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rt Of Sending Letters

그림책 작가 김효은

김효은 작가의 이야기는 고유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장면과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거듭 곱씹어 내놓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듯 고치고 또 고쳐 완성한 이야기들은 어린이에게, 어른에게, 멀리 타국의 독자들에게 가 닿는다. 그들에게 답을 받을 때, 이야기는 비로소 환하게 빛을 발한다. 흉내내지 않고, 과장하지 않아서 그 모습 그대로 빛을 낸다. 

그림책이라는 언어

“그림책이 있어서 우리가 이만큼 대화를 나누고 즐거움을 얻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한 이야기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가 되어서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것 같아요.”

옥탑 작업실이라니 낭만적이네요. 

남편이 사용하던 공간이에요. 이 건물 1층에 작은 베이글 가게를 시작하면서 옥탑에서 지냈거든요. 결혼하면서 제가 작업실로 사용하게 됐어요. 처음엔 많이 열악했는데 둘이 외벽도 하나 만들고 데크도 깔고 선반도 달면서 이런 공간이 완성됐어요. 전에 살던 집이 작업실 창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주택이어서 작업하다가 창 너머로 아이랑 남편에게 인사하고 그랬어요. 

 

애틋하고 귀여운 장면이에요. 먼저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이 제4회 wee그림책어워드 30권에 선정된 소감부터 듣고 싶어요.

정말 반갑고 기뻤어요. 이번 책이 나오고 나서 받았던 가장 반가운 감상평이 한 어린이 독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읽었다는 이야기였거든요. 사실 아기 낳기 전에는 어린이들이 제일 어려웠어요. 다가가기도, 친해지기도 어려운 ‘잘 모르는 존재’라고 할까요. 이야기를 만들 때면 누구보다 아이들이 봐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어린이는 이런 걸 좋아하겠지?’ 지레짐작하고 엉거주춤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맞추려는 어설픈 노력을 하다간 오히려 흉내만 내게 될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웠어요. 마냥 사랑스럽고 귀엽게 그린다고 아이들을 위한 그림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책이 어린이 독자들에게 즐겁게 읽혔다니,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쁘고 고마워요.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은 실제로 오 남매 중 둘째인 작가님의 어린 시절 경험담이 녹아든 책이라고요. 어떤 기억들인가요?

모든 걸 나눠야 했던 기억이 커요. 형제들과는 2~3년 터울인데, 먹을 걸 나누는 건 당연하고 옷도 항상 새 걸 못 입었어요. 특히 교복은 늘 닳고 닳아 반들반들해진 상태였어요. 성인이 될 때까지 늘 형제들과 함께 방을 썼고요. 어릴 땐 사람들 관심이 좀 부끄러웠어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외치던 시기였거든요. 신학기 때 가족 신문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우리 가족 관계를 공개하는 순간이 너무 창피했어요. 우리가 흥부네 가족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웃음). 애가 다섯이니까 외식하기도 어렵고, 밖에 나갈 때 엄마는 맨날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시고요. 그런데 커가면서 좋은 점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언니가 과외 해서 번 돈으로 옷을 사준다든지(웃음)…. 셋째에게 필요한 건 언니랑 제가, 넷째에게 필요한 건 셋째가 해주는 식이에요. 

 

책에 등장하는 오 남매의 성격은 실제 작가님의 형제들과 닮았나요?

캐릭터의 이미지가 워낙 단순해서 아주 자세히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형제들 성격을 참고하기는 했어요. 책 속 캐릭터들도 각자 고유한 성격을 지녔으면 했거든요. 언니는 정말 왕언니여서 어릴 때 엄마가 시장에 가시면 막내 목욕도 시킬 정도로 저희를 잘 챙겼어요. 엄마, 아빠도 의지를 많이 하셨죠. 셋째 남동생은 조용하게 자기 할 일 하는 선비 같은 스타일이었고, 넷째 여동생은 제일 비밀이 많은 친구예요. 자기만의 세계를 넘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지금 영국에 있는데, 떠날 때도 혼자 다 준비한 다음에 저희한테 ‘나 영국으로 일하러 간다.’고 메일로 통보하는 스타일이에요(웃음). 다섯째 남동생은 밝고 천방지축인 아이였어요. 지금은 30대 아저씨가 됐지만요.

 

작가님은 어떤 아이였어요?

저는 늘 사랑이 고픈 아이였어요. 언니는 공부를 정말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셋째는 저희 집 첫 번째 장손이었고, 넷째는 막내 여자아이, 다섯째는 막내 남자아이…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받았는데 저만 묘하게 그런 특징 없이 항상 중간쯤에 끼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생일마다 편지도 써주시고 평소에도 사랑을 많이 표현해 주셨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나봐요. 활발하고 적극적인 편이었고 질투도 많고 거칠기도 했어요. 셋째가 착하고 얌전해서 어른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제가 진짜 많이 때렸어요(웃음). 저는 자라면서 성격이 많이 바뀐 편이에요. 사춘기를 맞으면서 확 소극적으로 변했어요. 그때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표현 방식이 눈치 보는 걸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자퇴하고 혼자 공부했던 시기가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였고요.

평탄한 어린 시절은 아니었네요. 자퇴는 어떻게 선택하게 된 거예요?

고2 때 미대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입시 학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제 성적으로는 원하는 학교에 갈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관계에 집중하고 영향을 받는 스타일이라 친구들이랑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게 힘들었어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도 동의해 주셔서 큰 갈등 없이 자퇴한 후에 1년 동안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어요. 혼자 공부하고 밥을 먹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어요.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네. 너무 즐겁네.’ 매일 생각했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사람들 속에 있으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혼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죠. 혼자서도 충분하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도 점차 사라졌어요. 자존감을 쌓을 수 있는 시기였어요.

 

그림에 대한 애정이 많은 변화를 이끌었네요.

그러네요. 아주 어릴 때부터 저는 그냥 그림이 좋았어요.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그림이기도 했고요. 이거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더 파고들었죠. 잘하는 게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고민했을 텐데 저한테는 고민할 거리가 아예 없었어요. 원하던 회화 전공은 못했지만 대학교 졸업할 즈음에 그림책 학원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책 앞부분에선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나누는 의미의 ‘나눔’을 말하다가 둘째가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섯이 함께 쓰는 ‘공유’의 의미로 확장되는 전개가 좋았어요. 나눔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는지 궁금해요.

다 커서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는 슬픔도 나누고 시간도 추억도 나누며 자랐더라고요. 좋은 건 치열하게 나눠서 차지했지만 안 좋은 건 그만큼 잘 나눠서 덜어냈어요. 그런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책의 줄거리가 된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공평’이라는 단어를 넣으려고 했어요. 보통 나눈다고 하면 ‘분배’의 의미로 접근하고,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잖아요. 제가 느낀 부분이 있으니, 이 지점부터 다르게 고민해 보고 싶었고, 단순히 ‘나눔은 좋은 것’이라는 교훈으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랐어요. 책을 보며 저마다 질문을 던지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둘 다 케이크를 나누는 장면이지만 느낌이 사뭇 달라요.

맞아요. 첫 장면에서 케이크는 각자 차지해야 하는 요소로 등장하지만 마지막 장에선 다섯이서 사랑과 축하의 마음을 모으는 요소가 돼요. 하나 남은 딸기를 다섯 조각으로 나누지만, 딸기 조각들은 결국 생일인 둘째의 그릇에 놓여요. 그 다섯 조각의 마음을 알아봐 주셨으면 했어요. 일상 속의 많은 경험 중에서 나눌수록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것들을 발견하면서 ‘나눔’이라는 말 속에 ‘공유’와 ‘교류’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담고 싶었어요.

어쩐지 뒤로 갈수록 뭉클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책을 보면서 피식 웃게 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작가님만의 유머 코드가 있는 것 같아요.

정말요? 누군가 웃기고 싶은 열망은 있지만 늘 성공률이 저조한 편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쳐요(웃음). 제가 작업할 때 진지하고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어서 이번에는 가볍고 재미있게 작업하고 싶었어요. 책의 텍스트가 상황을 설명하는 정적인 말과 아이들이 하는 말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아이들은 누구보다 진지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독자들은 그 모습이 웃기고 사랑스럽잖아요. 천진함과 진지함이 대비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설명하는 말은 최대한 덜어내고 아이들 말을 훨씬 즐겁게 표현했어요. 

 

반대로 첫 책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들어요. 정말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각자 사연이 있고, 또 그 들 중 어딘가에 저도 있는 것 같아서요. 몇몇 인물은 직접 취재 후에 이야기를 쓰셨다고 했는데, 과정이 궁금해요.

《나는 지하철입니다》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싶어 만든 책이에요. 워낙 인물 드로잉을 좋아하는데, 생활 속에서 평범한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지하철이었어요. 드로잉북 안에 담기는 사람들은 진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테니, 이걸로 그림책을 만들면 되겠다 싶었죠. 처음부터 등장 인물 일곱 명을 정해 두었고, 인물들의 사연을 풀고 이야기도 엮어갔어요. 그런데 그 시기에 큰 슬럼프가 온거예요. 책을 만들다 보면 당장 이상하거나 고쳐야 할 것들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이야기 속 빛나고 좋은 점은 희미해지고 단점투성이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와요. 이 책이 과연 세상에 나올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작업이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드로잉북을 들고 지하철에 갔어요. 처음 마음을 찾고 싶어서 취재를 다녔고요. “나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서 해줄 이야기가 없어.”라고 말씀하시던 동네 구두 수선방 아저씨가 기억에 남아요. 그분과의 만남이 책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주었어요. 왜 이 책을 만들려고 했는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주었고, 꼭 완성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까지 생겼죠. 자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꼭 이 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는 지하철입니다》는 평소 무관심했던 타인의 이야기를,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은 너무 당연해서 지나치게 되는 행복을 발견하고 끄집어낸 이야기 같아요. 어떤 소재를 만날 때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져요?

아름다운 것들과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겹쳐져서 이야기가 돼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아름다운 것에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기고, 저건 왜 저래야 하는지 많이 고민해도 답을 모르겠는 문제들을 마주치면 마음에 품고 있다가 풀어내고 싶어져요.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도 마찬가지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디서든 내 몫을 챙기잖아요.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 때도 문득 나한테 피해가 올 것 같으면 주고 싶은 마음이 딱 닫히고요. 그런 제 모습을 발견할 때 불편함을 느꼈고, 스스로 돌아보게 되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난 거죠.

 

작업 순서는 어때요? 글이 먼저인지, 그림이 먼저인지 궁금해요.

주로 아이디어를 먼저 늘어놓는 편이에요.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풀어내고, 그때그때 좋은 문장이 떠오르면 옆에 붙여놓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해요. 글은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해요. ‘지하철 한 칸에 탄 일곱 사람의 이야기’, ‘나누는 이야기’ 이런 식으로 주제를 놓고 거기에 인물들의 사연을 하나씩 만들어본다든지, 나누는 것들을 마구 나열해놓고 이렇게 저렇게 엮어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요. 늘 그림보다 글이 어려워서 빼고, 빼고, 빼서 남은 것들이 텍스트로 들어가요.

재료는 주로 어떤 걸 사용해요?

콘테나 연필 선을 좋아해서 많이 사용하고, 수채화가 익숙해서 자주 쓰지만 책마다 달라요.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그릴 시기에는 잉크에 빠져 있었어요. 사람들 피부색이 다 다르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서 잉크 중에 피부색과 비슷한 몇 개를 고르고, 그 안에서만 색을 조합했어요. 밑그림 위에 덧그리면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 대부분은 밑그림 없이 붓으로 그려나갔고요. 잉크로 사람 목까지 형태만 잡아놓고 그 위에 눈코입을 얹고, 배경은 마지막에 그렸어요. 망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서 어떤 장면은 따로 그린 걸 합치기도 했죠. 그렇게 힘을 쏟아서 그런지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은 힘을 많이 뺐어요. 선도 단순하고, 색도 파랑, 분홍, 노랑 과슈 세 가지만 사용해 책에 나오는 모든 색을 만들어냈어요.

 

완성된 책의 더미도 무척 많던데요. 작은 부분만 달라져도 다시 더미를 만드는 거예요?

처음 구성했던 것보다 페이지 수가 줄거나 늘거나, 순서가 바뀌거나, 인물 배치가 일렬로 있었다가 한 프레임에 모이게 되는 등의 변화가 있을 때 더미북을 다시 만들어요. 그림책특성상 글과 그림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더미를 보면서 이야기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거든요. 비슷한 덩어리감이 반복적으로 나오지는 않는지,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저만 아는 변화들이지만 무엇이 더 나은지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에요. 책을 완성하고 나서 다시 더미를 볼 때가 있는데, ‘이것도 나름 좋았네.’ 생각할 때가 있어요(웃음).

 

2009년에 처음으로 그림책에 그림을 그렸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그림책 작업을 이렇게 오래 이어가는 내면의 동기가 뭘까요?

어릴 때부터 의심의 여지없이 늘 그림 그리는 일을 찾아다녔고, 덕분에 이렇게 멋진 일을 찾아서 정말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은 그려도 그려도 어렵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마음이 생겨요. 다른 작가님 책에 그림을 그릴 때도,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할 때도 저는 독자분들과 그림이라는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고 느껴요. 곳곳에 숨겨놓은 의미들을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다 알아주시고, 심지어는 제가 생각지 못한 부분도 캐치해 주시는 걸 보면 그림책이 있어서 우리가 이만큼 대화를 나누고 즐거움을 얻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한 이야기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가 되어서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것 같아요.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만들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감사해요. 그분들에게 피드백을 받을 때면 마치 정성스럽게 쓴 편지에 답장 받는 것 같아요.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더 많이 나누고 싶어요. 저는 다 못하겠지만 책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처음 경험하는 사랑

“이제 세상에 막 나온 아이에게는 모든 게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아이가 보길 바라는 아름다운 것들, 알게 되길 바라는 중요한 사실들을 계속 말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다시 제 귀로 돌아와요.”

딸 재아와 함께 지내는 생활은 어때요?

음… 사실 임신하고 주위 사람들이 너와 똑 닮은 아이가 생기는 게 좋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다지 반갑지 않았어요. 저는 어린 시절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사랑받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컸는데, 그럴수록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재아를 낳고 나서, 제가 경험한 어린이라는 존재의 이미지가 확 바뀌었어요. 사람들 말처럼 저랑 닮은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제가 지금껏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방식으로 전적으로 저를 사랑하고 의지해 주는 거예요. 아,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보다니. 아이가 저만 찾는 게 많이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되게 기분 좋은 일이더라고요. 무겁지만 그만큼 포근한 사랑이에요. 주는 것만 생각했는데 반대로 어린 시절의 제가 사랑받는 느낌이에요. 덕분에 예전부터 품고 있던 어려운 마음들도 많이 사라졌어요.

 

아이의 사랑이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워준다는 게 새삼 놀라워요. 엄마가 되고 나서, 그림책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어떤 점에서는 많이 변했고, 어떤 점에서는 여전한 것 같아요. 일단 그림책을 보는 방식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결혼 전에 그림책이 정말 많았는데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질리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다 교회에 기증했어요. 제 취향이 아닌 책은 아예 집어 들지 않았는데, 아이가 생긴 지금은 정말 다양한 책을 봐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정말 즐겁게 읽고, 엄마인 제가 해주지 못한 이야기를 책이 대신 해줄 때 작가분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요. 저도 잘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기고요. 그림책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됐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히 하고 싶어요. 전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없다고 생각했고, 세상에 이 이야기가 꼭 필요한지 자문하면서 위축되고는 했어요. 그런데 이제 세상에 막 나온 아이에게는 모든 게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저는 닳고 닳도록 보고 들은 것들이지만 재아에게는 온통 처음이라서 하나하나 신나서 말하게 돼요. 비가 오면 ‘비에 나뭇잎이 젖었네, 흙도 젖었네.’ 보이는 그대로요. 아이가 보길 바라는 아름다운 것들, 알게 되길 바라는 중요한 사실들을 계속 말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다시 제 귀로 돌아와요. 아이와 함께 세상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 들어요.

최근에는 집에서 많이 작업하신다고요. 아이 보면서 작업하는 생활은 어때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간이 부족해요. 예전에 바쁘다고 힘들어했던 모든 순간들은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웃음). 그렇다고 아이 돌보는 일을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기는 싫더라고요. 아이가 저를 찾는 이 시기가 생각보다 짧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아이와의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고 싶어요. 요즘은 남는 시간을 쪼개서 아이 자는 시간에 주로 작업하고 있어요. 좀 길게 하고 싶을 때만 가끔 엄마나 남편에게 부탁하고요. 그 이상으로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을 다져요.

 

아이가 자는 시간이라면 주로 밤이겠어요. 당연하겠지만…힘드시죠?

밤이 되면 너무 피곤한데 그때가 아니면 시간이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 하잖아요. 책상에 앉기까지는 좀 오래 걸리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면 오히려 기분 전환될 때가 많아요. 하루를 겨우겨우 버티면서 보내는 날은 몸도 마음도 지치지만, 주어진 시간을 적극적으로 잘 보내려고 노력한 날은 오히려 힘이 나요. 제가 내린 결정이니 더 이상 재거나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와 함께 생존하는 문제가 워낙 크다 보니 그림에 집착하던 마음도 자연스레 사그라들고, 스스로 세워놓은 한계나 벽도 많이 허물어진 것 같아요.

 

요 몇 년 동안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엄마로서의 나와 일하는 나 사이에 뚜렷하게 선을 그어놓고 ‘이 상황에서는 내가 나답게 느껴지지 않네.’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이랑 같이 있을 때도 분명 나다운 부분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 일을 억울하게 느낀다면 정말 제가 없어지는 것 같겠죠.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애만 보다가 하루가 다 간다고 여길 수도 있고요. 저는 그래서 아이랑 동네 다니면서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려고 해요. 나중에 보면 열심히 작업한 것 이상으로 뿌듯하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믿어요.

 

재아는 낯선 어른에게 인사도 대답도 잘하는 아이네요. 부모가 봤을 때 어떤 성향인 것 같아요?

재아는 먹는 걸 좋아하고, 먹는 걸 만드는 놀이를 좋아하고, 먹는 게 나오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예요(웃음). 넘어져도 잘 울지 않는 ‘슈퍼 둔한 아기’고요. 남편과 제가 좀 둔한 편이에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빈틈이 많아요. 약속 장소에 잘못 가고, 약속 시간 잘못 알고, 비행기표 잘못 끊고…. 심지어 전학 가는 날도 다른 학교로 등교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계획적인 사람과 만나고 싶었는데 남편은 저보다 한술 더 떠요(웃음). 둘이 맨날 뭐 잃어버리는 게 일상이에요. 그런데 남편은 인간관계에서도 둔해서 사람들한테 상처를 잘 안 받아요. 이건 좀 부러운 부분이기도 해요. 재아는 또래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기보다 흙놀이가 좋으면 무조건 혼자서 신발벗고 흙으로 들어가는 스타일인데, 남의 눈치 안 보는 성향은 또 남편을 닮은 것 같아요.

슈퍼 둔한 아기 재아는 외동이어서 작가님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라겠어요. 재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나요? 

재아 동생이 생기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어서 외동인 상태인데, 재아가 외동으로 자라게 된다면 부족함을 알면서 크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풍족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저 어릴 땐 부모님이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셨지만, 요즘은 너무 좋은 세상이잖아요. 마음 같아선 이것도 사주고 저것도 해주고 싶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마음까지 채워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질적인 부족함을 다른 걸로 채워주고 싶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 표현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요. 그런 것들이 더 의미 있는 일 같아요. 돈보다는 시간과 마음을 내기가 훨씬 어려우니까요. 지나고 보니 그런 기억들이 삶의 동력이 되더라고요.

 

재아도 몇 년 후면 엄마의 그림책을 읽을 거예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엄마를 재아도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재아가 어떻게 느낄까, 하는 생각은 아직 해보지 못했는데요. 음… 앞으로도 계속 그림책을 만들 거지만, 일에 너무 치우쳐서 재아에게 소홀했다는 후회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림이 저를 증명하는 전부는 아니니까요. ‘아빠가 요리를 많이 해주지만 가끔 엄마가 해주는 요리도 정말 맛있었어.’ 싶은 요리도 있으면 좋겠고, ‘내가 어릴 때 자고 있으면 엄마는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싶은 그림도 있으면 좋겠어요. 그림 그리는 엄마를 엄마의 여러 모습 중 하나로 봐줬으면 해요.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은,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즐겁게 열심히 사는 엄마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봐준다면 좋겠어요.

 

재아와 함께 자라면서 작가님의 그림책 세계도 점점 더 커질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책을 덮으면 바로 주위에서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는 것들 있잖아요. 비 얘기를 한다면 비를, 달빛 얘기를 한다면 밤하늘을 바로 볼 수 있죠. 늘 존재하지만 모르고 지나치거나 때로는 너무 당연해서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들을 찾아서 그림으로, 글로 정성스레 만들어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에게 세상 여기저기를 들추어 보여주고 이야기해 주듯이요.

어린이가 묻고 작가님이 답한 이야기

좋아하는 케이크가 날마다 바뀌어요. 어제는 초코 케이크가 좋았고, 오늘은 딸기케이크가 먹고 싶어요.

다음엔 숫자 책을 만들고 싶어요. 글자를 몰라도 숫자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림책이요. 언어가 달라도 모두가 볼 수 있을 거예요.

제일 친한 사람은 언니예요. 셋째에게는 존경하는 마음과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반반 들어요. 넷째는 자주 보고싶어요. 막내는 자주 놀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커요. 아무래도 언니와 동생들 모두를 좋아하나 봐요.

큰 동생(셋째)은 베이글 가게에서 일해요. 넷째는 영상 디자이너로 여러 가지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해요. 막내는 경영 컨설팅 회사에 다닌다는데 항상 바빠요. 다음에 만나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좋아하는 작가가 너무 많아서 다적으려면 종이가 부족할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으로 좋아했던 작가를 떠올렸어요. 그림책을 처음 만들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가브리엘 벵상과 이수지 작가님이에요.

책을 완성하기 전까지 고치고 또 고치면서 만들어요. 그래서 완성하고 나서 고칠 곳이 바로 보이지는 않아요. 가끔은 ‘이랬다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동안 고민한 시간을 믿는 편이에요. 대신 다음 책에서는 더 좋은 방식으로 풀어봐야지 다짐하고는 해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