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ing About A Girl With Bobbed-Hair

일러스트레이터 오케이티나

몽글한 단발머리에 빨간 스트라이프 티셔츠, 그리고 눈에 띄는 멋진 짝짝이 양말. 내가 아는 티나는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야무진 소녀다. 티나 자신이자 그린 이이기도 한 일러스트레이터 홍수영은 15년 전 일기장을 채워오던 소녀를 처음 세상에 소개한 뒤 지금까지 꾸준히 ‘오케이티나’라는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이라면 자신에게 말하듯 그려오던 그림이 아이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 직접 만난 그녀는 짝짝이 양말은 신지 않았지만, 들뜬 얼굴로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티나와 닮아 있었다

나는 티나

달라도 괜찮아

이사한 지 열흘도 안 돼서 집에 초대해 주셨어요. 바쁘셨죠?

이사하고 바로 인터뷰 일정 잡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웃음). 아직 정리가 다 안 돼서 안방 침대 뒤쪽에 잡동사니가 이만큼 쌓여 있네요. 최근에는 이사 준비하느라 바빴고, 올 초에 작업한 창작 그림책 두 권을 하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라 차례대로 마무리 짓는 중이에요. 쓰고 그리는 창작 그림책은 오랜만인 데다가 아들 재이와 관련된 이야기여서 더 기대돼요.그림책 외에는 아이 의류를 포함한 브랜드 협업도 몇 가지하고 있어요.

 

이번 호 주제가 정해지자마자 작가님을 떠올렸어요. ‘오케이티나’의 세월에 스민 이야기가 궁금했거든요. 티나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실래요?

티나라는 이름은 어릴 때부터 쓰던 영어 이름이에요. 일기장에 ‘난 괜찮아.’라는 긍정의 의미로 ‘오케이티나’라고 쓰곤했어요. 그 시절 싸이월드 감성이었죠(웃음). 티나는 제가 원하는 모습을 담아 그려낸 밝고 긍정적인 단발머리 소녀예요.학생 때는 머리카락 1센티미터 자르는 것도 아까워서 단발머리에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티나 머리를 단발로 설정했어요. 성격은 어릴 때 좋아하던 ‘삐삐 롱스타킹’처럼 활발하고 씩씩했으면 했고요.

 

티나는 늘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더 밝아 보이는 것 같아요.

작은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모습을 그리는 걸 좋아해요. 《티나와 구름 솜사탕》에 페이지 양쪽이 팝업으로 펼쳐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거기에도 좋아하는 걸 엄청 많이 그려넣었어요. 재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재이도 조그맣게 그리고 저도 그렸어요. 잘 찾아보면 <스타워즈>의 ‘요다’도 있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도 있어요.

 

저도 그 페이지 보고 ‘이게 다 몇 명이야?’ 했던 것 같아요. 학생 때부터 이 길을 걸어왔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전공은 무대 디자인이었다고요?

맞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화나 공연 보는 걸 좋아해서 전공으로 이어간다는 생각으로 무대미술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작업하는 건 너무 재미있었는데 생각보다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원하는 걸 바로 만들지 못하고 꼭 몇 사람의 컨펌을 거쳐야 했죠. 처음 기획했던 대로 연출되기가 힘들더라고요. 학교 다니면서 ‘아, 나는 단체 작업보다 개인적인 작업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어떻게 갖게 된 거예요?

학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고, 일러스트 일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요즘 인스타그램에 글과 그림을 올리는 것처럼 싸이월드에 그림판으로 그린 그림일기를 올렸는데 운 좋게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어요. 문구 회사의 제안으로 머천다 이징 일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일로 이어졌고요. 많은 분들이 ‘오케이티나’ 하면 싸이월드 스킨을 떠올려 주세요. 당시에 제가 그 작업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시스템상 꼭 사업자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덜컥 개인사업자를 냈어요. 프리랜서와 개인사업자가 뭐가 다른지, 세금은 어떻게 내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별 고민도 안 했던 것 같아요.‘이름은 그냥 오케이티나로 하면 되겠지?’ 정도였죠(웃음).다행히 기획안이 통과되고 이후에도 일이 잘 풀려서 사업을 재미있게 해나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몰라서 용감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몰라서 저지를 수 있었다는 말, 뭔지 알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펼쳐나가는 데 망설임이 없고 적극적으로 보여요.

원하는 일은 꼭 해내는 추진력이 강한 편이에요. 운도 많이 따랐지만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평가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그 마음이 감사하게도 이곳저곳 퍼져서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준 것 같아요.

 

싸이월드 스킨에서 수많은 굿즈로, 굿즈에서 그림책으로 영역을 확장해 왔어요.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갈 때마다 계기가 있었나요?

브랜드 협업 작업은 일 시작하고 지금까지 15년째 하고 있어요. 캐릭터 문구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많이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쓰고 싶어서 문구류를 만들어 왔어요. 10년동안 작업해 온 다이어리는 물론이고 다른 제품들 역시 지금도 모두 아껴서 사용하고 있죠. 그런데 30대가 되면서 제가 더는 필통을 들고 다니지 않게 되고, 다이어리보다 아이폰에 기록하는 게 더 편해지는 시기가 왔어요. 상품을 만드는 게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수백 가지 상품군이 쌓여갈수록 새로움 없이 패키지만 바뀌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전처럼 설레지 않고 회의감이 들었어요. 상품은 소비되는 것이다 보니 환경 문제에 관한 걱정도 많았고요. 시중에 이렇게 예쁘고 좋은 상품이 많은데 내가 이걸 계속하는게 맞을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그때 많이 했어요.

 

그 고민의 결과가 첫 그림책 《티나의 양말》인가요?

맞아요.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스스로 자꾸 묻다 보니 그림에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답이 나왔어요. 상품은 단편적인 부분만 보이니까 아무리 그 안에 이야기를 넣으려고 해도 하나의 그림으로만 기억돼요. 해마다 유행이 바뀌었기 때문에 비슷한 디자인, 비슷한 상품도 많이 나와서 점점 정체성을 찾기도 어려웠어요. 갈수록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고 그게 그림책까지 흘러갔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 위에 내가 좋아하는 예쁜 그림들을 엮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훨씬 어렵고 복잡하더라고요. 멜로디와 가사가 조화로워야 좋은 노래가 나오듯이 장면과 텍스트가 리듬감 있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했어요. 첫 더미를 만들면서 ‘이거 처음부터 아예 다시 배워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림책은 지금도 어렵다고 느끼고 공부할 것도 많은 영역이에요.아직 배우고 싶고 잘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게 그림책이어서 너무 좋아요.  

《티나의 양말》에서 티나가 짝짝이 양말을 신고 나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처음 한 생각이 ‘내 양말이 짝짝이라서 이상한가?’라는 의기소침한 생각이 아니라 ‘다들 내 양말이 멋져 보이나 봐!’라는 게 정말 좋았어요.

그림책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라도 괜찮아.’였어요. 대학교 졸업하고 뉴욕에 갔을 때 생각을 크게 전환하게 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일들이 거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워낙 다양한 인종이 있어서 그런지 같은 상황이라도 각자 느끼는 감각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분위기예요. 뭘 해도 자유로웠어요. 날씨가 추울 때 누구는 패딩을 입고 누구는 반팔을 입어도, 남자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요.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저도 점점 타인의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죠. 미국에 있으면서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경험했어요. 2년 정도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갑갑함이 느껴질 정도로요. 티나 역시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어도 티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티나가 씩씩한 이유가 있었네요. 뉴욕에는 공부하러 가신거예요?

사실 부모님 등쌀에 떠밀려 간건데 결과적으로는 공부도 하고 일도 했어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살아가면서 외국 생활을 한 번 해보는 건 인생의 큰 자산이 될 거라고, 대학 졸업하면 꼭 나가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계속 부모님 밑에서 살다가 결혼해 버리면 기회가 더 없어지니 꼭 나가라고, 토익이나 토플 점수 같은 건 준비 안 해도 된다고요(웃음). 제가 대학교4학년 때 언니가 먼저 뉴욕으로 떠났어요. 저는 친구들도 서울에 있고 미국은 여행으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기가 싫더라고요. 그 울타리를 깨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동기들이랑 졸업 전시만 하고 간다며 미루고 미루다가 떠났는데, 가자마자 아빠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았어요. 여행만으로는 못 느끼는, 이방인으로서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감각이 뭔지를요. 1년만 있다 오라고 하셨는데 한 달 있어 보니까 1년 가지고는 턱도 없을 것 같아서 일을 시작했어요.프리랜서이기 때문에 타국에서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죠. 참 값진 경험이었어요.

쉬지 않고 작업하면서 그림 그리는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의 티나는 저였어요. 저와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죠.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노래 중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My Favorite Things’라는 곡이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계속 나열하는 노래예요. 그 노래처럼 저는 항상 무언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살았어요. 이 일을 시작할 때도 남들이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혼자 보는 그림일기처럼 그리곤 했어요. 그런데 5년, 10년이 지날수록 내 경험을 나누고 싶어졌어요. 인상 깊었던 영화나 여행지, 공연을 보면서 눈에 담은 것들을 빨리 집에 가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취향이 맞는 사람과 영화를 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지잖아요.저한테는 그림이 그래요. 내가 지나온 10대, 20대의 동생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들도 생겼어요.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나와 같은 처지인 엄마들과 아이들에게도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도 아이들도 좀더 긍정적이기를 바라요. 사실 아이들은 좀 왈가닥이어도 괜찮잖아요. 여기저기 치이지 않고 마음껏 에너지를 내뿜을 수 있는 시기가 그때뿐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씩씩하고 호기심 많게, 자유롭게 컸으면 좋겠어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어른들 몫이라고 생각해요. “너희들은 더 자유로워져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굿즈와 그림책 작업 외에 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머천다이징을 오래 하면서 회의감이 드는 시기가 있었는데, 아이 낳고 보니 신세계가 펼쳐졌어요. 제가 요즘 제일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는 게 아이와 관련된 거니까 자연스럽게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 옷, 아이용품 브랜드와 협업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애니메이션인데요. 올해 초 《티나의 양말》이 파일럿 형태로 제작되었어요. 다른 과정이 남아 있어서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티나에게 생명력을 주고 움직임과 목소리를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진행한 작업이에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오래오래 그리고 싶다.’라는 생각은 아직 유효한가요?

그럼요. 잘 그리는 그림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르기도 하지만 만약에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냥 오래오래 그리는 걸 택할래요.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와 좋아하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니까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육아를 시작한 후에는 오래오래 그리는 것보다 이 일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는 게 진짜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가족이라는 테두리와

아이가 선물한 스케치북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셨다고요.

엄마, 아빠가 결혼하시고 10년 정도 일본에 사셨어요. 저는 네 살, 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는 시점까지 거기서 자랐고요. 엄마는 일본 이야기를 할 때면 그곳에선 작은 물건 하나를 사도 어여쁜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서 참 신기했다고 말씀하세요. 일본에 있을 때 <이웃집 토토로>를 티브이에서 방영했는데요. 엄마, 아빠가 비디오테이프로 일일이 녹화해서 보여주셨어요. 좀 커서는 아빠가 찰리 채플린이나 히치콕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다 같이 보곤 했어요. 고작 중학생이었는데요(웃음). 

중·고등학교 땐 저와 언니가 좋아하는 만화책《20세기 소년》을 같이 빌려 보고, 하루키 책은 가족 모두가 좋아하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함께 봤죠. 읽는 속도가 다 달라서 책을 제일 빨리 읽는 아빠가 1등으로 보고, 중간에 밀리지 않도록 순서대로 돌려 봤어요. 일본에 있을 때 디즈니랜드에 자주 다녔던 것도 그렇고, 가족이 다 같이 뭔가 하는 걸 참 좋아했어요. 지금은 결혼해서 모두가 떨어져 있지만 아쉬운 대로 서로 재미있게 본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추천하곤 해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와 취향을 공유하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내 취향을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는 걸 배우며 자랐어요.

 

가족 간의 유대감이 무척 컸나 봐요.

네. 아빠가 대학교 교수님이셔서 상대적으로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모두 모이는 밤에는 항상 왁자지껄한 집이었죠.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우리 가족이 함께 보낸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부모님의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저도 재이랑 그렇게 스스럼없이 지내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관계가 되고 싶어요.

 

밝은 아이였을 것 같아요.

어릴 때도 머릿속에 좋아하는 게 가득했던 것 같아요. 제가 케이크를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때는 생일에만 먹는 줄 알았어요. 윗부분에 잎사귀처럼 생긴 초콜릿이 뿌려져 있는 케이크가 있는데, 초코와 화이트 중 뭘 먹을지 매년 고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케이크가 초코 반 화이트 반으로 출시된 거예요. 그게 그렇게 기쁘더라고요.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릴 때 일 년을 기다렸던 생일 케이크를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어 행복했어요. 이런 일에 기뻐하는 저를 발견하고 나서 ‘아, 나는 울적한 일이 있어도 케이크 한 조각만 있으면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저 자신을 쉽게 위로하는 방법을 빨리 알아차린 셈이죠.

 

그 아이가 자라서 그림을 그리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어요. 아이 낳은 후에 일은 어떻게 이어갔어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육아 휴직도, 복직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가장 불안했어요.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 낳고 나서는 언제부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급했죠. 출산 후에는 손목이 많이 약해지거든요. 주위에서 무리해서 일을 시작하면 평생 손목 못 쓴다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재이 백일 때쯤부터 몸이 근질거려서 아이를 재워놓고 일을 시작했어요. 돌 전까지는 자야겠다는 마음보다 빨리 일해야겠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일 안하고 아이만 보는 일상이 저를 더 불안하게 했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 자면서 일을 했는데 돌 지날 무렵에 너무 무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 아이를 잠깐 보고 말 게 아니라 아이 성장에 맞춰서 패턴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림책 작업까지는 시간이 더 걸린 거죠?

네. 데드라인이 있는 외주 작업은 어떻게든 끝내야 하니 계속하긴 했는데, 길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 창작 작업을 시작하는 데까지는 더 오래 걸렸어요. 원래 그림책 작업할 땐 외주 작업을 병행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작업만 하거든요. 그림책 생각만 계속하다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리고 써요. 그 시간을 오롯이 그림책에만 쓰면서 탄력을 쭉 이어가고 싶은데 아이가 옆에 있으면 절대 불가능해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 많이 바뀌었어요. 신랑이 재택근무가 많아지고 재이도 더 컸죠. 어린이집에도 가고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니까 이제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계속 알려주고 있어요. 재이를 재우다가 조금 더 일하고 싶은 밤에는 “엄마가 부엉이 하나만 그리고 갈게. 아빠랑 자고 있어.” 말해요. 그럼 재이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부엉이 그렸어?” 하고 물어요. 결혼하면서 신랑이 제 일을 존중해 주는 느낌이 고맙고 좋았다면 지금은 아이도 제 일을 알고 함께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올해 들어서 균형이 많이 맞춰진 느낌이에요. 

 

이제 재이와 함께 차근차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겠네요. 

재이를 통해서 만나는 세상은 지금껏 알던 세상과 정말이지 다른 영역이에요.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아이에게 좋은 거, 위험한 거, 아이를 위해 있었으면 하는 게 다 새롭게 보여요. 작업할 때도 제가 아닌 재이의 색을 쓰게 됐어요. 재이가 좋아하는 중장비 차의 노란색, 재이가 요즘에 꽂힌 울트라마린 같은 색이죠. 늘 쓰던 색연필만 쓰니까 몽땅 색연필의 색이 정해져 있었는데 요즘엔 여러 색깔의 색연필이 골고루 짧아지고 있어요. 재이가 새로운 시선과 색, 그걸 담는 스케치북을 선물해 준 것 같아요. 요즘은 재이가 제 뮤즈예요.

 

지금의 리듬을 찾기까지 남편분의 도움도 컸을 것 같아요.

신랑이 많이 도와줬고 계속 함께 했어요. 재이 신생아 때부터 신랑 혼자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는 정도로 능숙해요. 급한 마감이 있으면 재이 데리고 시댁에 일박 이일 다녀오기도 했죠. 

 

육아를 내 것, 네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맞춰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신랑은 제가 하는 일을 존중해 줬고, 결혼 전의 라이프 스타일을 최대한 지켜주려고 했어요. 결혼 전에 작업실 없이 집에서 일하면서 월세 낼 돈을 모아 1년에 한 번씩 타국 생활을 했는데요. 그 생활을 결혼하고도 이어왔어요. 한창 그림책 더미 만들던 시기에는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에 참여할 겸 유럽에 갔는데, 제가 한 달쯤 머무르고 신랑은 중간에 와서 함께 있다가 돌아갔어요. 그런 노력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이어진 것 같아요. 단순히 육아를 함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제가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어요. 요즘에는 가끔 아침 여섯 시, 일곱 시까지 일하다 잠들면 신랑이 재이 아침 먹이고, 씻기고, 등원시키고, 돌아와서 같이 점심을 먹는 날도 있어요. 신랑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에요.

 

아버님이 아이를 봐주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맞아요. 엄마는 손주보다는 딸들을 더 챙겨주시는 것 같은데, 아빠는 정말 적극적으로 육아를 해주세요. 이사 오기 전에는 언니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는데, 아빠가 재이와 조카를 같이 봐주셨어요. 둘이 동갑이라 태어나서부터 거의 공동 육아처럼 키워 왔거든요. 아빠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고 있으면 저희는 피곤하니까 좀 슬슬 볼 때도 있는데, 아빠는 항상 곁에서 아이들 행동 하나하나를 마크하시더라고요. 직업 때문인지 뭘 많이 가르쳐 주시고 말도 되게 많이 시키세요. 그리고 점수 따려고 셔츠 주머니에 마이쮸 넣고 다니세요(웃음). 그런 모습들 보면서 ‘아, 우리도 어릴 때 아빠 사랑 많이 받았겠구나.’ 생각해요. 이렇게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나 다른 가족들을 자주 보면서 외동인 재이도 엄마, 아빠 외에 가족의 풍성함을 느끼기를 바라요. 살다 보니 가족의 테두리가 넓을수록 좋더라고요. 비빌 언덕이 많아지는 거니까요.

엄청난 디즈니 마니아라고 알고 있어요. 신혼여행 때 디즈니 월드 갔다는 글도 봤고요.

네! 올랜도에 디즈니랜드가 다섯 개 모여 있는 디즈니월드가 있어요. 상하이에 디즈니랜드가 생기기 전까지는 전 세계 모든 디즈니랜드에 다 가봤는데, 그 중 디즈니월드는 가족이 생기면 꼭 다시 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허니문 배지를 달면 디즈니월드의 모든 캐릭터들이 저한테 인사해 주거든요(웃음).

 

디즈니 캐릭터가 좋았던 거예요? 아니면 애니메이션이 좋았나요?

두 가지 다 좋지만 무엇보다 어린이의 동심을 지켜 주려는 문화를 좋아해요. 디즈니랜드에서는 디즈니 캐릭터들이 스타이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 도난 사건이 일어나도 아이들이 직접 볼 수 없도록 경찰은 랜드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일을 처리하죠. 어린이들이 소품을 실수로 파손해도 오히려 어른이 제대로 살피지 못해 미안해하며 어린이의 마음을 먼저 보듬어 줘요. 인형 탈을 쓴 직원들도 모두 그 캐릭터에 동화되어 행동하고요. 엄격하게 현실 세계와 차단되는거죠. 물론 상업적인 면도 크지만, 아이들이 무엇을 꿈꾸든 환영하고 존중해 주는 세계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디즈니랜드가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였어요.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라고 믿는 거요. 그 성에 실제로 캐릭터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 시기에는 뭐든 믿는 게 많을수록 좋잖아요. 나중에 커서도 “나한테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하고 어린 나를 귀여워할 수도 있어요. 저희 엄마, 아빠가 저를 그 안에 데려가 주셨듯이 저도 아이들 세계에서 통하는 허구의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아이들 마음이 풍요로워지도록요.

 

제일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뭐예요?

단연 <몬스터 주식회사>를 꼽고 싶어요.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셜리’예요. <몬스터 주식회사>는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에너지로 모으는 회사에서 일하던 셜리가 인간 아기 ‘부’와 인연을 맺고 일어나는 이야기예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쳐 결국 에너지원이 울음에서 웃음으로 바뀌게 되죠. 내용도 그렇지만 셜리의 색감도 너무 사랑스러워요. 뉴욕에 있을 때 <몬스터 대학교>가 개봉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신랑이 미국에 와 있어서 같이 보기도 했어요. 당연히 한국에 들어와서 또 보고요(웃음).

 

재이가 관심 갖는 캐릭터도 있어요?

<토이 스토리>의 ‘버즈’요. 국내 캐릭터들도 좋아하는데 요즘 다시 버즈를 찾기 시작했어요. 운이 좋았던 게 <토이 스토리 4>가 작년에 개봉했잖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고, 재이가 캐릭터를 알 만큼 컸고, 여기저기에 팝업 스토어가 생기고(웃음)…. 딱 그 시기에 제가 노력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버즈를 보여줄 수 있어서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확실히 혼자 즐기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즐기는 게 더 재미있어요.

작가님의 취향이 재이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재이에게 제 취향이나 감정을 주입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어요. 아무리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여줘도 재이는 변신 로봇을 좋아할 수 있잖아요. 그건 재이의 취향이고 선택이죠.재이는 지금도 확실히 취향이 있어요. 두 돌 때 소방차에 꽂혀서 한두 달 동안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삐요삐요 출동이다!”로 하루를 시작했어요. 밥솥에 불 났다며 끄러 다니고요. 그러다 1년 넘게 중장비에 빠져 있었고 요즘은 직접 운전하는 RC카를 좋아해요. 영향은 오히려 제가 받는 것 같아요. 요즘 그림 그릴 때 자동차에 바퀴를 엄청 크게 그리거든요. 원래 동물이나 자연을 자주 그렸는데 재이 덕분에 중장비를 그리게 됐어요. 다만 최대한 다양한 걸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쉽게 볼 수 있는 것 말고도 이렇게나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올해 참 많은 게 달라졌어요. 가족 안에서도 변화가 있었나요?

제일 아쉽고 큰 변화는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는 거예요.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재이 낳고서도 해외에 몇 번 나갔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주위에서 지금 데리고 가봤자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 왜 독일까지 애를 데려가서 고생시키냐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희는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이 정말 행복했으면 그만이고, 여행지에서 느낀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간직될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같은 때에는 옛날에 유럽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재이가 “엄마 나 여기 갔었어? 기차 탔었어?” 해요. 재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남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새로운 환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한창 많은 걸 흡수할 나이고 기차도 비행기도 너무 타고 싶어 하는데 다 막혀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재이에게 어떤 유년 시절을 선물하고 싶어요?

어떤 유년 시절로 기억할지는 재이에게 달렸다고 생각해요. 재이에게 씨앗을 뿌려줄 수는 있지만 그 씨앗이 앞으로 어떻게 클지, 아이에게 어떻게 남을지까지 생각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저희는 그저 열심히 뿌릴 뿐이에요. 저에게 좋은 기억이라고 해서 재이에게도 같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재이에게 제일 크게, 깊이 남는 씨앗이 열매를 맺겠죠.

 

누군가 지금의 삶에 만족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숨에 ‘오케이!’라고 대답할 수 있나요?

네! 지금 정말 행복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큰일이에요. 살아가면서 한 번도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없었는데 재이가 너무 빨리 크는 것 같아요. 두 살에서 세 살 넘어갈 때도 정말 속상했는데…. 지금은 또 내년에 유치원 보낼 생각 하니까 아쉽네요. 재이가 2017년 1월 12일 오후 다섯시 반에 태어났으니까, 그날 출산 다 하고 30분 지난 여섯 시정도로 돌아가고 싶어요(웃음). 그때부터 타임 리프처럼 계속 반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인 걸 재이 덕분에 많이 느껴요. 재이가 없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행복이에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정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