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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방에 담는 마지막 하루의 기록
평범한 가방에 담는
마지막 하루의 기록
어라운드 식구들에게 에코백을 하나씩 선물했다. 그리곤, “지금 드는 가방 대신, 이 안에 평소에 쓰는 물건을 담아오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영수증 뭉텅이나 어쩌다 들어간 고양이 사료 몇 알, 충전기 같이 예상 가능한 물건들을 준비할 게 빤했다.
반대로, 괜한 의식에 두꺼운 서적이나 고운 유리병에 담긴 향수 같은 걸 가져올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들을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악마처럼 짓궂은 질문을 고민했다. “그럼, 내일 당장 기억을 잃는다면 뭘 가져올 거예요?” 첫 번째 질문을 들을 때와는 달리 그들의 표정은 조금 미묘해졌고, 곧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황보은영 제품 디자이너
질문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저장돼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치매인 할머니와 그 할머니를 돌보는 할아버지를 담은 영상. 슬픈 감정보다 가슴이 먹먹하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기억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은 대부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살면서 몇 번의 이사와 가끔 하는 대청소에도 버려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물건들은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었던 것들이 아닐까.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물건들을 꺼내보았다.
스웨터 항상 잘 입게 되는 옷. 여름을 제외하고 코트 안에도 반팔 위에도 늘 즐겨 입었다. 그렇게 4년 정도 입었던 옷인데 한 번의 실수로 스웨터는 유치원생이 입을 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세탁기에서 꺼낼 때의 허무감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끼고 귀하게 여기던 옷과 달리 평소에 자주 입었던 옷이어서 옷에게 괜한 미안함까지 들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계절이 지나 옷장을 정리할 때도 버리지 못한다.
엽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그림은 내 모습 속 감추고 싶은 우울하고 슬픈 부분을 가지고 있다.
명함 친구들과 행복하게 식사를 하던 곳이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식당인데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다. 이 식당에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들과 나눴던 고민과 위로가 다시 기억하고 싶어질 것 같다.
향수 사실 난 향수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향기만은 좋았다. 잔잔하거나 순하지만은 않던 이 향을 내 몸에 바르면 조금의 일탈이 느껴지곤 했다.순간의 감정이지만 꽤 강하게 기억하는 경험이어서 잊고 싶지 않다.
반지 유난히 두꺼운 커플 반지는 그의 취향이다. 나와 그의 사이를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물건.
티켓 음악 전시회 티켓이다. 나는 음악적 소견도 지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모네의 그림을 보고 받았던 감동을 이 전시에서 소리로 받을 수 있었다. 내게 신선한 감각을 일깨워준 전시이기 때문에 기억이 사라졌을 때 다시 감각을 깨워줄 수 있지 않을까.
작업물 개인 작업을 할 때는 별 고민 없이 이것저것 그려보고 만드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제일 나다운 느낌이 나오는 것 같다. 항상 느낌이 달라져서 문제지만.
문진 부엉이를 좋아해서 사게 된 물건이다. 문진은 내가 생각하는 어른들의 물건 중 하나다. 이것을 쓰면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물론 이미 나이로는 어른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손에 쥐게 되면 내가 느꼈던 무게감으로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일 꾸준히 쓰는 물건이 잘 없는데 이 오일은 계속 쓰게 된다. 왠지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혜인 에디터
당장 내일 기억을 잃는다면, 새로운 기록들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다.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을 부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짐과는 반대로, 머릿속에선 소중한 기억들을 기록할 물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게 참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출하고 유치했다. ‘정말 이런 걸 들고 올 거야?’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물을 정도로.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티켓 스물두 살에 처음 이 땅을 건너가봤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간 곳은 겨우, 일본. 쫓기듯 관광한 3박 4일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보는 사진첩과 이 티켓 한 장이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말한다.
동화책 이 책 한 권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전부 들어가 있다. 밤, 부엌, 여행. 가끔씩 정신이 퇴행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역시 난 이렇게 유치한 게 좋다.
휴대폰 지금 사용하는 휴대폰은 아니지만, 이 안에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사진들이 담겨있다.
립스틱 엄마가 쓰는 이름 모를 립스틱이다. 이걸 보면 언제든지 엄마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다.
DVD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보지 않았던 영화 <레옹>. 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3900원에 팔길래 사서 봤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되어버렸다. 자신은 고독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레옹’이 되고 싶었음을, 언제나 내가 잊지 않길 바란다. 그래도 여자니까 얼굴은 닮지 않기를!
일기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절이 적힌 종이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슬펐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을 겪고 성장했단 것을 알려주고 싶다.
펜과 연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가장 많이 쥐었던 물건이 아닌가 싶다. 돈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기억이었다.
패치 지금 이 책을 포함해서 총 10권의 책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굳이 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지난 글들을 읽는다면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나를 가장 많이 아는 건 어라운드가 아닐까.
쪽지 한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내게 남겼던 연락처다.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지만, 가끔 그 친구가 보고 싶다. 가장 미웠던, 가장 사랑했던 친구.
소라껍데기 바다를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전진우 에디터
불행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거기서 느껴지는 설렘 때문에, 나는 가끔 아주 다른 삶을 꿈꾼다. ‘다음 생에’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그 대신 ‘모든 걸 잃는다면 ㅇㅇㅇ로 가야지’ 생각하며 지내는 편이다. 회의주의자, 비관론자 같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앞서 말한 생각이 나를 항상 더 활기차게 만들어 줬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받은 질문은 흥미롭다. 비록 기억을 잃는다는 짓궂은 조건이 붙었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보내고 싶은 물건을 골랐다. 어떤 물건은 전혀 다른 삶에, 어떤 물건은 지금의 삶에 자연스럽게 매달려 있다.
자켓과 뱃지 여행갈 때 항상 챙기는 카키색 자켓과 내셔널지오그래픽 후원자에게 주는 뱃지. 여행에 관한 쓸데 없는 수사가 너무나 많지만, 그럼에도 내게 여행은 언제나 소중한 일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골랐다. 여행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험’일 것이다.
유리병 예전에 어느 숲에서 싸구려 화이트와인을 마시려고 했는데, 오프너가 없었다. 누군가 코르크를 안쪽으로 밀어 넣자고 말했다. 나무 젓가락과 돌을 이용해 결국 성공한 우리는 그걸 따뜻하게 데워서 마셨다.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변 풍경은 선명하다. 어설픈 우리들에게 과분한, 아름답던 가을의 모습이었다. 잊고 싶지 않다.
카메라 아주 다른 삶이더라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면 좋겠다. 감각은 없어도 된다.
담배 죽을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버렸는데, 만약 지금처럼 기회가 한 번 더 있다면 그때는 ‘담배 피우는 삶’도 살아보고 싶다. 나를, 내 건강을 함부로 대하는 삶.
액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속옷 차림으로 기타를 치던 나를 단번에 그려줬다. 함께 많이 웃었는데, 그때 문득 생각했다. 참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엽서 엽서를 써준 사람은 앞쪽에 있는 사진이 나 같다고 말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어서 그 말을 무작정 믿을 순 없었지만, 닮고 싶었다. “닮아줘.” 또 다른 나에게 부탁함!
만년필 지금 직장에서 진급할 때 받은 것. “과거의 나는 어쨌든 꿈만 꾸지 않고 당장 맡은 일도 열심히 했어.” 뭐 그런 메시지랄까.
고양이 이빨 파란 뚜껑 위를 보면 하얀 고양이 이빨이 네 개 있다.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이갈이를 할 때 방바닥에서 운 좋게 주워 놓은 것들인데, 왠지 모르게 참 소중하다.
책 생일날 스스로에게 선물한 책. 알프스나 로키, 에베레스트 같은 유명한 산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머릿속 세상을 더 높게, 더 넓게 만들어 준 책. 그나저나 나에게 선물한 책을 또 한 번 나에게 선물할 수 있다니.
여권 질문을 대충 읽고서 처음으로 고른 물건.
고래모형 흰 수염 고래를 떠올리면 화나는 일도, 억울한 일도, 불만도 잠시 없어졌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 나에게는 지구보다 더 큰 동물.
김다현 시각 디자이너
머릿속이 하얘질 내일의 나에게 주고 싶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찾다 보니, 당장 필요할 물건들보다 자꾸만 추억에 잠기게 되는 것들이 모였다. ‘이런 게 아닌데. 내일 필요한 물건은 체크카드나 신분증 같은 거 아니야?’ 하며 서랍에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이것만은 기억하길 바라는 것들로 추려졌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추억의 조각들을 보며 과거를 기억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이어리 가장 칭찬하고 싶은 나의 습관 중 하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이어리를 써왔던 것. 어떤 날 갔던 곳, 만났던 사람, 느꼈던 감정의 기록들을 훔쳐보면서 나를 기억했으면 한다.
진료노트 올해부터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먼지’의 건강수첩이다. 처음 데리고 왔을 때쯤, 병원에 가서 찍은 노트 속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이걸 보며 힘든 날에도 미소 지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어디에 있든, 얼른 들어가서 밥 챙겨주라는 메시지도 전할 겸!
사진 스무 살의 나와 고향 친구들의 모습이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학창시절의 친구들과는 애틋하고 끈끈한 감정이 항상 있다.
머리핀 평소 잘 하고 다니는 머리핀은 아니다. 선물 받은 건데, 그냥 놓고 보기를 좋아한다. 선물해준 사람이 각별하기도 하고.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초록색 머리핀을 골랐을 그 투박한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카드 아빠가 써준 생일카드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자주 편지를 써줬다. 좋은 글귀나 썰렁한 유머, 가끔은 잔소리가 쓰여 있는 편지를 받아보는 일이 참 좋았다.
종이꽃 초등학교 선생님인 엄마께 반 아이가 쓴 카드. 나는 엄마의 직업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항상 존경해왔다. 그 마음을 꼭 다시 기억하고 싶다.
동전 지갑 이건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다. 7살 때 작은 슈퍼를 하셨던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서 이 작은 동전 지갑이 갖고 싶은 마음에, 몰래 주머니에 넣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선물이라며 그 동전 지갑을 찾는데… 어린 나이에도 부끄러운 마음에 오랫동안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못했다.
연필 휴학을 하고 배낭여행 갔을 때 런던에 있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가져온 연필이다. 그때 이 연필을 집어 들며 ‘다시 학교에 가면 꼭 열심히 하자’라고 다짐했던 것 같다. 지금도 중요한 다짐을 적을 때만 꺼내 쓰는 아끼는 물건이다.
손수건 이모가 사주신 손수건. 내일의 나는 좀 더 꼼꼼하고 여성스러워지길 바라는 바람으로 슬쩍 넣어봤다.
여행노트 22살, 호기롭게 친구 둘과 함께 무작정 떠났던 유럽. 그 여정의 하루하루가 담겨있다. 이따금 남의 여행 에세이라도 읽듯 꺼내보는데, 그때마다 기록이란 걸 했다는 게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본다면 그때의 기분은 또 다르겠지.
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혜인
글 황보은영·이혜인·전진우·김다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