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BOOK&MOVIE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 <D.P.>를 보다가 문득 ‘왜 내 주변 남자들은 저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현상의 아래에 숨은 진실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그 절규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팀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소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처음 읽은 때는 아마 20대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이었던가, 아니면 휴학생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아르바이트생이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매일 지도 한 장 없이 낯선 도시에 떨어진 기분이었고, 천애 고아처럼 늘 사랑이 부족했으나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사랑할 마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은 베트남 전쟁 이야기였다. 베트남 전쟁이라니. 한국 전쟁도 남 일 같은 판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의 이야기라니. 그러나 우울한 여학생은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좋았다. 소설 속의 정직한 목소리가 좋았다. 작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좋았다. 아니, 작가의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 같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슬퍼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서글퍼졌다.
그동안 절판된 이 책의 개정판이 얼마 전 섬과달(아,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이라는 출판사에서 새로 나왔다. 오래전에 읽은, 느낌이 좋았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학창시절 호감을 품은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그 애가 여전히 괜찮을지,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렇게 괜찮은 애가 아니었으나 그저 내 눈이 좀 이상했던 것은 아닌지 불안한 것이다. 이 책을 다시 읽은 날, 나는 오래전 눈물을 흘렸던 부분에서 똑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서글펐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건 좋다.
이 책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레이니강에서>라는 챕터다. 평범한 미국 청년이, 이제 갓 어른이 되어 곧 대학에 입학할 계획인 청년이 베트남 전쟁 소집영장을 받는다.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던, 마치 남의 일처럼 여기던 전쟁에,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치러지는 전쟁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작가는 막 영장을 받은 청년이 느끼는 혼란과 분노, 고통과 좌절, 그리고 공포에 대해 생생하고 구체적인 단어들을 동원해들려준다. 이 문장들 덕분에 나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겪어볼 일이 없었을 일을 겪고, 되어볼 일이 없을 사람이 되어본다. 이를테면 20년도 더 전에 입영 영장을 받은 내 남자(인) 친구들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이다.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유령처럼 군대에서 돌아왔던 남자애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애들의 얼굴은 어쩐지 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그것은 대단히 씁쓸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남자들의 표정이었다. 웃기도 그렇고 울기도 그런 표정이었다. 대단히 쪽팔린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죽어도 말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가에는 전에는 없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미처 몰랐다.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많은 공포가 숨어 있을 줄은. 아니, 몰랐다고 하면 안 된다. 그 애들이 얼마나 좌절했는지, 갑갑해 했는지, 분노하고 슬퍼했는지를 나는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일종의 인류학적 측면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 진실로 그 일이 나의 일이라고, 내 남편의 일이고, 내 아버지와 내 남동생의 일이고, 내 아들의 일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들의 싸움이 내 싸움이 될 일이 없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선 다른 전쟁 이야기들에 차고 넘치는 박진감이나 용맹함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긴박감도, 극적인 장치도 없다. 작가는 마치 거대한 똥통에 빠진 것 같은 전장에서의 이야기들을 기묘할 정도로 시적으로 그려낸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전쟁을 치른다는 일,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글을 끝도 없이 걷고 또 걷는다는 일, 그칠 기약이 없는 비와 무시무시한 밤을 견딘다는 일,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다는 일, 그리고 죽는다는 일, 또 죽인다는 일에 대해서, 그 기억에 대해서 한 청년의 입을 빌어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역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진실과는 먼 곳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는 길리어드라는 가상의 나라의 ‘시녀’ 이야기다. 출산율이 극도로 떨어지고 환경오염과 사회 불안, 전쟁 등으로 혼란한 20세기 미국에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집단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길리어드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 그 나라에서는 여자들은 일을 할 수 없다.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여자들은 ‘아내’, ‘하녀’, ‘시녀’, 그리고 ‘이모’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비여성으로 찍힌 여자들은 방사능폐기물로 가득 찬 ‘식민지’로 추방되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시녀’는 성경에서 금지한 간음을 한 여자들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빼앗긴 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집을 떠돌며 대리모 역할을 한다. ‘시녀’들은 붉은 옷을 입어야 한다. 외출할 때마다 얼굴을 비롯한 온몸을 가려야 하고,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다. 가임기가 오면 ‘아내’에게 붙잡힌 채 사령관과 성교도, 교미도, 강간도 아닌 행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원래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솔직히 지루하고 따분해서 끝까지 다 읽으려면 불굴의 투지가 필요할 때가 많지만, 이 책을 읽을 땐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문장은 쉽고 단순하면서도 정확하고 우아하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디로 이어질지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침대 옆자리에 누워 그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저항조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사령관의 집, 열리지도 않는 창문이 달린 작은 방에 처박힌 이름 모를 ‘시녀’의 이야기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가장 낮고 미천한 곳에서 이 해괴하고 끔찍한 세상을 훔쳐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겪은 공포와 시련을 체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꾸는 악몽’에 손과 발을 담가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악몽에 연루된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 등장한 폭력 – 대리모, 투석형, 여자들의 사회 활동을 금지시킨 것, 읽고 쓰지 못하게 한 것,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한 것, 얼굴 가리개,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의 시체를 장벽에 매달아 전시하는 것들 중 인류 역사상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21세기의 뉴스 속에서 그와 꼭 같은 아찔한 일들을 보고 듣는다.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다. 그들은 다시 부르카라는 감옥 같은 옷을 뒤집어써서 온몸을 다 가려야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에서 비참하게 맞아 죽고, 나쁜 남자들은 그렇게 여자를 죽여도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야만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끔 글쓰기 수업을 한다. 수업을 하면서 종종 나보다 훨씬 더 잘 쓰는 이들을 만난다. 내가 왜 가르치는 쪽이고 그들이 왜 배우는 쪽인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그들은 야심 없이 소박한 이야기를 쓴다. 그들이 모두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건 간에 나는 그들이 계속해서 쓰기를 바란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말과 호흡과 리듬이 있다. 그들이 그것들을 쉽게 타인의 말과 호흡과 리듬으로 대체해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시시콜콜한 목소리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 이 세상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덮어 버리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마도, 전쟁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 팀 오브라이언 | 섬과달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 황금가지
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