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Layer House

층층이 깊어가는 자리
아티스트 홍인숙

수원화성 장안문 앞에는 파란 지붕을 가진 구옥이 있다. 봄이 오면 대문을 열어 마당을 개방하고 사람을 부르는 자리, 겨울이 오면 잠잠히 잠을 자는 자리. 오래된 집을 고치면서 덜어내고 비우고 나니 집도 생명체라는 걸 깨달았다는 그녀. 막힌 혈관을 뚫고 제대로 된 옷을 입혀 주니 집은 세 번째 주인과 새롭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세 개의 층에 역할을 주고 겹겹의 레이어를 쌓아가는 이 집엔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결코 하나의 틀에 가둘 수 없는 이야기와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 되는 둥그런 이야기가.

내 안의 언어로

살아가는 일

집을 찾아오는 길이 꼭 소풍 같았어요. 화성행궁이 집을 두르고 있네요.

화성 둘레길 좀 걸으셨나요?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곳이에요. 아침에 해가 잘 들어서 이른 시각에 초대했어요. 딱 아점 먹을 시간이네요. 간단하게 차랑 과일 좀 드세요.

 

어려운 시기에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접시가 참 곱네요.

그렇죠? 할머니 유품이에요. 제가 참 아끼고 좋아하는 식기죠. 오늘 우린 차는 보이차인데, 다기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왔어요. 하나는 일본 작가 구로다 다카시의 다관, 하나는 중국 다관, 하나는 한국 작가의 작품이에요. 요리는 잘 못해서 원형의 상태로만 준비했어요. 딸기, 토마토, 삶은 달걀, 쿠키(웃음)…. 뭘 인위적으로 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도 못하거든요. 

 

조리하지 않는 게 영양 상태도 좋다더라고요(웃음). 수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이 동네에 계시는군요.

가족들도 다 수원에서 지내고 있어서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가족은 마음의 중심이고, 마음의 중심은 영감의 출발이거든요. 만약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면 여기에 집을 두고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무가 땅 아래 뿌리를 두고 땅 위로는 사계절 다르게 변하는 것처럼요. 살면서 몇 번 중심을 잃으면서, 변화에 능동적이려면 우선은 중심이 잘 잡혀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 ‘중심 언어’가 확실한 곳에 제가 있으니 세상을 받아들이는 게 한결 편안하더라고요. 그러니 수원에 머문 건 본능인 것 같아요. 할머니가 쓰던 식기를 아직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요. 저에게 여기는 집보다… 서식지에 가까워요.

 

방금 중심 언어라고 하셨는데, 그게 어떤 의미예요?

음… 겉으론 다들 잘 사는 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소리 지르며 흔들거리는 게 진짜 사람의 삶 같아요. 누구나 그런 악 소리 하나씩은 있을 거예요.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절대적인 것이요. 그게 중심 언어 아닐까 싶어요. 저의 경우는 가족, 행복, 사랑이더라고요.

 

그 중심 언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가요?

제 개인전 <글자풍경-셔> 때 시와 그림의 만남 프로그램으로 박준, 김민정, 오은 시인과 아트 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 관객분이 박준 시인에게 어떻게 하면 나만의 글을 쓸 수 있는지를 물었거든요. 그 답을 저도 곰곰 생각해 봤는데 ‘내 글이 있으면 절대로 남의 글을 베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확한 내가 있으면 남을 따라 살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그 상태가 되려면 다른 사람의 삶을 읽고 베껴 쓰는 흔들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테고요. 그렇게 여럿의 나에게 흔들리면서 악 소리를 내다 보면 중심 언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언어가 수원에서 확실해진다는 거군요. 어린 시절부터 지내온 곳이기 때문에 동네가 익숙할 것 같아요.

화성행궁이 관광지가 되고 나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동네가 되었거든요. 인스타그램에서 행궁동 카페 도장 찍기가 유행했다고 해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동네가 상품화되어 가면서 카페촌처럼 변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그런데 우리 세대는 클래식한 동네가 상품화되면 어떻게 변하는지, 삼청동이나 인사동을 보면서 선행학습했잖아요. 여긴 늙은 시간의 동네예요.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 세탁소, 구멍가게, 문방구가 있는 그런 동네요. 이런 동네에 갑자기 레스토랑, 카페, 빵집, 소품숍 등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어서 좀 걱정스러워요. 점점 생활의 소장은 사라지고 생활의 소비만 남는 건가… 싶어서요. 몇 해 전에는 동네에 있던 학교가 하나 없어졌어요. 문화재 복원을 위해서라지만 동네의 다양한 문화를 발생시키는 출발점인 학교가 사라졌다는 건 여기 사는 주민들의 늙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처럼 느껴져요.

 

‘늙은 시간’이 사라졌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개인적인 공간이 관광에 노출되는 일이 부쩍 많아졌어요. 저희 집 대문은 마당에서 예술교육 프로그램 진행할 걸 생각해서 자바라 형식으로 만들었어요. 문을 활짝 열면 마당이 개방되는 구조죠. 날씨가 좋을 땐 종종 대문을 열어두는데 관광 온 분들이 그냥 드나드시더라고요. 큰 카메라를 들고 마당에 들어와서 꽃과 나무를 찍어 가는 분도 있고, 개인 공간인 내부까지 들어오려는 분도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초인종을 눌러서 지금은 소리를 차단해두기까지 했죠. 이웃들은 이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주민의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실감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까 초인종을 눌러도 소리가 안 들렸던 거군요. 동네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어요.

이 동네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행궁이란 특별한 역사와 함께 시간을 먹어온 곳이에요. 그래서 대대로 집을 물려 받아 사시는 어르신이 많죠. 어르신들의 삶은 지극히 아날로그여서 사실 삶이 아파트화되어 가는 저에겐 불편한 동네예요.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저를 철들게 해요. 사람다워진달까요? 신기하죠? 눈이 내리면 옆집 할아버지는 득달같이 나와서 집 앞의 눈을 치우세요. 어떤 날은 저희 집 앞까지 꼼꼼히 쓸어주시는데, 저는 여태껏 눈은 저절로 녹아서 사라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더라고요. 동네분들이 혹시나 미끄러질까 봐 바로 쓸어내는 마음이 어찌나 귀한지 몰라요. 어르신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가 잊고 살던 것들을 깨닫게 돼요. 동네에 카페가 생기고 변화하는 게 불편하다고 느끼는 저도 참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어느새 진짜 주민이 된 것 같은데, 지금과 달리 이 동네에 들어올 땐 맞춰야 할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동네 고유의 분위기에 우선하자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 동네 분위기를 사랑해요. 옛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컨템포러리 클래식’의 미세한 힘겨루기를요. 이에 대처하는 주민 각자의 삶의 방식이 아름다워 보여서 저 또한 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저도 아름다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요. 결국은 제가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동네 분위기를 우선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을 지을 때 지형 그대로를 살려 설계하려고 하자, 전투할 때 승리의 타당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는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해요. 그런데도 정조대왕이 언덕 모양을 그대로 살려 성곽을 쌓을 것을 명하면서 그랬다잖아요. “아름다움이 이기는 것이다!”

 

와, 소름 돋았어요. 멋진 말이네요.

그렇죠(웃음)? 저는 이 동네에 들어올 때 일단 외관은 고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번쩍번쩍한 집이 생기면 동네가 위축될 테니까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고도 제한 같은 건설 조건을 두어서 마음대로 고칠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이 동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제일 자연스럽게 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집 바로 앞에 있는 성곽 둘레길을 마당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자바라식 대문을 달았어요. 나무대문을 활짝 열면서 집 밖 풍경을 언제든 곁에 두고 싶어서요. 그리고 집 둘레에는 성곽길과 옆집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담의 역할로 나무들을 심었죠. 집 내부를 공사할 때도 오래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된 것들 위주로만 수리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시작부터 한 것 같아요. 일단 필요 없는 걸 버리자는 생각이었는데, 집의 뼈대만 남으니까 그제야 제가 원하는 게 뭔지 보이더라고요.

그게 뭐였어요?

‘그대로 둬야겠다.’는 거요. 겨울엔 집을 고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빨리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라 겨울부터 공사를 시작했거든요. 그랬더니 공사 도중에 벽이 전부 터진 거예요. 그때 집도 겨울엔 잠을 잔다는 거, 계절을 탄다는 거, 생명체라는 걸 알게 됐죠. 하수구는 집의 피가 흐르는 혈관이고, 방과 방은 내장이고, 외관은 우리가 입는 외투였어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질서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내부에 막혀 있는 전기선, 뚫어주어야 할 하수관 등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기본만 고치는 데 집중했어요. 집도 살아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전문 업체 도움 없이 스스로 판단하며 고쳐 보자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년 동안 차근차근 고쳐나갔어요. 

 

그 1년간 어떤 게 바뀌었나요?

말하자면, 중환자실에 입원한 증조할아버지를 간신히 일반 병실로 옮긴 게 현재의 집이에요(웃음). 이 집은 40년 가까이 한 자릴 지킨 집이에요. 워낙 오래되다 보니 조금씩 기울어서 제가 들어올 땐 그림을 똑바로 걸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바닥 수평을 세 번이나 고쳐야 했죠. 공사하면서 제가 간과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건 우리나라 기후가 40년 전과는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이상 기후가 계속되면서 장마도 길어지고 열대 기후에 가까워졌잖아요. 근데 집은 40년 전 조건에 맞춰져 있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긴 거죠. 우선 집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물길을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우수통도 지름이 넓은 걸로 바꿔주었고요. 이렇게 구조적으로 하나씩 바꿔가면서 실내 인테리어엔 제 취향과 분위기를 녹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테리어 공사하시는 분들께 이상한 사람 취급도 많이 받았죠.

 

왜요?

이 집 바닥에는 파란색 카펫이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데, 이걸 깔겠다고 하니 말리시더라고요(웃음). 작업할 때 저는 꽤 냉정한 편이어서 처음엔 공간도 그렇게 꾸미려고 했어요. 그런데 공사하면서 벽이 한 번 터지고 나니까 여긴 따뜻한 게 잘 맞는 곳이란 걸 알겠더라고요. 특히 1층은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과 그림 이야기를 하는 생활 갤러리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신뢰의 색상과 따뜻한 촉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게 로열블루 색상의 카펫이죠.

 

오묘한 블루예요.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줘요.

그렇죠? 완성하고 나니 공사 관계자들도 인정하시더라고요(웃음). 이 집에서 완전히 쓰임을 바꾼 건 지하 작업실과 마당밖에 없어요. 이전 주인은 북쪽 마당은 주차장, 동쪽 마당은 고추밭으로 쓰셨는데 지금 저는 ‘자연 속의 이동 판화교실’이라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마당에서 수행하고 있어요. 마당이 있는 이 집을 작업실로 정한 원래 목적이기도 해요. 마당 앞에 펼쳐진 화성 성곽 둘레길을 산책하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판화라는 매체가 가진 나눔의 미덕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이 마당이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마당에 심은 꽃과 나무는 사람들과 나누려고 키운 건데 오히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죠. 특히 꽃향기가 그래요. 집에 자연을 가까이 두고부터 배우는 게 참 많아요.

40년 가까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탄 집이라 내 집으로 만드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지금도 너무 어려워요. 저는 이 집의 세 번째 주인이에요. 북쪽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는 첫 주인이 외손자를 본 기쁨에 심은 나무래요. 그런 이야기가 40여 년이란 시간을 통해 지금껏 전해지고 있는 건데… 그게 과연 저에게도 기쁨일까요? 사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살구나무도 저에겐 중환자실에 입원한 증조할아버지를 보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마흔 살 고목나무가 제 취향은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걸 보면서 낙엽을 쓸고, 나무를 수발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사계절이 홀랑 다 가요(웃음). 근데 이렇게 강제로 부지런쟁이가 되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나무나 사람이나 같다는 걸요. 오래된 동네에서 늙은 집을 가꾸며 살다 보니 전과 달리 죽음에 진지해지기도 해요. 많은 어르신이 이 오래된 동네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으로 지내시거든요. 이 집 역시 이전 주인들이 평생 살 집을 생각하며 꾸려놓은 곳이고요. 그래서 제가 함부로 거슬러선 안 되는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하나 편하자고 맥을 끊으면 억겁의 인연은 어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해치지 말아야겠다는 소심과 겁을 배워요. 이 동네에 살면서 도인처럼 착해지는 저 때문에 가끔 괴롭기도 해요(웃음).

 

동네 분위기나 집의 형태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아파트 키드여서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고 흥미로워요.

아파트에는 시공간의 자극 없이 일정한 패턴이 주는 안도가 있잖아요. 세팅이 다 되어 있기 때문에 삶에 큰 변곡점이 없죠.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인사법 같은 거죠. ‘나도 안 건드릴게, 너도 건드리지 마.’ 하고 고개만 까딱하는 묵례. 이 무심의 거리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단독주택은 그게 안 돼요. 주변 환경이 변하면 내부도 계속해서 변하거든요.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산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부지런한 참견쟁이가 되는 거예요. 저는 주택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옆집 할아버지께 많이 배우고 있어요. 저도 어느덧 마흔이 넘었지만 이 동네 어르신들에 비하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마당 가꾸는 법도 전혀 몰라서 제 계절 교과서인 옆집 할아버지를 따라하며 지내요. 할아버지가 가지를 치면 저도 따라서 가지를 치고, 감을 따면 저도 감나무를 흔들어요. 어르신들 덕분에 자연에 순응하며 주택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죠.

 

이 집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집 같아요. 완전히 비우고 필요에 따라 채워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집과 제 작업에 닮은 점이 있다면 다층의 레이어로 완성된다는 거예요. 저는 학부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판화를 공부했어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건 2009년인데, 그래서 작업 스타일이 회화이면서 판화이기도 하고 서양화 같으면서 한국화 같기도 하거든요. 처음엔 왜 이런 모호한 경계의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을 많이도 받았어요. 근데 저는 그런 질문들이 오히려 당황스럽더라고요. 서독과 동독이 통일되고 소련이 러시아가 되는 걸 지켜본 우리 세대 작가들에게 본질이란 게 과연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만일 본질이 있다면 그건 다층의 레이어 아닐까 싶어요.

그 레이어란 게 정확히 어떤 거예요?

경험에서 비롯된 데이터를 조직화한 거죠.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동네에서 그림을 보려면 교회나 절에 가야 했어요. 학교에서는 교과서 그림을 보고, 교회에 가선 기도하며 예수상을 보고, 절에 가선 절하면서 탱화를 보며 자랐으니 제 그림의 씨앗 언어는 복합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죠. 생각해 보면 생활의 아주 작은 것까지도 각기 다른 레이어로 작용한 것 같아요. 친할머니 댁에선 장작을 때고, 외할머니 댁에선 연탄을 쓰고, 집에선 보일러를 사용한 것까지도요. 옛날엔 인터뷰를 하더라도 민화적 생활 도상들, 팝아트적 만화 도상들, 문자그림들이 어떻게 데이터를 조직화해서 완성된 건지 하나하나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저에게 작가론에 대해 깊이 물어오는 매체도 없었고요. 이전 시대가 굳건한 하나의 사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쪼개지고 쪼개지는 디테일이 중요해진 분위기예요. 그래서 이제야 제 작업의 레이어에 대해 편히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 집도 제가 하는 판화 작업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요?

회화가 캔버스에 색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거라면 판화는 종이에 색이 스며드는 거거든요. 판화는 드로잉과 제판과 잉킹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쳐 하나의 작품이 완성돼요. 단계마다 필요한 작업 태도가 있어서 드로잉 하듯 잉킹 하면 안 되거든요. 스며듦을 달리해야 하는 작업이어서요. 이 집 역시 무언가를 덧대고 담고 쌓아서 올리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공간이어서, 과정마다 스며듦을 달리하기 때문에 판화랑 닮았다고 보는 거죠.

 

작업 과정에도 애정이 많아 보여요.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판화과로 진학한 건 판화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껴서였나요?

아휴, 아니요. 하루는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쓰러지셨는데 그때 아버지를 위한 책을 써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가족을 소재로 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죠. 사실… 저는 판화가 출판을 배우는 학과인 줄 알았어요. 인쇄 개념으로 알고 진학한 건데 가보니까 글쎄 현대미술을 가르치는 거예요(웃음). 근데 막상 해보니까 파인아트로서 판화가 저한테 아주 잘 맞더라고요. 종이를 다루고 배우면서 알게 된 태도들이 있어요. 값싸고 얇은 종이 한 장이 품은 에너지, 그걸 다 말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해요. 저는 미표백 한지에 잉크가 스며드는 걸 보면서 그 순간 제가 순수하게 그림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깨달음은 ‘진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했고, 그림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목적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묵언의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 레이어로 종이 판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작품을 보면 레이어가 쌓이면서 오히려 경계가 사라지는 것도 같아요. 

맞아요, 그게 제 작업이에요. 경계를 허물면 전부 동그래지고 다 제 것이 되잖아요(웃음). 한국화와 서양화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전업 작가이면서 공공미술 기획자로서 경계를 흐리려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제가 경계가 많은 사람이어서예요. 경계를 가져봤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잘 알거든요. 사실 저는 편식도, 편견도 심해요. 편식을 고치려고 요리도 배워봤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대신 실패를 통해 맛의 편견에서는 자유로워졌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 사랑의 경계에 자유로워지는 것도 같은 이유겠죠. 제가 경계를 허물고도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건 살아온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작업할 때마다 여기서 더 밀고 나가느냐, 멈추느냐를 고민하는데요. 밀고 나가는 걸 선택하면 세상과의 접점이 많아지면서 풍요로워지는 지점이 분명히 생기거든요. 저는 그게 사람들이 제게 주는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작업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울게 되는 거. 기쁨과 슬픔의 레이어를 쌓을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거. 그런 것이 주는 힘이 엄청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림 이야기를 좀더 해볼게요. ‘썅’, ‘뿅’, ‘사라아앙’ 같은 단어를 작은 그림들로 쌓아서 문자도를 만들고 있죠. 일반적이지 않은 이 단어들은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처음부터 선명하게 오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긴 사유 끝에 떠올린 짧은 문장에서 와요. 저는 그림 그리기 전에 드로잉보다 먼저 글을 쓰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장문을 쓰는 게 어려워져서 단문을 쓰고 있거든요. 올해 처음 다이어리에 쓴 단어는 ‘용서’였어요. 그 뒷장에 쓴 게 ‘용사’였고요. 한동안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는데 15년 정도 지나니 이제야 죽음이란 단어가 용서되더라고요. 제가 용사가 되었기에 용서를 알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두 단어를 가장 먼저 다이어리에 적었어요. 이런 흐름처럼 삶의 단초를 엮어 하나의 문장이 되었을 때, 그 문장에서 덜고 덜어서 핵심만 남았을 때 그것이 문자그림이 돼요. 남는 건 점 같은 하나의 단어지만 그 글자를 덮고 있는 레이어들을 다 보느냐 못 보느냐에 따라 그림 해석이 달라질 거예요. 만일 ‘뿅’이라는 문자도를 본다면 이걸 뿅이란 글자로만 보는 분이 있고, 뿅을 이루는 그림들만 보는 분이 있고, 아예 다른 걸 보는 분도 있어요. 저는 그게 그림이자 예술의 역할 같아요. 사람들에게 오답을 만들어주는 거.

 

내 작품을 오답으로 해석하는 게 불편하진 않아요?

전혀요. 예술은 원래 오답인걸요. 정답이 되는 예술은 정치죠. 제가 작업할 때 항상 경계하는 게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말 것’이에요. 예술가는 오답을 생산하는 장치가지 정치가가 아니니까요.

 

음… 그러네요. 정답이 있는 예술은 저로서도 달갑지 않을 것 같아요. (집 안을 둘러보며) 판화 작업을 이 집에서 하신다고 들었어요.

이 집은 세 개 층에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하며 만들어졌어요. 지하 작업실은 작품을 생산하는 공간, 1층은 그림을 보고 소통하는 공간, 그리고 2층은 글을 쓰고 읽는 공간이에요. 제 작업 패턴은 보통 계절과 시간에 맞춰 달라지는데요. 봄, 여름, 가을에는 부지런히 작업을 하고요, 겨울잠을 자기 전인 11월엔 그 작업을 전시로 펼쳐 보이는 패턴이에요. 겨울엔 되도록 작업 활동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잠만 자며 지내려고 해요. 요즘처럼 해야 할 작업이 많을 때는 작은 작업만 조금씩 하면서 봄을 기다리죠. 예술가는 몸상태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기 관리가 필수적이거든요. 저에겐 갑상선 질환이 있어서 겨울엔 무조건 겨울잠으로 에너지를 쌓아줘야만 해요. 얼마 전에 함민복 시인의 대담을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사람이 가장 착할 때는 잠을 잘 때’라는 거였는데요. 그래서 저는 겨울이 좋나 봐요. 민폐를 끼치지 않는 계절이라니….

누구나 제대로 일하기 위해선 내 몸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이 집의 1층 공간을 갤러리로 오픈하는 시기도 대개 5월이에요. 5월이면 제 컨디션뿐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도 유연해지거든요. 살구나무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살구가 열려요. 그럼 저는 살구 따러 오라고 사람들을 부르죠. 사실 이 집을 구상할 때 1층은 한 사람만을 위한 갤러리로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껏 살아 보니까 세상을 움직이는 건 군중 속 1인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한 사람의 공간은 결국 다수의 공간이 될 거고, 그렇게 연결고리 같은 집이 될 것이니 만남의 시작은 좁고 작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은 마음을 왜 봐야 하는지, 왜 천천히 봐야 하는지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거든요.

 

그 답을 찾았어요?

찾는 중이지만 이런 생각은 들어요. 이 공간에 다수가 들어오는 것보다 한 사람이 들어왔을 때 작은 걸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요.

 

오늘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가야겠어요(웃음). ‘집이 곧 행복’이라고 이야기한 인터뷰를 봤어요. 여전히 집은 행복인가요?

네, 세상이 다 변해도 집은 변하지 않는 행복이었으면 해요.근데 행복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른 가치잖아요. ‘집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 데서의 행복은 몇 평짜리 집인지, 얼마짜리 집인지 같은 부동산 개념의 행복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과정에 가까워요. 행복이란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웃는 얼굴이잖아요. 이 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게 동네에 스며드는 것, 누군가 대문 앞을 지나가면서 우리 집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것, 제가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그 사람도 이 집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는 것 모두 저에겐 행복이에요. 이런 장면들을 떠올리며 집을 고치고 나를 고치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이 집의 레이어를 전부 걷어냈을 때 마지막에 남을 한 가지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 (한참 생각한다.) 대나무? 우리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처음엔 보살피기 버거웠어요. 노년의 나무를 건사하기엔 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죠. 살구나무가 매 계절 저에게 부족함이란 깨달음을 준다면 반대로 동쪽 마당 대나무는 에너지를 줘요. 대나무는 올해로 5년째 기르고 있는데요. 새순이 뻗어나가는 걸 보면 절로 신묘한 힘이 솟더라고요. 혹시 대나무 크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6월 초순의 밤, 마당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죽순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요. 나무가 크는 소리죠. 

 

소리가 들린다고요? 상상의 소리인 거죠?

아니요. 정말 들려요. ‘따닥따닥’하고요. 보통 새벽에, 한 번에 올라오는데요. 마당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들을 수 있어요. 동영상도 찍었는데 소리 한번 들어보세요. (동영상을 재생한다.)

 

어?

들리시죠? 이래서 인간은 다 안다고 잘난 척을 하면 안 돼요. 이런 죽순의 탄생과 소리는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자연과 어울려 살면서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어요. 매일 깨지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인데 여기는 그런 걸 알게 해주는 집이에요. 그래서 이 공간을 집이 아니라 서식지라고 하는 거고요.

 

서식지의 미래가 무척 기대되는데요!

앞으로도 이 집은 계속해서 레이어에 깊이를 더하고 경계를 허물어 나갈 거예요. 특유의 쾌활함을 머금고 긍정적인 기운이 감도는 집이 될 거라 믿어요. 집은 항상 ‘거기’에 있어요. 집은 어디 안 가요.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니 앞으로도 이 집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보려고요. 아 참, 제가 3월부터 시작되는 <예술가로 사는 것>이라는 전시에 참여하게 됐는데요. 이번 작업으로 예술가로 사는 게 어떤 건지 곰곰 생각해 본다면 이 집에서의 생활도 좀더 깊어질 것 같아요. 오늘도 내일도 집은 곧 행복일 거라 믿어요(웃음).

“통화할 때 에디터님 목소리에서 새 소리가 나서 이 그림을 꺼내두었어요.” 이른 아침 수원에서 만난 홍인숙 작가가 1층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건넨 한마디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금발 머리 소녀 얼굴과 두 마리의 새가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말한 ‘한 사람만을 위한 갤러리’는 이런게 아닐까. 새 소리라는 한마디가 좋아서 내내 곱씹다 이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는 결국 다수의 공간이 되고,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결해 주는 집이 되는 거. 오늘의 만남을 기록하며 정조대왕의 이야기를 조용히 읊어본다. “아름다움이 이기는 것이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