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Live In Heaven

그래픽 디자이너 석윤이

석윤이 디자이너 손끝에서 탄생한 책들은 갖은 곳에서 사랑받는다. 출판사 북디자이너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된 지 3년. 최근 모스그래픽이란 브랜드를 론칭하고 색과 도형만으로 재미있는 종이들을 만들며 지내는 그에겐 ‘아인’이라는 명랑한 딸이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지만 딸과의 시간만큼은 언제나 성실히 채워진다. 이렇게 안정적인 시간을 마주하기까진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는 엄마의 역할이 컸다. 몸짓과 말씨가 닮은 삼대는 자주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 여기가 천국이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 앞에서도, 달고 맛있는 과일 앞에서도 쉬이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천국이 아닌 곳은 어디일까. 세 사람은 이제, 아주 닮은 친구처럼 보인다.

거짓말 같은 행복에 닿기까지

“주변 사람들이 부모님과는 최대한 가까이 있는 게 좋다고 하고, 엄마도 그걸 원하시더라고요. 마침 제가 대학생 때까지 부모님과 살던 아파트 1층 집이 나왔길래 뛰어가서 바로 계약했어요. 처음엔 엄마랑 가까이 사는 게 뭐가 좋은지 실감이 잘 안 났는데, 아인이를 낳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건 신의 한 수였어요.”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죠.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윤이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코로나19가 생각만큼 실감나진 않아요.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하고 모든 생활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늘 하던 대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일이 계속 많아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네요(웃음).

 

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죠. 본인을 소개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을 거 같아요.

윤이 이젠 어디 가서 제 소개할 일이 많지 않지만 인터뷰하거나 작업에 크레딧을 올릴 때 “뭐라고 표기할까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요. 옛날엔 북디자이너라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이야기하게 됐어요. 이미지를 만드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어서 이젠 그게 맞는 것 같거든요. 사실 저는 북디자이너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근데 그렇게 소개하면 많은 사람이 책만 만든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좀더 포괄적인 작업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방향을 꾀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단어로 소개하고 싶어요.

 

요즘 ‘모스그래픽Mohs graphic’이라는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죠.

윤이 모스그래픽은 사실 이름을 짓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하던 작업이었어요. 북디자인을 오래 해오면서 쌓인 인쇄지식을 활용해서, 제 마음껏 디자인한 뭔가를 제본 형태로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시작은 그간 알게 된 고마운 사람들에게 노트라도 만들어서 선물하겠단 마음이었는데, 사람들이 이건 선물로 줄 게 아니라 팔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 거예요. 근데 판매를 할 거면 좀… 잘 만들어야 하잖아요(웃음). 노트 샘플을 만들고 나니까 하고 싶은 아이템이 계속 생겨나서 하나씩 늘려가다 보니 이렇게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어요.

 

모스그래픽은 어떤 의미예요?

윤이 저는 이름 짓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데… 뇌 구조가 단순해서 그런지 고민도 오래 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저는 북디자인을 해오면서 책의 주인공은 늘 텍스트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글자들이 돋보이도록 시각적으로 꾸미고 매만지는 작업을 해온 거죠. 그래서인지 텍스트 같은 부가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북디자인을 하고 나면 “표지 디자인에 담은 의도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했고요. 자연스럽게 ‘그냥 보면 아는 거’를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이 있어서 ‘Show’라는 단어를 응용해 보기로 했어요. 문장형으로 만들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고민이 있었는데요. 문득 Show를 뒤집어봤는데 그 모양이 Mohs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모스그래픽이라고 짓게 됐어요. 모스그래픽으로는 시각적으로 재미를 주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보자마자 예뻐, 시원해, 밝아, 단번에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작업들이요.

이름 짓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했는데 아이 이름은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윤이 아이 이름은 ‘아인’이고, 성은 ‘유’예요. ‘유아인’이죠. 병원에 가면 간호사 언니들이 좋아하면서 실명이냐고 묻는 일이 많아요(웃음). 히브리어로 아인이 ‘하나님의 눈’이란 뜻이거든요. 함축적인 의미인 게 마음에 들었고, 아인이란 단어를 독일어로 풀면 ‘하나’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 뜻도 좋아서 유아인으로 짓게 됐어요. 아인이는 세 자 모두에 이응이 들어가는데 이왕이면 둥그런 성격이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활발하고, 웃기고, 특별히 예민한 부분도 없는 아이예요.

 

오늘 어머니와도 함께하게 됐는데 어머니 성함도 궁금해요.

신화 반가워요. 저는 손신화예요. 믿을 신信, 빛날 화華. 할머니 이름 같지 않죠? 근데 저는 어릴 때 제 이름을 싫어했어요. 우리 때는 순자, 영숙, 영자 이런 이름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친구들이 그리스 신화냐, 희랍 신화냐, 하면서 놀리니까 더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러다 주변 어른들이 예쁘다고 말해주면서부터 그제야 ‘내 이름 예쁘구나.’ 하게 됐어요.

 

굳건해 보이는 이름이에요. 그럼 ‘석윤이’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신화 저는 ‘윤’이라는 음절이 좋았어요.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윤’이라 짓고, 딸을 낳으면 ‘윤이’라고 짓겠다고 일찍이 마음먹었죠. 윤희는 너무 흔하니까 윤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문으로 하면 믿을 윤允, 넓을 이羡예요. 한자 뜻도 좋아서 미리 정해 놓고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더라고요. 그땐 출산 전에 아이 성별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낳고 나서야 성별을 보고 이름을 정할 수 있었어요. ‘석’이란 성이랑도 잘 어울려서 흔하지 않고 예쁜 이름이 됐죠.

 

이름을 알고 나니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네요(웃음). 모스그래픽은 특히 색감이 눈에 띄는데, 세 분은 어떤 색을 특히 좋아하세요?

아인 보라!

윤이 저희 셋은 취향이 비슷한 편인데 셋 다 보라색을 좋아해요. 하루는 마트에 가자면서 외출을 했는데 가만 보니 셋 다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참 특이한 삼대죠(웃음). 아인이가 보라색을 좋아하는 건 자라온 환경의 영향도 있는 거 같아요. 다른 아이들처럼 아이들 특유의 색감으로 꾸며진 자기만의 방에서 자라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어른들이 지내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서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어요. 원색이나 톤 다운된 색, 무채색 할 거 없이 골고루 좋아하죠. 아인이는 그림 그릴 때도 색을 참 다양하게 써요. 제가 일하는 동안은 할머니 방에서 지내서 밝은 색상부터 고상한 색상까지 다 만나게 되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아인 저기 내 방이야!

윤이 항상 할머니 방을 자기 방이라면서 자기 방이 제일 크다고 해요(웃음). 엄마가 아인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가 지내기 좋은 공간으로 꾸리다 보니까 엄마 방이면서 아인이방인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엄마도 엄마만의 방이 필요할 텐데, 가끔 미안해요. 근데 엄만 이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늘은 아인이 할머니 댁에서 이야기 나누게 됐어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층만 달리 지내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형태로 살게 된 거예요?

윤이 처음부터 이렇게 가까이 살 생각은 아니었어요. 저도 결혼하고 독립한 건데 굳이 엄마 곁에 딱 붙어서 살 필요를 느끼진 않았거든요. 근데 주변 사람들이 부모님과는 최대한 가까이 있는 게 좋다고 하고, 엄마도 그걸 원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운 데 집을 구해볼까 싶었는데, 마침 같은 동 1층에 집이 나왔길래 뛰어가서 바로 계약하게 됐어요. 지금 이 집이 제가 대학생 때까지 살던 집이거든요. 처음엔 이사하고도 엄마랑 가까이 사는 게 뭐가 좋은지 실감이 잘 안났는데, 아인이를 낳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건 신의 한 수였어요.

 

어떤 점에서요?

윤이 편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에요. 저는 아인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출판사로 출퇴근을 했어요. 그때 엄마가 어린이집도 안 보내고 오롯이 아인이를 봐주셨어요. 그래서…솔직히 저는 육아의 어려움을 잘 모른 채 지냈어요. 퇴근하고 돌아와서 보통 일이 아니란 걸 간접적으로 실감하는 게 전부였죠. 그런 날들이 거듭되니까 제가 엄마한테 모든 걸 떠넘기고 출근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애 엄마들은 집에서 똥 기저귀 갈고, 이유식 먹이고, 본인은 쉬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아파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저는 너무 우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양심에 찔리고 엄마한테 미안했어요. 엄마가 저한테 불평한 적은 없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솔직히 집이 난장판이었거든요. 아인이가 아직 어릴 때니까 정신없이 어질러두고, 엄마는 그걸 치울 기력이 없고, 제가 퇴근했으니 밥은 차려줘야 하고…. 그 풍경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아무리 회사에서 돈을 벌어 온다지만 이건 사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 가면 일 잘한단 소리도 듣고, 세련되게 출퇴근하고 그랬는데요. 집에만 오면 회사에서 기력을 다 써서 집안일 할 기력이 없는 거예요. 저는 그 시절 제일 부러웠던 게, 옷장이나 서랍장에 아이 옷을 빨아 잘 개서 넣어놓고 장난감 분류해서 정리하는 엄마들이었어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저렇게 정리가 잘돼 있다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주말이 되면 엄마한테 죄인 된 기분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든지, 밥을 안 하시도록 맛있는 걸 대접하든지, 제가 아이를 온전히 보든지…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했죠. 아이는 점점 더 활발해지고 손 가는 일도 많아지고, 엄마는 조금씩 지쳐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장 굶더라도 회사를 그만두자고 마음먹은 거죠.

 

퇴사하고 나니까 좀 편해졌어요?

윤이 아이가 제일 예쁠 때 저는 회사에 있다는 것도 싫었고 아이랑 있을 땐 늘 지쳐 있어서 미안했어요. 주말엔 주말이어서 피곤하고, 평일엔 출퇴근으로 피곤하고. 게다가 지쳐가는 엄마를 보는 것도 힘들었고요. 이 생활에 모두가 피곤해진 시점에 퇴사를 결심한 건데, 진짜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어요. 프리랜서는 앞날을 예견할 수 없으니까 처음엔 들어오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다 받았거든요. 일정 조율하는 법도 몰라서 전부 감당하려다 힘들어지고, 체력적으로 무리해서 응급실에도 실려 갔어요. 그래서 프리랜서 1년 차엔 적응하는 데 집중해야 했죠. 그러는 동안 아이는 좀더 커서 자기 일을 찾아 할 수 있게 됐고, 엄마는 늘 제 곁에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렇게 2년 차가 되니까 모든 게 정리되면서 셋 다 거짓말처럼 행복해졌어요.

아인 근데 엄마는 요즘 이 말을 제일 많이 해요. “아, 어떡하지? 이거 오늘 다 해야 하는데!”

윤이 아유…. 맞아요, 프리랜서가 되고 제일 많이 하는 말이에요(웃음).

프리랜서의 삶이란 이런 거군요(웃음). 작업을 집에서 하고 있는데, 일과 생활에 시간 배분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윤이 프리랜서 3년 차가 되니까 질서가 잡히면서 시간 조율도 자연스러워지더라고요. 회사 다닐 때보다 지금은 더 다양한 일을 하게 되고, 그걸 전부 스스로 관리하다 보니까 정신없이 바빠요. 그래도 업무에 쓰는 시간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으니 생활도 병행할 수 있죠. 아침에 일어나서 아인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일을 제가 하게 되면서 엄마에게도 자유 시간이 생겼어요. 아인이를 데려다주고 오전 업무를 시작하고, 점심이 되면 엄마 집에 올라가서 같이 밥을 먹어요. 그러고는 다시 내려와서 일하는 패턴이 잡혔죠. 사실 처음에는 이것도 힘들었어요. 일과 생활 모든 게 제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었거든요. 점심엔 뭐 먹지, 엄마 컨디션은 괜찮나, 아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일하니까 더 피곤해져서 프리랜서가 쉽지 않다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처음엔 과연 프리랜서가 옳은 선택이었나 고민도 많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시간 배분에 노하우도 생기고, 우선순위도 잡히더라고요. 중요한 일은 쳐낼 수도 있게 된 거죠. 그러고 나니까 일이 많아도 아이와,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게 됐어요. 아이도 조금 자랐다고 제가 일할 땐 뒤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더라고요.

 

아인이는 엄마가 일할 때 뭐 해?

아인 그림 그려요. 펜으로.

윤이 아인이 펜 많잖아. 그거 한 번 보여드려. (아인이가 방으로 들어간다.) 쏟지 말고 조금만 가져와!

아인 엄마나 잘하세요!

윤이 어휴, 크니까 말을 너무 잘하는 거 있죠. 이따 “너 아까 뭐라 그랬어!” 하고 혼날 거 알면서도(웃음).

 

(웃음) 어머니는 어떠세요? 딸이 프리랜서가 되고서 좀더 편해지셨어요?

신화 지금 이 모습이 딱 제가 원하던 바예요. 저는 윤이가 학생일 때부터 결혼하고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해 왔거든요. 지금 윤이는 경제권도 있고, 일도 바로 아래층에서 하고 있으니까 안심이 되고 좋아요. 저는 지금 늘 꿈꿔온 이상적인 풍경에서 살고 있어요.

윤이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요새는 결혼 전부터 엄마들이 “애 낳아도 나는 못 봐준다.” 하고 선포한다던데, 엄마가 체력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시거든요.

신화 저도 절대 손주를 안 보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어요. 자녀들이 분가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삶을 자식이나 손주한테 얽매인 채 보내고 싶진 않았어요. 주변에서도 마음 굳게 먹지 않으면 손주 돌보다 자기 삶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한 거 같아요. 근데 저는 윤이한테 고마운 게 참 많거든요. 윤이가 대학에 다닐 때 집안 상황이 안 좋아져서 휘청거린 적이 있는데요. 그때 윤이가 가족한테 정말 잘했어요. 저한테 신경도 참 많이 쓰고, 동생도 나서서 돌보고, 아빠도 응원하고…. 이즈음부터 저는 윤이를 딸이자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모녀 관계를 넘어 돈독해지는 시기를 겪은 거죠. 그때, 윤이가 아이를 낳으면 제2의 삶을 할머니로 살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주인공인 것도 좋지만 조연으로도 충분히 멋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사랑을 주는 지금의 삶이 좋아요. 윤이는 제가 지칠까 봐 몇 달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하는데, 그런다고 제가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아요. 같이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데요.

오늘이 제일 젊고 예쁜 날

“가끔 윤이가 ‘엄마가 내 친군데 나중에 엄마 없으면 어떡해. 나는 친구도 없는데.’ 그러거든요. 그럼 아인이가 ‘내가 있잖아. 난 엄마의 영원한 친구야.’ 그래요.”

사랑하는 손녀여도 함께 지내면서 힘들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신화 있죠(웃음). 아인이가 지금보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몰랐어요. 엄마가 출근하면 항상 여기 올라와서 저랑 시간을 보냈으니까 당연히 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근데 얘가 점점 커가면서 저보다도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땐 솔직히 좀 섭섭했어요. 이제 내 품을 벗어나는구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잖아요. 저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니까요.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생각을 바꾸려고 애썼어요. 저는 아이를 지켜보고 챙겨주는 존재라고 상기한 거죠.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아인이가 제 품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윤이 그때 엄마가 많이 서운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어요. 예전엔 아인이가 할머니밖에 모르고, 할아버지가 뚝딱뚝딱 뭘 잘 고치니까 할아버지랑 결혼하겠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두 분이 행복해하셨고 그게 저도 만족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인이에게 그런 애교가 없어지는 거예요. 게다가 할머니 청력이 점점 안 좋아지니까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걸 답답해하더라고요. 할머니가 말을 걸면 못 들은 척할 때도 있고요. 제 눈엔 그게 다 보이니까 저까지 속상했어요. 이런 상황을 우리 모두 처음 겪는 거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걱정도 했는데요. 어느 순간 엄마가 그 섭섭함을 이겨내시더라고요. 엄마 말대로 주연보단 조연의 삶을 택하면서 아인이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셨어요.

 

관계에서의 강약이 조절된 거네요. ‘윤이’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지는데, 어떤 아이였어요?

신화 우리 가족은 윤이가 어릴 때부터 자연을 보러 참 많이 다녔는데, 나들이를 하고 오면 윤이는 꼭 그림을 그렸어요. 고속도로나 지방 도로에서 스쳐 지나간 길목을 그리고 “여기 이런 거 있었잖아.” 하면서 보여준 거죠. 제 머릿속엔 없는 풍경인데 나중에 가서 보면 윤이가 그린 그 풍경이 정확하게 거기 있는 거예요. 심지어 젖소가 앉아 있었는지, 서 있었는지도 기억해서 그리는데 그 당시에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선생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브로치가 매번 다르더라고요. 저는 그게 윤이의 상상인 줄 알았는데, 학부모 참관 수업으로 학교에 몇 번 갔더니 정말 선생님 브로치가 매일 바뀌고 있는 거예요. 그때 윤이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윤이가 미술을 하는덴 아낌이 없었어요. 남편이 스케치북만큼은 아까워하지 말자고, 선 하나를 긋고 종이를 넘겨도 그대로 두자고 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죠.

윤이 그랬어? 재밌다, 나는 몰랐네?

신화 그랬지. 아인이도 윤이를 닮아서 손으로 만지고, 만들고, 그리고 하는 걸 좋아해요. 얘도 그쪽으론 타고난 애 같아요.

 

윤이와 아인이를 키우면서 두 아이의 다른 점도 실감했을 것 같아요.

신화 윤이는 순둥이였어요. 얘는 말썽은커녕 제가 챙겨주고 보살펴줄 필요 없이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하는 맏딸이었거든요. 동생을 얼마나 잘 챙겼는지, 동생이 화장실에 가면 엄마를 찾는 게 아니라 누나를 찾았어요. 학교에선 모범생이었죠. 책임감을 가지고 뭐든 확실하게 해냈거든요. 선생님들도 윤이를 참 예뻐했는데 하나 아쉬운 점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좀 없었단 거예요. 하루는 윤이 담임 선생님이 호출해서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윤이가 웃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윤이는 뭐든 잘하는 애였지만, 자기가 잘한다는 확신을 못 갖는 애였어요. 자신감이 없으니 잘 웃질 않았던 거죠. 근데 아인이는 혼자여서인지 뭐든 자신만만해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랑받고, 본인도 그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밝고 명랑해요. 윤이가 기를 살려주고 잘하고 있다고 북돋아 줘야 하는 아이라면, 아인이는 자신감이 너무 지나칠까 봐 다독여줘야 하는 아이죠.

엄마랑 딸은 특히 공감을 많이 하는 관계라고 하잖아요. 세 분은 어떨 때 서로에게 공감하곤 해요?

윤이 공감하는 부분은 정말 많아요. 일단은 쇼핑! 여자 셋이 나가면 항상 비슷한 데 관심을 가져요. 저는 어릴 때부터 예쁘고 근사한 물건에 익숙했어요. 부모님이 아름다운 오브제를 좋아하셨거든요. 저희 부모님은 유독 인테리어 소품에 관심이 많고 아름다운 것들을 집에 놓고 싶어 하셨어요. 근데 아인이가 꼭 그래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모두가 비슷한 분위기를 좋아하다 보니까 얘도 자연스럽게 꾸미는 데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할머니 방도 자기 방처럼 꾸미면서 스티커도 붙이고, 뭔가를 만들어서 걸어 놓고…. 엄마랑 제가 식탁보를 사서 깔아 놓으면 자기도 자기 책상에 천 조각을 하나 깔아 놔요. 예쁜 꽃 보이면 “꽃 사자.”고 이야기하고, 마음에 드는 의자가 보이면 “이거 내 방에 놓고 싶다.”고 하고. 그래서 셋이 나가면 재미있어요. 물건을 사는 관심사가 비슷하니까요.

아인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윤이 아(웃음), 엄마가 해외 드라마를 좋아해서 미드, 영드, 일드 다양하게 틀어놔서 아인이도 귀에 익어서 이러는 건데요. 아인이가 가끔 리모컨을 가지고 와선 드라마를 먼저 보자고 하거든요. 사실 얘는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셋이 둘러앉아서 뭐라도 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아빠도 할아버지도 밖에서 일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셋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거든요. 엄마랑 할머니 사이에 자기가 있다는 게 좋은가 봐요. 그럴 때 참 다행이란 생각을 많이 해요.

 

이번엔 아인이 얘기를 좀 들어볼까요? 아인이는 할머니랑 엄마를 뭐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아인 (부끄러워한다.)

윤이 소개해 봐, 우리는 무슨 가족이지? 저번엔 ‘맨발 가족’이라며. 저희 셋 다 한겨울에도 양말을 잘 안 신거든요(웃음).

아인 이빨 가족.

윤이 아(웃음)! 얼마 전에 셋이 함께 치과에 다녀왔거든요. 할머니는 치료 때문에 다녀왔고, 저는 스케일링, 아인이는 이를 뽑아서 가게 됐죠. 그래서 이빨 가족이라고(웃음).

 

지금 이빨 가족은 (웃음) 참 돈독해 보여요. 윤이 씨는 어릴 때부터 엄마랑 이렇게 가까웠어요? 

윤이 음… 10대까지만 해도 엄마가 너무 무서웠어요. 그땐 엄마가 엄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20대가 되면서 철이 들기도 했고… 집이 한 번 휘청였을 때 엄마가 한없이 작아 보이더라고요. 옛날에 제가 기억하던 엄격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 엄마랑 부쩍 가까워졌어요. 그즈음 엄마랑 대화를 더 많이 나누게 되면서 엄마 말엔 지혜가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죠. 엄만 항상 저보다 생각이 앞서가시거든요. 제가 예측하지 못한 삶을 엄마는 살아봤으니까,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부터 엄마를 더욱 믿게 됐어요. 엄마연세가 지금 일흔인데도 여전히 대화가 잘 통하는 걸 보면 이젠 정말 친구가 된 거 같아요.

 

일흔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윤이 그렇죠? 사람들이 결혼을 빨리 해서 애를 일찍 낳은 줄 아시는데, 사실 엄마는 딱 적령기 때 저를 낳으셨거든요. 근데 생각하는 건 확실히 젊으세요. 노트북도 잘 다루시고, 저보다 드라마 같은 것도 훨씬 잘 다운받아 보시고. 그래서 고리타분하다거나 세대 차이가 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확실히 거기서 오는 신뢰도 있는 것 같아요.

신화 가끔 윤이가 대화하다가 “엄마가 내 친군데 나중에 엄마 없으면 어떡해. 나는 친구도 없는데.” 그러거든요. 그럼 옆에서 아인이가 “내가 있잖아. 난 엄마의 영원한 친구야.” 그래요. 윤이랑 제가 친구처럼 지내는 걸 보면서 아인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아인이를 보면서 엄마랑 딸은 동반자라는 걸 다시금 느껴요.

윤이 씨는 엄마가 되어보니 어때요? 엄마랑 본인이 닮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윤이 살면서 엄마랑 취향이 비슷하다고는 많이 느껴왔어요. 엄마가 40대 때 입던 옷을 지금 제가 입고 지내는 것만 봐도 그렇죠(웃음). 근데 아인이를 키우고 나니 제가 엄마랑 내면까지 닮았다는 걸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아이가 생기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것 같아요. 아인이란 존재가 등장하면서 모든 관계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거든요. 책임감도 생기고, 아이를 시시각각 돌봐야 하기 때문에 신경 쓸 게 정말 많아지는데요. 그러면서 엄마랑 닮은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됐어요. 특히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응하는 방식이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나 생활하면서 우선순위를 따지는 방식 같은 거요. 스스로 내린 결정이 엄마 의견과 같을 땐 확신을 얻고 제 판단을 신뢰하게 돼요. 그럴 때마다 제가 엄마 딸이란 걸 실감하게 되고요.

신화 윤이는 어릴 때부터 뭐든 잘해야 하는 아이였어요. 못하는 일이라면 노력해서 꼭대기에 가야만 하는 성격이었죠. 근데 지금 얘는 주방일을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좀 있거든요. 근데 윤이 성격에 주방일도 막상 하기 시작하면 잘할 게 분명해요. 사실 주방일은 나중에라도 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윤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 좋겠어요. 저는요, 윤이가 지금처럼 자기에게 생기는 문제들을 저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엔 살이 찌고 늙고, 얼굴도 점점 못나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윤이에게 자주 이렇게 말해요. “윤아, 네가 살아갈 날 중 오늘이 제일 젊고 예쁜 날이다. 가장 소중한 시간이야.”

 

아, 마음에 꼭 새기고 싶은 문장이에요. 지금은 각자 생활로 바쁜 시기니까 행복한 상상을 한 번 해볼게요. 아무 걱정 없이 셋이 일주일을 보낼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윤이 홍천에 농막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가 천국이다!” 하고 싶어요.

아인 놀이터 갔다 집에 들어와도 그러잖아. 에어컨 켜고 “여기가 천국이다!”

윤이 맞아요(웃음). 사실 셋이 함께라면 어디에 있으나 천국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이 우리 셋이 제일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시기 같아요. 엄마도 일흔이 넘어가면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실 테고, 아인이도 앞으론 친구들과 보낼 날들이 더 많을 거잖아요. 저도 이제야 프리랜서로 지내는 노하우가 생겼으니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봐요. 저희뿐만 아니라 아인이 할아버지나 제 남편도 자기만의 질서를 찾은 시기인 것 같아요. 제가 처음 프리랜서가 되고 우왕좌왕할 땐 온 가족이 변화에 적응하느라 시행착오가 있었거든요. 근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그러진 퍼즐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아요. 모두가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아인이도 그걸 몸소 느끼고 있고요. 항상 ‘행복하다’고 그러거든요.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삼 예쁘네요. 아인이는 엄마랑 할머니랑 뭐를 제일 하고 싶어?

아인 괌에 가고 싶어.

윤이 코로나19 직전에 간 게 괌이었는데, 거기서 시간을 보낸 게 좋았나 봐요. 자주 이야기하더라고요.

신화 지금은 항상 셋이 함께니까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저는 아인이랑 윤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윤이가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게 제 기쁨이에요.

윤이 저희도 분명히 불평과 불만이 있던 시절을 겪었어요. 그런데 이젠 그런 게 생기더라도 터뜨리고 분출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젠 서로의 마음을 다 알게 된 것 같거든요. 엄마는 엄마니까 저를 배려하고, 저는 딸이니까 엄말 한 번 더 이해하려고 하고. 그런 과정들이 거듭되면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이 관계를 어떻게 이어 나갈 예정이에요?

윤이 아인이가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거든요. 초등학생이 되면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손 가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초등학생이 되고 우리가 애써 잡아둔 질서가 한 번 또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만의 관계를 잘 쌓아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신화 아직 결혼 안 하셨죠? 아이 낳을 생각이 있다면, 꼭! 꼭 딸을 낳으세요(웃음).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