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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불시착
가열차게, 혹독하게, 필사적으로, 우리는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이 이번 생의 마지막 여름이라는 각오로, 젊음이 올해를 끝으로 사그라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토록 비장한 각오로 우리는 이국의 파란 바다를 찾는다. 하지만 휴양지라는 곳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몹시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푸른 바다와 하얀색 백사장은 무척이나 안전하다. 불쾌한 표정으로 면박을 주는 괴팍한 식당도 없고, 알 듯 모를 듯한 오묘한 표정으로 모험을 부추기는 호객꾼도 없다. 100미터를 걸어 들어가도 물에 빠지기는 쉽지 않다. 자연 앞에서 무자비하게 소비되는 젊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느 영화에서였던가? 2000년대 초반에 개봉한 영화 <비치>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금지된 지도를 손에 얻고 비밀의 섬을 찾아간다. 그는 현지인의 눈을 피하고, 높은 폭포에서 몸을 던진 후에 지상낙원을 만났다. 간발의 차이로 우리 세대는 모험을 놓쳐버렸다.
조식을 먹고 스쿠터를 빌렸다. 쉽게 닿지 않을 곳을 찾아 조금 더 들어가 보고, 인상에 남을 만한 몇 개의 풍경을 만났다. 우리는 그때마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쳤다. 안락함에 대한 죄책감으로 우리는 부지런을 떤다. 이미 낙원 같은 장소를 이리저리 떠도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스케일이 커지면 섬과 섬 사이를 이동하기도 한다. 늦은 밤 나와 친구는 침대에 앉아 다음 모험을 계획했다. 여긴 다 돌아봤 으니까, 여기도 가봤으니까…. 구글 맵을 켜고 우리는 땅의 지형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육지보다는 바다에 집중해가며, 육지를 움푹 파고든 파란색 지형을 찾아 마사지하듯 폰을 주물렀다. 그리고 현재 머물고 있는 섬의 바로 옆에 괜찮은 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여행이 부럽다. “It was so amazing. You must go there.” 어느 날 얼굴이 붉어져 돌아온 떠버리 관광객의 한마디로 다음 장소를 정했을 것 같다. 그곳에 가려고 일행을 모집하고 교통편을 수소문했을 것 같다. 일행 중 몇 명이 사라지고 그중 몇 명은 다음 숙소에서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겐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술과 담배가 모두의 가방 구석에 있었을 것 같다. 누군가 어깨가 쑤신다면 이걸 발라보라며 가방 깊숙한 곳에서 비린 액체를 꺼내 발라줬을 것 같다.
우리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그 많은 일을 했다. 많은 숙소를 검색하고 가격을 비교하느라 그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미 예약된 숙소를 취소하고, 취소 수수료를 물지 않으려 메일을 썼다. 답장이 돌아오고 취소가 확인된 후, 작은 섬의 숙소를 예약했다. 떠버리 여행 자가 되어 늘어놓아야 할 모험 후기가 요즘은 모두 데이터로 소진되어버리는 것 같다. 다행히도 이번 여행의 경우 몇 개의 무용담은 데이터로 변환되지 못했다. 그 덕에 이번 여행은 글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변환되지 못한 데이터- 다음 날 비행기는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에 내려주었다. “클라크 에어포트?” 필리핀 어느 도시의 이름으로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친구는 울다시피 말했고, 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가뜩이나 휴양지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공항 입구에서 마주한 풍경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단정하게 손질된 가로 수와 넓고 깨끗한 길. 제각기 걸어가는 하굣길의 학생들. 방금 전까지 모래 위를 뒹굴던 우리에겐 차라리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단위로 계획된 미국식 주택들이 잔디밭을 끼고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집집마다 구비된 주차장엔 볼보와 사브 같은 얌전한 차들이 반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클라크는 몇 년 전까지 미 공군이 주둔하던 군사 도시라고 한다.
우리는 석양을 등지고 터덜터덜 걸었다. 깨끗하고 안전한 이 길이 곧 끝나기를 기대하며, 이 길의 끝에서 마주할 작은 강 하나 정도를 상상했다. 이왕 버린 하루라서 그런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 우리는 모험가로서 절대로 대면해서는 안 되는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저 멀리 한국 음식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갈비 냄새가 맛있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모든 희망이 무너졌다. 이제 내려놓을 대로 내려놓은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우리는 갈비와 냉면을 주문했다.
식사를 기다리며 하루 동안 머물 숙소를 예약했다. 창밖의 식당 종업원은 비현실적으로 노란 햇살에 얼룩을 비춰보며 창문을 닦고 있었다. 식당 앞 잔디 깎는 기계는 이미 잘 정돈된 잔디밭을 또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 구석에 눕혀놓은 우리의 지저분한 배낭을 보면 좀 치워달라고 부탁할 것 같았다. 곧이어 기대치도 않은, 꽤 제대로 된 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는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허겁지겁 젓가락을 휘젓기 시작했다. “우리 처음으로 제대로 쉬는 거 같지 않아?”
차가운 육수를 먼저 한입 들이켠 친구가 힘겹게 입을 땠다.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