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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의 시간
BOOK&MOVIE <세상의 모든 계절>, 《세컨 네이처》
The time for gardener
정원사의 시간
정원을 가꾼다는 건 무척 고상한 일 같다. 또 대단한 재능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정원은커녕, 화분 하나도 제대로 못 키운다.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노부부가 등장하는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과 정원 가꾸기를 통해 자연에 대한 관점을 수정해 나가는 작가의 책 《세컨 네이처》를 통해, 나는 정원사의 재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꽃 덤불 사이에 둘러싸인 타샤 튜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늙고 싶다는 꿈을 품던 여자들 중 하나였다(내 꿈은 언제나 평범하다). 사실 나는 꽃 한 송이 제대로 키워본 적 없고, 화분이란 화분은 다 말려 죽인다. 조금만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녹다운이 되는 저질체력에, 만성적인 허리 통증 때문에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허리를 잘 굽히지도 못한다. 심지어 우리 집에는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는데 거의 쓰레기 하치장이나 창고에 가깝다. 나는 매일 집을 나오고 들어갈 때마다 마당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지만 실은 비질도 잘 하지 않는다.
‘정원’이라는 주제를 숙제처럼 받은 후 나는 한때 내가 빠져 있던 정원에 관한 책들에 대해서는 잊기로 했다. 타샤 튜더도 잊기로 했다. 내게 이제 정원에 대한 환상은 없다. 정원은 아니지만 나는 근처 주말농장에서 수년째 텃밭 가꾸기를 하고 있는데, 거의 자연과의 사투 수준이다. 오랜 사투 끝에 나는 슬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내게는 농부나 정원사의 재능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정원사의 재능이란 과연 뭘까.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은 정원을 가꾸는 한 노부부의 사계절을 그린 이야기다. 남편인 톰은 지질학자, 아내인 제리는 심리상담사다. 그렇다. 이들은 톰과 제리다. 하지만 만화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이들의 금슬은 원앙도 울고 갈 정도다. 톰과 제리는 매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함께 저녁을 준비한다. 식사를 하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다정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주말에는 함께 텃밭으로 가서 열심히 정원을 가꾼 뒤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신다. 때로 장성한 아들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와인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이야기도 나눈다. 스스로 운이 좋다고 평하는 이 부부의 노년은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화 같다.
제리의 직장 동료인 중년 여성 메리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부러워한다. 그 부러움은 메리로서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큰 것이다. 메리의 인생은 외롭고 불안정하다. 그녀는 이혼한 뒤 결혼한 남자를 사랑했다가 헤어졌다. 그녀에게는 집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자기 이야기를 떠벌리고 차를 살 거라고 말하고 차만 사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거라 확신한다. 그러고는 술에 취해 울음을 터뜨리며 한탄한다. 왜 난 늘 잘못된 선택만 할까.
왜냐하면 메리, 그건 당신이 조급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메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메리는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대신,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열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열망이 가급적 빨리 이뤄지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시간의 속도보다 빨리 움직이기에, 늘 엇박자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뛰어난 논픽션 작가인 마이클 폴란은 식생활과 자연에 대한 책들을 여러 권 썼다. 미국원예협회가 꼽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원 관련서 중 하나인 《세컨 네이처》에서 그는 직접 정원을 가꾸면서 정원사로서 자연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고민하고,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정원 가꾸기의 관습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타일의 낭만적인 자연주의의 허상에 대해 고찰한다. 나는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몸을 써서 그 일을 하는 동시에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 좋은 생각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는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글에는 책상 앞에서는 얻기 힘든 활기와 생명력이 가득하다.
나는 대부분의 다른 정원사들도 이런 기분을 종종 경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이 7월의 어느 날 오후, 정원에서 여러 가지 사소한 일들을 부지런히 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당신은 원추리의 스러진 꽃대를 잘라주고, 잡초를 뽑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토마토를 솎아내고, 두 번째 꽃을 보기 위해서 긴 줄기의 네페타를 다듬어주기도 한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만큼 열심히 일을 하지만 일한 티는 별로 나지도 않고 내내 꾸물거리기만 한 느낌이다. 연장이 손에서 가볍게 느껴진다. 이제 다른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당신의 손은 잘 알고 있다. 참제비고깔의 꽃을 잘 피우려면 곁순들을 따주어야 하고, 으아리꽃에게는 넝쿨줄기를 올릴 지지대를 만들어주어 야 한다. 일손이 바빠지면서 일상의 잡념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그것은 마벨이 <정원>이라는 시에서 표현한 마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초록빛 그늘의 초록빛 생각에/ 온갖 잡념을 모두 날려버린다.”
– 마이클 폴란, 《세컨 네이처》 중에서
폴란의 정원 가꾸기는 일사천리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실패하고 해결책을 찾고 노선을 수정하기를 반복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에게 정원사로서의 천부적 재능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정원을 가꿔나가면서 그에게는 ‘제2의 천성’이 생긴다. ‘제2의 천성’ 즉 ‘세컨네이처’는 자전거 타기처럼 한번 몸에 익으면 두 번 다시 잊히지 않는, 정원 가꾸기의 기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뛰어난 정원사들은 모두 실패에 대해 느긋하다. 실패를 즐거워하는 건 아니지만, 노여워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꽃을 잘 피우던 작약이 갑자기 꽃을 피우지 않으면, 호기심을 발동시켜 문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보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정원에서만큼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주목받는다는 것을 정원사들은 이해한다.
– 마이클 폴란, 《세컨 네이처》 중에서
무언가에 전력을 다해본 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철학을 갖게 된다. 예전에 SNS에서 한 여자의 다이어트 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미 20킬로그램 가까이 살을 뺀 여자는 이렇게 썼다. “어떻게 뺀 살인데, 주말 동안 미친 듯이 먹고 나니 다시 몇 킬로그램이 늘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다시 빼면 되니까요. 한 번 실패했다고 끝난 게 아니에요.” 나도 다이어트라면 아주 관심이 많지만 다이어트에 목숨 거는 사람들에게는 뜨악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 여자의 건강한 마음가짐은 좋았다. 한 번 실패했다고 망한 게 아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 정원사들 역시 이것을 안다. 올해 건강한 당근과 온전한 모양의 토마토와 아름다운 장미를 기르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내년에도 실패하리라는 법은 없다. 올해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서 내년에는 좀 더 잘해보자. 사계절은 이 인생에서 딱 한 번만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사계절이 패자부활전처럼 찾아올 것이다. 실패한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매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정원사는 그만의 특별한 환상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몸은 더욱 소중히 여긴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오후처럼 당신은 여전히 몸을 움직여 자연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그를 자극시키기도 하면서 여름의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겠지만, 자연을 통해서 찾아내는 초록 엄지의 길은 때때로 이처럼 명쾌한 특징을 나타낸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따를 수 있는 ‘제2의 천성’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 명쾌하다. 꾸준한 몸놀림. 그것이 바로 정원에서의 우아한 기품이다.
– 마이클 폴란, 《세컨 네이처》 중에서
제리는 요리도 정원 가꾸기도 하지 않는 메리에게, 언제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메리에게 다정히 조언한다. “정원을 가꿔봐.” 메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속도에 순응하는 일이 필요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릴 필요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생의 승패와는 관계없는, 작은 실패와 성공을 매일매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다. 정원을 가꾼다는 건 어쩌면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원사에게 필요한 재능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아는 것, 기다릴 줄 아는 것, 그리고 지치지 않는 것. 그런데 그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재능과, 이 인생을 잘 살아가는 재능과 같은 것이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도 많고 가다 보면 뒷걸음질쳐야 할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건 정원 가꾸기가 한 번의 시도로 모든 일을 다 마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마이클 폴란, 《세컨 네이처》 중에서
정원도 아닌 우리의 텃밭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작년에는 토마토를 열 개도 제대로 수확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병충해를 입을까 겁이 나서 익기도 전에 다 따버렸더니 먹기도 힘들 정도로 맛없는 새파란 토마토만 잔뜩 얻었다. 가뭄으로 고구마 줄기는 3분의 2가 다 말라 죽었고, 비싼 허브 씨앗들도 바질만 빼놓고는 모두 전멸. 우리는 최악의 정원사에 최악의 농부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년에도 또 텃밭을 가꿀 것 같다. 텃밭에 갈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니까.
“내년에는 토마토의 가지를 더 많이 잘라줘야겠어.”, “큰 토마토보다 방울토마토를 심는 게 낫겠다.”, “바질은 싹이 늦게 트는 것 같아.”, “또 가뭄이 오면 매일 와서 물을 줘야겠네.”, “다음엔 양상추를 더 많이 심자. 정말 잘 자라잖아.”
그런데 내가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들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제리의 입장에 서 있던 나는 영화가 끝난 후에야 메리의 입장이 된다. 문득 결혼한 친구가 자신과의 여행 약속을 너무 쉽게 깨버렸다며 분개하던 결혼하지 않은 친구의 기억이 난다. 입장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혼자 몸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도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간 나의 메리들을 제리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아닌가? 나의 메리들에게 제리의 입으로 말했던 것이 아닌가? 나의 메리들을 제리의 팔로 포옹해주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쩌면 억세게 운 좋은 자의 위선이 아닌가? 지금도 톰과 제리의 집은 아늑함과 평온함, 사랑과 행복으로 넘치는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메리는 그 집 앞에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채로 서성일 것이다. 운 좋게 안으로 들어가도 메리는 계속해서 겉도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인생의 실패자,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톰과 제리일 수도 있지만, 메리일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
마이크 리ㅣ드라마ㅣ영국ㅣ129분
노부부 톰과 제리는 런던에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그들은 각자의 상처를 오랜 시간 품어온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그녀는 그간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나게 다가온다.
세컨 네이처 Second nature
마이클 폴란ㅣ황소자리ㅣ384쪽
많은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이 상충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또 다른 오해도 거기서 비롯한다. 마이클 폴란은 정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연과 제대로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자연에 관하여 굳혀진 고정관념이 사라질 차례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