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about love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와 <500일의 썸머>는 옛날 노래를 즐겨 듣고, (아닌 척하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차기보다는 차이는 데 더 익숙한 아날로그형 남자들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아니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은밀하게 운영하는 블로그에 우울할 때 보기 좋은 영화 리스트를 올린 적이 있다. 그게 무려 10년 전인데 아직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댓글이 달린다. 그만큼 사람들은 우울하고, 우울할 때는 영화를 보건 책을 읽건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싶어 한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그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닉 혼비Nick Hornby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티븐 프리어즈Stephen Frears의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다. 그리고 만약 10년 만에 그 리스트를 업데이트한다면 나는 거기에 이 영화도 함께 올릴 거다. <500일의 썸머>

이 영화들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유머감각과 재치가 넘친다. 솔직하고 귀여우면서도 섬세하고 지적이고 때로는 괴짜처럼 보인다. 젠체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는 좋은 음악들이 끝도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영화들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들 같다. 바로 영화의 두 주인공 ‘롭’과 ‘톰’처럼.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시카고 변두리 동네의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바이닐Championship Vinyl’을 꾸리고 있는 남자 롭은 이렇게 묻는다. 

“음악이 먼저일까? 불행이 먼저일까? 불행해서 노래를 듣는 걸까? 아니면 노래를 듣고 불행해지는 걸까?”

그는 음악으로 일기를 쓰는 타입의 남자다. 그는 헤어진 여자친구 로라가 새 남자친구와 불타는 밤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질투심에 몸부림치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다 그들이 아직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퀸Queen의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를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깔고 행복에 도취된 채로 매력적인 여가수와 하룻밤을 보내러 달려가는, 좋게 말하면 철이 없고 사실대로 말하면 찌질한 남자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이별 Top 5’의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연애 경력이 어디에서부터, 무엇 때문에 잘못되었는지 실연의 역사를 되짚는 남자다. 여자친구가 떠난 집에서 추억의 순서대로 오래된 레코드판을 정리하는 그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남자라기보다는 추억 속에서 사는 남자처럼 보인다.

<500일의 썸머>의 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더스틴 호프만이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부의 손을 잡고 달아나는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졸업>에 큰 영향을 받은 남자다. 하지만 사실 <졸업>은 결혼식장에서 웃으면서 뛰어 나오는 커플의 얼굴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의 실제 마지막 장면은 행복한 얼굴로 버스에 오른 두 사람이 어쩐지 당혹스럽고 막막하고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가 아닌,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톰의 말은 바로 <졸업>의 마지막 장면을 모티브로 흘러간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와 이해할 수 없는 연애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별을 당한 적이 있으신지? 우리의 톰에게는 썸머가 바로 그런 여자다. 1960년대 머리 스타일을 하고는 자기 별명이 ‘애널 걸Anal girl’이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곤조곤 말하는 여자. 웃는 모습이 예쁘고 치아가 예쁘고 하트 모양 점이 예쁘고 무릎이 예쁜 여자. 톰과 썸머는 똑같이 그룹 ‘더 스미스The Smiths’를 좋아하고, 복사실에서 몰래 키스를 하고, 이케아IKEA 매장에서 신혼부부 놀이를 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들 관계에는 문제가 있다. 썸머는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다며, 지금 행복하면 됐지 왜 꼭 이 관계를 어떤 단어로 규정해야 하느냐고 따지는 타입의 여자다. 톰에게는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울 뿐이다. 결국 연인에게 있어 상대가 나와 같은 강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와 혹시나 하며 상대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참히 배반당했을 때의 감정을 이 영화는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같은 기법을 이용해 재기 발랄하게, 또 날카롭게 보여준다. 세상이 모두 내 편인 것만 같은 기분과 매정한 세상에서 나만 혼자인 것 같은 기분, 바로 이 극과 극의 기분이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되지만, 반대로 사랑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비참함에 빠지기도 한다. 

롭과 톰은 그들을 찬 여자들에게 묻는다. ‘그때 왜 나를 찼던 거야?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했지?’ 그녀들의 답은 놀라울 정도로 싱겁고, 또 어이가 없다. ‘너와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 그와는 가능하게 느껴졌어.’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시카고에 사는 롭 씨나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톰 씨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실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연애들이 실패한 원인은 뭘까? 나는 그 남자들의 어떤 점에 실망했던 것일까? 어째서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걸까? 그건 아마 내가 예쁘거나, 여성스럽거나, 성격이 좋거나, 남자를 유혹하는 필살기를 갖추거나, 심지어 돈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래, 그 정도쯤은 안다. 

나도 그때는 연애의 기술 같은 것에 목을 맸다. 상대를 목마르게 하는 밀당의 기술이나 내게 관심 없는 남자가 관심을 두게 하는 법 같은 것. 지금 돌이켜 보면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관심 없는 남자가 나의 가공할 필살기에 홀려 잠깐 관심을 보인다 한들,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그렇다고 평생 작전이나 짜고 필살기나 구사하면서 야전 사령관처럼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혹시 성공한 연애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게 실패 원인을 찾기에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왜, 28살에 만난 별로 내 취향이 아닌 남자와 결혼하기로 작정했을까? ‘마음이 약한 사람은 26살 때부터 혼자가 될까 두려워하거든’이라고 했던 롭의 고백대로 평생을 혼자 살까 두려워서? 그 정도로 마음이 약해서? 그게 정답인지도 모른다. 내가 대부분의 남자에게 별로 매력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피곤했다. 마주치는 모든 남자가 나의 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24시간을 경계 태세로 사는 것도 대단히 피곤했다. 아니, 정말로 나는 그런 한심스러운 이유 때문에 어떤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기로 작정을 한 것일까?

충격에 휩싸여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롭과 톰의 헤어진 여자친구들의 말처럼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고, 동시에 그 누군가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일. 그의 유머감각이 마음에 들고, 그는 나의 웃음을 마음에 들어 했던 일.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기에 비슷한 가치관, 즉 검소하고 근면한 삶의 자세를 똑같이 동경하고 있었던 일.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사이의 크고 작은 차이들에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에 매혹되었던 일. 그런 것들이 그에게도 동시에 일어났던 일. 이건 도무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저 마법 같은 일, 또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퉁이를 돌다 통화 중이던 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이는 것처럼, 우리는 전치 12주의 강도로 사랑에 빠진다. 수만 분의 일의 확률로, 상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연애에 관한 이론은 ‘사랑은 타이밍’ ‘시절 인연’ ‘짚신도 제 짝’ 같은 별 신빙성 없어 보이는 오래된 이론들이다. 그와 내가 서로의 이상형에 가까운지 아닌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읽고 있던 책이나 즐겨 보던 드라마가 무엇이었는지도 동시에 중요하다.

내가 그를 만나기로 한 날 40분이나 늦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날 파스타 대신 삼겹살을 먹었더라면, 그가 나를 만나기 1년 전에 사이코 같은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를 만나기 전에 아픈 사랑의 상처에서 헤어 나올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른 학교에 다녔더라면, 내가 다른 직장에 다녔더라면, 그가 우리를 소개해 준 친구와 초등학교 4학년 때 포켓몬스터 딱지 때문에 절교했었더라면, 내 아버지가 두 살 때 함경북도 원산에서 강원도 속초로 피난을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는커녕 상대의 존재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어쩌면 우리는 마트에서 무심하게 서로 스쳐 지나가는 매력 없는 남의 배우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랑과는 별 관계없어 보이는 무수한 끈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가운데 우리는 결국 상대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오래된 노래, 옛사랑의 상처, 몇 년째 그 모양 그 꼴인 친구들, 세상의 흐름에는 담을 쌓고 사는 손님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롭은 동네 스케이트보더 소년들의 음반을 제작하고 예전에 그만둔 DJ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실연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또 더는 여자들에게 테이프나 녹음해주며 치근대는 것보다는 결혼해서 안정을 찾고 싶다며 로라에게 프러포즈까지 한다. 실연의 상처에 폐인이 되다시피 한 톰은 오로지 호구지책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건축가의 꿈을 꾼다. 그리고 ‘썸머Summer’가 떠난 자리에 ’오텀Autumn’이 들어온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때는 사랑에 실패한 후부터다.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버림받고, 가루가 날릴 정도로 자존심이 분쇄된 후에야 우리는 평생을 외면하느라 노력해 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삶이라는 것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 우리의 가장 못나고 추한 부분, 우리가 접어둔 채 잊어버리려 애썼던 꿈들은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허상들이 억지로 걷힌 후에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헤어진 후에야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거리를 걷고, 일터에서 돌아와 저녁을 만들어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좋은 음악을 듣고 함께 감동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게 된다. 타오르는 열망에 몸을 던졌다가 정말로 타죽는 대신에, 미지근한 숯불 같은 뜨뜻미지근한 사랑 위에서 늘어난 팬티 바람으로 함께 뒹굴 수 있는 안정감을 추구하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오랜 연인이 된다는 것은 서로의 꿈과 서로의 절망을 삶은 감자나 찐 호빵처럼 호호 불어 나누어 먹는 일이라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 소년들은 남자가 되고, 소녀들은 여자가 된다. 롭과 톰 역시 사랑의 실패를 통해 비로소 소년에서 남자로 자란다. 같이 사는 여자는 매일 야한 란제리를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반드시 너여야만 하는 운명적인 사랑은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전 우주를 통틀어서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남자, 또는 그 여자뿐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그 사람,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잊을 수가 없던 그 전화번호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가 나를 화나게 하였던 어느 밤의 일도,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나의 한 마디도, 헤어지기로 하고 집에 돌아와 엎드려 흘렸던 눈물도 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낡은 플롯처럼 느껴진다. 그를 향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갈망도 겨우 흔적이나 남았을 뿐이다. 그러니 사랑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 멜로 | 영국, 미국 | 113분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노총각 주인공. 여자친구도 있고 가게도 있어 그런대로 만족스런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갑자기 여자친구가 떠났고 그는 남아 고민한다. ‘문제가 뭐지?’ 그 답을 찾는 여정에서 스크린 밖의 사람들도 덩달아 생각하게 된다. 정말 그와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마크 웹 감독 | 드라마 | 미국 | 95분
기억난다. 2010년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사람들이 탄식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던 것. 아마 속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게도 그런 여자(혹은 남자) 하나 있었지’라고. 얼마 전, 다시 이 영화를 보니 그때의 마음과 또 다르다. 또 봐도 엔딩 크레딧엔 실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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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