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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거라고 말해줘요
먹고사는 걱정으로 지칠 때 불현듯 떠올리는 영화들.
<김씨 표류기>(2009) 이해준 | 드라마
용돈을 타 쓰던 시절에 <김씨 표류기>를 봤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한강 다리에서 떨어지는 남자의 모습은 가난한 어른의 최후처럼 보였다. 막연히 나는 아닐 거라고 근거 없이 안심도 했다. 신용카드의 노예가 되고 나서부터였나. 이제 한강 다리에서의 첫 신은 가장 생생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지금의 씀씀이를 유지한다면 멀지 않아 남자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말겠지.
죽지 못하고 밤섬에 떠밀려온 그는 이곳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모래 바닥에 썼던 ‘Help’는 ‘Hello’가 되었고 빛나는 도시의 불빛보다 자신이 피운 작은 불빛 하나에 더 감동했다. 유리병 속에 편지를 써서 보내는 여자를 통해 살아갈 힘도 얻는다. 한 편, 히키코모리인 여자는 어떻게든 살아내는 남자를 지켜보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한다. <김씨 표류기>는 절망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먹고사는 걱정으로 지칠 때 이 영화를 떠올린다. 아마도 벅차게 눈물 나는 엔딩 덕일 것이다. 방에만 있던 여자가 문밖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할 때, 밤섬에서 쫓겨난 남자가 기적처럼 버스에 탔을 때, 삶의 벼랑 끝에 선여자와 남자가 손을 잡는 순간까지. 한국에 제일 많다는 김씨 성을 가진 두 남녀는 결국 살기를 선택했다. 안락했지만 결코 현실은 아니었던 각자의 공간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으로 나왔다. 아무리 너덜너덜한 남자의 지갑이라도 버스 카드에 잔고가 남아 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최후의 잔고는 남아 있는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2018) 임순례 | 드라마
혜원은 돌아왔다. 엄마가 떠났고 자신도 떠났던 고향 집에 다시 돌아왔다. 왜 돌아온 거냐는 친구의 물음엔 ‘배고파서’라고 답한다. 정말이지 그렇다. 집을 떠나 도시로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배고픔. 가난해서, 외로워서, 낯설어서, 깊은 곳에서부터 허덕이는 배고픔.
답도 없고 이유도 없고 해결 방법도 없는 배고픔. 그저 돌아가는 길밖엔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배고픔. 서울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은 쉬어버린 편의점 도시락 밥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새로 밥을 지어 먹었다. 눈 덮인 밭에서 배추 한 포기를 캐어, 자신을 위한 밥상을 차렸다. 한겨울을 버틴 농작물은 그만큼 맛있는 법이다.
혜원이 돌아간 집에 엄마는 없었지만 곳곳에 엄마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어릴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기억했고 돌아온 기분을 만끽하며 요리했다. 동시에 다시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도 느꼈다. 꼭 다시 도시로 가야 할까? 나는 혜원이 이곳에 남아 있길 바랐다.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삶이 싫어서 돌아왔다는 재하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커다란 포기도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낯선 이곳에서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이 영화를 꺼내보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은 채워질 수 있겠지. 언젠가 돌아갈 그날을 위해 조금씩 돌아갈 채비를 시작한다.
<도쿄!: 흔들리는 도쿄>(2008) 봉준호ㅣ드라마
레오 카락스Leos Carax,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그리고 봉준호가 바라본 도쿄. 봉준호는 도쿄라는 도시를 고요함 가운데 흔들리는 이미지로 해석했다. 그의 눈에 도쿄 사람들은 움츠러들어 있었고 외로워 보였다. 도쿄의 어느 집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10년째 히키코모리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복잡한 도시 한복판을 걸으며 햇볕이 싫다고 말하는 그의 과거를 미루어 봤을 때 도시 사회 안에서 느낀 외로움을 피해 숨어 사는 삶을 택한 것이다.
10년째 아버지가 보내주는 약간의 돈만으로 꾸역꾸역 살아가던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휴지심이나 피자 박스처럼 버려야 할 것을 모아 쌓아 둘 것. 식사는 싱크대 앞에서 해결할 것. 배달원과는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말 것. 토요일에는 무조건 피자를 주문할 것. 집에서만 살아가는 일상이 무척 따분하고 고독해 보였지만 한편으론 안락해 보이기도 했다. 일을 하지 않고 주어진 돈 안에서 필요한 소비만 이어가는 일상. 저런 삶은 어떤가? 스스로 묻기도 했다.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면 나는 지금 위험한 것일까. 어쨌든 영화는 그가 긴 세월 고수해 온원칙을 깨고 집 밖으로 나오게 한다. 놀랍게도 10년 만에 마주한 세상은 고요했고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약속한 듯 숨어 사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처럼 히키코모리가 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고. 어쩌면 도쿄에는 이런 흔들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차곡히 쌓인 피자 박스처럼 견고하고 단단한 외로움을 깨어줄 작은 흔들림이.
글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