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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플래닛, 초원의 집
BOOK
《헝그리 플래닛》, 《초원의 집》
THINGS
I HAVE
내가 가진 것들
어떤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것 같아 서럽고, 또 어떤 때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럽다. 그럴 때 내가 책을 찾는 이유는 그 책들이 내게 다른 인생과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좁은 시야와 그보다 더 좁은 마음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매번 느끼는 것은 당연하게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나는 바로 어제까지 내 몸의 반만 한 배낭에 든 것들만 가지고도 잘 살았다. 여행지에서 내가 묵었던 호텔과 여관방에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때로는 침대와 침구, 천장에 붙은 팬이 전부인 방이었다. 그 방들에 나는 여행지에서 산 물건들을 하나씩 들여놓기 시작했다. 새 옷, 집에 가져갈 장신구, 책, 선물, 편의점이나 시장에서 산 간식들. 마치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내가 가진 것들에 숨이 턱 막힌다. 나는 대체 언제 이것들을 다 사들인 걸까? 짬을 내어 방을 정리하기로 한다. 쉽지는 않다. 지금은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들과 없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물건들을 정리하고 수납할 공간을 마련하느라 나는 매일 머리를 쥐어짜고 또 돈과 노력을 쓴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내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싶다. 일종의 완벽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동시에 나는 단순함과 완벽함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갖고 싶은 물건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널려 있는 이 소비사회에서 나 홀로 섬처럼 독야청청할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왜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는가. 왜 수사들이 고요한 수도원의 벽장 같은 방에 은거하며 매일 밭을 갈겠는가. 그들처럼 신실하고 진지한 사람들에게도 세상 속에서 살면서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아서 돌돌 말아 올린 채로 들판을 뛰어다니던 예쁜 소녀들은 기억이 난다. 마차와 통나무집과 초원의 풍경도 기억이 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잠들기 전 잠옷을 입고 머리에 꼭 맞는 수면용 모자를 쓴 소녀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던 장면이다.
이제 잠을 자려고 합니다.
제 영혼을 지켜 주세요, 주님.
제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죽거든
제 영혼을 맡아 주세요.
– 로라 잉걸스 와일더, 《초원의 집》 중에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도 없고 기도를 해본 적도 없지만,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제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떤 것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조금은 부럽다. 의심 없이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더 큰 것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은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책이다. 무려 9권이나 된다. 나는 이제 3권까지 읽었다. 아이들과 함께 간 어린이도서관에서 옛 추억이나 되새겨볼까 싶어 빌렸는데, 손에 잡자마자 푹 빠져버렸다. <삼시세끼>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나 비슷하다. 읽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근심, 시름, 걱정 같은 게 날아간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아버지가 직접 지은 숲 속 작은 통나무집에서 로라네 가족은 조상들이 살 아온 그대로 산다. 사냥하고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마련하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입을 옷을 직접 바느질해 만든다. 온종일 쉴 틈 없는 자급자족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로라의 부모님은 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주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들짐승의 습격, 인디언의 위협, 메뚜기떼의 공습에 모든 것을 버리거나 잃었을 때도 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로라와 언니 메리가 머리에 달 수 있는 예쁜 리본은 딱 하나다. 딱 하나뿐이라서 그 리본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리본을 달 수 있는 날은 교회에 가거나 파티에 가는 날 뿐이다. 아이 둘에게 수업에 필요한 석판 하나를 살 돈을 내어주면서도 아빠는 큰 결심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로라와 메리는, 그리고 이 가족은 불행하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가난이 한 인간의 품위를 결정짓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쓰지 않는 크레파스만 해도 10박스는 있다. 다 어딘가에서 받은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물건의 소중함, 아껴 쓰는 기쁨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그리고 또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나, 하고 생각한다. 입지 않는 옷, 들고 다니지 않는 가방, 쓰지 않는 그릇. 많이 가진 것이 죄인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 우리가 생존의 위협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가난은 한 가족의 품위를 해치지 못했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의 가난은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노동의 배신》에 쓴 대로 공포의 냄새를 풍긴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사들인 것들의 관리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넣을 공간이 필요해서 집을 늘려야 하고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또 다른 물건을 사들여야 한다. 더 열심히 일해서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에 마음을 쓸 여유가 줄어든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 메뚜기는 가 버렸고, 내년에는 아빠가 밀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였고, 만찬에는 굴 요리를 먹게 될 것이다. 선물도 사탕도 없지만, 로라는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사탕 덕분에 아빠가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뻤다.
– 로라 잉걸스 와일더, 《초원의 집》 중에서
초원의 집에 사는 로라네 가족은 가진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이 소중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정든 집을 떠날 때도 몇 시간 만에 짐을 꾸려 출발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매일 매일을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현대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종종 모든 걸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서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늑한 집과 풍족한 먹을거리뿐인 인생은 어떤 느낌일까.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피터 멘젤과 페이스 달뤼시오의 사진집 시리즈를 좋아한다. 그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 가정이 가진 물건들을 집 앞에 몽땅 끄집어내어 찍은 사진들로 유명해졌다. 《헝그리 플래닛》은 그들이 호주, 차드, 중국, 쿠바, 프랑스, 그린란드, 부탄, 멕시코, 미국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사정을 가진 가족들의 일주일 치 식량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각 가족과 그들이 사는 나라의 사정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가정이 일주일 동안 소비하는 음식 중에서 조리하지 않은 날것이나 신선한 채소류는 거의 없다. 말리나 차드, 부탄과 에콰도르 같은 나라의 가정에 비한다면 그들은 높은 열량의 육류와 탄수화물, 그리고 패스트푸드를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기에 이 책에 실린 가족들의 식생활의 격차는 너무나 크다. 탄산음료와 정크푸드 섭취로 인한 비만과 싸우는 멕시코 사람들과 호주 원주민들, 전통적인 식단과 현대적인 식단을 적절히 조화시킨 부유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만을 섭취하는 수단 난민촌 사람들과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부탄 사람들.
계절에 따른 부족함과 국지적 가뭄, 병충해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굶주림이라는 오래된 문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동시에 반어적으로, 우리는 과도한 소비의 문제에 직면했다. 내일이면 먹을 게 없을지 모르니 지금 먹고 또 먹으라고 명령하는 우리 조상 침팬지의 유전자가 남아 있어 우리는 끝없이 먹는다. (중략) 먹는 문제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 피터 멘절·페이스 달뤼시오, 《헝그리 플래닛》 중에서
냉장시설도 없이 널빤지 위에 고기를 늘어놓고 파는 아프리카의 거대하고 활기차며 또 기이한 고기시장, 보잘것없는 천막 앞 모랫바닥에서 삼시 세끼 먹는 밋밋한 죽을 끓이는 수단의 어머니, 날생선을 통째로 뜯어먹는 그린란드의 어린이, 숲에 살 때는 고기가 다 떨어지면 방목장에 가서 캥거루 한 마리를 잡아오면 되었지만, 지금은 KFC 치킨과 맥도날드 햄버거에 중독된 거대한 몸집의 호주 원주민.
이 사진들은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것을 넘어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세상은 좋은 말로 이토록 다채롭고, 나쁜 말로 이토록 불평등할까? 한쪽에서는 넘쳐나는 음식이 왜 다른 한쪽에서는 모자랄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얼마나 많은 음식이 필요할까? 먹는 것은 곧 사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세계의 다른 한쪽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거기에 우리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공산정권 치하의 어려운 시절을 겪은 폴란드의 한 엄마는 아이들을 걱정한다.
생활이 어려운 만큼 작은 즐거움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초콜릿 한 조각이나 민트 캔디 한 알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마르제나가 말한다. 마르제나는 그런 작은 즐거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르제나는 풍요로운 시대에 자란 딸 클라우디아가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클라우디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사탕은 그냥 사탕일 뿐이고,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죠. 우리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우리들 세대에게는 지금도 그런 게 특별한 것들이지요.”
– 피터 멘절·페이스 달뤼시오, 《헝그리 플래닛》 중에서
요즘 두 편의 드라마를 즐겨 본다. 이 글이 실린 잡지가 나올 때쯤이면 두 시리즈 모두 끝나있을 것이다. <송곳>과 <응답하라 1988>이다. <송곳>은 언제나 날카로운 송곳으로 내 가슴을 찌른다. 실직 중에 실직자 수와 불안한 경제 전망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다. 반대로 <응답하라 1988>을 보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또 그 옛날을 추억하게 된다. 풍로로 밥을 짓고, 단칸방에 살고,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집집마다 사정이 빤하던 그 옛날을. 사실 그 옛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시절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왠지 이 드라마를 보면 그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런 것에 속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쓴다. 술에 취했는데 비틀거리지 않고 걸으려는 느낌과 비슷하다. 추운데 춥지 않은 척하거나, 떨리는데 떨리지 않는 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은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따갑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따가운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만의 작은 판타지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초원 위 로라의 가족들과 쌍문동 골목길 가족들과 부탄의 가족들과 내 가족들이 거쳐 온 시간 같은 것들.
시장에 갈 때마다 채소 가게 앞에서 시든 배춧잎을 당당하게 주워오던 엄마의 모습, 아빠가 켜주었던 난로, 목욕을 할 때마다 엄마가 가스 불에 데워주었던 물, 아빠가 깎아주었던 연필과 엄마가 찜통에 쪄서 만들어주었던 카스텔라, 버스를 타고 가던 소풍, 놀이터나 장난감 없이도 동네 아이들과 온몸의 불이 다 빠져나가도록 매일 매일 달리며 놀던 일.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추억들을 성냥처럼 하나씩 꺼내어 마음의 불을 지피는 데 쓴다.
《초원의 집》을 읽다 보면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또,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는 부모인지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거라고, 이달이 지나면 다음 달이 올 거라고,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거라고, 올해가 지나면 내년이 올 거라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그냥 그렇게 살면 아이들에게 남겨줄 추억이 참 많을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이렇게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린이 노래를 그쳤을 때 로라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빠, 올드 랭 사인이 뭐예요?”
“먼 옛날이라는 뜻이란다. 자, 이제 그만 자거라.” 아빠가 말했다.
그러나 로라는 조용히 연주하는 아빠의 바이올린 소리와 숲 속에서 들려오는 쓸쓸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동안 더 깨어 있었다. 로라는 난롯가의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난롯불이 아빠의 갈색 머리와 갈색 턱수염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황갈색 바이올린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로라는 조용히 몸을 흔들며 뜨개질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 생각했다.
‘이건 먼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야.’
로라는 아늑한 집, 아빠와 엄마, 난롯불과 음악이 먼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게 기뻤다. 지금은 지금이니까 결코 잊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절대로 먼 옛날일 수 없다.
– 로라 잉걸스 와일더, 《초원의 집》 중에서
헝그리 플래닛
피터 멘절, 페이스 달뤼시오 지음 | 윌북 | 491쪽 | 148x210mm
24개국 30가족 구성원들이 일주일 동안 소비하는 식품과 일상을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아프리카 말리부터 남미 에콰도르까지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식탁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질문이 많아진다.
초원의 집 1~9권
로라 잉걸스 와일더 지음 | 비룡소 | 148x210mm
80년대 국내 TV 외화 시리즈로도 알려진 책이다. 1870년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조금 더 나은 모금자리를 찾아 나서는 로라네 가족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했던 곳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모습들을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사진 김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