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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오르는 일
오름에 오르는 일
우연히 제주도 지역 라디오 방송의 통신원을 하게 되었다. 가끔 전화 연결을 통해 오늘 날씨는 어땠는지, 동네에 특별한 사건은 없었는지 등 주변의 사소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디제이가 예정에 없던 질문을 던졌다. “어떤 오름을 가장 좋아하세요?” 잠깐 당황했지만, 대답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저는 백약이오름을 좋아해요”, “왜죠?”, “그곳에 오르면요, 이 넓은 섬에 저 혼자만 있는 것 같아요.”
신화 같은
오름
180만 년 전, 남쪽 바다 아래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 섬이 하나 생겼다. 섬 가운데 용암이 분출된 흔적인 커다란 분화구가 한라산 백록담이고, 섬 여기저기서 잔열이 보글보글 끓어오른 흔적들이 오름이다. ‘한라산 꼭대기를 커다란 숟가락으로 한 숟갈씩 퍼서 내려놓았더니 오름이 되었다.’는 제주 신화를 들을 적이 있는데 오름을 볼 때마다 이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이토록 귀여우면서, 놀랍도록 오름을 잘 표현한 신화라니.
제주에는 그런 오름이 400개 가까이 있다. 산 하나에 딸린 기생 화산 개수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주를 꽤나 여행했다는 사람들조차 “정말? 좀 과장된 것 같은데.”라며 반신반의한다. 어떤 이는 “제주도 어디에 오름이 있다는 거야?”라며 제주를 여러 번 여행했지만 오름을 본 적이 없다고도 말한다. 반면 제주 어디에서든 오름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제주에서 오름은 바다만큼이나 흔하다. 아주 흐린 날만 아니라면 멀리 한라산 근처로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낮은 산들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오름이다.
오름 꼭대기에는 분화구가 있어 그 주위를 한 바퀴 돌아 걸을 수 있다.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한라산도 보이고 바다도 보이고 중산간의 논과 밭, 그리고 주변의 다른 오름도 보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높이에서 새로운 얼굴의 제주도를 보는 순간, 마치 나 혼자만 그 매력을 알아차린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어쩌면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비슷하다.
제주의 친구들에게 “어떤 오름을 가장 좋아해?”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모두 다르다.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거문오름, 아부오름, 노꼬메오름…. 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름은 대부분 가장 먼저 가본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오름이든 처음 그곳에 올라 내려다본 제주 풍경은 내내 잊기 어렵다. 정말이지 첫사랑과 같다. 나의 백약이오름처럼.
나의 첫 오름
제주도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빌린 차를 타고 중산간 도로 어디쯤을 달리다가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나는 동시에 소리쳤다. “잠깐!” 초록 능선의 아름다운 오름 중턱에서 황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갑자기 마주친 그림 같은 풍경에 홀려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는 그만 잊어버리고 오름 아래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렇게 만난 나의 첫 오름. 입구에 ‘백약이오름’이라는 표지판이 있고 백 가지 약초가 나는 오름이라 그리 이름 지어졌다는 설명이 쓰여있었다.
아래에서 보기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오를 수 있었던 건,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 덕분이었다.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면 제주의 중산간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느라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고, 그러는 동안 땀은 제주의 바람에 금세 식었다. 우리는 오름의 정상에 올라 완만하게 펼쳐진 풀밭 위에 앉았다.
그때 맞은편에 바다가 보였었는지, 성산일출봉이 보였었는지, 등 뒤로 한라산이 보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중산간의 푸른 초원과 주변의 아기자기한 오름과 그사이를 가로지르는 이차선 도로가 보였다. 차는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고 오름에는 우리뿐이었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은 제주지만, 이곳에 오르니 이 섬에, 이 아름다운 섬에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느껴지던 짜릿함에 우리는 한참 동안 저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람을 맞으며 벌렁 드러누워 있던 남자친구는 “나중에 결혼해서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이곳에 와 있을 테니 찾으러 와”라고 했다.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백약이오름에 앉아 처음으로 ‘이 섬에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시 만난 백약이
그로부터 몇 년 후 정말 제주에서 살게 된 어느 날, 그날도 중산간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오름이 보였다. “잠깐만” 차를 세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여기 백약이오름이구나.’ 웃음이 났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왜 이 곳을 좋아했는지 다시 떠올랐다. 호젓했던 월정리 바다에 화려한 카페들이 생기고, 아름다운 애월 산책로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생기는 요즘의 제주에, 언제 와도 한결같이 홀로 서 있는 오름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또 든든한지.
그 후로도 자주 백약이오름을 찾았다. 제주에 여행 온 지인들과 함께인 날도 있었고, 날씨 좋은 어느 주말 둘이서 같이 오기도 했다. 가끔은 혼자서도 왔다. 오름은 푸르렀고 누렁소는 여전히 그곳에서 ‘급할 게 뭐 있느냐.’라는 걸음으로 천천히 풀을 뜯고 있었다.
용눈이오름에서
어느 날 친구가 연락도 없이 제주도에 왔다. 하루만 자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얇은 단화를 신고 온 그녀와 함께 이번에는 용눈이오름으로 향했다. 제주의 친구들이 최고의 오름으로 가장 많이 꼽는 곳이어서 나도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마음에 담아 둔 터였다. 완만한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 정상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목이 말라 주머니를 뒤지니 작은 귤이 하나 있었다. 귤 하나를 까서 나눠 먹으며 한라산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몸을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며 앉기도 했다. 원래는 오름을 잠깐 걷고 나서 어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하려고 했는데, 그곳에 앉아있자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온 지인,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과 종종 용눈이오름을 오른다. 구두를 신고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수월하고, 아이들이 혼자 뛰다가 풀썩 넘어지더라도 온통 낮은 풀밭이라 괜찮다. 게다가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이 유난히 아름다워 처음 만나는 오름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
많은 말은 하지 않고, 그들을 오름 앞에 내려놓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천천히 용눈이오름을 오르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올라온 길을 바라본다. 그런 나를 보던 동행도 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의 표정이 화사해진다. 저마다의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 순간을 지켜보는 일이 참 좋다.
백약이오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
제주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오름이다. 가끔 정상에서 풀을 뜯어 먹는 소 떼를 만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방해하지 말자.
찾아가는 길 오름의 경우는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어려운 곳이 많은데, 특히 백약이오름은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힘들다. 렌터카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이용하면 이동할 수 있다. 택시의 경우 구좌콜택시를 불러 타면 된다. 요금은 보통 미터기를 따르지 않는데,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난도 등산로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눈이오름보다 난도가 있는 편이지만 백약이오름 역시 편한 옷차림과 운동화 정도로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용눈이오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산28
제주의 중산간과 오름 사진을 찍었던 故 김영갑 작가가 가장 좋아했던 오름. 여행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오름이기도 하다.
찾아가는 길 710번이나 710-1번 버스 중 하루 10번쯤 운행하는 송당 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남동산’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정류장마다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 헷갈릴 수 있으니 기사님께 여쭤보는 편이 좋다. 대개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난도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용눈이오름의 경우 계단도 없을 정도로 등반 난도가 매우 낮다. 길을 따라 천천히 분화구 둘레를 산책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30~40분 정도면 충분하다
에디터 이현아
글 정다운 사진 정다운·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