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Surprised You Today?

숭이라는 장르
기록자·마케터 이승희

영화를 볼 때마다 굳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 늘 의아했다. 소설이니까, 영화니까, 애니메이션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던 모험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도 있다. 프로필에 얼굴 사진 대신 덩그러니 ‘숭’ 한 글자를 적어놓아 숭이라 불리는 사람. 좋아하는 걸 함께 좋아하고 싶어서 나누는 데 열심인 숭은 재미와 호기심을 쫓아 불편한 곳으로 간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기어이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 불안한 영역에 재미를 싹 틔우는 사람, 숭의 발길이 닿는 곳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위트 있는 장르가 태어날 것만 같다.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일

귀여운 게 가득한 집이네요. 여기 있는 물건들 하나씩만 들여다봐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요.

뭐가 좀 많죠(웃음)? 알아주는 맥시멀리스트여서 집에 물건이 한가득이에요.

 

혹시 이사 준비하시나요? 문 앞에 박스들이 쌓여 있던데요.

그거 다 제 물건이에요. 오늘 오신다고 해서 아침에 밖으로 빼두었어요. 좁은 원룸 한가운데 쌓아놓고 살던 것들인데 그 상태면 사람이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웃음). 바빠서 당장은 어렵지만 이사를 해야 할 것 같긴 해요.

 

뭐가 정말 많네요. 집 둘러보다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요(웃음). 소개부터 들어볼까요? 배달의민족 마케터로 잘 알려져 있지만 퇴사 이후 더 많은 정체성이 생긴 것 같아요.

제 핵심 자아는 마케터지만, 요즘 가장 좋아하는 정체성은 ‘기록자記錄者’로서의 자아예요. 이 단어는 지승호 작가의《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이라는 책에 나온 말인데 기록자라는 표현이 좋아서 저를 소개할 단어로 쓰고 있어요.

 

그럼 오늘은 기록자 자아와 이야기해 봐야겠어요. SNS에서는 ‘숭’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오늘은 숭이라고 부를게요.

좋아요.

 

가장 간단한 것부터 물을게요. 기록이 뭐라고 생각해요?

살아 있는 표현 수단? 남겨진 것들의 모습은 참 다양해요. 죽어 있는 것도 있고, 무채색도 있고, 선명한 것도 있죠. 근데 기록이라는 건 어느 한순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는 기록은 나의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에요. 미래의 누군가가 제 기록을 보면서 영향받고 융합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그럼 ‘죽어 있는’ 건 뭐예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거요. 내 감정이나 생각은 물론이고 무엇도 표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상태! 죽은 기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겠죠.

 

기록이라는 건 숨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네요. 주로 어떨 때 기록을 하나요?

제 주변의 모든 걸 기록하기보단 저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들을 기록해요. 어느 날 친구 A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렇구나, 하고 넘긴 적이 있거든요. 근데 그다음 날 친구 B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와! 대박!” 그런 거예요. A는 옆에서 자기가 어제 한 말이라면서 서운해하고(웃음). 같은 이야기여도 제 컨디션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어떤 날엔 별다른 의미가 없고, 어떤 날엔 확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 상태와 타이밍이 맞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게 되는 거고요.

누구에게나 처음의 의미는 다를 텐데, 첫 기록이라고 하면 언제가 떠올라요?

저는 과거엔 기록을 정말 안 하던 사람이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최초의 기록은 다이어리 첫 장인 것 같아요. 열심히 쓰진 않았지만 다이어리 사는 건 좋아했거든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다이어리를 사서 1월 며칠만 열심히 적고 그만두는 애들(웃음). 맨 앞 장엔 늘 과한 버킷리스트를 적었어요. 한 번 쓰고 펼쳐보지도 않은 채로 1년을 보내고, 다음 해가 밝으면 새 다이어리를 또 사고…. 버킷리스트는 실천 여부와는 관계없이 만드는 걸 좋아해요. 이루지 못한다고 스트레스받는 편도 아니어서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두둑해지거든요. 한 해를 알차게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올해는 뭐라고 적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란 키워드가 점점 더 중요해져요. 다이어트가 가장 중요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삶의 균형을 이루면서 신체를 회복하는 게 버킷리스트가 됐어요. 옛날엔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 훌륭한 마케터가 되고 싶다 같은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가짓수가 적어지고 문장도 좀 철학적으로 변했어요. 요즘 꾸준하게 꿈꾸는 건 ‘여유 있는 삶’이에요.

 

2021년 1분기는 여유롭게 지냈어요?

…아니요. 저는 한동안 백수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취직을 하게 됐어요. 1년 정도 백수로 지낼 땐 열심히 노력해서 건강한 루틴을 만들었거든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 읽고, 차 마시고, 운동 다녀오고, 화분에 물 주고…. 친구들이 ‘은퇴한 회장님 삶’ 같다고 했는데(웃음) 다시 입사하고 출퇴근하다 보니 만들어놓은 루틴이 다 깨졌어요. 회사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건강을 뒷전에 두게 되는 것 같아요. 3개월에 한 번씩 이런 각성이 찾아오는데, 다시 여유 있는 삶을 찾아가 보려고요.

 

기록에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처음은 이상하고 엉성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용기를 주기도 했어요. 숭의 엉성한 기록도 궁금해지는데요.

부끄러운 건 보통 온라인 기록이에요. 특히 블로그요. 제가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써온 온라인 플랫폼이 블로그거든요. 늘 생활처럼 해오던 거니까 제가 과거에 어떤 글을 썼고, 그때와 지금의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감이 잘 안 잡히는 곳이기도 하죠. 원래 익숙한 데서 그런 걸 발견하기가 더 어렵잖아요. 최근에 책 《기록의 쓸모》도 출간하고, 미디어에도 노출되면서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제 블로그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주 옛날 글에도 댓글이 달리고 제 포스팅이 공유되는 일도 많아졌어요. 알람이 올 때마다 제가 쓴 글이지만 낯부끄러워서 깜짝깜짝 놀라요. 파이팅 넘치게 ‘최고의 마케터가 되겠어!’를 외치는 글도 있고, 마케팅 실장이 되겠다며 승진에 대한 야망을 보이는 글도 있고,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는 물론이고 블로그 상위 노출을 노리고 검색될 만한 단어들을 마구 쓰며 최선을 다한 포스팅도 있어요(웃음). 하나하나 확인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서 지금 제 태도랑 다른 글들만 좀 정리했어요. 주로 저의 과거를 반성하게 되는 글이요.

그만큼 오래 기록해왔다는 뜻일 텐데 지금껏 쌓인 기록을 보면 어때요?

즐겁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자랑스러운 일들은 대단한 스펙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다 기록에서 출발했거든요. 배달의민족 마케터도 처음 서비스가 시작되었을 때 ‘너무 좋다’, ‘최고다’ 하면서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출발점이 됐고, 책도 기록을 콘텐츠로 삼아 쓰게 된 거니까요. 기록은 제가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매개예요. 자연스럽게 시작한 행위가 저의 포트폴리오가 된 셈이죠.

 

어느덧 숭의 인스타그램(@2tnnd) 팔로워는 5만 명이 넘었어요. 온라인 기록이 공공연한 기록이 되면서 조심스러워진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게 해야겠다는 거예요. 근데 또 제가 불합리한 걸 잘 못 보는 잔다르크같은 면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글부터 쓰려고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멈춰 서서 상황을 한 번 더 보려고 해요.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하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런 태도가 꼭 ‘누군가가 제 SNS를 보고 있어서’여서만은 아니에요. 예전엔 회사에서 있던 일들을 감정 쓰레기통처럼 SNS에 쏟아내곤 했는데요. 나이가 들면서 이게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란 걸 알게됐어요. 이젠 저를 바라보는 팀원들도 있는데 가볍게 저의 힘듦을 쏟아내는 게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거죠.

 

사적인 공간이 사라진 기분일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글을 지나치게 검토하거나 일일이 수정하는 일은 잘 없어요.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오면 그제야 ‘누가 읽었구나.’ 싶지, 읽을 사람을 의식하고 기록하는 건 아니거든요. 직접 마주하지 않아서 더 그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리액션이 실시간으로 보이는 플랫폼에선 기록을 잘 못 하겠어요. 새로운 채널이 생기면 도전해 보는 성격인데, 클럽하우스는 영 적응을 못 하겠더라고요. 누가 제 말을 듣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이 되니까 의식되고 부담스러워서요. 반면 블로그는 제가 하고 있는 SNS 중에서도 특히 사적인 영역에 가까웠거든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죠. 근데 언젠가 가볍게 힘들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요. 힘내라는 말부터 무슨 일이냐는 궁금증까지 댓글과 쪽지가 막 오는 거예요. 그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제 기록에 관심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동시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저의 힘듦은 끝난 지 오랜데, 며칠이 지나도록 괜찮냐는 댓글이 달리는 걸 보고 민망해지기도 했어요. 제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인식한 후로는 제 행동에 좀더 책임감을 느끼게 됐죠.

우리는 SNS로 타인의 크고 작은 기록을 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내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왜 해야 하는지만 찾으면 기록은 쉬워져요. 제가 기록을 시작한 이유는 회사에서 회의록을 쓰라고 시켜서였거든요. 일을 잘하려면 써야 한다고 하니까, 저는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 쓰기 시작한 건데요. 그걸 쓰면서 기록이 자연스럽게 생활화 됐어요. 기록하고 싶다고 마음먹어도 잘 안 되는 분이 있다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기록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어떤 이유든 좋아요. 기록을 모아 책을 내고 싶다든지,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늘리고 싶다든지,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든지…. 사람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죠. 목적 없이 막연하게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저라도 막막할 것 같아요. 기록을 숙제처럼 느끼면 쉽게 시작할 수 없거든요.

 

어떤 일을 하든 목적이 있어야 움직이는 편인가요?

맞아요. 저는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방향을 찾으면 잘 달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망망대해를 무조건 달리라고만 하면 어디가 끝인지 모르니까 성취감도 없고 힘들어지죠. 어딜 가든 목표 지점이 있는 게 좋아요. 가는 방법과 수단은 자유롭게 두고 ‘저길 가면 돼.’라고 찍어주면 신이 나더라고요. 가는 동안 수영도 하고, 배도 타고, 수상 택시도 타볼 수 있겠죠.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계속 기록을 해왔다고 했어요. 지금은 또 어떤 고민이 기록에 동력이 되고 있나요?

시간을 잘 쓰고 싶다는 고민이요. 요즘은 시간이 뭘까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거절하기 아까운 좋은 제안이 참 많은데, 옛날엔 들어오는 대로 다 받았거든요. 인터뷰도, 책도, 일도…. 근데 그걸 다 하다 보니까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여유도 없고, 일상에서 행복이 사라지더라고요. 얼마 전에 디자이너 친구랑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외주 일을 받던 친구인데요. 시간을 꽉 채워 일해 보니 돈 버는 것보다 시간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삶의 균형이 맞는다면서요. 제가 밤낮없이 해온, 재밌다고만 여긴 일들이 제 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노트에 제 하루를 차지하고 있는 일들을 쭉 적어봤어요. 그리고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지우기 시작했죠. 하루 중 50퍼센트 정도는 여유 있게 남겨놓고 싶어서요.

 

50퍼센트씩이나요?

안 되려나요(웃음)?

 

그 여유라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미하나요?

맞아요. 퇴근하고 일단 과제가 없으면 좋겠어요. 꼭 일감이 아니라 친구와 약속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저는 거절을 잘못 해서 만나자는 요청에 대부분 응하는 편인데 앞으로는 제시간을 선점해 두고 그 시간을 온전히 저만을 위해 활용해 보려고요. 책도 보고, 샤워도 하고, 차도 마시고….

 

요즘 많이 지쳐 있어요?

지금 좀 그래요. 아… 이 질문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꼭 심리상담 받는 거 같네요(웃음). 요새 저에게 많이 지쳐 있냐고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거든요.

함께

좋아하고 싶어서

숭의 기록은 마케팅을 잘하고 싶어서 시작된 셈인데, 마케터란 직업이 아니었다면 기록자라는 자아도 없었을까요?

음… 네. 없었을 것 같아요. 스스로 작가라고 하긴 좀 부끄럽지만 제가 책을 쓰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도 마케팅에 관한 일을 남기고 싶고, 잘하고 싶어서였거든요. 저는 마케팅이 너무 재밌어요. 마케터 자아로서 성취감도 크고요. 마케터로 인정받거나 프로페셔널하다는 평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죠. 마케터가 아닌 제가 기록하는 건… 상상이 잘 안 돼요. 

 

마케팅이 왜 좋아요?

에펠탑 보는 걸 기대하면서 혼자 프랑스에 여행 간 적이 있어요. 근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토록 기대한 에펠탑인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까 좋다고 환호할 마음도 안 생기고 특별한 감흥이 없었어요. 그때 저는 누군가와 함께해야 신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마케팅은 ‘같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케터가 액션을 취했을 때 누군가 함께 변하고 시장이 움직이는 일이니까요. 변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성취감도 바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사람이랑 상호작용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책에 이렇게 쓰셨죠. “사람 안 좋아한다.”고요.

질문지를 보면서 그런 말을 썼다는 게 생각나서 놀랐어요. 지금 그 문장을 새롭게 써보자면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로 바꿔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어릴 땐 롤모델이 있었어요. 작가, 브랜드 대표 등등 멋진 사람을 볼 때마다 롤모델 삼고 싶었죠. 근데 롤모델이라는 게 그 사람 전체를 닮고 싶다기보단 닮고 싶은 포인트가 따로 있는 거잖아요. 실제로 롤모델을 만날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막상 만나니까 마냥 좋기보다는 생각한 것과 다른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실망도 하게 됐고요. 사실 롤모델로 삼고 싶은 포인트를 정한 것도, 그런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한 것도 저잖아요. 그 사람은 언제나 그 모습이었을 텐데 제가 보고 싶은 점만 찾아서 봐놓고 실망하는 건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환상을 품지 말아야겠단 생각도 하게 된 거고요.

 

그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 아니에요?

어, 아니에요. 저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가 ‘사람 안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건, 오프라인으로 대면하는 만남을 의미하기도 해요. 진짜 사람 좋아하는 분들은 만남으로 에너지랑 활력을 얻잖아요. 저는 집에서 쉬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타입이에요. 웬만하면 혼자서요.

 

의외네요. 《기록의 쓸모》에서 취향을 ‘영업’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당연히 사람을 좋아할 줄 알았어요.

좀 아이러니긴 한데 반반인 것 같아요. 영업하는 게 막 너무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제 성향이 원래 좀 중간에 걸쳐 있는 것 같단 생각도 드는데요. MBTI검사를 하면 외향형인 ENFP랑 내향형인 INFP가 번갈아 나오거든요. 저는 편한 사람들은 한없이 좋은 반면, 편치 않은 사람들에게선 에너지를 제대로 얻지 못해요. 그래서 책 홍보를 위해 강연이나 북토크를 할 땐 솔직히 좀 어려웠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길 하려니까 울렁거리더라고요. 행복하다고 느낄 겨를이 없었고 성취감도 크지 않았죠

즐거움, 위트, 재미가 숭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했어요. 안전한 곳에선 재미를 못 느낀다는 말도 인상 깊었는데요. 다소 불안하고 불편한 영역에 도전한다는 의미 같기도 해요.

실은 요즘 계속 불안한 상태였는데, 이 질문 덕에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아,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깨달으며 안심하기도 했고요. 저를 움직이는 동력은 재미도 그렇지만 호기심의 힘이 큰 것 같아요. 예측 가능한 분야는 재미가 없거든요. 예상 가능한 업무를 하는 건 원하지 않아서 직장을 선택할 때도 호기심과 재미를 먼저 생각해요. 웬만하면 제가 어떤 일을 할지 전혀 모르겠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저는 대체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모르는 영역을 경험해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종종 우울하기도 해요. 그게 저에겐 새로운 일을 할 때의 시행착오인데요. 제 첫 직장인 치과에서도, 배달의민족에서도 겪었고, 지금도 어김없이 겪고 있어요.

 

요즘은 어떤 게 힘들어요?

지금은 빵과 커피가 있는 프릳츠커피컴퍼니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어요. IT 계열이던 배달의민족에서 F&B 계열로 오니까 같은 마케터여도 일하는 게 낯설어요.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생두 농장이 어디에 있고, 원두의 특징이 어떻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계속 탐색하며 지내고 있죠. 모르는 건 물어보고, 공부하고, 익히는 시간의 연속이지만 이 과정이 저는 즐거워요. 답답하고 어려운 거랑은 별개로 새로운 분야에 있다는 사실이 저를 즐겁게 해요.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것에 만족해요? 지금 숭은 얼마든지 더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인지 뭐든 선택하고 나면 초반엔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렇다는 걸 모르다가 나중에 과거의 기록을 보고서 깨닫곤 하는데요. 지금 저는 적응하느라 바쁘고 힘든 상황이라 ‘백수가 편하구나….’ 그러면서 과거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요. 후회하는 거죠(웃음). 그런데요, 저는 늘 이래 왔어요. 배달의민족 다닐 땐 ‘아, 병원에 있을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내가 서울에 왔지?’ 싶었고, 병원 다닐 땐 ‘취준생 기간을 좀더 가질걸….’ 하고 후회했어요. 뭐든 선택하고 나면 꼭 후회가 뒤따르는데, 그게 실패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책에 드라마 <스타트업> 대사를 인용했죠. “후회는 과정에서 오는 거지 선택하는 순간에 오지 않는다.” 그 이야기랑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대사가 감명 깊었던 이유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실패와 성공이 결정된다는 의미 때문이에요. 저는 제 선택과 결정에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에요. 더 나은 방향을 꿈꾸며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까요.

 

후회하면서 긍정적이기는 어려운 일 같은데, 어떻게 긍정성을 유지해요?

저는 주변 사람한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에요. 긍정적인 기운이든, 부정적인 기운이든 바로 흡수하는 편이죠. 불평 불만이 심해지는 시기에는 일부러 그걸 채찍질해 줄 수 있는 친구들과 만나려고 해요. 그 친구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할 상황 아닌데? 너 지금 불평하는 거 불편해.”라고 이야기해 주거든요. 그럼 정신이 번쩍 들어요.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배달의민족에 다닐 때 책 《마케터의 일》을 쓰신, 아! 《어라운드》에도 나오셨죠(웃음). 장인성 상무님이 저를 부르신 적이 있거든요. 평가하는 시즌도 아니고, 상무님이 직원들을 평가하는 타입도 아닌데 제게 이런 이야길 하시더라고요. “승희 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정말 많이 받는 사람이야. 알고 있니?” 제가 주변에 나쁜 기운을 주는 사람과 있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과 있으면 폭발적으로 좋은 사람이 된대요. 의도적으로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들 옆에 있어야 하는 게 제가 할 노력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 말을 듣고 저 자신을 관찰해 봤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 이후론 의도적으로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지내려고 노력해요. 다른 사람의 관찰 덕분에 저를 더 잘 알게 된 거죠.

숭의 기록은 쓰고, 찍고, 만들어서 아카이빙하는 것을 넘어 ‘공유’까지 포함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기록을 나누는 게 어떤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제가 좋다고 느낀 것들을 사람들과 함께 알고 싶어서 공유한 거였어요. 저는 나만 알고 싶다는 마인드가 거의 없는 사람이거든요. 좋은 곳을 발견하면 “여기 진짜 좋아!” 하고 소리치고 싶어요. 처음엔 오로지 그 마음으로 공유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누군가 제 기록 덕분에 도움받고 행복해지는 게 좋더라고요. 

한 번은 좋았던 카페를 인스타그램에 기록한 적이 있는데요. 제 게시글로 인해 그 카페에 손님이 더 많아지고 장사가 잘된다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제 목소리가 어느 한 명에게라도 영향을 미치고 전해졌다고 생각하니까 기뻤어요. 그러면서 좀더 신중하게 공유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공유하는 게 부담스러워져서 ‘안 해야겠다.’가 아니라 ‘공유를 진짜 잘해 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한거죠. 그때부터 더 열심히, 많이 하게 되었어요. 글로 쓰든, 사진을 찍든, 영상으로 만들든, 진짜 좋은 곳들을 알리고 사람들이 주목해야 하는 이야기도 끄집어내서 보이고 싶어졌어요. 제 기록 욕구는 마케터 자아랑도 연결되는 거 같아요. 더 좋은 것들을 기록하면서 계속해서 공유하고 싶어지니까요.

 

공유한다는 건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이럴 땐 실수가 참 무섭죠.

그럼요. 겁나죠. 근데 꼭 실수가 아니더라도 상황이 잘못 흘러가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콘텐츠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제 기록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읽힐 수가 있거든요. 제 의도는 그게 아니지만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꼈다면 빠르게 반응하려는 편이에요. 잘못된 점이 있다면 사과하고 게시물도 삭제하고요. 기록에는 기록자의 태도, 생각, 가치관이 담길 수밖에 없어요. 근데 거기서 누군가 불편함을 느꼈다면 제 태도 역시 어딘가 부족했다는 걸 거예요. 그런 점을 살피고, 깨닫고, 인정하고, 고치고, 반성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도 무척 중요하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팔로우하는 어느 계정이 매일 저격글만 업로드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 정말 싫다, 이 장소 진짜 별로다…. 그걸 지켜보는 게 좀 불편해져서 블로그에 ‘저격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저격글’을 썼거든요. 근데 어떤 분이 댓글로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이 바로 그 저격글이라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때 수치심을 느끼며 인정한 뒤 그 글은 삭제했어요. 나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건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해요. 그걸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저에겐 기록이고요.

 

숭의 기록엔 좋은 점이 참 많아요. 일하면서 활짝 웃는 사진을 업로드하면 덩달아 웃으며 일하게 되거든요(웃음). 

고마워요(웃음). 온라인에서 더 똑바로 행동해야겠다고 느낀 건 실수했을 때도 물론 그렇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제 말에 영향을 받고 긍정적으로 변할 때예요. 사실 저는 제가 SNS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잘 안 해요. 그래서 한동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는데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제 말 한마디 덕분에 더 나아졌다면서 연락해오는 일이 생겼어요. 한번은 어떤 분이 제 이야기 덕분에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시는데, 제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나 싶더라고요. 기쁘면서도 덜컥 부담이 생기는 일이라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기록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진짜 좋은 건, 제게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해준 연락으로 저까지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거예요.

크고 작게 하는 일이 정말 많잖아요.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걸 다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살면서 추진력이 있단 말을 많이 들었는데 왜일까 생각해 봤는데… 전 추진력이라는 게 성격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성격으로 주어지는 거라면, 태어날 때부터 추진력이 없는 사람은 살면서 쭉 추진력 없이 사는 건데 그렇지는 않잖아요. 제가 언제부터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봤는데요. 기록해 놓은 걸 가만 보니 저는 뭐를 하든 ‘하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How?’를 생각하더라고요. 동료가 무언가 하자고 했을 때 “어떻게?”를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 거예요. 그런 태도 덕분에 추진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아요.

 

기록이 나를 더 잘 알게 해준 거네요. 이럴 땐 성실한 기록이 뿌듯할 것 같아요.

제가 성실하게 기록한다는 걸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한때 심리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께 저는 너무 게으른 것 같다며 한탄한 적이 있거든요. 집 정리도 안하고, 매일 지각하고, 침대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꾸준히 하는 건 없는지 물으시더라고요. 그래도 기록만큼은 꾸준히 한다고 하니 그럼 그 영역에선 성실한 사람인데 왜 게으른 사람으로 자기를 정의하냐는 거예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선생님 말씀에 울림을 받았어요. 제 일부를 저라고 확대하지 않게 되었죠. 저는 항상 저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저에겐 기록이란 성실함이 있었던 거예요.

 

그럼요, 온오프라인을 오가며 이렇게나 많은 기록을 해오고 있는걸요. 숭은 이 많은 기록 중 하나의 플랫폼만 남길 수 있다면 뭘 남기고 싶어요?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이야기한다면 노트요. 온라인은 쉽고 빠르게 공유할 수 있어서 좋지만, 사실 남긴 기록을 오감으로 느끼긴 어려워요. 그래서 애착이 가는 건 늘 노트에 직접 적은 기록들이에요.

 

기록의 핵심은 공유가 아니라 ‘나’인 거네요?

공유는 중요해요. 하지만 그 전에 제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록하는 게 즐겁지 않은데 그 기록을 공유하는 게 과연 의미 있을까요? 제 기록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지만 그런 영향도 저를 향한 글쓰기일 때 유의미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오프라인으로 기록한 걸 공유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어릴 때는 교환일기 같은 게 유행했는데 지금은 그럴 일도 없고요(웃음). 그래도 여전히 손으로 하는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배달의민족에 다니던 시절엔 팀원들이 다들 기록을 열심히 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요. 《어라운드》 ‘문구’ 편에 나온 규림이(이하 ‘뀰’)도 여행 드로잉을 모아서 《뉴욕규림일기》랑 《도쿄규림일기》 책을 펴냈고, 저는 그게 대단한 그림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아, 굉장한 기록이 또 하나 있는데요. (작은 노트를 꺼낸다.) 이분은 출산 휴가를 쓴 팀원이었는데, 아기 가졌을 때 쓴 노트를 일일이 제본해서 저희 팀에 보내주셨거든요. 출산 휴가를 쓰고 본인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리는 용도이기도 하고, 먼저 엄마가 된 사람의 소회를 담은 노트이기도 했죠.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쓰고 만든 노트를 선물한다는 건 대단한 일 같아요. 이 노트를 보면서 전 아직 아이가 없지만 어떤 마음으로 엄마가 되어야 하나를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제가 모르는 카테고리를 가상 경험하는 것도 좋았고, 제가 모르는 분야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경험도 새로웠어요. 저만 경험한 일을 기록해서 나누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고요.

 

기록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기록이 한층 더 생활화될 것 같아요.

맞아요.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록왕이에요. 한번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어디에 있든 뭘 하든 계속 적더라고요. 쓰고, 찢고, 오리고, 붙이고…. 셋이 다녀도 저만 매번 손이 놀고 있는 거예요. 옆에서 뭘 부지런히 적는데 저 혼자 멀뚱히 있기가 싫어서 더 열심히 기록하게 되더라고요. 저에겐 기록에 영감을 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보고만 있어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자그맣게 자주

놀라는 일상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록들이 ‘나’를 중심에 두고 있다면 인스타그램의 영감노트(@ins.note) 계정은 다른 사람 작업물을 스크랩한 계정으로 보여요.

처음 그 계정을 시작한 건 노트에 쓸 수 없는 영상이나 사진에서 받은 영감을 스크랩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요. 계정 소개글에 “별게 다 영감이네”라고 적어두었는데, 정말 그런 계정이거든요. 별거 아닌 것들을 예쁘게 찍겠다는 마음 없이 마구잡이로 찍어서는 하루에 열 개씩도 올리고 그래요. 근데 어느 순간 영감노트 팔로워가 확 늘더라고요. 제 본 계정은 사진도 예쁘게 찍어 올리고 가꾼다고 가꿔두었는데 아무거나 막 올리는 영감노트가 더 잘되는 걸 보니까 기분이 묘했어요. 

그러다 《기록의 쓸모》를 쓸 때 영감노트 1년 치 인사이트를 모아 보게 됐는데요. 제가 올린 게시물 대부분이 성실함에 대한 거더라고요. 제가 어떤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어요. 반면, 팔로워의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건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된 콘텐츠였어요. 영감을 모아놓는 개인적인 용도였지만,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인사이트까지 확인하고 나니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이슈를 꾸준히 스크랩하는 것도 좋은 기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불완전한 영감을 의미 있는 영감으로 바꾸기 위해선 ‘지금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요즘 관심있는 건 뭐예요?

균형 감각이요. 옛날에는 워라밸이 왜 중요한지 잘 몰랐어요. 사람의 삶을 시간으로 나누어서 9시부터 6시까지는 일하고, 6시부터 9시까지는 취미 생활을 하고…. 이런 건 너무 기계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방식엔 동의하지 않아요. 다만,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이면 미래의 제가 힘들어질 테니 과거, 현재, 미래의 균형을 잘 맞추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누가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고도 저에게 일정량의 여유가 남도록 잘 조절해 나가고 싶어요.

 

처음에 시간을 잘 쓰고 싶다고 하신 거랑도 연결되네요. 최근엔 미래의 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했어요?

…미래의 저를 위해 특별히 한 게 없네요. 오늘부터 적극적으로 생각해 봐야겠어요. 저를 채찍질해 주셔서 고마워요(웃음). 쌓여 있는 이 많은 노트엔 작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실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를 세우던 시절과는 결이 좀 달라진 것도 같고요. 이제 저는 작은 게 모여야 큰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방귀가 잦아야 똥이 나온다.’고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저는 잡담도 경쟁력이라고 생각해요. 잡담을 많이 해야 큰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거든요. 작은 걸 기록하다 보면 그게 마케팅에도 적용되고 제 삶에도 좋은 양분이 돼요. 이런 기록이 없으면 책 작업은 엄두도 낼 수가 없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록이 혼자 하는 거라면 목요일마다 모여서 쓰는 ‘목요일의 글쓰기’는 함께 하는 거잖아요. 모여서 글을 쓰는 건 어때요? 혼자 쓰는 것과 다른가요?

그럼요. 같이 쓰면 동기부여가 되고 쓰고 싶다는 마음, 써야겠다는 마음을 더 잘 먹을 수 있어요. 목요일의 글쓰기는 세 명의 마케터가 목요일마다 뭐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모임이에요. 총대를 멘 건 뀰인데 “글을 쓰고 싶으면 ‘굳이’ 시간을 내서 해야 한다니까요, 여러분?!” 하면서 우리를 채찍질해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메신저 게시판에 목요일마다 장문의 글을 공유하는 건데요. 빼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꾸준히 하는 멤버들을 보면 써야겠다는 자각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글 쓰는 데 자극이 돼요. 뀰은 여태 한 번도 안 빠지고 목요일마다 글을 올리고 있어요. 정말 성실한 친구죠. 엊그제도 뀰이 올린 거 보고 ‘벌써 목요일이네?’ 했던 기억이…(웃음).

 

목요일의 글쓰기는 합평과는 좀 다르네요?

저희는 절대 글을 평가하지 않아요. 이건 글을 잘 쓰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글 쓸 힘을 모으고 함께 행동해 보자는 거예요. 우리는 글을 잘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목요일의 글쓰기 목표는 나답게 쓰자는 거죠.

 

작품으로의 글쓰기와 기록으로의 글쓰기가 다른 거랑 비슷한 맥락이네요. 숭은 기록을 잘한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요?

결국 기록은 행동인 것 같아요. 기록을 잘한다는 건 꾸준히 하는 거랑도 연관이 있고요. 그래서 작품으로서의 글쓰기를 하더라도 기록으로서의 글쓰기까지 동시에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작가여도 어떤 분은 책을 한 권 내고 긴 시간 동안 쉬는데, 어떤 작가들은 다작을 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성실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하루키야 말로 작품으로의 글쓰기와 기록으로의 글쓰기를 모두가져가는 사람 아닐까요? 기록이라는 건 그 시대, 그 시기,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걸 남기는 거라고 봐요. 그건 꼭 글이 아니라 사진, 그림일 수도 있고 낙서나 메모일 수도 있죠. 그게 문학이 된다면 작품으로서의 글쓰기가 되는 거고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했죠. 이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1퍼센트의 영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는데요.

맞아요. 저에게 그 1퍼센트는 실행력이라고 했죠.

 

앞서 말한 추진력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았어요?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을 벌이는 주체가 하나같이 저더라고요. 주변 사람들도 뭔가 하고 싶을 땐 항상 저를 찾아와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저에게 실행력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저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 때 계획을 세우고 끌고 가는 걸 잘해요. 앞서 말한 추진력이랑 비슷한 맥락이죠.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이디어를 혼자서는 끌고 나가지 못한다는 거(웃음). 누군가 하자고 이야기를 꺼내줘야 움직이는 편이거든요. 스스로 선택해서 실행한 건 퇴사 말곤 없는 것 같아요.

 

실행력이 좋아도 끝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맺음은 어때요?

이건 일할 때 배운 게 습관이 된 것 같은데, 어떤 프로젝트건 끝이 나면 리뷰를 하거든요. 회고 과정이 프로젝트 끝에 반드시 포함되다 보니 잘하건 못하건 맡은 일은 끝을 내야 해요. 성과가 없다 해도 그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걸 할 때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힘을 길러내는 거니까요.

 

그럼 포기도 잘 안 하나요?

저 포기 잘해요(웃음). 근데 포기하는 건 전부 혼자 하는 일이에요. 여행 다녀와서 뭔가를 써보겠다고 인스타그램에 이야기하고 여전히 안 쓰고 있고(웃음). 그래서 진짜 해내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기면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해요. 같이 하면 책임감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거군요. 뀰과는 ‘두낫띵클럽’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백수 듀오’라면서 계속 뭘 하는 게 재미있었어요(웃음).

저희 둘은 친하지만 성격이 정말 달라요. 저는 야망이 엄청난데 뀰은 야망이 없어요. 그래서 뀰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 많죠. 그럴 때마다 저는 뀰의 멱살을 잡고 이끄는 역할을 하고요(웃음). 둘 다 백수일 때도 비는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어요. 저는 매일매일 불안해하는 반면, 뀰은 백수 생활을 즐기더라고요. 백수 시절엔 뀰이 매일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숭,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가만히 있어.” 조급해하는 저를 보며 뀰이 우스갯소리로 “두낫띵클럽이라도 만들어?” 했는데 제 추진력과 실행력으로 정말 만들어버렸어요(웃음). 이젠 둘 다 회사에 들어가서 명목상 해체지만 아직 그 이름을 남겨두는 이유는 ‘조급해하지 말라’는 선언이 지금도 저에겐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요.

 

두낫띵클럽이 휴지기라면, ‘포스트웍스POST/WORKS’는 이제 막 결성된 새로운 커뮤니티죠. 어떤 일을 하려는 거예요?

마케팅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어느 정도 혼자만의 업무가 있는 다른 영역과는 달리 무조건 같이 해야만 하는 분야죠.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마케터와, 마케팅이 필요한 직군의 사람이 협동조합원처럼 모여서 서로 돕고자 만든 커뮤니티예요. 더 나은 다음을 의미하는 포스트Post를 붙여 포스트웍스라는 이름을 지었죠. 저와 밑미의 하빈, 독립한 마케터 혜윤 세 명이 주축으로 각자 함께 일해본 동료들을 모아 커뮤니티를 만들었어요. 신뢰하는 세 명이 각자 책임감 있게 사람을 불러 아홉 명을 모은 거죠. 건너 건너 모인 사이여서 서로 잘 알진 못해요. 요즘은 멤버들 시선으로 좋았던 물건, 책, 사람 등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포스트웍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중인데요.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있어요.

숭이 포스트웍스로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뭐예요?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프리워커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요.

 

프리워커요? 왜요?

저는 마케터 동료들한테 ‘너니까 퇴사해도 일이 들어오는 거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많고, 마케터로 많이 알려져서 일을 받는 거지 본인들은 힘들다는 의미였죠. 근데 또, 제가 아는 스몰 브랜드 대표님들은 그 많은 마케터들 다 어디 간 거냐고,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싶어도 안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양쪽에서 니즈가 있는데도 서로 발견하지 못해요. 이런 경우도 있어요. 많은 브랜드가 마케터를 정식 채용하기보다는 프로젝트 단위로 마케팅할 사람을 찾기도 하거든요. 또, 회사에 소속된 마케터들은 여유 시간에 단기로 일할 만한 외주 업무를 알아보기도 하고요. 근데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해 만나지 못하는 거죠. 꼭 회사에 소속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다는 걸 포스트웍스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회사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단기로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보여주고 싶고요.

 

소속감에 대한 통찰일 수도 있겠어요.

소속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재택근무 때문이었어요. ‘왜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생각이 확장돼서 물리적으로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졌거든요. 더 나아가 프리워커로 활발히 활동하고, 이렇게도 일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주고자 했어요. 그래야 다른 동료들도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재택근무를 조건으로 직원을 채용했더니 고급 인력이 모여들었다는 거예요. 외국에 거주 중인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지원하는가 하면, 육아 때문에 출퇴근이 불가능한 고학력자 워킹맘들이 지원해 온 거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제약 없이 프리워커로 활동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더 근사한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분명히 또 새로운 걸 만들어낼 거라는 기대가 생기네요. 대화를 마무리하기 전에 일상을 기록하는 팁을 묻고 싶어요.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돼요. 첫째, 작은 것에 놀라 보세요. TBWA KOREA 박웅현 CCO도 “놀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걸 얻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기록을 잘하고 싶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더라도 호들갑 떨면서 놀라보는 게 중요해요. 작은 것에 놀라는 습관을 들인다면 세상에 기록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아질 거예요. 두 번째 팁은 마음에 드는 노트를 장만하는 거예요. 매일 크고 작게 만나는 놀라움들을 좋아하는 노트에 적어 보세요. 이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고 귀찮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쓰기 시작하면 일상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고 삶이 한층 더 재미있어질걸요?

 

오늘은 어떤 거에 놀랐어요?

짐들을 정리해서 현관 밖으로 뺐더니 여섯 박스의 짐이 나온 거(웃음)?

 

‘○○○의 이승희’가 아니라 ‘이승희의 ○○○’으로 소개하고 싶다고 했죠. 앞으로는 이승희의 ○○○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어요?

워낙 ‘배달의민족 마케터 이승희’라는 타이틀이 강해서 그걸 역전시켜 보고자 했던 말인데요. 이제는 그런 걸 다 떠나서 제가 하는 모든 기록이 ‘이승희의 장르’로 정의되면 좋겠어요. 제가 하는 행동이나 감각이 하나의 장르가 되고 싶다는 야망이 있거든요(웃음).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저만의 글, 생각, 행동, 마케팅 권법… 같은 걸 잘 가꿔서 저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어 보려고요.

영감노트에 내 계정이 태그 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인터뷰하던 날 던졌던 질문 하나가 업로드된 걸 보고 에디터로서의 태도에 대해 좀더 생각하게 됐다. “진짜 좋은 건, 제게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해준 연락으로 저까지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거예요.” 숭이 한 말이 고스란히 내 기분이 되어 원고를 정리하는 내내 기분이 둥둥 떴다. 좋은 인터뷰이와 새긴 기록이 나를 한층 더 좋은 인터뷰어로 나아가고 싶게 한다.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기록의 쓸모겠지.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