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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노트, 8월의 크리스마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이 갑자기 우리의 삶을 노크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다큐멘터리인 스나다 마미의 <엔딩 노트>와 이제는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속에서 힌트를 찾았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채로 영화를 보는 일이 나에게 흔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그렇게 본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드는 일은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다. IPTV의 VOD 서비스를 뒤적거리다 <엔딩 노트>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일러스트로 그린 포스터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버킷 리스트라는 대략의 설명만 훑어보고는 ‘뭐야, 이런 심각한 얘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감독의 친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니 이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딸이란 말인가.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실성한 여자처럼 웃다가 울다가, 눈물 콧물 쏙 뺐다.
“바쁘신 와중에 절 위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실 건 충분한가요? 부족한 건 뭐든 말씀하세요. 감사하지만 부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슬슬 입장해야 하니 속도 좀 내주세요. 우왕좌왕해서 죄송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이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시점으로 내레이션을 맡은 사람은 그의 딸이자 감독인 스나다 마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의 안쓰러운 모습과 딸의 예쁘고도 차분한 목소리는 묘한 불협화음을 자아내며 우리를 한 남자가 죽어가는 시간 속으로 안내한다.
평소 꼼꼼한 성격의 아버지는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난 후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엔딩 노트를 만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주기,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하기, 소홀했던 가족과 행복한 여행하기, 빈틈이 없는지 장례식장 사전 답사하기, 손녀들과 한 번 더 힘껏 놀기, 나를 닮아 꼼꼼한 아들에게 인수인계하기, 이왕 믿은 신에게 세례 받기,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병에 걸리기 전 아버지는 일본의 꼬장꼬장하고 거만한 샐러리맨이었다. 두툼하게 붙은 살에 멋없는 양복, 민첩한 몸놀림과 늘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 “이런 아저씨들이 일본을 짊어지고 온 거야.”, “회사는 생명!”, “컴퓨터가 주문을 받아오진 않습니다. 시장에서 발로 뛰어야 원하는 성과가 나옵니다.”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아저씨 말이다. 그런데 발병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의 육신은 몰라보게 변한다. 머리가 빠지고 살이 빠지고 기운도 빠지고 검버섯만 늘어난 아버지는 몇 개월 사이에 20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 산송장이라 해도 다름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목소리에 눌어붙은 거만함이 사라지고, 눈빛과 몸짓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미소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말투는 사려 깊어졌다. 몸놀림은 부드럽고, 표정은 평온하다. 그는 겸손해졌다. 죽음 앞에서 삶의 기름기가 빠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아버지의 대단한 점은 죽기 직전까지 잃지 않는 유머감각이다. 암으로 살이 빠져도 다이어트에 성공했다고 말하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도 장례식 절차에 관해 이르다가 “하다가 모르겠으면 나한테 전화해.” 라고 덧붙여 말한다. 덕분에 초긴장 상태인 가족들도 웃는다. 병실에 있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다들 웃고 있으니까 여기가 천국 같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회사에 가야 하니까….” 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으며 회사형 인간이 되어가던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원망하던 어머니의 사이는 늘 좋지 않았다. 그런데 죽음이 임박함을 예감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힘겹게 고백한다.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사랑해.”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잠깐 나가달라고 하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부로 산다는 것이 상대의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행위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내게는 정말로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지인들은 그 해 그로부터 연하장과 부고장을 함께 받게 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소원대로 5월까지 살아 담담하게 준비한 죽음은 담담하게 끝이 났다. 남은 가족들은 상실의 아픔을 달래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었다. 그는 길을 걷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죽음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장례식장부터 손님 명단, 묫자리까지 스스로 준비했고, 자식들에게 혼자 남게 될 어머니를 부탁했으며, 계좌에서 자동이체되는 공과금 리스트까지 정리해 주었다. 그는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고맙다고, 행복했다고, 사랑한다고 거듭 말했으며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죽었다.
<엔딩 노트>의 아버지는 죽기 며칠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들에게 묻는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 그러자 어린 손녀가 답한다. “한 살부터 백 살까지 살면 하느님이 만든 몸이 점점 낡아가는 거야. 책처럼 점점 낡아져서 죽는 거야.” 그런데 오래된 책처럼 낡지 않았는데 죽음이 급작스럽게 찾아온다면 어떨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은 동네의 허름한 사진관에서 일하는 사진사다. 노총각인 그는 아버지와 둘이서 산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는 아프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죽기에는 너무 젊다. 결혼도 못 했고 성공도 못 했다. 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종종 찾아오는 발랄한 주차요원 다림은 죽음을 앞둔 그를 들뜨게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죽음보다 큰 것은 아니다. 정원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이유를 알 길이 없는 다림은 문 닫힌 사진관 근처를 배회하며 그를 기다리고, 급기야는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걸로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한다. 결국, 정원은 직접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은 후에 죽는다. 영화에서 그의 죽음은 너무도 조용하고 또 자연스러워서, 죽었다기보다는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느낌이다. 어제는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없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시간이 흘러 다림은 사진관 쇼윈도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다.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그녀는 웃는다. 정원은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남은 것이다.
20대에는 죽음에 대해 의기양양했다. 젊음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칼끝이 목에 닿아있음을 느끼면서도 눈을 부릅뜨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배 째라는 기분으로 살았던 이유 역시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가 아니라 세상에 미련을 낳은 느낌이다. 예전에는 비행기를 타면 잠만 잤는데 요즘은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만 노려본다. 낌새가 이상하면 당장 구명조끼를 입고 산소마스크를 쓸 생각에서다(그렇다고 나만 혼자 살아남을 기적은 없겠지만). 택시 기사가 과속을 하면‘나 죽으면 책임질 거냐’며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다. 소화가 조금만 안 돼도 위내시경을 받으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건강 염려증 환자라는 소리나 듣는다. 이렇게 겁이 많아진 이유는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먹이고 입히고 키워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나에게 당장 죽음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만약에 내가 몇 개월 후에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살겠다며 난리를 치다가 자포자기 상태로 나가떨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다.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해줘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엔딩 노트>의 아버지, 스나다 도모유키가 보여주었다. 담담하고 용기 있게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어떤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자신이 죽어가는 공간을 가족들이 천국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는 본보기이자, 아버지로서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실례하겠습니다. 세일즈맨은 물러날 시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영화는 영구차가 나오는 장면에서 이제껏 단 한 번도 감정에 휩싸이는 일 없이 아버지 행세를 해온 막내딸의 내레이션과 함께 끝을 맺는다.
“딸이 저에게 이렇게 묻는군요. 그래서, 지금 어디 계세요?”
“하지만 그건 좀…… 가르쳐 줄 수가 없네요.”
엔딩 노트
마미 스나다 감독 | 다큐멘터리 | 일본 | 90분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을 받고 말기암을 판정받는다.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 앞에서 그는 마냥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엔딩 노트’를 만들어 리스트에 적은 일들을 해나가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족들과의 긴 이별 앞에서 조용히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죽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 | 멜로 | 한국 | 97분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곧 죽게 됨을 알게 된다. 가족, 친구들과 비교적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와중에 주차단속요원 ‘다림’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보는 이의 마음은 조금씩 더 애잔해진다.
에디터 박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정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