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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걸어야 볼 수 있는 것들

느리게 걸어야 볼 수 있는 것들

하루나 이틀의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쓸 수 있다면 무엇을 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그랬듯 지도를 펼치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지도는 복잡하게 그려진 선과 기호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만을 제공할 뿐이었고, 정작 그곳에 담긴 작은 것들의 목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불경 외는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어울림을 감상하는 일, 빈 나뭇가지를 통해 한 계절이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오후 4시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이 기록은 지난 계절, 이름도 따뜻한 햇볕의 마을 ‘보은’을 걸으며 내가 마주한 작은 풍경들이다.

첫 번째 산책길
법주사 가는 길

충청북도 보은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꼽는다면 속리산국립공원을 들수 있다. 떠나기 전에 산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물으니 이곳은 해발 1,000미터의 속리산 준령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언제나 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굳이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만한 산책길이 있다는 정보도 함께 들었는데, 마침 단풍이 절정이라 걷기에 더없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에서 탄 버스는 출발한 지 3시간여 만에 속리산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했다. 대나무로 짠 소쿠리 안에는 가을의 마지막 잎사귀들이 담겨 있었고, 맛이나 실컷 보라며 잘 익은 대추를 한 움큼씩 쥐어주는 상인들의 인심이 넉넉했다. 나는 마치 로컬시장을 구경하는 외국인 여행자처럼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쉬지 않고 대추를 씹었다. 정신없이 대추 한 봉지를 다 해치울 무렵에서야 상점거리가 끝나고 작은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속리교라고 불리는 이 다리를 지나자 그제야 그럴듯한 산책로가 시작되었다. 사계절 내내 폭신할 것 같은 잔디가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나는 잔디에 들어가 바보처럼 뛰다가 타이머를 맞춰두고 사진도 마음껏 찍었다. 작은 돗자리와 손수 만든 도시락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건 누군가와 함께 여행했을 때 더 즐거울 법한 일이었다.

매표소를 지나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십리(4킬로미터)의 절반 정도 거리라 하여 ‘오리숲길’이라고 불렸다. 곧게 뻗은 침엽수림 사이로 햇살이 은은하게 비춰들었다.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조금 걷다가 얕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법주사가 나온다.

넓은 경내에는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이라는 팔상전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들이 있었는데, 금동미륵대불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등산로 초입에 위치해 있어 꽤나 혼잡할 거라던 예상과 달리 경내는 한산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를 들었다. 낮은 염불 소리 사이마다 풍경이 바람에 스치며 청아한 울림을 더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다만 구름에 가려진 해가 흙바닥 위로 언뜻언뜻 나무 그림자 만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멀리서부터 하나둘 모여드는 등산객들을 확인한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 때는 오리숲 두 갈래 길 중 나머지 한 곳을 걸었다. 그곳에는 노란 오리 같은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작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학교에서 소풍 온 거야? 뭐 만들고 있어?” 나름 살갑게 말을 걸었지만 아이들은 그 또래 특유의 시크함으로 낯선 사람을 경계했다.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내가 왜 아저씨야, 형이지.” “몇 살인데요? 딱 봐도 아저씨구먼.” 그런 굴욕적인 대화가 오가는 중에 대뜸 한 아이가 물었다. “근데 고래는 잡았어요?” “응? 고래?”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가 그거였나,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래를 잡는 과정과 주의해야 할 점들,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 같은 기술적인 부분부터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따위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정성껏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호기심과 부러움, 공포가 한 데 섞인 눈빛이 되었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애국가는 꼭 외워둬라.”

두 번째 산책길
원정리 느티나무와 세중리

어느 날 우연히 본 사진 속에는 설원 위에 우두커니 선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겨울이었고, 모두가 앙상했는데 들판 위의 겨울나무는 눈 덮인 가지를 하늘로 펼친 채 한껏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그 풍경이 실재하는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그립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한동안은 그 나무에 빠져 살았다.

속리산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느티나무가 서 있는 원정삼거리 부근까지 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택시를 타는 것이었다. 버스가 다니기는 했지만 시간당 한 대뿐이고 그나마도 몇 번을 갈아타야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던 건 30킬로미터남짓한 거리를 2시간이 넘게 돌아서 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매점 아주머니께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인상이 무서운 기사님은 목적지를 듣더니 “거긴 가서 뭐하시려고? 볼 것도 없는데.”라는 말을 던지고는 말티재의 굽이고개를 무서운 속도로 돌았다. 택시는 저수지를 지난 다음에도 한참을 더 달렸다. 창밖에 는 추수를 막 끝낸 논과 밭이 누런 배를 드러내며 여유로운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내 눈은 연신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미터기에만 고정되어 있었고 풍경은 뒷전이었다. 생각했던 요금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택시는 한적한 시골 도로 한쪽에 멈춰 섰다. 그런데 막상 계산을 하려고 보니 현금이 부족했다. 시골의 택시는 카드 계산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말도 조금 더듬었는데, 기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미터기를 멈추더니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나처럼 말을 더듬었던 사람이 많았던 걸까. 나는 잠자코 택시가 향하는 방향만 주시했다. 택시는 인근의 마을로 들어가 ATM기 앞에서 멈췄다. 나는 요금을 계산한 뒤에 기사님께 걸어서 느티나무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걸어가려면 멀 텐데. 태워다 줄게요.” “마을 구경 좀 하다가 가려고요.” 그러자 기사님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일러주며 너무 늦어서 차를 놓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후에 살펴보니 내가 걸었던 곳은 세중리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후에 살펴보니 내가 걸었던 곳은 세중리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촘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휑하지도 않게 집들이 모여 있었고, 경운기와 호박밭, 작 은 송아지와 다리가 짧은 강아지도 한 마리 있었다. 그리고 크기는 작지만 세종대왕이며 이순신 장군, 책 읽는 소녀와 공산당이 싫다던 이승복 어린이 동상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초등학교도 하나 있었다. 단층 짜리 건물에 전교생이 몇 명일까 헤아릴 것도 없이 두 개의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실 안쪽에서 참새처럼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르게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느티나무가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버스정류장 두 개 정도의 거리를 걸을 동안 도로 위를 달리는 건 경운기 한 대와 할아버지의 느린 자전거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가 보이는 언덕 위에 섰을 때, 나는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어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나무는 생각보다 작았고 주변 풍경은 사진 속 설경에 비하면 턱없이 평범한 모습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 나무에서부터 걸어 올라온 한 남자가 내 곁을 스치며 혼잣말인 듯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어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아…’라는 감탄사로 얼버무렸고 뭐라고 덧붙일 새도 없이 남자는 도로를 따라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추측건대 내 어깨에 멘 카메라를 보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출사를 나온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남자는 우리가 너무 늦었다고 말해버렸고, 나는 그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사진과는 전혀 다른 풍경 때문에 느꼈던 허탈한 감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눈은 오지 않았고, 어쩌면 눈이 온다 해도 사진과 똑같은 풍경은 없을 테지만, 적어도 남자의 말처럼 늦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산책길
오후 4시의 삼년산성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새벽 2시와 오후 4시다. 새벽 2시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고 싶은 시간이라면, 오후 4시에는 누구의 이야기라도 오랫동안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새벽 2시에는 잠을 자고 오후 4시에는 졸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 시간들을 즐기려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이번 여행의 오후 4시를 삼년산성에서 맞았다. 보은 시내에서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는 이 산성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축산성으로, 축성한 지 3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하여 삼년산성으로 불렸단다. 산성은 오정산 능선을 따라 이어졌는데, 거리가 멀지 않아 천천히 걸어서 둘러보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사실 나는 어떤 역사적 의미를 새기며 산성에 올랐다기보다는 하루 중 햇살이 가장 풍부한 시간 동안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확인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확실히 오후 4시는 주변의 작은 것들이 빛나는 시간이었고, 그것들에 시선을 빼앗겨 발길을 늦출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나란히 늘어선 화분 속에 담긴 것이 사실은 조그만 채소들이었다는 것. 어딘가로 떠나버린 듯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모두 밭에 숨어 흙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 길을 가르쳐주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뜻밖에 미성이라는 것. 그리고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시는 물 한 모금의 기쁨. 

사방으로 탁 트인 전경을 내려다보며 나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걸었던 곳이 저기 어디쯤이었지 가늠해보기도 하고, 친구에게 막 찍은 사진을 전송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순간들 때문에 하마터면 서울로 올라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칠 뻔했다. 버스터미널까지 정신없이 뛰어가면서도 문득 고개를 돌리면 폭죽처럼 터져 나온 가을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지막 잎 하나까지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가 본 가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법주사 가는 길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01 시외버스를 이용할 경우 속리산터미널에서 하차하면 된다. 만약 보은 시내에서 속리산으로 이동할 예정이라면 말티재를 경유하는 농어촌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농어촌버스는 교통카드 이용이 가능하다.
02 법주사로 이어지는 오리숲길은 평지로 조성되어 있어서 유모차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법주사 입장료 어른 4천원, 어린이 1천원
03 속리산 등산은 코스별로 난이도와 소요시간이 다르므로 사전에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오르는 것이 좋다. 법주사를 시점으로 등반하는 코스가 많으며, 탐방코스는 홈페이지(songni.knps.or.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정리 느티나무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

원정삼거리에서 보정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하나 건너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로드 넘버원》의 촬영지였다. 속리산에서 택시를 탈 경우 2만50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온다. 보은 시내로 가는 버스가 매시간마다 있지만 언제 도착할지는 마을 사람들만 안다. 버스정류장은 도로 한쪽에만 있으며 반대방향 버스를 이용하려면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멀리서 버스가 오면 길을 건너서 타야 한다.

삼년산성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보은군청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가는 길에 이정표가 붙어있어서 찾기 어렵지 않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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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