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THER OF A CLIFF

벼랑 위의 엄마 : 어웨이 위 고, 벼랑 위의 포뇨

THE MOTHER
OF
A CLIFF

벼랑 위의 엄마

영화 <어웨이 위 고>, <벼랑 위의 포뇨>는 장르만 봐도 공통점을 찾기 어렵지만, 엄마라는 근본적인 존재에 대해 고민을 툭 던져주는 영화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부모가 된다는, 그 미지의 과제 안에 성큼 발을 디딘 기분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는 불안한 마음이 한결 단순해졌다. 나는 아이에게 벼랑 위 등대가 되어주기로 했다.

샘 멘데스의 영화 <어웨이 위 고>는 두 연인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는 신체 장기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하고, 남자는 전화로 보험을 팔고 회원을 관리한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들 무렵, 근처에 살던 남자의 부모님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2년간의 벨기에 여행을 선언하자, 그들의 도움과 지지를 기대했던 연인은 허망해진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우울해하며 남자에게 묻는다. 

“우리, 루저일까?”
“아니. 왜?”
“우린 루저야.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 기본적인 것들도 모르잖아. 심지어 어디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다니.”

여자가 우울해하는 이유는 그녀의 몸 속에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들의 삶에는 문제가 없었다. 서른이 넘어서도 변변찮은 일을 하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불확실한 앞날을 마주한 채 살아도, 그들은 서로 사랑했기에 그건 별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더 이상은 즉흥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부모가 될 테니까. 그러니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게는 두 명의 아이가 있다. 우습지만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내가 좋은 엄마가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에 차 있었던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출산도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 같은, 진기하고 스릴 넘치는 레포츠쯤으로 생각했다(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두 번이나 경험을 해보니 아이를 낳는다는 건 쉽게 말해 콧구멍으로 팔뚝이 빠져나오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리고 나는 전혀 준비 되지 않은 채로 엄마가 되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집에서 잠든 아이를 보면서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든 심정은 솔직히 ‘이걸 무를 수도 없고 나 이제 어떡해!’였다. 이건 36개월 할부로 명품백을 지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질러본 적도 없다만). 한 생명을 평생 동안, 최소한 20년 이상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껏 고작해야 1년 단위의 삶을 살아왔던 내게, 당황스러운 것을 넘어선 공포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한 후 나는 느리게, 종종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가며 엄마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는 인어 포뇨가 벼랑 위에 사는 소년 소스케에게 홀딱 반해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소스케를 만나러 오는 이야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전쟁이라는 터널 속을, <워킹 데드>의 좀비 엑스트라 역할에(분장도 없이) 바로 캐스팅될 것 같은 몰골로 헤매던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소스케의 엄마 ‘리사’를 보고는 홀딱 반해 버렸다.

리사는 작은 어촌 마을의 벼랑 위에 있는 집에서 남편, 아들과 함께 산다. 하지만 선원인 남편은 늘 바다에 나가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다. 리사는 마을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아들인 소스케는 요양원 옆 어린이집에 다닌다. 리사는 대충 만든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으면서 출근하는 정신없는 엄마다. 태풍으로 넘친 바닷물 때문에 길이 끊어져도 아이를 태운 차를 미친 듯이 몰아 기어이 집으로 돌아오는 무시무시한 운전 실력의 엄마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집에 오기로 한 남편으로부터 못 오게 됐다는 전화를 받자, 프라이팬을 집어던지고 맥주를 벌컥 벌컥 마시면서 냉장고를 발로 걷어차는 터프한 엄마가 리사다. 수상한 남자에게 매몰차게 굴면서도 아들에게는 “넌 그러면 안 돼” 하고 말하는 좀 뻔뻔한 엄마도 리사다. 

리사는 내가 알던 보통 엄마의 모습과는 달랐다. 리사는 좋은 엄마라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나쁜 엄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 눈에 리사가 멋져 보인 가장 큰 이유는 리사가 보기 드물게 살아 있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말에 “그랬구나~”라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에 버금가는 영혼 없는 리액션을 보여주고, 아이 앞에서 화를 꾹 누르다가 결국 팔자주름이 깊어지고, 욕구불만이 쌓인 생기 없는 표정의 보통 엄마가 아니라, 갓 잡은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생명력이 넘치는 엄마였다. 말괄량이 10대 소녀가 건강한 30대의 성인 여자로 자라면 딱 저 모습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리사가 멋졌던 때는 아들의 친구, 어쩌면 전에 물고기였을지도 모르는 포뇨가 집에 찾아왔을 때다. 리사는 아들의 친구를 위해 달콤한 꿀을 듬뿍 넣은 차와 컵라면을 대접한다. 유기농 뻥튀기나, 직접 만든 주먹밥이나, 하다못해 피자도 아닌 컵라면이라니, 21세기 엄마 치고는 정말 대범한 여자 아닌가! 게다가 이 간 큰 엄마는 해일로 마을이 완전히 물에 잠긴 것을 보고는 요양원 할머니들이 걱정된다면서 다섯 살 아들만 둔 채로 집을 떠나버리기까지 한다. 

“소스케. 잘 들어. 우리 집은 폭풍우 속의 등대나 마찬가지야. 지금 캄캄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빛을 보고 희망을 가지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여기 있어야 돼. (중략) 소스케. 니가 우리 집을 지켜주면 엄마도 힘이 날 거야.”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언제나 어머니는 중요치 않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이웃집 토토로>의 엄마처럼 아프거나, 다른 영화에서처럼 아예 없거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엄마처럼 겁에 질린 딸아이가 매달리자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며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뛰노는 것, 스스로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엄마의 과도한 개입은 아이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엄마들은 아이를 돌보지 않고 병원에 있거나 아이를 위험에 빠지게 하거나 소스케의 엄마 리사처럼 아예 아이를 두고 떠나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어느덧 걷기 시작한 아이가 잠시만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온갖 무서운 상상이 든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흉측한 사건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네 놀이터에 혼자 나와 노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마가 정해준 시간표에 맞춰 움직인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성장한다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그럴 만한 장소는 자기 방밖에는 없는 것 같다.

다시 <어웨이 위 고>로 돌아가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연인이 여러 불행한 가족들을 만난 후 끝내 찾아낸 장소는, 여자가 어린 시절을 허클베리 핀처럼 보냈다는 고향집이다. 여자는 고향집 뒤뜰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야말로 완벽한 장소인 것 같아.” 그러자 여자가 답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디에서 아이를 낳아야 할지,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널려 있지만,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는 미지수다. 심지어 실전에 돌입했을 때 가이드라인 같은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동시에 다섯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니까. 세상과 인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그것은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저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무섭고, 어떤 때는 너무나 행복해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하나 확실한 건 어제의 나보다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 애쓰게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좋으나 싫으나 나라는 사람의 손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 역시 아이의 수상한 친구에게 먹을 게 마땅치 않다며 너희 집에 가서 먹으라는 엄마보다는, 소스케의 엄마 리사처럼 컵라면에 물을 부어주는 쿨한 엄마가 되고 싶다. 대도시의 이름난 대기업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일과 인생을 증오하는 엄마보다는, 작은 어촌의 요양원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찬 엄마가 되고 싶다. 내 아이만 끼고 사는 엄마보다는, 아이에게 집을 맡기고 세상을 구하러 가는 멋진 엄마가 되고 싶다. 그리고 끝내 아이가 대견스럽게도 엄마를 찾아왔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를 꼭 안아주는 따뜻한 엄마가 되고 싶다. 

무엇보다 내 아이의 인생만을 좁게 비춰주는 커다란 등대가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작은 등대들 중 하나인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나중에 어둡고 무서운 바다에서 내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의 집 아이들이 길을 잃었을 때 그 희미한 불빛을 보고서 다시 길을 찾을 힘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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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혜인

글 한수희 일러스트레이터 황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