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en Tenants

식물이 있는 생활
곡선의 세계

식물을 키우는 일은 식물이 살아갈 장소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자리에 두고 키울지, 어디에서 더 잘 자랄지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곳은 식물에게, 또 나에게 잘 맞는 자리일까.

식물 생활자의

아침

집 안 곳곳에서 식물들이 자란다. 거실 안쪽의 두 벽면에는 마다가스카르재스민 덩굴이 천장까지 길게 뻗었고, 안방 침대맡에는 몬스테라가 커다란 얼굴 같은 잎을 사방으로 펼치고 있다. 수납장과 선반 위에는 온갖 종류의 고사리가 모여 있고, 베란다에서는 무화과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느리지만 씩씩하게 크는 중이다. 그 옆으로 크리핑 로즈메리와 자귀나무, 황칠나무와 유칼립투스가, 위로는 립살리스들이 사이좋게 볕을 나누어 쬐고 있다. 그 뒤로도 필레아와 헬레보루스와 싱고니움과 필로덴드론과… 그렇다. 우리 집엔 식물이 좀 많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고양이에게 아침밥을 주고 식물의 물시중을 드는 것이다. 대기가 건조하고 식물의 성장이 빠른 봄에는 물 주기에만 한 시간이 족히 걸린다. 밤사이 내 마른 목을 축이는 것도 잊고 베란다로 달려 나가는 날도 있다. 잠옷 바람으로 화분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물을 주고 있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다. 그러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시든 잎을 따거나 새잎을 매만지고 있다. 입으로는 연신 “아이 예뻐.”를 남발하며. 도대체 이 마음은 무어란 말인가.

이 유난한 식물 생활의 시작에는 소중한 두 사람, G씨와 S씨가 있다(내 식물 생활 동지이자 스승님들이기도 한두 사람 이야기는 나중에 시시콜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가끔 고양이를 위해 작은 모판에 귀리 싹을 틔우거나 여름 한 철 서서히 시들어가는 바질 모종에서 새로 난 잎을 따 먹으며, 나는 도무지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소질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이다. 그동안 내 손에서 죽어간 크고 작은 식물들의 역사를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테니까.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여러 일이 일어났겠으나 그것들을 모두 더해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면 곡선의 세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직선의 세계에서

곡선의 세계로

아파트는 직선의 공간이다. 수많은 직선이 직각으로 만나 면을 이루고, 그 면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아파트다. 물론 어딘가에 배흘림기둥이나 돔형 천장, 혹은 아치형 창문을 가진 아파트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아파트는 효율이 강조되는 공간이니 사각형 외의 도형이 설계에서 고려되는 일은 흔치 않다. 거실 창밖으로 남의 집 창문이 빼곡히 채워진 아파트 12층에서 5년을 사는 동안, 나는 조금씩 정신이 피폐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무와 숲을 사랑했던 한 건축가가 직선을 두고 했던 온갖 악담(?)을 자주 떠올렸다. 직선은 인간성의 상실이며, 신의 부재라고 했던가.

선이 곧아서 아름다운 세계도 분명 어딘가에 있으련만, 나에게는 점점 직선으로 둘러싸인 아파트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탈출하듯 이사를 결심했다. 마음 같아서는 낡은 농가 주택이라도 좋으니 밤잠을 깨우는 층간 소음도, 눈 앞의 높은 건물도, 새벽마다 복도에서 키로 쌀을 까부르는 옆집 할머니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키질 얘기를 좀 하자면, 복도의 에코 효과에 힘입어 엄청난 파도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방송에서 효과음으로 파도 소리를 연출하기 위해 키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가끔 거대한 해일이 덮치는 꿈을 꾸다가 깨보면 어김없이 할머니가 복도에서 키질을 하고 있었다….

이 지경에도 막상 아파트를 떠나자니 겁이 났다. 혼자서 낯선 주택 생활을 과연 할 수 있을까? 계약 만기 전 이사를 결심하느라 가진 용기를 다 써버린 뒤였다. 결국 나는 또다시 아파트로 이사했다. 여전히 무수한 직선들과 소음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래도 새 집에서는 시원하게 뚫린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베란다의 왼쪽 창가를 따라 길게 자란 메타세쿼이아 나무에서 가끔 어린 새들이 나는 연습을 하려고 난간으로 건너왔고, 그 너머로는 작은 숲이 있었다. 눈을 좀 대충 뜨고 약간의 최면만 걸면 그럭저럭 좋아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볕 드는 베란다가 있었다.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생활이 신물 난 나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직선의 세계에서도 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훈데르트 바서가 말한 나무 세입자들Tree Tenants은 좋은 답이 된다. 내 세계의 직선들을 곡선으로 상쇄할 수 있는 유연하고 온화한 답 말이다.

식물과 고양이와

사람의 자리

식물들은 각자 선을 가지고 있다.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은 직선이 없다는 것이다. 직선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진짜 직선은 없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렇듯 식물도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지는 불규칙적으로 뻗어 나가고 줄기는 유연하게 휘어지며 이파리는 자유로운 도형을 띤다. 식물로 가득 채워진 아파트 거실은 그래서 조금 정글 같은 데가 있다. 식물과 식물의 그림자들 사이로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한 공기가 흐른다. 그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가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인테리어 소품을 사듯 식물로 집 안 곳곳을 장식해 보자는 말은 아니다. 식물은 살아 있고 살아 있으니 또 죽는다. 아파트에서는 특히 잘 죽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베란다라는 이름의 희망.

남서향 아파트에서 양지 식물이 가장 잘 자라는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베란다다. 반양지 식물이 가장 잘 자라는 곳은? 역시 베란다다. 그렇다면 음지 식물은 어떨까. 두말할 것 없이 베란다다. 아파트에 사는 모든 식물은 베란다에서 가장 잘 자란다. 아파트 생활자 여러분, 베란다를 믿으세요! 이게 무슨 사이비 교주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정말이다. 낮에 볕이 잘 드는 아파트라면 어지간한 식물은 모두 베란다에서 키울 수 있다. 반양지 식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음지 식물이 어째서 베란다에서 자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해가 드는 한낮에 베란다로 나가 보면 된다. 새시 창문을 열고, 방충망도 열고, 그렇게 완전히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색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창이 투명해도 유리에 여과된 빛은 색이 다르다는 것을. 게다가 천장이 막힌 베란다에는 그늘진 곳도 늘 있게 마련이다. 음지 식물은 베란다의 그늘진 곳에, 양지 식물은 베란다의 볕 드는 곳에, 그 사이의 식물들은 남은 공간에 두고 나서 창을 활짝 열어 두기만 하면 식물들은 저 알아서 쑥쑥 클 것이다.

거짓말이다. 실은 손 가는 일투성이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시든 가지를 치고, 분을 갈고, 영양제를 챙기고, 다시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그렇게 마음을 쏟고 애를 써도 어떤 식물은 끝내 죽는다. 그렇게 죽은 식물들이 우리 집 베란다 한쪽에 거대한 무덤을 이루고 있다. 층층이 쌓인 텅 빈 화분과 누렇게 마른 이파리들과 뒹구는 흙먼지들로 이루어진 공동묘지다. 이보다 기괴한 것은 그 무덤에서 가끔 정체모를 싹이 돋는다는 것이다. 베란다는 정말 놀랍고도 오묘한 공간이다. 그렇다고는하나 폭염과 한파에는 베란다도 소용이 없다. 그러면 또 식물들을 이고 지고 거실에 들였다 뺐다를 반복해야 한다. 크기가 크고 무거운 토분들을 그렇게 몇 번 옮기다 보면 손목이 금세 시큰하다. 흙 마름을 살피느라 흙을 파는 검지에는 늘 손톱 사이로 까뭇한 흙 때가 끼어 있다.

가끔 누군가 묻는다. 식물들이 죽는 것이 괴롭지 않으냐고. 괴롭다. 그러나 그 괴로움에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경험이 쌓이면 요령이 는다. 식물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진다. ‘식물이 불쌍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답을 찾느라 애쓰는 대신, 직선의 세계에 의구심을 품고 곡선의 마음을 발견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모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봄이 오면 자주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고양이는 낮잠을 자고 식물들은 봄볕 아래에서 바람에 몸을 흔들고 나는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가만히 내 세계의 곡선들을 바라본다. 그런 시간은 정말 좋다. 가끔은 마음이 벅차다. 우리가 여기서 함께 살고 있구나. 아파트는 나에게도 너희들 모두에게도 최선은 아닐 텐데, 그래도 이만큼 적응해서 우리는 꽤 건강한 날들을 보내고 있구나,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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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