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앞코가 네모난 플랫 슈즈가 여러 켤레 있다. 길고 좁고 둘째 발가락이 유난히 긴 내 발에 가장 알맞은 모양이고, 그걸 신은 내 모습이 세련되면서도 편안함을 놓치지 않는 도시 여성 같아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를 처음 신고 나간 날 야외 취재를 갔었는데, 하필 모랫바닥을 걸어야 해서 새 신발에 상처라도 날까 조마조마하던 기억이 난다. 이토록 사소하고도 선명한, 나만 아는 사연들은 누구의 옷에나 깃들어 있다.
일상을 심플하고 편안하게
지현의 와이드 팬츠
장지현, 회사원
와이드 팬츠의 매력 심플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한다. 와이드 팬츠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준다.
Pick한 와이드 팬츠 와이드 팬츠 중 하나만 소개해야 한다면, 사진에 담긴 COS 와이드 팬츠를 꼽고 싶다. 여러 브랜드의 와이드 팬츠를 입어봤지만, 하나를 사면 거의 매일 입는 편이라서 한두 해 입다 보면 해져서 못 입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속 의 팬츠도 몇 년째 입고 있고, 다른 팬츠들처럼 어김없이 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팬츠를 입는 이유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가치가 내 삶의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물건을 구매할 때 브랜드의 가치와 방향성을 유심히 확인하게 되었고, 그렇게 삶의 취향도 선명해져 갔다. 글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내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의 삶에 또 어떤 아이템들이 쌓여갈지 기대된다.
제철 양말의 즐거움
구달의 양말
구달, 프리라이터 겸 양말 가게 점원
양말의 매력 가격이 저렴하다(1000원짜리도 있다!). 내 개성을 위트 있게 표현할 수 있다. 무난한 룩에 작지만 확실한 포인트가 되어준다. 형광색, 시스루, 꽃무늬, 짝짝이 무늬 등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부담이 적다. 발목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즉각 좋아진다. 발끝까지 신경 쓰는 섬세한 멋쟁이가 된 기분이 든다. 양말의 매력은 써도 써도 끝이 없다.
Pick한 양말 해피삭스의 키스 해링 콜라보 양말. 몇 년 전, 동유럽 4개국을 패키지로 돌고 온 엄마가 크로아티아 관광지에서 샀다며 내게 건넨 여행 기념품이다. 빡빡한 패키지여행 일정 속에서도 기어이 딸이 좋아할 만한 알록달록 귀여운 양말을 찾아낸 엄마의 애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이 양말을 신으면 발목마저 사랑스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나의 계절은 언제나 발목부터 온다.” 《아무튼, 양말》에 쓴 문장이다. 이맘때면 팬톤이 선정한 트렌드 컬러 가운데 하나를 골라 봄을 맞이하곤 하는데, 올해는 오렌지 껍질색 양말을 샀다. 여러분도 제철 양말을 신고 봄을 맞이하는 작은 즐거움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
그 해 여름을 담아
연경의 선글라스
김연경, 포토그래퍼
선글라스의 매력 선글라스를 쓰게 하는 날씨, 그리고 밋밋할 수 있는 얼굴에 작은 위트감을 줄 수 있다.
Pick한 선글라스 매년 여름 새로운 선글라스를 사는 것은 혼자만의 이벤트다. 나는 여름 내내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에 그 해 여름을 담는다. 매일 써도 질리지 않고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셀린느의 화이트 캣아이와 레이벤의 블랙 캣아이가 그런 아이템이다. 화이트 캣아이는 유학 시절 수고한 나에게 사준 선물이다. 매일 흐리던 하늘이 선글라스를 사러 가는 그 날만은 유난히 쨍하고 더워서 흰색 니트를 입고 매장으로 가는 길이 더 빛나 보였다. 나중에 딸이 생긴다면 엄마가 타지에서 얼마나 즐겁고 또 고통스러웠는지 이야기 해주면서 생색 내듯 물려주고 싶은 아이템 1호가 바로 이 선글라스다. 작년 여름에는 블랙 캣아이 선글라스를 매일같이 쓰고 다녔다. 어느 날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조명이 너무 눈부셔서선글라스를 썼는데 옆에서 그걸 본 친구가 빵 터졌다. 콘서트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 장면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똑같은 건 별로니까
주연의 빈티지 원피스
이주연, 《AROUND》 에디터
빈티지 원피스의 매력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신경이 쓰인다. 누가 더 잘 입었느냐를 떠나서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에서다. 빈티지 의류는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날 일이 드물(없)고, 어떻게 스타일링하든 정답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편하다. 하얀 옷깃이 달린 원피스, 고고한 주름치마, 잔잔한 꽃무늬, 각 잡힌 체크 재킷, 쨍한 색감과 땡땡이 무늬…. 시간이 쌓여 조금은 고리타분해진 패턴과 모양의 옷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기도 한다. 옷장 가득한 빈티지 의류 중에서도 특히 원피스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위, 아래 조합할 필요 없이 간단하게 한 벌만 입으면 되기 때문이다. ‘내일 뭐 입지?’ 하는 걱정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나에겐 참으로 기특한 아이템인 셈이다.
Pick한 원피스 꼭 하나만 소개하라면 이 원피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레이스 자수 옷깃이 마음에 들고, 연보라색이 의외로 내가 가진 옷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장미꽃 무늬를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데, 이 원피스의 패턴은 장미꽃인데도 화려하지 않고 잔잔해서 마음에 든다. 나는 매년 ‘10월 20일’을 좋아하는 옷을 입는 날로 정해 두고 그날 아침이면 콧노래를 부르면서 옷장을 열어보곤 한다. 그날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생일인데, 특별한 날이니까 매년 다른 옷으로, 제일 마음에 들게 입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답변을 적기 위해 사진첩을 보다 보니 의도한 건 아닌데 2년째 10월 20일에 이 옷을 입어오고 있었다. 올해도 이 원피스를 입게 될까? 글쎄, 나도 궁금하다.
핑크빛 캠퍼스 생활을 그리며
은조의 컨버스화
은조, 일러스트레이터
컨버스화의 매력 그날의 착장에 포인트를 주는 아이템으로 적절하고, 캐주얼한 옷엔 물론이고 원피스나 슬랙스 등 어느 옷에나 다 잘 어울린다. 정장 스타일로 차려입었지만 무게감은 주고 싶지 않은 날, 구두 대신 컨버스화를 신어주면 위트도 느껴지고! 만능 치트키 같은 아이템이랄까.
Pick한 컨버스화 이 분홍색 컨버스는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컨버스화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다. 암울하던 재수생 시절이 끝나고 대학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산 신발이다. 핑크빛 캠퍼스 생활을 꿈꾸며 무채색 톤 옷들만 고집하던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 컬러풀한 아이템이었는데 내 기대와는 다르게 캠퍼스 생활은 험난하고 고달프기만 했다. 왼쪽 발등에는 짝사랑하던 친구와 같이 먹던 포장마차 떡볶이 국물 자국이, 오른쪽 발 앞코에는 벼락치기로 밤새워가며 과제를 하던 날 묻힌 물감 자국 같은 것들이 남아서 20대의 기록이 새겨져 있는 일종의 일기장이기도 하다. 10년도 더 전에 구입한 아이템이라 지금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컨버스 디자인과는 조금 다른 것도 좋다. 지금의 컨버스는 뒤축 고무 로고도 더 이상 ‘ALL★STAR’로 나오지 않고 혀 부분의 로고도 사라졌다. 디자인이 바뀐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절망스럽던지…. 이제는 색도 많이 바래고 밑창도 낡아서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빗물에 양말이 다 젖어버리지만 컨버스의 클래식함을 지니고 있는 이 친구를 아직은 떠나보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