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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지 않는 행복, 이 올리비아
나는 한국에 산다. 그리고 이곳의 삶을 종종 불만스러워한다. 불평을 파헤치기 싫다는 이유로 자세히 살펴보기를 미뤄왔는데, ‘한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는 이를 만났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스스로 한국을 선택하여 가족을 이룬, 이 올리비아다. 여러 질문을 하고 답을 얻으며 알았다. 만족스러운 삶은 ‘나라나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결정’의 일임을. 그가 이토록 당당한 이유도 자신이 한 선택을 ‘옳음’이라 믿으며 최선을 다해 책임지기 때문이리라.
볕이 정말 잘 드는 집이네요.
처음 보자마자 계약한 집이에요. 전망도 확 트이고 낮에 빛이 많이 들어와서 밝아요. 아이들 어린이집 보냈으니까 저희 빵 좀 먹으면서 이야기 해요(웃음). 아침에 만들어놓고 나왔는데 아마 다 되었을 거예요.
와, 너무 맛있어 보여요. 빵을 직접 만드세요?
빵을 좋아하는데 매번 사 먹기는 비싸더라고요. 만들어 먹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프랑스에서 기계를 보내주셔서 집에서 해 먹고 있어요. 제가 멋스럽게 차리진 못해도 맛은 괜찮을 거예요. 따끈따끈해요. 매실 주스랑 같이 드세요. 아 프랑스 치즈도 꺼내 올게요(웃음).
따듯하니 정말 맛있네요! 먹으면서 인터뷰할까요?
좋아요. 먼저 제 소개부터 할까요?
네(웃음). 가족도 소개해주시면 좋고요.
저는 교육인이자 방송인이에요. 38개월 루이, 23개월 루나 엄마고요.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중국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어요. 한국 오자마자 아리랑 TV에서 일을 했어요. 우연히 <한식예찬>이라는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전공이 교육이라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다 5년 전부터는 국립외교원 전임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국제기구에도 관심이 많아서 국제백신연구소 IVI에서 인턴도 했네요. 남편은 배우예요. 이 계통에서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전시 기획 일을 오래 하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더 늦기 전에 도전하고 있어요.
처음 전화 통화할 때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놀랐어요.
아버지가 한국인이에요. 어릴 적부터 저한테 한국말을 하셨어요. 전 늘 불어로 대답했지만 한국어를 많이 듣긴 한 거죠. 한국에 와서 아리랑 TV에서 일할 때만 해도 한국어가 많이 서툴러서 힘들었어요. 박사학위를 따기 전에 어학당에 6개월 다녔는데 그때 많이 배운 거 같아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귀면서도 많이 늘었고요. 그래도 아직 은행 같은 데 가면 모르는 단어는 있어요(웃음).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어요?
10년이요. 한국에 오면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방송도 하고 싶고 강의도 하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욕심이 많았죠. 낮에는 강연하며 여러 행사에 참여했고 저녁에는 아리랑 라디오 데일리 게스트를 했어요. 정말 바쁘게 지냈어요.
어떻게 그런 스케줄을 다 소화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어요(웃음). 다섯 살 때부터 테니스, 수영, 승마, 골프 안 한 운동이 없었거든요. 시합도 많이 다녔고요. 아버지가 테니스 선수였는데 항상 몸과 정신을 관리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강했어요. 건강한 아이가 되어야 뭐든 할 수 있다는 육아 방식이었어요. 그때 훈련한 지구력과 끈기가 어떤 분야를 접하든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공부도 결국 체력 같아요. 얼마나 의자에서 버틸 수 있느냐죠. 저는 그걸 운동으로 단련했어요. 제가 연속 강의를 4~6시간 하는데요, 말을 계속해야 해요. 정장을 입고 힐을 신고 서서요. 강의 전에는 PPT도 준비해야 하고요. 이걸 일주일에 세 번 하는데 사실 너무 힘들어요. 어릴 때부터 생활과 운동을 꾸준히 병행했기에 지금도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어요. 사실 하루아침에 되기는 힘들어요. 저는 30년 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그 리듬이 맞아요. 컨디션 관리하면서 하죠.
밖으로 내뿜는 에너지가 크면 안으로 채워야 하는 것도 있잖아요.
저는 사람을 만나고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편이에요. 혼자의 시간이 자주 필요한 사람은 아니에요. 남편은 그런 시간이 많이 필요한 편이고요. 자기만의 방식을 찾으면 되는 거 같아요. 저는 어릴 적부터 항상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시간이 남으면 허전해요. 무조건 채워야 해요. 어디 가서 친구를 만나든 운동을 하든 해요. 저한테 휴식은 여행이에요. 두 달에 한 번씩 가족과 함께 여행을 꼭 가려고 해요. 그때는 내려놓고 힐링하려고 해요. 사실 요즘은 SNS를 완전히 딱 끊을 수는 없어서 완벽하게 쉬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웃음).
솔직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저는 제 삶을 그대로 전달하는 편이에요. 실제로 저를 만났을 때 꾸밈이 없어서 좋아해주시는 거 같아요. 저한테 자유롭고 당당하다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서로 살아온 문화가 다른 거죠. 프랑스에 비해 한국 교육은 지시와 간섭이 많은 편이긴 해요. 한국에서는 대학 이후에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화장하거나 자신을 가꾸기 시작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열네댓 살 때부터 자신을 가꾸기 시작해요. 학교 갈 때든 누구 만나러 갈 때든. 그래서 발달 시점이 더 빠른 거 같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연습이 많이 되어 있어서 더 당당한 거 같아요. 근데 한국에 살면서 좀 신중해졌어요. SNS에도 저를 팔로우 하는 분들이 한국에 많잖아요. 사진과 글도 자제해서 올려요. 완전 자유롭게 살지는 못해요(웃음).
부모님께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거 같아요.
한국 문화를 우리에게 물려준 건 어머니 같아요.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30년을 살면서 행동은 프랑스인에 가깝거든요. 스킨십도 자연스럽고요. 어머니가 한국어 학자로 한국 문화를 깊숙이 알고 좋아했어요. 우정, 인연, 정, 배려, 예의, 이런 것들을 연구하셨어요. 언제나 예의 바르시고, 남이 뭘 주면 너무 감사하지만 거절도 하시고요. 늘 처세를 잘해야 한다고 애기하셨어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 같아요. 그걸 보며 배웠는데 사실 어머니만큼 잘할 자신은 없어요.
일곱 살 때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어머니 친구 집에 들러 프랑스 선물을 전하곤 했어요. ‘지난번에 올리비아한테 재킷을 사다 주셨잖아. 우리도 이 선물을 드려야 해.’ 하면서요. 프랑스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있지만 보통 아주 친하거나 가족이 아니면 선물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은 친하지 않아도 선물을 주잖아요. 외국인들이 그런 걸 참 신기해해요. 그래서 한국인들을 다정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요가도 오래 수련하신 걸로 알아요. 사진집을 본 적 있거든요.
요가를 오래 하시고 명상도 늘 하세요. 저희 집은 아버지가 주로 저와 오빠를 돌봤고 어머니는 평생 워킹맘이었어요. 제가 커리어를 쌓는 건 어머니에게 배운 거죠. 내면의 힘이 누구보다 강한 분이세요. 명상을 하면서 깨달으신 거 같아요. 어머니가 명상하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봤는데 열네댓 살까지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더 크니까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고 저도 요가를 하게 되더라고요. 임신했을 때 정말 열심히 요가를 했어요. 프랑스 사진작가 친구가 한국에 와서 사진집을 함께 내기도 했고요. 명상, 요가 하는 습관은 어머니가 물려준 무의식 습관 같아요. 근데 저는 아직 내면의 깨달음을 얻기엔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아요. 지금은 밖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얻고 있지만, 언젠가 한계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조금 느끼기도 하고요. 그때 가서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가지?’ 고민해봐야겠죠.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았겠네요.
네. 한국에서 운동 선수였는데 다섯 살 연상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프랑스로 가셨죠. 프랑스어도 못했고, 스포츠인이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빨리 은퇴하시고 저랑 오빠를 키우셨어요. 어머니는 대학교수로 일하시고요. 제가 아버지랑 사이가 좋은 이유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저희에게 사랑을 쏟아부으셨기 때문이에요. 당시는 한국 음식이나 재료를 파는 곳도 없어서 너무 고생하셨거든요. 제 성격이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무척 활동적인 분이에요. 우리가 더 크니까 한인회장도 하시고 해외 입양을 위한 노력도 많이 하셨어요.
어린 시절 한국에서 산 적이 있나요?
여섯 살부터 열 살 때까지 한국에 살았어요. 어머니가 특채로 프랑스 대사관에서 문화정책담당을 맡게 되면서 가족이 모두 한국으로 왔죠. 서래마을 프랑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많이 배웠어요. 외국인 환경이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다 한국인이잖아요. 지금도 한국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때 정말 한국을 좋아했어요. 4년 살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을 때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요.
한국이 왜 그렇게 좋았어요?
사람이 좋았어요. 파리는 개인적이어서 친척이나 어머니 친구 몇 명 빼고는 저를 잘 보살피진 않았어요. 근데 한국에 오니 이모들이 챙겨주더라고요. 저를 막 문방구에 데려가더니 원하는 거 다 골라 보래요(일동 웃음). 너무 깜짝 놀랐어요.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아니었는데요. 저희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스티커 하나 골랐더니, 아니래요. 더 많이 고르래요(웃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착하지? 왜 다 나한테 잘해주지?’ 생각했어요. 그리고 환경 자체도 좋았어요. 프랑스에서는 조그만 아파트에 살았는데, 한국에서는 아래에 수영장이 있고, 한 건물 안에 외국 친구들도 많았거든요. 스쿨버스 아저씨도 친절하셨고요. 그때의 작은 기억, 다정한 인상들이 쌓여서 유년 시절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도 들었고요.
중국에도 잠깐 사신 걸로 알아요.
고등학교 때 중국어를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대학교 때 중국어 전공을 하고 석사까지 했어요. 중국은 너무나 궁금한 나라였어요. 집에 한국과 일본 책은 많았지만, 중국에 대한 정보는 없어서 궁금했어요. 신비로웠고요. 실제로 생활하면서 문화적 차이로 어려움은 없었어요. 지금도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런데 산시성에서 대학교 강의를 1년 했는데 매연이 너무 심해서 힘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손으로 창문을 만지면 까만 게 묻어 나왔어요. 그때 제가 크리스마스에 가족을 만나려고 프랑스에 갔는데 내리자마자 ‘피토’를 했어요. 다행히 사스는 아니었고 폐에 실핏줄이 터졌는데 비행기를 타니까 기압 변화 때문에 더 악화된 거였더라고요. 급하게 수술하고, 남은 계약 기간을 채운 뒤 한국으로 오게 되었어요.
익숙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나라와 낯선 삶에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저는 항상 안정보다 도전을 선택해요. 잘하고 싶은 게 많고요. 사람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항상 저 자신과 다른 것에 관심이 많고요. ‘배울 점이 많다. 신기하다. 재미있네.’ 하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릴 적부터 독립적으로 살아서 어딜 가도 두렵지 않고 자신감이 있었어요. 운동을 오래 해서 “내가 남자한테 져? 나는 싸울 줄도 알고 힘도 센데?” 하는 마음이 있죠.
다른 나라에 간다고 그 문화에 들어가는 건 아닌데요,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잘 수용하는 비결이 있나요?
일단 인간관계에서 언어가 가장 중요해요. 언어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드니까요. 중국 속담에 ‘입향수속入乡随俗’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나라에 가면 그곳의 문화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에요. 제 생각도 같아요. 자기 테두리 안에서 살려면 다른 나라에 가도 소용없고 갈 필요도 없어요.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죠. 저는 외국에 나가면 무조건 외국 친구를 사귀라고 해요. 시간, 돈, 노력, 다 고민하고 가는 건데 그 정도 수고도 안 하면 얼마나 아까워요. 좋은 기회도 많고요. 저는 중국어 배울 때 시장 가서 아주머니들과 수다 떨고 그랬어요. 수업 시간 외에 말을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머리 자르는 데 가서 친해지고 또 놀러 가고요. 제 성격이 사교적이긴 한데, 그렇지 않더라도 극복해야 해요. 후회 안 하면 괜찮아요. 근데 나중에 꼭 후회를 하더라고요.
올리비아 씨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예요?
기회의 나라요. 한국에 와서 많은 기회를 얻고 잡았어요. 기회가 안 오면 만들면서요. 한국은 어느 도시보다 자기 의지로 성취할 수 있는 도시,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프랑스 사회는 무겁고 고정적이에요. 유동적이지 않아요. 사회가 그러니까 사람 관계도 잘 안 움직이고 이미 있는 관계만 돌아가요. 기회를 잡으려고 해도 어려워요. 한국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있는 거 같고 다이내믹해요. 그 안에서 무언가에 푹 빠져 그 시점을 잡으면 잘 살 수 있는 도시 같아요. 반면에 한국은 프랑스에 비해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기 때문에 자유롭진 않아요.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하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좋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안 맞는 나라 같아요. 저는 한국 하면 ‘기회, 다이내믹, 움직임, 발달’ 등이 연상되는데, 어떤 이는 ‘사교육, 경쟁, 스트레스, 회식’ 같은 걸 떠올릴 수도 있어요. 어느 가치관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살아봤는데요. 삶에 있어 도시는 어떤 의미인가요?
도시는 자기 일기장의 중요한 포인트, 자기 역사를 그려주는 한 부분이에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가 그 사람의 정신을 형성해주는 거 같아요. 한국에 살면서 ‘나’라는 빌딩을 쌓아왔다면 프랑스에 가서 돌 하나를 더 얹고 중국에서 돌 두 개를 얹고, 이런 식으로 히스토리가 쌓이면서 하나의 삶이 되는 거죠. 도시는 제 삶에서 뗄 수 없는 한 부분이에요. 제 경험이기도 하고요. 남이 제 경험을 뺏어갈 수 없잖아요. 프랑스에서 산 20년, 중국에서 산 4년, 한국에서 산 10년. 이건 저만 느끼고 경험한 일이에요. 우리 아이들도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고 여행하고 경험하며, 나중에 커서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살면 좋겠어요.
다른 나라, 도시에서 살아볼 계획이 있나요?
프랑스에서 꼭 살아보고 싶어요. 제가 태어나서 20년 동안 자란 곳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거든요. 여름방학 때마다 가긴 하지만 일상생활을 살아보지는 않아서 좀더 깊숙한 문화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데 남편이 아버지처럼 고생하길 바라진 않아요. 그래서 보류 중이지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라도 가고 싶긴 해요. 아이들에게 불어를 알려주고 싶거든요. 한국에도 프랑스 학교가 있지만 저는 거길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안되기도 하고요.
한국에서 임신, 출산, 육아를 하고 있어요. 문화가 다르다고 느낀 부분이 있나요?
저는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 안 가고 바로 집으로 왔어요. 남편과 제가 함께 아기를 낳았는데, 우리가 같이 고생하고 함께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그 신념이 너무 뚜렷했고 스스로 증명하려고 했어요. ‘해보진 않았지만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옛날 엄마들도 다 했는데.’ 하는 마음으로요. 주변에서는 “왜 조리원을 안 가?” 하면서 걱정했어요. 여름이라 제가 맨발로 다니면 시부모님이 양말 신어야 한다고 쫓아다니셨고요. 알고 있었죠. 한국이 산모에 대한 우려가 많다는 걸. 하지만 저는 너무 괜찮았으니까요(웃음).
복직은 언제 했어요?
3개월 쉬고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제가 10개월 완모를 했거든요. 출근하고,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강의를 한 뒤 산모 휴식 공간에 앉아서 유축을 했어요. 그렇게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유축해 날짜 써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저녁 때 집에 가져오는 거예요. 너무 뿌듯했어요. ‘아이를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나 엄마로서 참 열심히 살았다.’ 같은 거였어요. 남편이 주양육자고 분유를 줘도 되지만, ‘나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우리 같이 키우고 있는 거야.’라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남편이랑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화목했어요. 가장 힘들지만 좋았던 시기였죠. 또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웃음).
부모님이 양육하던 패턴과 비슷하네요. 아빠가 주로 아이를 돌보고, 엄마는 주로 일을 하고요.
맞아요. 남편에게 참 고마워요. 집에 있는 시간을 어려워하지 않고, 아이들과 관계가 정말 좋아요. 남편과 저는 성격이 달라요. 그래서 잘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남편은 아이들에게 위험할 거 같은 일은 저지하는 편이에요. 얼마 전 저희가 소파를 샀는데 아이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고 혼내더라고요. 저는 좀 어때 그냥 둬, 하며 자유롭게 두는 편이고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제가 루나를 12월에 낳았는데 이듬해 2월에 열리는 평창올림픽에 불어 아나운서를 제안받았어요. 너무 신기한 게 어머니가 88서울올림픽 때 불어 아나운서를 했어요. 30년 시차를 두고 엄마와 딸이 올림픽 아나운서가 될 기회잖아요. 무조건 하고 싶었어요. 모유 수유를 한창 할 때였는데, 마침 남편이 촬영 스케줄이 없어서 다 같이 평창으로 내려갔어요. 지인 부모님에게 용평에 있는 리조트를 빌려서 아나운서 방송을 하러 다녔어요. 메달 타워에서 방송했는데, 쉬는 시간에 내려가서 난로 피우고 유축하고 그랬어요. 날이 너무 추워 젖병을 냉장고에 넣을 필요 없이 바깥 눈 속에 꽂아두곤 했죠.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하지만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부작용이 있긴 했어요. 몸이 시리더라고요. 좀 무리하긴 했죠. 너무 추웠고요. 하지만 다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아이들한테도 나중에 애기해주려고요. 지금까지는 육아를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또다시 신경 써야겠다고 느끼고 있어요.
어떤 신경이요?
제가 아이를 잘 키우는 걸로 보이겠지만, 되게 건성으로 대답하고 기다리라고 할 때 많거든요. “잠깐만 기다려. 엄마 이메일 보내고 있잖아.” 이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거예요. 가끔 애한테 화도 내요. 그러면서 생각해요.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뭐가 중요한 거지?’ 애 잘 때 좀더 놀아줄걸, 삼 분짜리 책 하나 읽어줄걸, 후회하고요. 아이를 아무리 잘 키운다고 해도 누구나 다 비슷할 거예요. 요즘은 그런 후회를 안 하려고 해요.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아이에게 모든 시선을 쏟고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해요. ‘엄마가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구나, 사랑하려고 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도록요. 그런데도 급한 일이 있어서 아이 이야기를 못 들어주면 바로 사과해요. “미안해. 오늘은 좀 바쁜 날이네. 엄마가 아까 중요한 통화를 하고 이메일도 보내고 있었어.”라고요. 부모가 1% 달라지면 아이는 99% 바뀐다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아주 조금만 노력하면 집안 공기도 달라지고 아이도 달라져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해서 힘든 거 같아요. 지속적으로 해야 하니까 태도와 내공이 쌓여야 해요.
한 인간을 기른다는 게 쉽지 않아요. 의문스럽고 고민되는 일이 계속 생겨요.
정말 그래요. 부모라는 이 직업이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 같아요. 결과물이 바로 안 보여요. 예상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하죠. 보통 사업할 때나 목표를 세울 때 A, B, C 플랜이 있잖아요. 근데 교육은 아니에요. 답이 없고 아이들이 다 달라요. 전문가에게 들어도 다 다르니까 부모가 자기 아이를 알고 아이 말을 잘 들어줘야 하는 거 같아요. 아기 땐 귀를 기울였는데, 조금 컸다고 자꾸 나를 이해하길 바라잖아요. 아이들이 원하는 건 부모의 단순한 집중, 자기 말 들어주는 건데…. 저도 요즘 아이들과 있는 시간에는 집중해서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에게 불어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어요.
사실 언어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언어에 숨겨진 수많은 표현, 사고력, 표현 방식 문화를 전달하고 싶어요. 언어는 한 부분이고 언어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나누고 싶어요. 언어의 탄생 배경을 알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하잖아요. 예를 들어 한국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써요. 영어로 쓰면 ‘my country’인데 한국은 공동체 성향이 단어에 묻어 있어요. 우리 동네, 우리 남편, 우리나라, 대한민국, 단일 민족, 한 민족 이런 단어가 문화로 나타나잖아요. 불어도 여성 단어, 남성 단어가 다르고요. 아이들이 불어를 통해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면 좋겠어요. 제가 불어를 알려줘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루이는 어릴 때부터 제가 불어로 말을 해줘서 알아듣긴 해요. 그런데 아이가 둘이 되니까 밥 먹고 씻기고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져서 저도 아이들이 잘 알아듣는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몇 년 전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이 아주 많은 관심을 끌었어요. 확실히 두 나라의 교육에 차이가 있죠?
프랑스 교육은 엄해요. 저도 어릴 때 밥은 무조건 식탁에 앉아 먹어야 한다고 교육받았어요. 그리고 제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교육했죠. 근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한 입이라도 더 먹여보겠다고 따라다니면서 먹이고 있더라고요(웃음). 저희 어머니가 보시면 완전 혼날 텐데 말이죠. 다시 식습관을 들이려고 ‘여기서 안 먹으면 치운다’고 식사 시간에 식탁에서 못 내려가게 교육하고 있어요. 프랑스는 재산 정도와 상관없이 문화를 접하기가 쉬워요. 프랑스에 사는 제 사촌들도 다 아이가 서너 명이에요. 연봉이 적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이 잘되어 있거든요. 한국도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국제 수준이랑 비슷해졌죠. 근데 아이를 안 낳잖아요. 그걸로는 안 되는 거죠. 한국 부모들은 교육 욕심이 있어서 아이를 교육하는 데 돈도 많이 들고요. 인프라를 다르게 해줘야 할 거 같아요. 또 프랑스는 ‘너는 너의 길을 찾아야 한다. 네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어요. 아이를 한 인간으로 존중해주고 독립성을 인정해줘요. 한국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부모가 받쳐주고 음식도 해다 나르고, 좀 ‘오냐오냐’ 하는 것 같아요.
올리비아 씨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고 있어요?
저도 좋은 건 다 시키고 싶어요. 다만 아이 의견을 많이 물어보고 있어요. 태권도보다 수영이 좋다고 하면 그걸 하면 되는 거죠. 하지만 아이가 크는 건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교육을 하면 어느 정도까지 될 수 있지만 결국의 자녀의 선택이예요. 자녀의 결혼을 부모가 반대할 수 있을까요? 전 못 해요. 그건 제 삶이 아니잖아요. 성인으로서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야지 엄마가 누구랑 결혼해야 하는지 판단 내려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스스로 프로그램을 찾아서 유학을 갔어요. ‘내가 이걸 배우고 싶은데 프랑스 학교엔 없고 미국 학교엔 있구나. 친구도 저렇게 유학을 가네?’ 하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지원해서 갔어요. 스스로 키우면 알아서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컸기 때문에 저희 아이들도 그렇게 크길 바라죠.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사랑을 심어주고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네가 스스로 자라야 한다는 인식은 줘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독립하게 되겠죠.
독립성을 키워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요?
저는 아이를 꼭 어린이 공간에만 데려가지 않아요. 성인들만 있는 행사장에도 데려가요. 인간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봐요. 삶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결정되는 것도 많고요. 그건 디지털 세대라 해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을 일찍 만나면 두려움을 이겨내고 소통을 잘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왜 아이를 데리고 왔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근데 그건 제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에요. 제가 알아서 제 아이를 키우는 거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걸 아이 나이에 맞추려 하진 않아요. 핑크퐁 콘서트에만 가는 게 아니고, 모나리자 그림을 보러 갈 수도 있죠. 세 살이면 어때요? 아름다운 걸 보는 데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잖아요. 좋은 걸 보면서 감각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한국은 어린이 친화적인 곳이 많지 않아서 쉽진 않은데 여러 시도를 하려고 해요.
아이 성향을 보면서 데려가야 할 텐데요.
보통 행사장에 데려오면 아이가 워낙 착하고 순하니까 데리고 다니나 보다 하잖아요. 근데 아니에요. 순한 아이는 없어요. 길러주는 거예요. 선천적으로 비교적으로 순한 아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이후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교육 자체가 집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환경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점점 크고 언젠가 만나게 될 세상이잖아요. 아이가 통제가 안 된다고 안 데리고 다니면 점점 더 못 데리고 다닐걸요?
그럼 어떻게 교육해요?
이런 식으로 미리 설명해요. “여기 샴페인도 있고, 그렇게 뛰다가 부딪히면 다칠 수도 있어. 여기 앉아서 핑거푸드를 먹고 있자. 또 원하면 엄마를 불러줘.” 제가 옆에 못 있을 땐 “엄마는 여기 있을 테니까 좀 보다가 이리로 오면 돼.”라고 얘기해주고요. 얼마 전 루나를 가방 브랜드 행사장에 데려갔어요. 맥주와 공연이 어우러진 행사장이라서 아이를 데려갈까 고민하긴 했지만, ‘거절당하면 집으로 돌아오지 뭐.’ 하면서 갔어요. 도착했더니 밴드가 연주를 하고 라이브 음악이 들리잖아요. 아이가 눈이 동그래졌어요. 밴드 앞에서 너무 신나서 춤을 추는 거예요. ‘아, 음악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실제 음악은 이런 느낌이구나.’ 관찰하고 경험하는 거죠. 물론 아직 어려서 안아달라고 하고 보채기는 해요. 그런데 이런 장소에 가면 갈수록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아가요. 하면 안 되는 것, 하면 혼나는 것도 알더라고요.
밖에 나가면 엄마도 즐겁잖아요.
맞아요. 이게 저한테 맞는 육아예요.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다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요. 아이 낮잠 시간에 맞춰야 하고. 그런데 저는 안 그렇거든요. 제 중심이에요.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살아야 엄마가 행복하고 아이를 위해서도 열심히 해줄 수 있어요. 아이가 하원해서 집에 오면 좋을 때도 있지만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어요. 업무가 아직 안 끝났는데 데리고 와서 요리도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려니 더 힘든 거예요. “엄마 이거 해줘.” 하면서 1분에 열 번도 더 찾아요. 그럼 ‘아 힘들다.’ 말이 저절로 나와요. 저는 기분 좋게 사람들과 만나고 맛있는 거 먹고 이야기하면 힘이 나요. 아이와도 더 잘 놀아주게 되고요. 아이들도 새로운 경험 하고 저도 할 거 했고요. 사람들은 안 피곤하냐고 하는데 저는 차라리 그게 나아요.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육아를 하는 거예요.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하려고 해요. 힘들면 지금 방식에서 변화를 주고 행동에 옮기는 거죠.
매 순간 후회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편 같아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많이 하면서 살았어요. 남편이 결혼 전 일 때문에 정말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남편에게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어요. 살도 10키로 찌고 맨날 회식하고 정말 힘들어 보였거든요. 그때 남편이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회사에서 일하기 전에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 일을 하다가 그만뒀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해보라고 했어요. 저는 이게 너무 중요하다는 걸 알아요. 꿈이잖아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해보지도 않는 거와는 큰 차이가 있죠. 제가 이렇게 얘기하고 지원할 수 있는 이유가, 저는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목표를 거의 이루며 살아왔어요. 달성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면서요. 물론 저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근데 고민할수록 ‘그래도 해야지.’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아야하니까요.
요즘 잘하고 싶은 건 뭐예요?
어릴 때 하던 골프를 요즘 다시 하고 있는데, 세미프로가 되고 싶어요. 골프는 자기 스스로 성장하고 가꿀 수 있는 스포츠예요. 다른 운동보다 특히나 지구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루아침에 절대 이룰 수 없는 운동이고, 제가 저 자신을 위해서 이뤄내고 싶은 목표예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걸 알지만 조금 더 저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육아를 마칠 때 어떤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을 믿어요. 아버지가 늘 저를 친구처럼 대했어요. 어릴 때부터 ‘친구야’ 그랬어요. 어머니와도 돈독했고요. 지금도 어머니와 ‘우리 여행 가자.’ 하고 둘이 떠날 수 있는 건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관계가 있어서 가능한 거죠. 저는 부모님과의 좋은 관계가 유산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걸 제 아이들에게도 잘 물려주고 싶어요. 제가 부모님만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있지만요. 아이들이 커서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구나’라는 걸 알아준다면 너무 감동할 거 같아요.
가족의 꿈도 궁금해요.
먼저,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을 잘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너무 크기 전에 1년이라도 프랑스에서 살고 싶어요. 꼭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제가 일을 쉬고 오롯이 아이들만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정연화, 의상 협찬 Tamb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