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CE REAWAKE OUR MEMORIES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장소 있어?

The place reawakened
our memories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장소 있어?

갑자기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장소 있어?”라고 물으면 우린 어떤 답을 할까. 살면서 가본 많은 장소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고르겠지. ‘좋은’의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조용한 곳, 아늑한 곳, 분위기가 좋은 곳… 답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답에는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런 장소 하나쯤은 다 있지

친한 친구들과의 카카오톡 채팅방은 늘 난장판이다. 가끔 재미있는 주제로 얘기를 시작하면, 일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도망가기 일쑤다. 며칠 전,그곳에 물의를 일으킨 질문 하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장소 있어?”였다. 한 친구가 무뚝뚝하게 “무등산”이라고 답했고 또 다른 친구는 재빨리 “야, 그런 모텔도 있어?”라고 답했다. 

한참을 시시덕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씁쓸해졌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래저래 문득 슬퍼지는 일들이 있는데, 가장 마음이 착잡해질 때는 이런 때다. 풋풋하던 마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디론가 사라지고, 알량한 욕망만이 남는다. 키득거리며 웃다가도 가끔 애꿎은 ‘나이’에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내 먹먹함을 알아차린 건지, 한참을 ‘ㅋㅋㅋ’로 응답하던 한 친구가 말했다. 

“그래. 모텔도 좋고 다 좋은데, 이제 막 좋아하게 된 사람과 함께라면 나는 어떤 공원에 갈 거야. 어딘지는 너희한테 말해주고 싶진 않아. 나만의 장소니까. 거긴 유명한 곳이 아니라 밤이 되면 사람도 없고 차도 없어. 가끔 고양이들이 좀 지나다니는 정도? 거기서 이야기 나누면 참 좋아. 그 자리에 앉아서 밤샌 적도 있었지.” 나는 처음의 경박스럽던 웃음과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걸 채팅창 너머의 친구들은 보지 못했겠지

모텔을 외치던 다른 친구들도 슬슬 하나씩, 감춰뒀던 장소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남녀 친구들이 어우러진 채팅방에서 나오는 얘기는 결국 야한 얘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사랑을 시작하던 친구들의 각기 다른 설렘을 어렴풋이 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분명 질문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장소 있어?”였는데, 왜 다들 과거에 대한 얘기만 한 걸까. 마치 질문이 “막 좋아지기 시작했던 사람과 함께 갔던 장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야?”였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내 머릿속 어딘가를 둥둥 배회하던 기억이 가던 길을 멈춰 세웠다.

그래서 내가 알려주고 싶은 장소는

기억이 멈춘 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 아니 사실 그런 세세한 것은 기억나질 않는다. 함께 지구 끝까지 걸어갈 것처럼 만나기만 하면 산책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처음 보는 간판을 발견했다. ‘자하미술관’이라는 작은 글씨와 함께 500미터라는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 걷는 길이면 어디든 좋았기에 그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생각보다 심한 경사 길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는데,그땐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숨보다 걸을 때마다 슬쩍 스치는 손등으로 온 신경이 몰려가 있었으니까. 올라가는 길이 꽤 길고 예뻤는데, 그 길에 대한 기억도 드물게 남아있다

푸른 잔디, 무너진 폐가, 넝쿨이 많은 높은 담, 고양이들이 숨어 들어간 자동차 밑…. 그런 곳에서 쉬고 걷기를 반복하다 보니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자하미술관이 보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였는데,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부암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그랬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심장 박동수가 평소보다 더 빨라지고, 그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그래서 모든 건물의 꼭대기엔 스카이라운지가 있는 거라던데, 그래서였을까. 그때부터 심장이 더 뛰었던 것 같다. 이 추억에 내 얼굴은 한 번도 나오질 않는다. 모든 기억은 나의 관점, 그러니까 내 눈으로 본 것들만 남기에 그렇겠지. 궁금해진다. 그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자하미술관에만 있는 공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자하미술관은 서울의 미술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추억을 시작으로 몇 번의 기억이 그 까마득한 자리에 덧입혀졌다. 자하미술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찾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갈 때마다 ‘혹시 없어지진 않았겠지’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는데, 늘 작은 전시와 함께 그 자리에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 든다. 시간이 멈추는 것도 같고. 걸음과 목소리를 아무리 조심스럽게 내도, 그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목소리가 메아리로 퍼지는 게 민망한 마음에 말을 거의 안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사람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수밖에 없다. 전시를 보면서도 그 고요한 긴장은 깨지지 않다가

2층의 커다란 창문 앞에 다다르면 그제야 꾹 다물고 있던 입에서 ‘말’이라는 게 흘러나온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꺼내 함께 들여다보며 웃기도 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그곳에서 했던 것은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어디든 각별한 마음이 든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던 기억도, 남산타워에서 자물쇠를 걸던 기억도 특별하다. 하지만 그때 먹었던 스테이크의 맛은 도무지 기억나질 않고, 많은 사람이 걸어놓은 자물쇠 사이에서 이제 내 자물쇠는 찾을 엄두도 안 난다. 그런 것들이 대부분 흐릿해질 때,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이런 곳에서 보낸 시간이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이곳에는 정말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는 건 아녔을까

우리가 말한 장소들의 공통분모

내가 딴생각에 빠진 사이 카카오톡 채팅은 몇백 개가 넘어있었다. 이 질문이 재미있어서 회사 채팅창에도 올리고, 또 다른 친구들 채팅창에도 올려봤는데 다들 신이나 있었다. 그때 나온 대답들을 그대로 옮겨본다.
캠핑할 수 있는 야산, 도서관, 양화대교 밑, 선유도 공원, 상수동 화력발전소 옆 길, 하늘공원 주차장 쪽길, 건국대학교 안, 아무도 없는 사무실, 성당, 초등학교 운동장, 자작나무 숲, 대나무 숲, 낙산공원, 무등산(모텔 아님), 중랑천 벤치, 행성리의 원두막, 기차, 올림픽공원, 비행기 안, 버스 맨 뒷자리, 홍익대학교 운동장, 어느 주택 옥상, 제주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마당, 부산 달맞이 공원, 담양의 버스정류장, 아무도 없는 관람차…….

우리가 말한 이 장소들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통분모가 존재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걸 꼭 찾아내고 싶진 않다. 굳이 이건 어디에 있는 어떤 장소라고 정확하게 알려줄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앞서 말한 자하미술관도 꼭 누군가에게 가보라고 알려주는 장소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기억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잠시 눈을 감고 그곳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장소에서의 일들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수다스럽게 말해보는 것도 좋겠다. 분명 옆의 사람도 그런 장소 하나 떠올리게 될 거고, 모두 그런 장소를 떠올리며 조금 행복해지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얌전히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는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 그리움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돌아오지도 못할 시간을 떠올리며 현재의 대화를 이어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도 싶고. 하지만 함께 떨림 속에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공간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위로가 될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그림은 지난 6월 1일까지 진행된 <높고높은 풀 위로> 전시의 일부다. 노석미 작가의 작품으로 facebook.com/nohseokmee에서 그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자하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62-21
Tel 02-395-3222
zaha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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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

포토그래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