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 Me First

마땅히 그래야 할
시인 유진목

유진목 시인은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산다. 시인은 머리카락을 할짝대는 고양이를 품에 꼭 안고 “얘는 아무래도 저를 고양이로 아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약속을 했다면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약속을 지키면 그다음 약속으로 건너가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녀는 시와, 산문과, 영상과, 그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향유하기 위해 마땅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토록 멋진 작업엔 응당 그래야만 한다.

정기적인 청탁이 있어도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긴 어려워요.
신문 칼럼이 하나에 20만 원 정도니까 열 개를 쓰면 200만 원,
1인이 한 달에 가까스로 살 만한 금액인데 서울에선 이 돈으로 살기엔 좀 벅차죠.

돈을 더 많이 갖는 건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어요.

오랫동안

내가 말해온 방식

만나서 반가워요.

부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혹시 고양이… 괜찮으세요?

 

그럼요.

다행이네요. 이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거든요. 제 지인 중엔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고양이랑 함께 사는 분이 있는데, 매일 약을 챙겨 먹더라고요. 눈도 빨개지고, 재채기도 수시로 하고.

 

사랑하는 존재에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면 정말 괴로울 것 같아요. (차를 마시며) 이거 맛있네요.

괜찮나요? 좋아하는 차예요. 한여름 같은 날씨에 따뜻한 차를 내어드려서 민망하네요.

 

차는 따뜻하게 마셔야죠(웃음).

저는 아직까지 보일러를 틀고 지내요. 지금은 이렇게 덥지만 밤이 되면 추워지거든요. 자기 전에 보일러를 켜는데 아침에 꺼도 낮까지 열기가 좀 남아 있어서…. 덥지 않으세요?

 

네, 저도 추위를 많이 타서 아직 수면 잠옷 입고, 전기담요도 켜고 자는걸요.

아! 체질이 비슷한가 봐요(웃음). 다행이네요. 서울 소식은 주로 트위터로 접하는데, 다들 한여름 날씨라고 해서 적응이 안될까 봐 걱정했어요. 어제 서울 갈 일이 있어서 KTX 타고 다녀왔는데 서울에 비가 와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쌀쌀하더라고요.

 

맞아요. 여기 날씨가 훨씬 좋아요. 집이 너무 편안해서 소개도 잊고 수다부터 떨었네요(웃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 살면서 서점을 운영하고 글 쓰고… 하는 유진목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질문들이 밀도가 높고 어려워서 오늘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네요(웃음).

 

대중에겐 유진목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만, 본명은 아닌 걸로 알아요. ‘목유진’이란 가명을 붙이고 영어식으로 표기했다가 굳어진 거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제 본명이 ‘유진’인데, 필명에 나무 목木 자를 꼭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름 앞에 목을 붙여 목유진이라고 정했죠. 한창 영화 할 때라 해외 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유진 목’이라고 표기하면서 SNS도 eugene_mok으로 가입했는데요. ‘유진 목’이라고 써놨더니 다들 ‘진목 씨, 진목 씨’ 그러는 거예요. 처음엔 ‘음?’ 했는데,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해서 네네, 하다 보니 유진목이 됐어요. 서른 살부터 저랑 관계 맺기 시작한 사람들은 거진 저를 진목이라고 부르니, 이 이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본명은 이제 관공서 아니면 쓸 일이 잘 없어서 지금은 유진목이라는 이름이 좋아요

어느 인터뷰에서 아주 예전부터 시를 썼다고 이야기한 걸 봤어요. 글이 아니라 ‘시’로 표현한 걸 보면 일찌감치 시를 정의 내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말하는 방식(웃음)? 제가 쓰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럼 다른 사람이 쓴 시는요?

저는 남의 글을 판단하지 않아요. 그래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시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반대로 시를 읽으면서 소설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문학 작품 안에 여러 장르가 혼재됐다고 보는 건가요?

저는 그래요. 장르라는 건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누어 둔 거 같아요. 많은 작품이 시 같기도,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데, 이 작품을 어디로 분류할지 고민하는 거죠. 작품의 장르를 정확하게 구분해야만 일이 수월해지는 영역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 작품이 장르 나누기에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대부분 모호한 편이거든요. 《산책과 연애》는 에세이로 분류되지만 장시처럼 읽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사실 산문은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장르지만 이 글은 리듬감과 속도감을 갖고 한 번에 쭉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출판사 대표님이 처음 제 원고를 보곤 의아해했죠. 에세이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데, 에세이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모호하고…. 그래서 그때 장시처럼 읽히면 좋겠다는 의도를 설명하면서 이것저것 조율했어요. 산문이지만 짧은 호흡으로 들어간 단락이나 꼭지가 있는 건 그런 이유예요. 저는 이런 식으로 문학 안에서 장르를 뒤섞으려고 해요.

 

문학이 아닌 영역에서는 어때요?

저는 1인 영상 프로젝트로 ‘목년사’라는 걸 하고 있는데요. 목년사로 찍는 영상도 어디에 속하기가 좀 애매한 분야예요.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하지만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고, 낭독영상도 그렇거든요. 규정할 장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포에트리 필름Poetry Film이라는 장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를 영상화하는 장르라고 하는데, 지금은 거기 가까운 작업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목년사로 발표한 <거짓의 조금>도 그렇고, 이전에 만든 <작가의 탄생>도 그렇고요.

 

단편 영화인 듯, 낭독 영상인 듯, 무언가의 티저인 듯도 한 작업들이었죠. 목년사 얘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목년사는 제가 등단하기 전부터 하던 1인 영상 프로젝트예요. 좀 그럴듯하게 만들고 싶어서 목년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이 생긴 뒤로는 사람들이 “목년사가 뭐예요?” 하고 물어보는 일이 생기더라고요. 목년의 ‘년’은 이년 저년 할 때 그 년이에요(웃음). 목년이라는 여자애 이름을 생각해서 지은거죠. 재밌는 건, 이름을 붙이고 나니 사람들이 목년사라는 회사 안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면서 만드는 영상이라고 인식한다는 거예요. 근데 전 뭐든 혼자 하는 게 편한 사람이라 출연도, 촬영도, 편집도 계속 혼자서 해오고 있죠.

가치 있는 건

스스로 빛을 내니까

이번 호 주제는 ‘돈과 소비’예요. 사실 주제가 너무 어려웠는데, 문득 《교실의 시》에 수록된 시인님 에세이가 생각났어요.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롯데리아에 가서도 오도카니 앉아만 있었다는 내용이었죠.

제가 돈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땐 ‘돈이 없을 때’예요. 있을 때는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 저는 어릴 때 부모님께 제대로 돌봄을 받던 아이가 아니어서 그때야말로 돈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면서 지냈어요. 사실 학급 시스템은 사회성이 폭발하는 구조잖아요. 저는 학생 때 문예반이었는데, 거기서도 선배가 되면서 돈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요. 문예반 회장까지 맡는 바람에 다과비를 혼자 부담해야 했거든요. 합평회 때 음료와 간식을 준비해야 했고, 후배들 저녁 식사도 사 줘야만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그걸 다 용돈으로 충당하던데 전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매일이 돈 걱정이었죠. 학교에서는 문예반을 탐탁지 않아 해서 지원금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처음 아르바이트한 것도 이 즈음이에요.

 

첫 아르바이트는 뭐였어요?

버거킹이요. 열아홉 살 때였죠. 근데,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버거킹에서 알바하는 친구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하는거예요.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저는 알바비를 모아야 하는데 거기 끼면서 자꾸 돈을 쓰게 됐죠. 어느 순간 모임에서 살짝 빠지게 됐는데, 그 이후로 힘든 파트에만 배치되더라고요. 다들 나란히 서서 빵 놓고, 채소 놓고, 포장하고 그러는데 저 혼자 구석에서 열기가 훅훅 끼치는 그릴에 패티 굽고 있고…. 꽤 힘든 시절이었어요. 그 이후엔 논술 첨삭 알바도 하고, 대학생땐 방과후 돌봄 알바도 했어요. 동대문에서 밤에 시장 문을 여는 부부의 아이를 돌봐 주었는데, 학교 끝나면 숙제 봐주고 가방 챙겨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일이었어요. 나중에 영화 일할 때는 중간중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아르바이트 환경엔 만족했어요?

첫 아르바이트가 1998-99년 이땐데…. 시급이 1,800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아유….

세 시간 일해서 햄버거 하나 사 먹을 돈이었죠. 그래도 문예반 애들 간식 사 줘야 하니까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이 시기에 ‘돈이란 없으면 어떤 일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 생겼다고 했어요. 돈이 없어서 경험할 수 없던 일 중 가장 아쉬운 건 뭐였어요?

여행이요. 저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게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여행은 제게 소비의 영역에서 가장 멀리 있는 거였어요. 여행을 할 만큼 돈을 모았다 싶으면 월세나 보증금이 올라서 생활이 빡빡해졌죠. 그렇게 30대 중반에 처음 해외에 가게 되었어요. 첫 여행지는 쿠바였죠. 도착하자마자 감격해서 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어딜 가든 너무 벅차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걸어 다녔어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바야모에 갔는데 광장에… 아니 뭐가 왔는지 아세요? 증기기관차가 오는 거예요. ‘이게 뭐지?’ 꼭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았죠. 연기가 풀풀 나는 기차가 역에 도착했고, 꼭 영화 속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 옆으론 마차가 지나다니고 있었고요.

 

증기기관차요? 사람이 타나요?

네. 상상이 안 되시죠?

와, 이거야말로 돈으로 경험을 산 거네요.

여행은 다분히 돈으로 사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이나 전시도 그렇고요. 저는 무용 공연 보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잔고가 얼마 없는데도 연말이면 LG아트센터 1년 패키지 할인권을 살 정도로 좋아해요. 그 당시 40-50만 원 정도 했는데, 30대 초반인 저한텐 굉장히 큰돈이었거든요. 그래도 돈으로 경험을 산다는 마음으로 꼭 그 티켓을 샀어요. 패키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티켓을 먼저 오픈하기 때문에 좀더 좋은 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볼 수가 있어요. 특히 공연은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경험치와 감동 정도가 완전히 달라져요. 좋은 자리에 앉으면 훨씬 더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죠. 그렇게 공연을 보러 다니니까 주변 사람들이 저를 되게 유복한 앤 줄 알더라고요. 어려움 없이 공연장에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근데 전 연초에 그거 사고 수중에 10만 원도 남지 않은 채로 살았거든요. 공연을 선택한 대신 거의 모든 생활을 포기한 거죠.

 

그때 가장 먼저 포기하던 게 뭐였어요?

친구들 만나는 거요. 옷 사거나 밥 먹는 것도 줄였어요. ‘이 돈이면 VIP 좌석에 앉을 수 있어.’ 오직 그 생각이었죠. 그땐 공연을 진짜 좋아했고 많이 봤어요. 그러다 30대 중반에 제주로 가치 있는 건 스스로 빛을 내니까 내려가게 됐는데, 거기 가서는 공연을 마음껏 못 보니까…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한번은 당일치기로 LG아트센터에 가서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요. 공연은 진짜 좋았는데 힘들어서 두 번은 못 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점차 공연을 안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서서히 익숙해진 것 같아요. 확실히 지방에서는 서울에 비해 공연이나 문화 활동을 즐기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지금은 부산에 있어서 제주에 살 때보단 좀 나아지긴 했죠. 지금도 공연 보고 싶다는 욕망이 커서 무슨 공연을 하나 홈페이지를 자주 들여다보곤 해요. 앞으로는 좀 보러 다녀볼까 싶어요. 내년에는 정기권을 구입할까하고 있고요. 앞으로 1년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일단 사고 보려고요.

 

《어라운드》 63호 인터뷰에서 “글을 써선 우리 둘(유진목과 그의 남편)을 돌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 건 진짜 힘든… 건가요?

그렇죠. 고정 수입이 없거든요. 정기적인 청탁이 있어도 어려워요. 원고지 10매 분량의 신문 칼럼이 하나에 20만 원 정도예요. 이걸 매달 쓴다고 해도 과연 한 달에 몇 개를 써야 생계가 유지될까요? 열 개를 쓰면 200만 원, 1인이 가까스로 살만한 금액인데 서울에선 이 돈으로 살기엔 좀 벅차죠. 게다가 한 달에 열 편을 연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까요? 한 달에 두세 개 정도 고정으로 연재하고, 나머지는 인세로 충당한다…. 인세는 매달 들어오는게 아니거든요. 보통 분기별로 들어오거나 다음 쇄가 소진됐을 때에야 들어오는데, 그건 책이 얼마나 팔리느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 전부 운에 맡겨야 해요. 언제 재쇄를 찍어서 인세가 들어올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책을 대충 1만 5천 원이라고 치면, 1000부 찍었을 때 150만 원을 받게 돼요. 그걸 한 달에 한 번씩 받아도 부족할 텐데…. 이건 보너스를 받는 거지, 생활비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려면 글 쓰는 거 말고 또 다른 행위가 필요해요. 강연이라든지…. 원고료가 상승하지 않는 이상 글쓰기로 먹고 살긴 불가능해요.

아까 유진목을 설명하는 대표 단어로 시인을 꼽으셨는데요. 그렇다면 나를 대표하는 역할이 내 생계를 책임져 주지 못하는 거네요.

네. 시라는 장르가 제 성향과 잘 맞아서 제 정체성이라고 이야기한 거고, 생계를 이어갈 역할을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서점 ‘손목서가’겠네요. 올해는 그래도 강의가 좀 있어서 생계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어요.

 

서울로 강의를 다니는 게 힘에 부치진 않아요? 이동하는 데만 왕복 여섯 시간 이상이 걸리잖아요.

처음엔 힘들었어요. 근데 점점 흐름을 타면서 제 체력이 거기 맞춰지더라고요. 부산에서 서점만 왔다 갔다 할 때보다 활동영역이 넓어져서 좀더 건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이동이 길어진 만큼 체력을 더 써야 하기 때문에 전보다 밥도 더 잘 챙겨 먹게 되고, 그 덕에 체중도 많이 늘었어요. 사람은 뭔가를 잘하고 싶으면 반드시 노력을 하게 돼요. 몸소 겪고 보니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강의를 잘하려면 전날 일찍 자야 하고, 늦게 일어나서 후다닥 나가는 게 아니라 밥도 잘 챙겨 먹고 한두 시간 여유를 두고 준비하게 돼요.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게 된달까요. 그렇다는 걸 몰랐을 땐 거리가 멀면 강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지금은 거기 몸이 맞춰져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았더니 매주 서울을 왔다 갔다 하게 됐죠. 진짜 정신없이 상반기가 지나갔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좀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해주나요?

그럼요. 모든 게 약속이거든요. 목년사의 낭독 연재는 출판사와의 약속이고, 영상 공개 일자를 공지했기 때문에 기다려 주시는 분들과의 약속이기도 하죠. 저는 혼자 있을 땐 아무렇게나 있어도 상관이 없는데 남과의 약속은 잘 지키고 싶어요. 약속은 서로 기대가 있을 때 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면 기분이 좋고,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어요. 사람과 어울리는 데 크게 마음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말은 제가 할 일을 다 했을 때, 그다음에 나오는 반응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가 약속을 다 지켰다면 저는 그걸로 끝이에요. 그다음 약속을 향해 가야 하기 때문에 지킨 약속의 이후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들 반응 같은 데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죠. 누군가 제 책이 재미없다고 이야기한들 신경 쓸 시간도, 마음도 없다는 거죠. 어쩜 제 성격이 제가 굳이 묻지 않는 한 남들 피드백을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시인님의 모습이 참 솔직해 보여요. 창작물에 재능기부를 요하는 사회에 고료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용기 있어 보이고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창작물에 사용료를 지불하는데 인색한 걸까요?

전적으로 선배들 탓이죠.

 

그들이 그렇게 해와서요?

네. 그들이 한 번 더 묻지 않았기 때문에요.

 

왜 돈을 안 주느냐고…?

네. “얼마예요?”라고. 얼마냐고 묻지 않으면, 얼마라는 답변을 할 필요가 없어지거든요. 저는 영화 일을 하다가 시인이 된 사람이에요. 영화 일은 항상 대화의 시작이 페이예요. 만나자마자 ‘이번 영화의 예산은 얼마고, 너의 직급에 줄 수 있는 페이는 이거다. 가능한가?’를 논하게 돼요.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그게 불가능하면 그다음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시간 낭비니까요. 시인이 되고 처음 청탁 전화를 받았는데, 끊고 생각해 보니 페이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한 거예요. 페이 제안이 없던 일이 처음이라 어리둥절해서 다시 전화해 보려고 했는데… ‘페이가 얼마냐’고 묻는 게 좀 그렇더라고요. 지금까지는 물어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기분일 거라곤 생각을 못했거든요. 제 원고료를 되묻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그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체면을 차리게 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중에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어갔는데, 잡지가 나와도 원고료가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그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청탁 제안이 오면 묻기 시작했어요. “원고료가 얼마입니까?”, “왜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습니까?”, “잡지가 나왔는데 왜 고료가 들어오지 않는 겁니까?”

 

반응이 어땠어요?

당황해하죠. 출판 업계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시인이란 직업이 생겨난 게 1-2년된 일이 아니잖아요. “시 한 수 읊게.” 했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이 넘은 직업인데, 고료 시스템은 왜 이렇게 굳어진 걸까요? 제가 2015년에 등단했는데요. 그때까지도 원고료가 얼마인지 명시하지 않고, 지급일이 언제인지 알려주지 않는 건 다 지금까지 먼저 작가가 된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게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작가 선배들을 존경하지 않게 됐죠. 전혀, 전혀 존경스럽지 않아요. 이런 판을 후배들에게 물려준 데 있어 선배 작가들은 부끄러워해야 해요. 저희 앞에서 글이 어떻네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거… 인터뷰에 실려도 되는 건가요?

꼭 써주세요. 꼭.

 

계속 목소리를 내면 이런 문화가 좀 바뀔까요?

요구하면 일단은 고료를 명시해서 메일을 다시 보내 주더라고요. 앞으로도 틈날 때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려고요. 작가에게 청탁할 땐 고료와 지급일이 당연히 명시되어야 해요. 이 기본적인 걸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좀… 휴.

 

제시되는 원고료는 어때요? 적정 수준에 미치나요?

전혀 그렇지 않고, 그래서 거절해요. 최근에 거절한 건 시편 재수록과 시론에 대한 건이었어요. 원고료가 책정되어 있지 않아서 물어보니 신작 시에만 고료가 책정되고 발표한 시를 재수록하는 데는 고료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던데…. 원고료가 책정되지 않으면 제 사정도 어려워지거든요. 재수록에 대한 원고료가 없으면 진행이 어렵다고 반려 메일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앞으로 시정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고료를 줄 수 있는 만큼만 청탁하는 게 상식 아닐까요? 어쨌든 목소리를 내서 한 번쯤은 지적해야 앞으로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을까 싶어요. 차차 바뀌리라고 기대는 하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내 고료에 대한 기준도 생겼을 것 같아요.

저만의 기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료가 적다고 해서 무조건 거절하진 않아요. “저희 예산이 이 정도여서 이 정도의 고료를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청탁 요청이 온다면 고료가 적어도 승낙해요. 예를 들어서 같은 5만 원이어도 태도나 상황에 따라서 다른 5만 원이 될 수 있는 거죠. 돈은 액수보다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근데 진짜 성의 없는 일 처리나 태도 같은 건 정말 싫어요. 고료를 여러 차례 물어 겨우 받아낸 대답이 5만 원이면, 그땐 거절하는 거죠.

 

고료가 정말 높은데 태도가 별로라면요?

안 합니다.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 거네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태도가 별로라면 하지 않아요.

 

시인님의 이런 태도가 용기 있어 보이는 건 세상의 많은 노동자가 돈 이야길 어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돈 밝힌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감추게 되는 것도 있고요. 돈은 결코 부끄러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아마도 양반 문화에서 온 게 아닐까 싶어요. 양반들은 돈 얘길 안 하잖아요. 지금 우리는 명예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절로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명예보다 돈인가요?

아니요, 가치.

 

가치!

합리적인 가치요.

 

그럼 일할 때 1순위로 두는 건 가치예요?

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인가 계속 생각해요.

 

근데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어? 저는 눈에 보인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요?

가치 있는 건 스스로 빛을 내거든요.

 

예를 들어주세요.

가치 있는 사람은 가까이 가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눈에 보인다고 생각해요. 아주 오래된 동네와 낡은 물건… 이런 건 스스로 빛을 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거고요. 만일 저기 오물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다가가지 않을 거예요. 근데 그게 비료가 되는 귀중한 자원이라면 가까이 가야만 하거든요. 가치가 있으니까요. 눈으로 확실히 구분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쓰임이 많을수록 가치도 높아지는 건가요? 

쓰임이 없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럼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되죠. 

 

가치에는 값을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거라면 없애지 않는 것도 비용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숲의 나무를 없애지 않는 것. 관리 안하려고 없애는 건데, 거기 그대로 두면 두는 그대로 가치를 보존하게 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인데 현대 사회에선 귀중한 것들을 없애는 데 더 혈안인 것 같아요.

다시 고료 이야기로 돌아와 볼게요. 지금은 좀더 많은 예술인이 비용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제는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사용자 측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고요.

 

그럼 현실에 순응하고 목소리 내지 않는 사람들에겐 반감이 생기기도 하나요?

아니요. 사람은 누구나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요. 용기라는 건 만들어서 가지는 것이지 애초부터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용기가 없거나 비겁한 행동은 절대 비난하지 않아요. 사람은 언제나 도망가고, 숨을 수 있고, 목소리 내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목소리를 내면서 목소리 내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노동은 생계 때문에 하는 일인데 기쁨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아, 도대체 돈이 뭐길래….

이 세계에선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한국은 돈 없이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복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이 아파트, 투룸에 오션뷰인데 1000에 60이에요. 놀랍지 않으세요? 주인 할머니가 60만 원으로 생활하시기 때문에 보증금을 높이지 않죠. 이게 왜 상징적이냐면, 제가 서울에서도 계속 1000에 60으로 살았거든요. 근데 그땐 원룸에 살았어요. 이게 저는 서울의 비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해요. 원룸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최하계층, 학생, 독거노인일 텐데, 그 사람들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1000에 60인 거예요. 2010년에 연남동에 살 때 1000에 60으로 방이 세 개 딸린 집에 살았어요. 14평 정도였죠. 근데 7년이 지나니까 같은 1000에 60으로는 방이 두 개가 됐어요. 그러다 나중엔 1000에 60을 들고 일산으로 가게 됐죠. 서울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바깥으로 밀려나게 돼요. 서울에서 10여 년을 1000에 60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 집 같은 주거 환경은 가져본 적이 없어요. 주거는 사람이 사는 데 아주 기본적이고 치명적인 환경이에요. 근데 서울은 그걸 너무 잔인하게 이용해요.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1000에 30으로 집을 내어줄 수도 있잖아요. 근데 안 그러죠. 1000에 60 내고도 마루만 한 곳에 부엌과 화장실이 다 있는 좁디좁은 데서 사람이 살아야 하는 거예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훼손되는거죠. 그러다 보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마음이 병들고, 건강이 나빠지고, 그러다 보면 분노가 쌓여요. 돈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돈이 많다고 웃는 일이 많아지거나….

네.

 

존엄성이 높아지거나….

네.

 

가치 있는 사람이 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돈이 진짜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고, 월급을 200-300만 원씩 받는 평균 청년들이 건강한 마인드로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 있느냐 하고 물으면 아니라는 거죠. 돈이 많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으로 내 자존감을 지켜가면서 건강하고 보람차게 살아갈 만한 환경이 아닌 거예요. 월급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고용주가 갑자기 월급을 600만 원으로 올리지 않는 한 전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청년들은 사회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연봉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 봤자 근본은 바뀌지 않는단 거군요.

네, 네네. 개인이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한국 사회의 청년들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평균 임금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국가가 정책을 통해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죠. 세를 놓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세를 위한 여러 정책을 만들어 주잖아요. 부동산 정책 같은 거요. 그런데 청년들의 주거 환경에 대해서는 아무 정책도 없는 거고, 그냥 집주인 마음인 거예요. 월세를 충당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부모님께 손을 벌리게 돼요. 근데, 유복한 부모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요? 아마 자신을 탓하면서 살아가게 되겠죠. 전 기회가 되면 이런 이야길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는데요. 그럼 전 농담 삼아 그래요. ‘화염병 한 번 못 던져보고 빨갱이 소리 듣는다.’고(웃음). 청년들이 자존감을 지키면서 자기의 가치를 알고, 병들지 않은 채 미래를 꿈꿔가는 사회가 되려면 한국 사회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해요.

오랫동안

나란히 함께할 것들

돈에는 유독 부정적인 견해가 많아요. ‘돈지랄’이라는 단어도 그렇고요. 돈지랄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어요.

저의 잘한 돈지랄은(웃음) 역시 여행이요. 여행 중에서도 취재 여행을 갔을 때요. 취재로 여행 간 건 처음 있던 일인데 장기간 여러 차례 가게 됐거든요. ‘내가 작가여서 취재 차 여행도 올 수 있구나! 아, 너무 좋다!’고 여러 번 생각했어요. 제 직업이 보람찼던 순간이었죠(웃음). 요즘 저는 마쓰모토 세이초まつもとせいちょう 전기를 쓰고 있는데, 세이초 소설에 나오는 장소를 취재하러 일본에 간 거였거든요. 시골의 온갖 료칸 같은 델 원 없이 가게 됐죠. 세이초가 옛날 사람이다 보니까 제가 가야 하는 곳도 오래된 료칸이었어요. 오래 보존된 곳이어서 되게 비싸요. 취재가 아니면 오지 못했겠다 싶을 정도로요. 그때 너무나도 귀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와, 소설 속 화자 되어 보기네요.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일본 하코네가 배경인 《푸른 묘점》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여기 나오는 료칸이 엄청 고급이거든요. 1박에 100만 원, 밥 한끼에 40만 원이에요. 그걸 제가 사비로 어떻게 누려 보겠어요. 지금 이 집의 네 배 정도 되는 크기를 혼자 쓴 거예요. 층 전체가 제 집이었죠. 하도 오래된 료칸이라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창과 문이 다다다다 흔들려요. 숲속에 있어서 비도 많이 오고요. 편안한 환경이 아닌데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녁 식사를 하는데 조그마한 접시에 음식이 끝도 없이 나왔거든요. 하나 하나 너무 맛있더라고요. 그게 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이라 엄청 즐거웠어요. 제가 이 작가를 좋아한 것도 뿌듯해졌고요.

 

“영화는 남의 돈을 써서 만들기 때문에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죠. 취재 여행 또한 타인의 돈을 사용하는 건데, 내 돈으로 여행하는 거랑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요?

남의 돈을 쓸 때는 그가 내어준 돈이 고스란히, 혹은 그 이상의 가치로 되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좀더 보편적인 결과물을 생각하게 되죠. 내 만족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야 한다는 책임이 따르거든요. 내가 모르는, 나와 상관없는 어떤 사람마저도 결과물을 보고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돈을 지불할 수 있게끔 해야 하는 거죠. 반면, 내 돈을 써서 만드는 작업물은 저 혼자 만족해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료칸에서 저녁 먹을 때 좋기도 했지만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내 돈을 내고 먹는 거라면 그저 맛있게 먹고 말았을 텐데 이걸 어떻게 글로 풀어야 하지? 어떻게 전달하지? 그런 생각을 계속하게 됐거든요. 제 돈으로 사 먹는 게 아니니까요.

 

들을수록 세이초 전기가 궁금해지네요.

제가 읽어도 너무 재밌어요(웃음).

 

지금 생계를 이어가게 해주는 게 손목서가라고 했어요. 부산 영도에 있는 서점이죠. 처음에 도서관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는데, 지금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어요?

초반 생각과 비교하면 완전히 실패죠. 그래도 가끔 2층에 올랐을 때 모든 분이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있어요. 아주 가끔씩 실현되는 일이죠. 그땐 저도 살금살금 지나다니게 되는데, 그런 장면을 보면 “매직 데이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와요.

 

손목서가를 운영하면서 손님들이 책을 소품으로 쓰는 모습도 많이 보게 된다고 했어요. 그럴 때 기분이 어때요?

제가 굉장히 싫어하는 게 어떤… ‘척하는’ 거예요. 그게 책 읽는 척이어서 더 싫은 거고요. 책 읽는 척은 왜 하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책 읽는 사람이 좋기 때문에 하는 거겠죠? 그게 좋아 보이지만 자기 자신은 하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니까요. 책은 자기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어요. 남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읽는 척하는 거, 그런 문화에 저는 굉장한 거부감이 있어요. 근데 SNS에 그런 식으로 손목서가를 보여주는 사람들 덕분에 홍보가 잘되는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저는 그런 홍보는 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거 때문에 그런 사람들만 더 오게 되거든요. 그래서 손목서가 인스타그램 계정도 닫은 거고요.

 

소품처럼 다뤄지느니 차라리 판매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건 가요?

음… 책을 사려는 사람은 그런 보여지는, 척하는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는 거죠. 진짜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척하는 모습을 보고 오는 게 아니라 서가에 무슨 책이 꽂혀 있는지 궁금해서 오는 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책과 관련된 팬시한 굿즈도 좋아하지 않고,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어떤 책이 입고되었는지 사진을 촬영해서 올린다거나… 하지 않아요. 나름의 운영 방침을 가지고 있는 거죠. 진짜 원하는 사람들은 직접 와서 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손목서가는 의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하기도 하고, 커피나 직접 만든 음료를 판매하기도 해요. 가죽이나 패브릭으로 굿즈를 만들기도 하고요. 서점을 벗어나 하나의 브랜드로서 기능하는 것 같아요.

손목서가는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함께하는 작은 공간이면 좋겠어요. 책뿐만 아니라 좀더 다양한 물건을 사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책으로 만든 굿즈가 아니라 진짜 ‘물건’이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하거든요. 세계 100대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로 알려진 일본의 케이분샤에 갔을 때도 책보다 생활용품을 더 많이 사 왔어요. 일본어를 잘하지 못하니까 사진집이나 화집 위주로 보긴 하는데, 그래도 모자랑 옷, 고무장갑 같은 물건을 사 온 걸 보면 확실히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케이분샤에는 냄비나 포크 같은 것도 팔거든요. 손목서가에서 쓰는 포크 중엔 케이분샤에서 온 것도 있죠. 사람들이 손목서가에 와서 다양한 걸 사 가면 좋겠다 싶어서 나무 상자도 만들고, 이것저것 물건을 들이는 데 관심이 있어요.

 

취향은 일정 부분 소비로 완성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스타일 역시 소비로 완성된 걸 텐데요. 작가님만의 참새 방앗간이 궁금하네요.

저요? 안경점에 가면 큰일 나요. 되도록 안 가려고 하죠. 옷이랑 안경은 숍에 들어가기만 하면 꼭 사게 되거든요. 화집이나 사진집도 위험하고요.

 

이것만큼은 이 돈 주고 사길 잘했다, 싶은 물건이 있다면요?

다요.

 

어? 그럼 실패한 물건은요?

전 물건을 사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어요. 싼 걸 사고 금세 버린 적도 있지만, 그런 것도 다 ‘싼 게 비지떡이다.’라는 걸 인지하고 구매한 거여서 만족해요. 그 외엔 전부 충분히 고민하고 신중하게 물건을 사는 편이죠.

 

충동구매도 잘 안 하고요?

네. 사실 안경 같은 건 한 번 꽂히면 대여섯 개씩 갖게 되는데요. 어떤 면에선 충동구매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나칠 수 없는 거여서 신중하게 고르거든요. 그래서 후회는 하지 않아요.

 

충동구매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신중해진다는 거예요?

맞아요. 제가 사는 것들은 제 수입 안에선 비싼 거여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거덜 나버리니까요(웃음). 제가 소비할 때의 기준은 ‘오래 만족할 수 있는가’ 예요.

 

소비도 돈이 있어야 하는 일이에요.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엔 참 많죠. 이러한 한계 안에서 어떻게 안정을 찾고 있어요?

저는 돈이 없어도 자유로운 편이에요. 한창 돈 때문에 생활이 힘들었을 때도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돈을 어떻게 불리지?’ 하는 생각을 잘 안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돈에는 욕심이 별로 없어요.

 

돈 모으는 데 관심이 없나요?

생각 자체가 없어요. 더 많이 갖는 건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작업 제안이 들어오면 그때 받을 비용을 생각하는 편이죠. ‘○○○원이 들어올 텐데, 이걸로 뭘 하지?’ 하고요. 반대로 ‘○○○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여건이 되면 그때야 하고 싶은 걸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웃음).

 

지금 행복하세요?

그럼요. 아! 오신 김에 손목서가 들렀다 가실래요?

우리는 손목서가에 들러 직접 만든 글뤼바인을 마셨다. 정통 독일식 레시피로 달여낸 이 음료는 여러 과일과 향신료, 그리고 와인을 넣고 팔팔 끓이는 음료다. 알코올은 모두 기화되어 술맛을 전혀 느낄 수 없지만, 어쩐지 자꾸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알코올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이었겠지. 차가운 글뤼바인을 마시며 손목서가를 구경했다. 손목서가의 스티커가 붙은 책은 구입할 수 없는 소장용 도서. 그런 책만 자꾸 집어서 고른 책 중 살 수 있던 책은 딱 한 권뿐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을 누가 사려나 싶었는데!”하던 유진목 시인님의 얼굴과 이 책을 선물받을 사람을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2021년 여름, 부산은 이토록 찬란했다. 그가 앞으로도 계속 돈 걱정 없이 행복했으면 한다.

손목서가
A. 부산 영도구 흰여울길 307
O. 매일 11:00-19:00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