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Through Neighborhood

Wander, Wonder
연희동의 하루

동네 자랑 좀 해 보련다.

오르막길이 너무 가팔랐고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지 슬슬 불안해질 때쯤 비디오 대여점 간판이 보였다. 비디오라니, 설마 아직도 영업 중인 가게는 아니겠지? 대여점 앞 자그마한 로터리 주변에 마을버스 몇 대가 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되는 아담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서울 도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수풀이 우거지고 한적했다. 다양한 새소리가 울렸고 매미가 얼마나 많은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버스 정류장 하나 거리를 지나자 좁은 계단이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졌고 그곳에 매물로 나온 집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이후 이사를 두 번 했지만 줄곧 연희동에 살고 있다.

산책로 너머로 제법 울창한 숲이 보였다. 그곳이 궁동산이라는 건 몇 달 뒤에야 알았다. 산? 애걔걔, 이게 산이야? 봉분보다 조금 더 솟은 산을 따라 걸으니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느긋한 걸음으로 30분이 걸렸다. 일부러 이동하지 않고, 등산화를 신지 않고 산행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등산에 별다른 관심은 없지만 걷기를 좋아하는 내 성향에 잘 맞는 동산이었다.

연희동엔 담장을 두른 단독주택이 많은데 담장 위로 각종 나무가 뻗어 나와 시야가 삭막하지 않고 골목이 번잡하지 않아 쾌적하다. 큰 상권이 형성된 동네(홍대 앞 공영주차장 한복판)에 살 때는 현관을 나서자마자 간밤의 증거인 온갖 쓰레기를 마주해야 했고 매일 저녁 활성화되는 압도적인 조명, 소음, 인파는 극한의 상황을 모른 척하는, 대단히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자는 성격에도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깔끔한 주택가의 생활은 매일같이 평온하다. 그 한결같은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안정감을 준다.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그리우면 옆 동네로 훌쩍 넘어가면 된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다.

궁동산은 안산으로 이어져 조금 더 본격적으로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안산 둘레길은 샛길이 많아 다양한 경로로 진입하거나 나갈 수 있다. 홍제천에서 조깅을 하다 안산과 궁동산을 통해 집에 올 수도, 궁동산에서 시작해 안산을 거쳐 홍제천으로 내려가 조깅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다. 답답한 시국에 그나마 시원한 개방감을 준 것이 이 코스였다.

작업 역시 집에서 하는 요즘, 높은 지대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창밖에 펼쳐진 지붕의 물결덕분에 간간이 내다보아도 답답하지 않고, 도시에서 나기 마련인 자동차나 인간의 소리 대신 매미와 새소리가 있다. 작업실을 굳이 집과 분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일지 모르겠다.

깨끗한 골목, 적당한 산책 코스, 우거진 식물, 다채로운 새소리가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면 진작 다른데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난 도시 체질이다. 다만 일상의 공간은 상권에서 살짝 벗어난 구역이되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도시의 편의가 펼쳐져 있길 바라는 것이다. 골목의 식물이 좋은 것도 그 초록을 지나 카페나 식당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8시에 문 여는 카페가 5분 거리에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단지 일찍 열 뿐 아니라 커피 맛도 내 입에 딱이다. 약, 약중, 중, 중상, 극상 등 드립커피의 농도를 그날그날 달리해 주문한다. 내가 커피를 입안의 질감으로 마신다는 것도 여기 사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카페오레의 우유 양을 많이 줄여 ‘쁘띠’라고 이름 붙인 나만의 메뉴도 생겼다. 여기 말고도 카페 라인업이 탄탄한 편이라 플랫화이트, 샤케라토, 아인슈패너 등 메뉴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진다.

점심은 주로 사 먹는다. 간이 세지 않은 나물밥, 느끼하지 않은 곰탕, 별미로 먹는 LA갈비, 푸짐한 삼계탕, 패티가 든든한 햄버거를 비롯해 차이나타운과 방불한 다양한 중국 음식점이 연희맛로를 중심으로 몰려 있다. 오향장육을 이곳에서 처음 먹었다. 그러고 보니 생면 파스타와 바질 페스토도 이 동네에서 처음 먹었다. 면적에 비해 먹을 데가 많다 해도 10년째 돌고 돌다 보면 지겨워지기 마련이라 간간이 옆 동네 식당을 찾아 다니다 보면 어느새 동네 식당이 생각나고 그새 새로운 곳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연희동은 외식보다 장보기에 좋은 동네인 것 같다. 대형마트가 없는 이 일대에서 사러가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넓지 않은 면적에 비해 여러 문화권에서 들여온 식재료가 풍성하다. 엔다이브 샐러드? 해산물 파에야? 렌틸콩 샐러드? 한우 스테이크? 월남쌈? 사러가와 주변 가게들을 한 바퀴 돌면 웬만한 식재료는 구할 수 있다. 다채로운 식재료에 반주가 빠지면 서운하다. 불과 몇 년 만에 반주계의 일인자로 떠오른 내추럴 와인과 크래프트 비어를 조달하는 곳 역시 집에서 5분 거리다. 지난 몇 년간 서대문구와 마포구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생활했다.

먹을 것만으론 건강한 일상을 꾸릴 수 없다. 밤의서점은 내가 아는 서점 중에 분위기가 정말 좋다. 가지 수가 많진 않지만 주인장의 안목으로 추린 서가를 훑어보며 내 관심사와 포개지는 책 한두 권쯤은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다. 몇 해 전엔 유어마인드가 연희동으로 이사 온 덕분에 출판계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창작물을 보며 좋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주치의처럼 내 모든 안경을 관리해 주는 안경사까지 한 동네에 있으니 아무래도 연희동을 벗어나면 생활이 곤란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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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