 깨끗하고 세련된 느낌이 참 좋았어요. 나이가 들고 가족이 생기니까 제가 생각하는 집의 형태나 집에서 느끼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자연이 준 온기와 자연스러움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지금의 이 테이블을 쓰기 전까지 프리츠 한센 테이블을 썼어요. 여기저기 유용하게 쓰였는데 아이들 가구와 어울리기엔 좀 가벼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우드로 된 테이블을 사고 싶었지만 원형 테이블은 사이즈가 작지 않을까 오래 고민하다 바꿨는데 만족도가 정말 높더라고요. 아직은 두 아이가 어리고 공간을 꾸미는 중이라서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고 싶어요. 그러면서 제 삶의 태도와 방식이 바뀔 수도 있겠죠.
시온: 이 집에서 저의 점유율은 거실의 소파 자리, 서재와 와인 창고 정도예요(웃음). 저는 시각적으로 아내보다 예민하지않고 저보다 잘 구성해 줄 걸 알기에 제 의견이 많이 반영되진 않았어요. 서재는 시간과 정신의 방으로 책상과 의자, 책장을 제가 골랐어요.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잠깐 책을 보거나 업무를 보곤 해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여기는 아빠 엄마 없으면 들어가면 안 돼.’라고 알려줬어요. 교육을 통해 스피커에도 손을 넣지 않게 되었지만 턴테이블은 아직 밖으로 못 꺼냈어요(웃음). 아이들이 자라 대화가 되면 또 바뀌겠죠. 각자 나름의 취향으로 공간이 구성되고 있는 과도기 같아요.
크리에이터에게 취향과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한 언어예요. 요즘 나를 가장 나답게, 행복하게 하는 건 뭔가요?
지원: 플라츠를 꾸리면서 꽃 시장에 자주 가다 보니 식물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요즘은 매일 출근하자마자 8시 50분부터 10시까지 플라츠의 백야드 식물에 물을 줘요. 시간과 마음을 쓰면서 식물을 돌보니 저에게 정말 좋더라고요. 행복해지고 위로가 돼요. 처음에는 수고스럽고 힘들었어요.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요즘은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좋아요. 디자인 일을 오래 하면서 사진으로 레퍼런스를 많이 보는데, 그걸로는 제 취향이나 관점이 넓어진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식물을 유튜브로 봤을때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직접 가서 촉감을 느끼고 가지도 쳐보고 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아,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를 확실히 알았어요. 앞으로도 레퍼런스를 좀 걸러내고 오감을 살려서 경험할 수 있는 걸 많이 하고 싶어요.
시온: 시간과 정신의 방에 들어가 커피와 독서를 즐겨요. 저는 음악과 게임이라는 모국어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해요. 회사 대표로 비즈니스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경영의 언어도 이해하고 습득해야 하죠. ‘게임 길드 운영할 때 이런 책들 알고 있었으면 더 잘할 수 있었겠네.’ 싶은 것도 있고, ‘어? 이건 내가 되게 잘하고 있었네.’ 느끼거나 이런 식으로 빨리 적용해 봐야겠다 할 때도 있어서, 독서를 하며 힌트를 얻을 때 재미있어요.
행복하게 하는 것도 일과 연결되어 있네요. 지금도 게임을 하나요?
시온: 아니요. 더 이상 저를 만족시키는 게임이 없어요. 이제는 사업이라는 리얼 게임을 하죠(웃음). 한창 게임 할 땐 20시간, 40시간 해도 즐겁기만 했거든요. 일도 그래요. 육아의 시간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어서 그 시간이 제한되었다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요. 집에서 못 마시고 못 들어도 수집을 통해 행복을 찾는 행위는 계속하고 있어요. 음악이나 책을 소비하거나 감상하는 건 디지털이나 스트리밍으로 할 수 있는데 소장하는 행위는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도구가 저한텐 바이닐과 와인, 책이에요. 시간이 주어지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가장 하고 싶은 건 테니스예요. 운동화랑 삭스까지 사 놓고 등록할 곳도 알아봤는데 시작을 못 했어요. 코로나 이슈가 있고 일도 아직 정리할 게 많고,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요.
일을 할 때, 역할이나 틀의 경계가 넓으면 종종 막막해지잖아요. 불안할 때도 있나요?
시온: 그럼요. 근본적으로 인간은 안 좋은 일이나 고통이 있어서 불안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불안하다고 생각해요. 불안의 요소는 어디서든 올 수 있어요. TPZ의 대표이고, 한 여자의 남편, 두 아이의 아빠라는 것이 예전보다 덜 자유롭지만 제가 선택한 거니까 받아들여요. 불안할 때는 불안에 떨고 두려워하면서 겪어나가요.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푹 자고 나면 다시 리프레시 되기도 하고요. 일을 하다가 해결해야하는 일이 생길 땐 제가 모든 일을 다 잘 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답을 알 만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봐요. 다양한 기사나 책을 보고 전략을 짜기도 하는데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직관을 따르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일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가 취해지더라고요.
지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은 아닌데, 일하면서 ‘이게 최선일까?’ 하는 물음이 들 때가 불안해요. 계속 마음에 걸려서 왜 이렇게밖에 못했지 할까 봐요. ‘와 좋다. 이대로 가자.’ 하는 곳도 있지만 ‘이게 맞을까?’ 마음에 걸리는 공간들도 있죠. ‘이거 어차피 나만 아는 거고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하자.’ 하는 마음과 싸우는 거죠. 플라츠 같은 경우 오피스가 4층에 있어서 오며 가며 계속 마주해요. 지나칠 때마다 거슬리는 건 계속 바꿔갔어요. 가끔 너무 우울할 때는 퇴근하면서 한바탕 울고 집에 와요.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요. 저는 측은지심이라는 말을 좋아하거든요. 나만 너무 힘들고 외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안쓰럽다고 생각하니까 빨리 극복이 되는 거 같아요.
로스트는 잃어버린 시간, 플라츠는 독일어로 광장이라는 뜻이라고요. 많은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이름을 지어왔을 텐데요. 집에도 이름을 지어보면 어떨까요?
지원: 함께 고민해 봤는데 기지하우스Gidgee Haus가 적당한거 같아요. 기지는 군사 기지의 베이스이며 탐험의 스테이션, 위트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우리 집은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일이 연장되는 곳이기도 해요. 우리가 전개하는 여러 공간의 아이디어나 기지가 샘솟기도 하고 에너지가 보충되기도 하는 팀포지티브제로의 본부 기지죠. 기지를 내뿜을 수 있는 기지하우스!
집의 형태가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변하고 있네요. 직접 집을 짓는 날도 올 거 같은데요?
지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가 꿈꾸는 집의 형태가 명확해지고 있어요. 아파트가 아닌 오래된 빌라나 주택을 개조해보고 싶어요. 천장도 노출하고 재미있게 공간을 나누면서 스튜디오의 형태로 살아봐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가장 갖고 싶은 건 마당이에요. 저는 뒤늦게 자연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자연을 가까이하며 지내면 좋겠어요. 아이들과 마당에서 자유롭게 지내고 싶은 바람을 어떻게 좀더 구체화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시온: 저는 하나의 집 안에 원하는 삶을 모두 구현하기보다는 거점이 여러 개면 좋겠어요. 위성도시처럼 베이스에는 아이의 교육과 안전에 특화된 걸 두고 다른 곳엔 자연과 함께하는 콘텐츠로 채우는 거예요. 정기적으로 한 달에 몇 번, 일주일에 한번 정도 머물 곳이 한두 곳 더 있으면 좋겠어요.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스테이나 다른 형태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지원: 그 방법도 좋긴 한데, 우리가 잘 세팅해 놓아도 사람이살지 않으면 온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우리의 거점이라고 하더라도 집과 별장은 정말 다를 거예요. 저는 아주 좋은 호텔에 가도 며칠 있으면 집에 가고 싶고, 조금 불편해도 내 집이 편하다고 느껴요. 내가 쉴 수 있고 나만의 물건이 있는 곳이 나를 온전히 품어주니까요.
H. positivezero.co.kr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장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