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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마을
잘 가요,
내 소중한 사람
엘리, 알고 있나요?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당신이 얼마나 용감해 보였는지. 어린 시절 우리는 탐험가가 되길 꿈꿨죠. 나는 상상도 못 했어요. 나처럼 헬멧에 고글을 쓰고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을 줄은, 최고의 탐험가 찰스 먼츠를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그가 다녀온 파라다이스 폭포를 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말이에요. 돌멩이를 산등성이 삼아 뛰어넘던 내 귓가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크고, 맑고, 건강한 목소리로 “비행선으로 러시모어 산을 넘어야 해!” 그렇게 소리쳤죠. 왜 나는 아직도 이런 문장이 선연한 걸까요. 다 쓰러져 가는 나무집에 들어갔을 때, 당신은 마치 곧 날아오를 것처럼 나무집을 조종하고 있었어요. 이 쓰러져 가는 집이 비행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죠. 풍선 하나를 붙잡고 허락도 없이 당신의 공간을 기웃거리던 나는 당신 때문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요. 번개처럼 나타난 당신이 “너 뭐야!”라고 외쳤잖아요.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당신이 헬멧을 벗었을 때 삐죽삐죽 솟아올랐던 머리카락을 기억해요. 당신은, 당신을 보고 깜짝 놀라 놓쳐버린 내 풍선을 찾아주겠다며 대뜸 내 손을 잡고 나무집 2층으로 올라갔어요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던 풍선, 당신은 내 등을 떠밀었고 나는 그걸 잡으려다 뚝 떨어져 팔이 부러졌죠. 기억하나요? 그때 정말 아팠다고요. 당신은 다친 나를 찾아 우리 집으로 왔고 그 방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죠. 창문을 타고 넘어왔잖아요. 당당한 탐험가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했죠. 당신은 정말이지 왈가닥에 말괄량이였어요. 앞니가 빠진 당신 모습이 제 눈에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당신은 알까요? 당신은 반드시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겠다고 했고, 거기 집을 짓고 평생 모험 일지를 채우겠다고 했죠. 내게 ‘마이 어드벤처 북’이라는 노트도 보여줬잖아요. 그거, 여전히 제가 잘 가지고 있어요.
소극적이고 두려운 게 많은 나지만 언젠가 파라다이스 폭포로 당신을 꼭 데려가고 싶었어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왔네요. 저기, 엘리. 당신은 항상 나보다 많은 말을 했어요. 이제야 말하지만 난 그게 참 좋았어요. 나는 한마디를 할 때까지 숨을 많이도 고르는 편이거든요.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고, 내가 행동하기 전에 재빨리 모든 걸 해내곤 했어요. 결혼하던 날에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당신이 내게 그렇게 했거든요.
우리 가족은 늘 조용했어요. 다들 저처럼 느리고, 표정이 거의 없고, 말수가 적었죠. 하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 세상이, 내가 사는 집이 이토록 활기가 넘치고 씩씩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우리는 우체통에 나란히 우리 이름을 적었고, 당신과 나의 생활을 담아 집을 꾸며 나갔죠. 비행선을 만드는 대신 풍선을 잔뜩 몰고 다녔던 거 기억해요? 나는 풍선을 손에 쥘 때마다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에 갈 날을 꿈꿨어요. 당신도 그랬겠죠? 비록 삶이 바빠 모험을 시작하지 못했지만 우린 늘 꿈꿨어요. 아메리카, 저 먼 아메리카 남쪽 모습을.
당신, 우리에게 아기가 생긴 순간을 기억하나요? 아마 당신도 잊을 수 없겠죠. 세상이 온통 우릴 향해 박수를 보내주는 것 같았어요. 그날은 숨만 쉬어도 행복했어요. 오늘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제 주변 모든 게 별처럼 영롱했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통 튀어오르는 것만 같았어요. 엘리, 아기가 유산된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자책하던 당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나도 아기를 보고 싶었어요. 눈도, 코도, 입도 내 손으로 쓸어내리고 마음껏 만져보고 싶었죠. 당신과 내가 사랑한 만큼 아이도 배 속에서 우릴 사랑했을 거예요. 녀석은 아마 이 세계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곳을 탐험하고 있을 테니, 이젠 안심해요. 엘리, 아이가 떠난 뒤 당신이 머리도 빗지 못하고 망연자실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낼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나요? 그래도 당신이 내 손을 잡아 줘서, 다시 일상을 함께 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엘리, 고마워요. 눈 부신 햇살 아래 피크닉 매트를 깔고 누워 함께 하늘을 바라봐 줘서, 깜빡 잠이 들어도 웃으며 깨어나 줘서. 엘리, 당신은 항상 나보다 빠르고 씩씩했어요. 우리가 자주 가던 언덕을 기억하나요? 내가 땀을 흘리며 중간에 멈춰 서면, 숨을 몰아쉬며 헉헉대고 있으면, 당신은 먼저 꼭대기까지 올라 저에게 손짓하곤 했죠. “칼, 여기 볕이 이렇게나 좋아요. 칼, 어서 와요!”
엘리, 당신과 이렇게 오래도록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내게 행운이었어요. 웃고 싶을 때도 얼굴 근육을 실룩일 줄밖에 모르던 나는 당신을 만나 활짝 웃는 법을 배웠어요. 어깨를 펴고 걷는 법도 알게 되었고요. 나는 아직도 당신이 여기 없다는 게 거짓말 같아요. 당신은 언제까지나 나보다 씩씩하고 건강할 것만 같았거든요. 머리가 새하얘져도, 지팡이가 없인 안 되더라도. 당신이 힘겹게 언덕을 오르던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아려요. 누군가 그 언덕에서 쓰러져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나여야 했어요.
엘리, 기억하나요? 당신이 내게 건넨 ‘마이 어드벤처 북’ 말이에요. 우린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했는데 그 노트는 단 한 장도 함께 채우지를 못했네요. 나는 당신과 이곳도, 저곳도, 그리고 파라다이스 폭포까지도 꼭 함께 탐험하고 싶었는데…. 우리, 긴 시간을 행복했지만 세상살이가 마냥 기뻤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어떤 건 녹록지 않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죠. 하지만, 엘리. 나는 행복했어요. 내 삶을 설명해야 한다면 행복이란 단어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엘리, 나는 당신이 떠나고 혼자 이 집을 지켜요. 이곳엔 우리 추억이 생생히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엘리, 바깥에선 여길 철거할 준비가 한창이더군요. 엊그제는 당신과 내가 함께 만든 우체통을 건드리는 사람이 보여 지팡이를 휘둘렀다가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요. 내가 많이 예민했나 봐요. 동네 사람들은 나를 요양원에 넣으려고 했고 사람들은 나를 두고 수군거려요. 그들의 시커먼 속삭임이나 요양원 같은 건 무섭지 않아요. 내가 두려운 건 오직 당신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집을 떠나는 거예요.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게 나는 너무 무서워요.
엘리, 나는 오늘 수천 개의 풍선을 지붕에 매달았어요. 내일이면 이 집은 땅에서 떠오를 거고 나는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할 수 있겠죠. 엘리,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나요? 엘리, 내가 이 집과 무사히 함께할 수 있도록, 엘리, 나를 지켜주세요. 새들이 풍선들을 쪼지 않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힘이 다 하지 않도록, 엘리, 나를 지켜주세요. 엘리, 우리의 이야기를 안고, 머지않게 그 곳으로 갈게요. 엘리… 그때 나를 마중 나와 줄래요?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