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ttest class : 클래스

이토록 뜨거운 교실

The hottest class

이토록 뜨거운 교실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이라는 것의 수혜자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 더 이상 교실에 앉아 학생이 될 일이 없어진 후에도 우리는 종종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어차피 인생이란 것은 끝나는 순간까지 가르침과 배움의 연속이니까. 로랑 캉테의 영화 <클래스>는 가르침과 배움이 총알처럼 빗발치고 수류탄처럼 터지는 전쟁터 같은 교실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원샷하고 학교로 향하는 한 교사의 불안한 옆얼굴. 그것은 분명 기대와 희망과 만족으로 가득한 얼굴은 아니다. 당장 사표를 던지거나 교실로 총기를 난사하러 가려는 사람의 얼굴이다. 어쩌면 자신의 슬픈 직업적 운명을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처럼 단숨에 삼켜버리려는 사람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랑 선생의 교실 안은 그야말로 ‘카오스’다. 흔히 말하는 ‘중2병’에 걸린 아이들은 통제 불능이다.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다. 아이들은 사사건건 말대꾸에 계속해서 트집을 잡고 태클을 건다. 젊은 동료 교사는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들어와 “더는 못 견디겠어! 저것들은 인간도 아니야!”라며 격렬하게 분노를 터뜨린다. 마랑 선생 역시 순간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삼켜야 한다. 

가끔 마랑 선생의 프랑스식 수업은 잘 굴러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학교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던 문제아 슐레이만이 처음으로 뭔가를 해내자 ‘마랑 선생은 슐레이만을 폭풍 칭찬한다. 슐레이만은 “지금 놀리는 거죠?”라고 하면서도 이 칭찬이 믿기지 않는 듯 기쁜 표정을 짓는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슐레이만은 또 문제를 일으켜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 과정에서 목숨처럼 지켜오던 이성을 잃고 한순간 분노에 휩싸여, 여학생들에게 ‘너흰 몸 파는 여자처럼 낄낄거렸다’는 실언을 한 마랑 선생은 학생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히고, 학교의 징계까지 받게 된다. 

로랑 캉테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클래스>를 처음 본 건 내 인생에 누굴 가르칠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던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교실에 갇혀 입 다물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던 학창 시절이 지옥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내 자식들만큼은 절대로 그런 교육을 받게 하지 않겠다는 투지로 불탔던 나는, 이 자유로운 교실의 풍경에 충격을 받았다. 애들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나는 마랑 선생에게 속삭여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랑 선생, 그냥 소리를 지르세요. 아이들을 꼼짝 못 하게 하라고요. 말대꾸하면 얼차려를 시키세요. 이 교실에선 내가 신이라고 외치라고요. 여기서는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역시 프랑스는 자유의 나라로군요! 하지만 역시 인간에게 자유란 버거운 선물이 아니던가요?’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결국 어떤 것도 명확해지지 않은 채,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은 채로 끝이 나버렸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좋은 텍스트다. 

아무튼, 그런 내가 올해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2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다. 정원이 16명에 중학생이 2명, 나머지는 모두 고등학생들이다. 무료인 데다 출석 의무도 없는 이 수업은 예상대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눈은 언제나 반쯤 감겨 있었고 무슨 질문을 해도 얼굴에는 물음표만 둥둥, 대답은커녕 심지어 수업 내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첫 수업 이후 근 한 달 동안 나는 사경을 헤맸다. 내가 왜 이 수업을 맡겠다고 한 걸까? 이번 주엔 대체 몇 명이나 나올까? 어떻게 해야 애들이 수업 내용에 관심을 두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르치는 데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는 걸까? 이러다가 학생이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정말 별로인 선생인 걸까? 

망망대해에서 홀로 노 젓는 기분이 너무도 처참했던 나머지, 이 함량 미달 선생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서가를 뒤져 가르치는 일에 관한 책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책은 운 좋게도 미국의 교육 사상가인 파커 J. 파머 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였다. 개정판에 증보판까지 무려 10쇄를 찍은 이 훌륭한 책은 이렇게 말한다. ‘나쁜 교사는 그들이 가르치는 과목과 자신을 격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도 멀어진다. 반면 훌륭한 교사는 자신의 자아, 학과, 학생을 생명의 그물 속으로 한데 촘촘히 엮어 들인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한다. ‘훌륭한 교사가 만들어내는 유대감은 그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멋진 일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달이 지났다. 연휴가 줄줄이 끼어 있던 6월의 첫째 주, 10시가 되어도 교실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악몽이 현실이 됐다. 우두커니 앉아서 ‘실패다! 완전 실패!’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무렵 하나둘씩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정원 14명의 절반도 안 되는 6명이 출석했다. 그리고 나는 수업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여유를 얻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나는 어떻게 해야 멋진 선생이 될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날 나는 비로소 아이들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닌, 아이들의 눈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됐다. 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으려 노력했다.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아이를 위해 즉석에서 <500일의 썸머>의 춤추는 장면을 찾아서 틀어주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짐했다. 이제 잘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선생이 되겠노라고. 

영화 <클래스>의 원제목은 <Entre Les Murs>다. ‘벽으로 들어가다, 벽을 뚫고 들어가다’는 의미다. 때로 내게는 학생들의 마음이 견고한 벽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벽을 두드린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을 때 나는 그 벽과 거리를 두고 서서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주절거린 후에 종이 땡 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 나오고 싶다. 그때 나는 나의 허약한 자아를 발견한다.

나는 상대가 내 진심을 외면할 것이 두려워 먼저 방어막을 치는 타입의 사람이다. 상대의 싸늘한 시선, 무뚝뚝한 말투 한 마디에 나는 부실 시공된 건물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나는 허세를 떨거나, 권위를 내세우거나, 현란한 기술로 나의 허약함을 덮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냉담한 벽을 두드릴 때, 주먹에서 피가 나고, 목청이 쉬도록 두드릴 때, 나 자신에게도 비로소 어떤 것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단지 교실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볼 용기가 생길 때,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엇을 하든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일에 있어서건, 사랑에 있어서건, 삶에 있어서건.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겠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이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 속 교사들은 학기 시작 전에 출석부를 보면서 아이들을 ‘좋은 애’와 ‘안 좋은 애’로 나눈다. 마랑 선생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학생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 두었다. 아이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아이들을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은 존경심을 보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존경이란 쌍방향이어야 한다며 응수한다.

재미있게도 마랑 선생과 아이들 간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마랑 선생이 학생들에게 ‘몸 파는 여자’라는 소리를 한 이후부터인 것 같다. 그때부터 이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갈등하고 다툰다. 마랑 선생이 끝까지 잃지 않으려 했던 교육자의 겉옷을 순간의 실수로 벗어던지면서 아이들에게 마랑 선생은 교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서 지독히도 마랑 선생을 괴롭혀 왔던 에스메랄다는 플라톤이 쓴 『국가』의 한 구절을 외워 그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몸 파는 여자치고는 좀 알죠?” 

마랑 선생의 파란만장한 프랑스어 수업은 끝났다. 운동장에서 교사 대 학생의 축구 시합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카메라는 아무렇게나 밀어둔 책걸상만 남아 있는 교실을 한동안 비춘다. 한 학기 동안 이 교실에서 일어났던 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좋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쁜 것이었을까? 그것은 성공적이었을까, 아니면 완벽한 실패였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을까? 마랑 선생은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는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이제야 영화 <클래스>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진도가 아니다. 멋진 수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났을 때 생기는 화학작용이다. 교실이라는 공간에 어른과 아이들을 몰아넣는다. 한 학기가 지나는 동안 그 안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단지 진도 빼기나 지식 전달이 아니라, 좀 더 심오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선생과 학생은 서로를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속일 수도 있고 들통 날 수도 있다. 경멸할 수도 있고 존경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수업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면 그것이 하나의 수업이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 ‘클래스’는 교실이기도 하고, 수업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제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벽을 둘러 나 자신을 지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물론 학생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시간을 버티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관중석으로 몸을 날리는 록스타처럼 그 불확실한 관계들 속으로 내 몸을 던지고 싶다. 아이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서 바닥에 나뒹굴어 멍이 들거나 팔, 다리가 부러진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한순간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한 내 인생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열일곱 살의 소년과 소녀들에게도, 서른일곱 살의 어른 여자에게도 똑같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클래스The class
로랑 캉테 감독 | 드라마 | 프랑스 | 129분
도시 빈민가의 한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조용한 전쟁을 이 영화는 과장되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교실’이라는 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소리 없는 혼란을 지켜보며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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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