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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간 빠리지엔 박소영 대표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낸다. 불어에 빠져 프랑스로 떠나고 인도 원단에 반해 무작정 인도행 비행기 표를 끊은 ‘인도로 간 빠리지엔’ 박소영 대표처럼 말이다. 그녀가 만난 먼 나라의 사람들은 수많은 변수 앞에서도 태연히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 말은 돌고 돌아 꿈에 그리던 길 위에 오른 그녀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이름에서부터 인도와 프랑스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져요. 브랜드를 직접 소개해 주실래요?
인도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탄생하는 인도 원단과 그 원단으로 제작한 다양한 상품을 소개하고 있어요. 판매하는 상품 중에는 원단 비중이 가장 높아요. 인도 원단을 골라 들여오기도 하고, 직접 원단을 개발하거나 상품을 제작하기도 해요. 파리에서 10년 정도 생활하기도 했고, 섬유 디자인을 공부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인도의 감성을 함께 나타내고 싶었어요. 좀 길고 투박하지만 저를 제일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이름이에요.
파리와 인도 중 파리 이야기를 먼저 들어볼게요. 어떻게 유학 길에 올랐나요?
엄마가 불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어요. 어릴 때부터 불어를 듣고 살아서 그런지 제가 프랑스를 정말 좋아했어요. 언젠가는 거기서 꼭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죠. 그림도 좋아해서 조그만 꽃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렇게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려서 패턴을 만드는 게 섬유 디자인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전공하던 의상 디자인에 별로 흥미를 못 느껴서 죽어라 불어만 배우러 다니다가, 프랑스에서 섬유디자인을 공부해 보면 좋겠다며 떠날 구실을 만들었어요. 졸업 전에 유학 길에 올랐고, 마음껏 꽃을 그리면서 패턴을 공부했죠.
그렇게 바라던 빠리지엔의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다행히 친구들을 잘 만났어요. 학교에서 기숙사 배정을 음대 쪽으로 잘못해줬는데 그냥 지내겠다고 한 게 잘한 선택이었죠. 아침 아홉 시부터 비올라,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음악에 관해 물으면서 친구들과 친해졌고, 백건우나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콘서트를 함께 보러 다녔어요. 학생 할인 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티켓값은 만 원이면 충분했거든요. 건축과에 다니는 친구와도 친해져서 주말에 종종 유명한 건물을 보러 다녔어요. 그림 그리다가 심심하면 버스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에펠탑과 퐁네프를 구경하기도 했고요.
낭만적이네요. 파리 생활에 빠져 있다가 인도 패브릭에는 어떻게 흥미를 갖게 됐나요?
학교 근처에 인도 가게가 제법 많았어요. 지나다니다가 한번 들어가 봤는데 이국적이고 화려한 분위기에 완전히 반해버린 거죠. 그때 살던 집에 월세를 내면 일정 금액을 공제해서 매달 환급금을 받는 제도가 있었어요. 환급금이 한참 안 들어오다가 어느 날 500만 원 정도가 한꺼번에 들어온 거예요. 그 당시 한국이 IMF 시기여서 엄마, 아빠한테 “나 돈 생겼으니까 당분간 방세 안 보내주셔도 돼요.”라고 할 법도 한데, 인도 가게에 가서 실크로 된 이불이랑 사리(인도 여성의 전통 의상)를 사는 데 다 써버렸어요(웃음). 돈만 생기면 거기에 간 거예요. 그 이후로 트렌치코트, 티셔츠, 모든 옷에 사리를 두르고 다녔어요. 파리에서는 뭘 어떻게 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더 마음대로 하고 다녔죠. 전공을 살려 인도로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꿈을 접었어요.
인도를 향한 꿈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네요.
맞아요. 지금 이 일을 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예술의전당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통역 일도 했어요. 의류 회사도 다녔는데, 무늬를 개발하고 구상하는 단계는 없고 이미 정해진 모양을 그리기만 해야 한다는 게 재미없었어요.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고 키우는 게 너무 행복해서 일할 생각도 없었는데,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남편이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편이 아니라 시아버님이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해 주셨거든요. 거기에만 기대서 살다 보니 점점 자존감이 무너지더라고요. 주눅 들어 있는 남편 보는 것도 힘들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부모에게서 아이들이 배울 점이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런 마음을 늘 가지고 있다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어요. 뭘 살지, 어디에서 어떻게 팔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오로지 예쁜 옷 가게만 찾아다니면서 첫 인도를 경험했죠.
처음에는 기성품을 바잉하다가 자체 제작으로 영역을 넓혀간 걸로 알아요. 어떤 확신이나 계기가 있었나요?
마네킹에 매번 같은 옷을 입혀 소개하고 판매하면서 이 일을 일처럼 하는 게 힘들었어요. 인도 물건을 들여오는 분들도 점점 많아지니 결국 가격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셀러로만 남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만든 이름이 ‘인도로 간 빠리지엔’이에요. 파리에서 빈티지 상품과 원단을 사 오고 인도에서 제 취향의 옷과 물건을 사서 마켓을 열다가 ‘원단을 직접 제작해볼까?’ 고민하던 차에 지금의 인도 파트너인 자이팔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나 인도에서 원단 파는 사람인데, 샘플 한번 보내줄까?” 하기에 반신반의하며 받아 봤는데, 원단이 참 예뻤어요.
어떤 점이 끌리던가요?
진하다가 흐렸다가 살짝 어긋나게 채색된 패턴들이 매력적이었어요.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인간적인 느낌이 좋았고요. 저는 지나치게 세련된 고려자기보다 투박한 분청사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원단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자이푸르라는 지역에서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요.
네. 자이푸르는 인도식 원단 제조에 최적화된 곳이에요. 넓은 황야가 펼쳐져 있고, 원단을 잘 말려줄 바람과 습도, 춥다가도 더운 날씨 등 전체적인 기후가 갖춰져 있어요. 원단 작업은 패턴이 될 그림을 그린 후, 그 그림을 곱게 다듬은 나무조각에 새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요. 거의 하루 종일 걸려 블록이 완성되면 1미터 12센티미터 폭의 원단에 여러 가지색을 섞어 만든 염료를 묻힌 블록을 찍어 나가요. 원단의 컬러 수만큼 블록 수도 늘어나죠. 그린과 레드의 페이즐리 패턴을 찍는다고 하면, 한 사람이 그린 염료를 묻힌 블록을 찍어나가고 다음 사람이 정확한 위치에 레드 블록을 찍는 거예요. 한 사람이 같은 텐션으로 찍어야 양질의 원단이 나오기 때문에 장인이 작업할 수 있는 양은 하루 10미터 정도예요. 몇 천 미터짜리 원단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는 스크린 블록이라고 하는 큰 스탬프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들고 찍는 방식으로 진행해요.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 작업에 몰두하는 장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인건비가 저렴해서 수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택한 사람들인 거예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한 작업이군요.
그 과정을 너무 잘 아니까 원단을 한국에 들여올 때마다 감격스럽고, 생각도 많아져요. 그들의 수고와 정성을 헐값에 팔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저희 원단을 사주시는 분들도 이 과정만큼은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문자 그대로의 ‘슬로 패션’이네요.
맞아요. 인도 사람들이 화가 없어요. 느리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죠. 일하다가 갑자기 전기가 끊기면 자가발전기가 없는 이상 그날 작업은 종료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원단을 못 말려요. 한 번 만들었던 색의 제조 과정을 기록해 두는 시스템이 없어서 한 공장에서도 같은 색을 만드는 데 애를 먹고요.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않아서 물건을 제때 못 보내고, 이전에 주문했던 패턴을 재주문하려는데 우드블록이 부러져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변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하루치 다섯 개의 스케줄을 짜 가면 한 개라도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예요. 저는 너무 마음이 급한데, 기일 안에 작업을 못 마쳐도 “괜찮아. 내일 하면 돼.” 이런 식이죠. 처음에는 너무 답답해서 드러누울 지경이었어요. 영어로 욕을 섞어가면서 항의도 해봤는데, 작업자들이 저보고 ‘bad word’ 썼다고, 아주 나쁘다고 거의 울듯이 이야기하더라고요(웃음). 그들은 기껏해야 ‘upset’ 정도의 표현을 쓰지, ‘angry’라는 단어만 써도 놀라거든요. 문화를 잘 몰랐을 때는 계속 일이 지연되고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절대 재촉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느긋함이 위로가 돼요.
결과물을 받아볼 때 많이 감격스러울 것 같아요.
정말 그래요. 얼마 전에 오픈한 더현대 서울에 인도로 간 빠리지엔이 입점을 했는데요. 제 일에 전혀 관심이 없던 동생이 “언니, 여기 언니 게 있더라? 진짜 대단하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 보내왔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많이 축하해 주시고요. 저도 현장에 다녀왔지만 그저 운이 좋아서 들어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크게 뭉클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기분 좋은 순간은 최근에 1천 미터짜리 원단의 색이 동일하게 나온 걸 확인했을 때예요. 큰 업체에서 많은 물량을 주문해서가 아니라, 손으로 저어 만드는 물감으로 천 미터짜리 원단에 똑같은 색을 냈다는 게 기적 같은 일이거든요.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요. 까다로운 견뢰도 검사까지 통과하고 나니 ‘이제 됐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기다리는 고객들을 이해시키는 일도 어려울 것 같네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재촉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개인이 아니라 업체의 경우에는 더 그렇죠. 예를 들어 제작 기간이 대략 15일 걸린다고 하면 딱 15일 되는 날 전화가 와요.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변수를 고려해 기간을 정한다고 해도 늦어지는 일이 생기거든요. “약속 지키셔야죠. 장사하시면서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그럼 인도의 상황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한국에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인도의 감성을 좋아하시는 만큼 그 문화로 인한 기다림을 견뎌 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감사해요.
이번 주제가 ‘좋은 옷을 오래 입는 일’이에요. 패브릭을 만들고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한 계절 입고 잊히는 수많은 옷들에 관한 생각도 드셨을 것 같아요.
패트리샤 폴라코의 《할머니의 조각보》라는 책이 있어요. 고향을 떠난 안나의 엄마가 원피스와 스카프의 자투리 천으로 조각보를 만드는데, 그 조각보가 가족의 식탁보로, 안나 결혼식의 장막 지붕으로, 그 후 대대로 쓰인다는 내용이에요. 인도에도 비슷한 ‘칸타’라는 문화가 있어요. 몇 십 년 전에 쓰던 천에 자투리 천을 손바느질로 덧대고 덧대서 새로운 걸 만드는 거죠. 인도 가정집에서 칸타로 만든 행주나 발 매트를 볼 수 있어요. 옷이든 소품이든 한 번 입고 마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소중히 여기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요.
먼 나라 인도와 한국을 원단이라는 매개체로 잇고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나요?
인도에 가면 길가에 구걸하는 아이들이 정말 많아요. 눈빛이 너무 선한데 수치심이 없어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제가 그날 하루 1달러를 준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이 일이 좀 더 잘 돼서 인도 작업자들에게도 일을 많이 주고, 나중에는 작은 학교라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꼭 제 이름으로 짓지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저희 아이들도 거기 가서 미술 수업 같은 걸 해주면 좋고요. 인도로 간 빠리지엔을 운영하는 건 저 혼자지만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받은 만큼 값진 일로 보답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딸 다미와 아들 지성이는 어떤 아이들인가요?
다미는 열아홉, 지성이는 열둘, 터울이 큰 남매예요. 다미는 저를 닮은 것 같아요. 주위 시선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쿨해요. 공부만 안 할 뿐이지 은근 모범생이고요. 지금 검정고시학원에 다니는데, 학원 수강생들이 수업 시간에 다 잔다길래 너도 자냐고 물어봤더니 “그럴 거면 돈 내고 안 다니지.” 하더라고요. 제가 육아서를 보고 육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냥 제 마음대로 아이를 키웠어요. 미국에서 잠깐 살았을 때,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다미를 유치원에 보냈어요. 근데 안 간다고 울지도 않고 별말 없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도 걱정 없이 볼일 보고 돌아다니다가 다미 찾아오고 그랬어요. 한국에서도 쇼핑몰 키즈 놀이터에 데려다 놓고 “놀아~.” 하고 나오면 두 시간 동안 혼자 잘 놀고 있었어요(웃음). 옷도 입혀주는 대로 입고, 꽃 달아놓으면 종일 달고 있었죠. 다미 혼자일 때는 그게 그렇게 편한지도 모르고 키웠는데 지성이를 낳고 보니까 너무 다른 거죠. 미술관에 같이 갔는데 캄캄해서 안들어간다고 울고불고 난리, 운동화 색깔까지 골라 신고, 캐릭터 옷으로 무장하고…. 다미가 정말 무난하게 큰 아이라는 걸 지성이 키우면서 알았어요.
둘이 정말 다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지성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같이 살을 부비는 걸 좋아하는데 다미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너무 힘들대요. 진짜 웃기고 특이한 애예요. 지금도 멋은 안 내는데, 음식 배달시키고 나서 꼭 샤워를 하거나 머리라도 감고 나와요. 배달 기사님이나 퀵 기사님에게 굉장한 매너를 지켜요. 요즘 비대면이라서 마주칠 일 없다고 해도 “그래도 스칠 수가 있으니까.” 그래요. 하는 짓 보면 어이가 없고 웃겨요(웃음).
비대면 시대의 매너녀네요(웃음). 다미가 엄마 영향을 받은 건지 미대를 준비하고 있다고요?
네. 그림을 좋아해요. 소질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요즘 미대는 대부분 실기를 안 봐서 공부를 잘해야 해요. 그림만 잘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내는 게 더 중요한가 봐요. 검정고시로 가려면 문제를 다 맞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다미에게 그냥 내년을 생각하고 준비하라고 했어요. 대학을 꼭 그 나이에 가야 하는 건 아니고, 좀 늦어도 괜찮다고요. 대학에 간다는 건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가도 된다고 하니까, 요즘엔 좀 덜 불안해하는 것 같아요.
한창 사업을 시작하던 시기에 다미의 사춘기가 겹쳤던 것 같아요. 자퇴도 그때 결정한 일인가요?
맞아요. 다미 사춘기가 고1 때 왔어요. 중학교 시기를 넘어가고 커서 사춘기가 오니까 훨씬 힘들더라고요. 그 시기에 다미는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무슨 말만 하면 “다 싫어, 나 죽을 거야. 자퇴 안 시켜주면 죽을 거야.”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정말 밝고 즐거운 애였거든요.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어요. 원래 다미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그 세계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있지는 않더라고요. 사람 예쁘게 그려놓고 아래 보면 다리가 흐물흐물하고, 읽는 책에도 전부 ‘죽은’ 같은 단어가 붙어 있어요. 멘탈이 정말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계일 것 같아서, 방향을 틀었어요. 그래서 일반 고등학교로 갔는데 입학한 순간부터 다니기 싫다고 울더라고요. 매일 우는 애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괴로웠어요. 혹시 나쁜 마음먹을까 전전긍긍하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저도 너무 힘드니까 그냥 관두라고 했더니, 좀더 다녀본다고 하더라고요. 결국엔 안 되겠다 싶었는지 2학년 때 자퇴서를 내고 나왔어요. 작년에 코로나19 때문에 학교도 안 가는데 굳이 자퇴를 하겠다고 해서(웃음) 결국 타이틀을 땄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만, 많이 힘드셨겠어요.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제가 늘 즐거운 성격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가 맨날 우는데 “어우, 울지 마아~왜 자꾸 우니~?” 이렇게밖에 안 되는 거예요. 다미가 엄마는 감정이입 하나도 안 해준다고 뭐라고 하고요(웃음). 지금도 다미가 힘들다고 하면 “다 힘들어, 다 힘들어.” 하고 말아요. 사춘기 때 생각하면 지금 많이 친해졌죠.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재미있어요(웃음).
생각해 보면 저희 엄마가 저를 키우듯이 아이들을 키운 것 같아요. 엄마 서른아홉, 아빠 마흔일곱에 저를 낳으셨는데, 그때는 그런 집이 없었어요. 젊은 엄마들끼리 모이면 그 아이들도 자기네들끼리 집단을 만들잖아요. 친구들이 방학 때 <E.T.>보고 왔다고, <별밤> 너무 재미있다고 하면 저는 속으로 ‘그게 뭐지?’ 그랬어요. 엄마는 저랑 동생 미술관 데리고 다니기 바쁘셨거든요. 제 방에도 평범한 색이 아니라 새까만 색의 페이즐리 무늬 커튼을 달아놓고 “얘, 이거 너무 예쁘지 않니?” 하셨어요. 고등학생 딸 방에 그런 걸 해주는 엄마가 어디 있어요(웃음). 그런데 제가 지금 다미 방 벽면에 마젠타색 과슈를 진하게 칠해놓고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어보고 있네요.
지성이는 어때요? 취향이 섬세한 친구 같은데.
지성이는 뽀로로 매트를 못 가져본 설움 같은 게 있어요. 다미가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지성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집에 장난감도 별로 없고 이미 어른의 집이 되어 있었거든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매트도 깔려 있고, 동생이 있는 집엔 장난감도 많으니까 부러워해요. 공룡에 대한 애정이 지금 시작된 것 같아요. 온 방을 공룡으로 채워놓고 공룡 흉내를 내고 다녀요. 작년 1년 동안 집에만 있으면서 다시 유아기로 돌아간 느낌이에요. 재미있는 건, 마트에서 공룡 장난감을 사는 게 본인도 창피한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엄마, 이거 친구 사줄 거지?” 하고 크게 말해요. 옷에 막 숨기고(웃음). 공룡 좋아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다고 말해줘도 계속 그러네요.
지금은 귀엽기만 한 지성이와 다시 한번 사춘기 전쟁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는 않으세요?
이제 저는 어떤 사춘기가 와도 내버려 둘 거예요. 그때는 뇌하수체가 콸콸 분비돼서 이성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아요. 옆에서 아무리 대화를 이어가려고 해도 안 듣는다는 걸 이제 알거든요.
무사히 그 시기가 지나기를 바랄게요. 아이들과 무척 솔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아요. 10대 때는 특히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쉽지 않잖아요.
다미는 정말 시시콜콜 별별 이야기를 다 해요. 남자친구 사귀고 싶다, 자기가 모쏠인데 어떻게 생각하냐…. 가끔 듣다가“얘, 이래서 내가 학교를 관두지 말랬지. 친구랑 해야 될 얘기잖니?” 농담할 정도예요(웃음).
편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음… 그렇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낸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엄마가 되고나서 애랑 잘 놀아주면 그날 하루가 너무 뿌듯했어요. 그냥 잘 놀기만 하면 되는 게 적성에 잘 맞았어요. 엄마로서는 그게 최고의 일이니까요. 친구들은 자기 시간이 없어서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어요. 맨날 데리고 나가서 이것도 보여주고 저것도 보여주고 그랬어요. 다미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학교 안 가고 엄마랑 어디 가고 싶다고 그랬던 게 기억나네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꼭 마음에 두고 살았으면 하는 것도 있나요?
저는 마흔여섯에 새 일을 시작했어요. 한동안 아이들 키우다가 돈을 벌고 일을 할 수 있는 게 인생인데, 이른 나이에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친구들 직장 다니는 동안 집에서 아이들만 키웠지만, 감사한 건 제가 조직에 오래 있어본 적이 없어서 시스템대로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해나갔다는 거예요. 아이들 어릴 땐 좋은 대학, 대기업처럼 한마디로 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인생이 제일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떤 카테고리로 규정할 수 없는 일이 많잖아요. 제 일 역시 누군가 아이들에게 “엄마 무슨 일하시니?” 물어본다면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죠. 인생이 너무 길고 사람 일은 알 수 없잖아요. 아이들에게 매일 네가 좋아하는 거 열심히 하면 된다고, 그리고 그게 진짜 맞는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석류 앞치마
상큼한 오렌지 색 석류 패턴의 앞치마는 아사60수의 얇은 면으로 가볍고 실용적이다. 허리부터 무릎으로 떨어지는 기장으로 스커트처럼 덧입기도 좋은 아이템.
60,000원
빈티지 칸타 (레드)
오래된 천을 덧대어 손바느질로 완성하는 인도전통적인 패브릭, 칸타. 세월의 얼룩과 빛바램에서 빈티지한 멋이 느껴진다. 침대 스프레드, 러그, 소파 커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200,000원
파란꽃 쿠션
인도 목화솜을 가득 채워 넣은 쿠션. 파란 줄기와 하늘색 꽃잎, 그리고 붉은 라인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높은 보온성과 견고하고 푹신한 쿠션감을 오래 느낄 수 있다.
35,000원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