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brant and rough colored

발랄하고 괴팍한 색

BOOK&MOVIE

<레이디 버드>,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

Vibrant and rough colored

발랄하고 괴팍한 색

자기파괴적인 괴짜는 사절이다. 진짜 괴짜들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제멋대로 산다. 진짜 괴짜들은 그래서 발랄하다. 배우 그레타 거윅의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레이디 버드, 그리고 캐나다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모두 그런 괴짜들이라서, 이 괴짜들과 보내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아마 10년도 더 전의 일일 것이다.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여자가 짧은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냥 핑크가 아니었다. 아주 뜨거운 핫핑크, 쇼킹 핑크 뭐 그런 색이었다. 여자는 펑키한 단발 파마 머리에 날씬했고, 핑크는 아주 강렬했으며, 그런데도 야하기보다는 무심했다. 여자에게는 파마 머리와 핑크색 원피스, 그리고 굽이 높은 검정색 구두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래서 더 멋있었다.

여자는 곧 전철에서 내렸고 그 여자를 본 시간은 기껏해야 5초 정도였을 텐데 나는 지금까지 그 여자를 기억한다(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렇게 오래된 기억은 자꾸만 선명해지는 이유는 점점 기억력이 좋아져서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채색을 방패 삼아 튀어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또 그런 것에 평온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핑크색 원피스를 입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런 것에 감탄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핑크색 원피스 따위야 뭐, 하는 느낌으로 당당해서 또 한 번 더 감탄했다. 

내 옷걸이의 옷들은 모두 무채색이다. 딱 한 벌, 아주 짙어서 검은빛마저 도는 붉은색의 번들거리는 긴 스커트가 있기는 하다. 내가 그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아빠는 질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무당집이냐?” 

배우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의 컬러가 바로 핑크라는 생각을 했다. 본명 대신 스스로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자신을 소개하는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아마 그레타 거윅 자신의 기억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미국 서부의 새크라멘토라는 소도시에 사는 소녀의 한 시절을,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다가 끝내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레이디 버드의 머리칼에는 핑크 컬러가 섞여 있다. 엄마와 말다툼을 벌이다 홧김에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 뒤(대단한 여자애다) 부러진 팔에는 핑크색 석고로 깁스를 했다. 방 벽은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고, 졸업 파티에 입고 가는 드레스는 당연히 핑크색이다.

이 소녀는 좀 독특하다. 아니, 실은 괴짜다. 잘나가지만 깊이 없는 속물 친구들도 그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쟤 좀 이상해.” 레이디 버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자괴감과 자만심을 오간다. 얼굴과 목과 어깨에는 늘 힘이 들어가 있다. 레이디 버드는 숨도 안 쉬고 하고 싶은 말부터 시작한다. 몸은 늘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무언가를 쫓으려는 듯. 그래서 레이디 버드는 그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선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레이디 버드는 이 인생의 열렬한 구애자다. 그리고 대개 열렬한 구애자들은 구애의 대상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하게 마련이다. 

레이디 버드가 다니는 가톨릭 학교의 친구들은 모두 부자다. 하지만 엄마는 돈이 없다며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고, 동부에 있는 대학으로 가겠다는 레이디 버드의 계획을 결사반대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집안 형편은 아빠가 일자리를 잃으면서 더더욱 기운다. 귀엽고 착한 남자애와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게이다.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멋있고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남자애와 생애 첫 섹스까지 했는데, 그는 레이디 버드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의 시선은 꿈을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소녀를 둘러싼 현실은 구질구질하다. 모든 소녀 시절이 그러하듯이. 여드름 자국이 있는 얼굴,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매, 원하는 대학에 가기에는 모자란 성적,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내가 친한 사람 사이의 간극, 부족한 용돈, 아무리 해도 잘 지낼 수 없는 부모, 갑갑한 학교, 엇갈리는 애정 관계, 단조로운 매일매일. 그런 레이디 버드에게 핑크란 일종의 발악 같은 것이다. 나는 평범해지지 않겠어.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이룰 거야. 그리고 현실에서 점프해 꿈으로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입장권의 색깔도 핑크일 것이다.

바라고 바라던 뉴욕의 한 대학에 합격한 레이디 버드는 소녀 시절의 분홍색 방을 흰색으로 칠하고 떠난다. 어른이 된 그녀는 이제 사람들에게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소개하는 대신, 진짜 이름을 말해준다. 독특하던 촌뜨기 소녀 레이디 버드는 이 낯설고 커다란 도시에서 쓸쓸하고 울적하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레타 거윅의 사랑스럽고 똑똑한 첫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주 기분 좋은 질투심을 느꼈다. 열정적이면서 열심이기까지 한, 매력적인 여자의 성공 앞에서는 즐겁고도 신나면서 동시에 좋은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영화에는 그 누구도 아닌 그레타 거윅만의 색이 배어 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호흡과 리듬이, 발랄하고도 괴팍한 속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자기만의 색깔을, 매력적이면서도 적합한 방식으로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랫동안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진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렵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치지 않는 즐거운 주제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어느 책인지, 어느 영화에서인지 어떤 사람의 영혼은 유달리 강렬한 색이라는 대사를 본 적이 있다. 내 생각에는 글렌 굴드 같은 사람도 강렬한 색의 영혼을 가졌을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갑자기 글렌 굴드라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글렌 굴드에 대해 아는 것은 딱 두 가지다. 피아노를 엄청나게 잘 친다는 것. 그리고 아스퍼거 증후군이 의심될 정도로 사회성이 바닥인 괴짜 중의 괴짜라는 것. 

나는 도서관에서 글렌 굴드에 관한 책 두 권을 빌렸고, 그중 한 권은 대충 훑어보다가 옆으로 치워버렸다. 남은 한 권이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이었는데 아주 두껍고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작가의 성실한 자세와 충실한 번역을 높이 사고 싶은 책이다. 심리학자이자 의사이면서 음악에 조예가 깊던 작가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활용해, 그리고 글렌 굴드와의 친분까지 활용해 한 괴짜 천재의 흥미로운 전기를 만들어냈다.

글렌 굴드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이었다. 20대에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그는 금세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괴짜였다. 그가 연주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는 한여름에도 두꺼운 옷에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그의 피아노 의자는 그 위에 앉으면 피아노 건반에 매달린 느낌이 들 정도로 낮았고, 그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의자 솜이 다 빠져 뼈대만 남을 정도였다. 연주하는 내내 그는 피아노 위에 엎어질 듯한 자세였고, 한 손이 연주할 때 다른 한 손은 종종 지휘를 했으며, 연주에 몰입하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다리를 꼰 채 연주를 할 때도 있었다. 

동시에 그는 언제나 자신의 건강에 대한 망상과도 같은 걱정에 빠져 있었고, 사람들과 제대로 사귈 줄 몰랐다. 그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고독을 즐기는 일을 더 사랑했다. 말년에는 건강염려증에서 비롯된 약 복용이 과해져 건강이 점점 나빠졌고, 어느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천재 괴짜의 특징답게 나빠지는 몸을 돌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글렌 굴드는 51세에 뇌일혈 발작으로 죽었다. 

그의 현실감각은 어른보다는 어린이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고 꿈꾸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배가 조금만 아파도 의학적으로 응급상태라고 생각했고,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청중은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연주회장에 온 것이라고 보았다. 글렌은 자신의 역할 – 피아노의 대가이자 음악평론가, 작곡가, 소설가, 그리고 의학 전문가 – 로 상상했지만 무엇이 꼭 맞는지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카멜레온 같은 그의 기묘한 행동은 때론 매우 매력적이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에게 숨어 있는 불안과 다치기 쉬운 감정을 묻어버리는 구실을 하고 말았다.

– 피터 F 오스왈드,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 중에서

나는 이 비범한 괴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헤쳐 나갔는지를 나름대로 즐거운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그는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원하는 과시적인 인간인 동시에, 타고난 은둔자였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특별한 색채를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종종 그와 나를 동일시하곤 한다. 물론 재능이 아니라 그 괴팍하고 부정적인 성격을 말이다. 종종 남의 감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를 주는 것, 남들에게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 건강이나 비행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것, 유치한 과시욕이나 인정욕구 같은 것들까지도. 

밤마다 이 두꺼운 책을 야금야금 읽으면서 글렌 굴드가 생전에 녹음한 앨범들을 하나씩 찾아 들었다. 다른 어떤 음악보다 그를 유명하게 해준 바흐의 음악들이 가장 좋았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는 완벽하게 무지해서 다른 연주곡을 들을 때면 졸리거나 기분이 가라앉곤 했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는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그 유명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 음악에는 따뜻함과 밝음, 깨끗함과 맑음, 아름다움, 슬픔 그리고 고요함이 혼재했다. 들을수록 나는 이 곡을 사랑하게 됐다. 글렌 굴드가 직접 쓴 ‘음악의 목적은 아드레날린을 순간적으로 분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경이롭고도 고요한 상태를 점진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것’이라는 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예술이란 인간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내적 연소이지, 천박하게 밖으로 드러내서 대중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음악의 목적은 아드레날린을 순간적으로 분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경이롭고도 고요한 상태를 점진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 피터 F 오스왈드,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 중에서

글렌 굴드는 어느 순간부터 청중이 있는 연주회를 기피하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연주를 녹음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곧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미디어였던 TV에 푹 빠졌다. 굴드는 아예 방송국에 상주하며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면서 건강에 집착하고, 건강에 집착하면서도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가 모든 열정을 음악에 온전히 쏟아부었더라면 베토벤처럼 말년에 다다를수록 음악적으로 완결되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워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력 관리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니까. 

스스로 즐기면서 동시에 아주 잘해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가 들어서도 반짝이는 눈빛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해낼 수 있을까. 나의 발랄하고 괴팍한 색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색은 점점 바래가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갑자기 10년 전 지하철에서 목격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그리 젊지 않았다. 그 여자는 최소한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의 몸은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그 여자는 당장이라도 하이힐을 벗어 들고 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가 그 여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원피스 색깔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소녀가 아닌데도 그 여자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여자가 몸을 뒤로 젖힌 채 팔짱을 끼고 있었더라면 내가 지금껏 그 여자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ㅣ2018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기 때문일까. 매사에 적극적인 크리스틴은 타인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스스로 만든다. 이제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그녀의 발버둥이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
피터 F.오스왈드ㅣ을유문화사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피터. F 오스왈드는 굴드의 음악에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에너지와 이야기를 파헤친다. 그의 주관적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객관적인 굴드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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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