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r than Poem

에디터 K의 시시콜콜 인터뷰 : 시인들의 문방구

한적한 동네 골목 어귀에 허름한 문방구가 하나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기억도 못 할 만큼 희미한 존재감. 그곳은 시인들의 문방구다. 상점에 방문한 시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는다. 점점 희미해지는 이곳에서 당신이 고른 문구는 무엇인지, 그 물건에 어떤 애착이 있는지, 그것에 어떤 새 이름을 지어줄지에 대해.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황인찬 | 장정이 되어 있는 노트

 

시인들의 문방구에서 고른 물건은 뭐예요? 장정이 되어 있는 노트, 아니라면 표지가 단단한, 가능하다면 예쁜 노트를 고를래요. 평소에도 노트에 욕심이 많아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 노트예요. 공부를 할 때든, 뭔가 생각난 것을 적을 때든 유용하게 쓸 수 있죠. 용도에 따라 노트를 구분하여 사용하게 마련이니, 노트는 언제나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좋아요. 노트 말고도 대체재가 많지 않아요? 요새는 컴퓨터나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를 주로 사용하지만, 고등학생 때는 혼자 글을 쓰고 싶을 때 따로 사용하는 노트들이 있었어요.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뭔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뿌듯함을 느꼈어요. 그런 특별함을 담아 노트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그거. 그거? 사실 이름 지어주는 게 참 어색해요. 노트에 어떤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대명사로 부르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해요. 왠지 볼펜이나 컴퓨터라면 그거라고 말하기 어색한데, 노트라면 “아, 그거 안 가져왔다.” 하고 말하는 게 훨씬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당신의 그거는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해줄래요? 그것은 약간의 두께를 지닌 사각형이다. 그것은 얇은 면이 촘촘하게 포개져 있으며, 두꺼운 면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 그것은 펼칠 수 있다. 그것을 펼치면 하얀 부분이 보인다. 그 하얀 부분의 표면은 거칠지만 동시에 매끄럽다. 위 묘사를 통해 생각나는 사람은? 황인찬. 황인찬? 저 자신이에요. 음, 재미있어요. 그럼 황인찬을 닮은 그것으로 황인찬이 싫어하는 사람을 고문할 수 있다면요?물쇠가 달린 비밀 노트를 선물할래요. 그리고 적당한 때에 하나씩 펼쳐 어딘가에 공개할 거예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어느 날 벌레로 변한 주인공이 나오잖아요? 만약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노트로 변해 있다면, 당신의 첫마디는? 이게 뭐야. 어떤 방식으로 노트를 사랑할 거예요? 노트를 너무 사랑하게 된다면 뜯어보지도 않고 포장된 상태 그대로 책장 어딘가에 끼워둘 것 같아요. 너무 아까워서 도무지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언젠가 가장 적절한 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가 버리겠죠. 어쩌면 사랑한다는 건 당신에게 조금 슬픈 일일 수도 있겠네요? 막연한 기다림 같은 거죠. 끝으로 직접 고른 노트에 적고 싶은 자신의 시 구절을 소개해주세요.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 있던 일을 다 적습니다” (황인찬, <영원한 친구> 중) 응원할게요. 너무 쉽게 절망하지 않고 살고 싶네요.

김종연 | 필통

 

여기는 시인들의 문방구예요.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걸 말해봐요. 제 생일은 10월 중순이라 항상 중간고사 기간이었어요. 중학생 때부터였으니 지금까지 15년째 중간고사네요. 그런데 생일 선물을 문방구에서 고르라고요? 문구류를? 잔인한 면모가 있으시네요. 저는 필통 고르겠습니다. 왜 필통이에요? 일단 필통이 없어요. 필통은 뭐랄까, 가방 같은 거잖아요. 안에 뭔가 있어야 하는 것. 필통만으로는 필통이면서도 필통이 아닌, 뭐 그런 점이 마음에 드네요. 필통이라는 단어를 연속해서 다섯 번이나 사용했는데,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있어요? 어릴 때 필통은 권력이었어요. 필통에 무슨 게임이 달려 있냐에 따라서 가격 차이도 많이 났고, 쉬는 시간마다 좋은 필통이 있으면 그 주변으로 친구들이 다 몰렸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필통이 없었어요. 하루 용돈이 2백 원이었거든요. 문방구에는 주로 식사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이게 이유가 될까요? 필통에 담겨 있는 필기구가 사연(이유)이 되는 거고 사연이 없으니까 필기구 없는 필통이 되고… 게슈탈트 붕괴가 오네요. 와우, 정신분열! 이상의 후예인가요? 기가 나온 김에 필통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요? 김종연. 음, 바로 전 시인도 자기 이름을 붙였는데, 이유가 뭐예요? 임연수라는 사람이 낚은 물고기 이름이 임연수어가 됐듯이 저도 제 이름 붙여볼래요. 그럼 당신의 임연수, 아니 김종연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묘사해줄래요?은 부드럽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은 인조가죽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을 보호하기에 딱 적당하고 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변형되지도 않습니다. 색은 짙은 갈색이고, 지퍼가 달려 있습니다. 가볍네요. 그런데 뭘 넣고 다니기엔 좀 작아요. 이런 걸 어디에 쓰죠? 이런 걸 어디에 쓰냐는 마지막 말을 통해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유성호라는 친군데, 어디에다 쓸지 모르겠는 게 닮았어요. 지금은 인도에 가 있어요. 고기가 먹고 싶다 하네요. 필통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인 고문법이 있다면요? 지퍼에 살이 끼게 할래요. 가만히 있어도 아프고, 벗어나려면 열거나 닫아야 하는데 그땐 더 아프겠죠. 치명적이네요. 이번에는 반대로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필통이 되어 있다면? 뭐야 이거. 음, 하루 세 끼 음식을 넣어주고, 매일 깨끗이 씻어줄 거예요. 어딜 가든 항상 지니고 다닐 거고요. 그런데 정말 상상이 잘 안 되네요. 그래도 본드 같은 걸 선택하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김종연이라는 이름의 필통을 대변하는 시 구절이 있어요? “너의 하위항목들이 너를 구성하고 있다. 너의 기억들이 너를 운영하고 있다.” (김종연, <애프터 더 비프> 중) 끝으로 자신에게 필통은 어떤 의미예요? 기억이에요.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현실이 달라지곤 하니까요. 저를 기억해주세요.

김건영 | 색이 많은 색연필

 

시인들의 문방구에서 무슨 물건을 골랐어요? 저는 색깔이 가장 많은 색연필 세트를 골랐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린 시절에 미술 시간만 되면 초라해진 기억이 있어요. 저는 16색 크레파스를 가져갔는데 친구들은 32색이나 64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던 거죠. 그때 생각이 나서 그런지 색이 엄청 많은 색연필을 갖고 싶어요. 평소에도 색연필에 욕심이 많아요? 저를 위해 색연필을 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특별히 쓸 일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가끔 누군가에게 색연필을 선물해요. 사람들의 마음이 좀더 다채로운 색깔로 채워지기 바라거든요. 제가 선물한 색연필 세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상상하곤 하는데, 잊히고 책상 구석에 박히게 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있어줄 것 같아 안심이 돼요. 그럼 기왕 상상한 김에 색연필에 이름을 지어줄래요? 전 우주 수다노동자조합 한국지부.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가끔 화려한 색깔이 잔뜩 칠해진 그림을 보면 시끄럽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물론 좋을 때도 있고요. 전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혹은 글로 표현하는 경우를 생각하자 색연필을 든 노동자들이 생각났어요. 기왕이면 스케일이 크면 더 좋겠고요. 이름과 이미지가 잘 매치되지 않는데, 마치 색연필을 처음 본 사람처럼 묘사해줄 수 있어요? 긴 막대기는 나무로 되어 있다. 막대 중간에 색깔이 잠들어 있다. 칼로 나무를 벗겨내면 색깔은 날카로워진다. 나뭇가루가 나뭇잎처럼 떨어진다. 잘 마른 장작 냄새가 난다. 그 첨단을 찌르고 긁고 문지르면 색깔이 옮아간다.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의 이름은? 정미주. 누구예요? 여자친구예요. 오, 로맨틱! 조금 잔인한 가정이지만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정미주 씨가 색연필로 변해버렸다면 뭐라고 말할 것 같아요? 욕은 쓰기가 좀 애매하니, 소설 《마션》의 도입부로 대체할게요. (“아무래도 좆됐다.”)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색연필을 사랑할 거예요? 글이든 그림이든, 평생을 연마해 단 한 번 평생에 남을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에, 그 색연필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래요. 좋아요. 이번에는 반대로 색연필로 할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인 고문법이 있다면요? 그가 저지른 잘못을 온몸에 새겨줄 거예요. 지워지면 또 새기고,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그의 잘못이 문장으로 낱낱이 채워질 수 있도록 할래요. 앞의 활용법을 토대로 색연필의 정의를 내려주세요. 색연필은 내 어둠의 프리즘이다. 자, 그럼 이번에 고른 색연필로 자신의 시 구절을 하나 적어줄래요? “어둠이 깊게 어린 날 나는 크레파스를 선물 받았다 이것은 훗날 내가 만날 공포의 종류들” (김건영, 중)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실 제가 어릴 때 여러 색깔 크레파스나 물감을 가졌다고 해서 그림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림을 끔찍할 정도로 못 그리거든요. 그것이 지금도 제가 색연필을 사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예요.

최예슬 | 겨울왕국 스케치북

 

이번에 고른 물건은 뭐예요? 엘사 공주와 눈사람 올라프가 그려진 스케치북이에요. 사절지 크기로 골랐어요. <겨울왕국>! 맞아요. 공간이 넉넉한 스케치북 한 권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서 빈 공간 대부분을 텍스트로 가득 메울 테지만, 언제 어디서든 스케치북을 열고 나의 순간들을 저장하기 위해 선택했어요. 스케치북을 가지고 어디에 갔나요? 스케치북은 지금 저와 함께 영국 에든버러에 머물고 있어요. 타지에서의 모든 일상을 빈 종이에 기록하죠. 올드 타운 허름한 카페에서 마신 스코티시 크림티의 가격, 딘 빌리지에서 만난 하얀 강아지의 생김새, 불꽃놀이가 한창이던 에든버러 성의 풍경을 때로는 텍스트로, 또 때로는 엉성한 스케치로 기록하고 있어요. 혹시 스케치북에 이름이 있어요? 이 녀석은 ‘셜록’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이름이에요. 셜록 스케치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예요? 불편한 낭만주의예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물건은 누군가의 인생이에요. 인생이요? 인생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김석진이라는 이름이 떠올라요. 김석진이 누군데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예요. 음….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네요. 당신의 스케치북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고문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사람에 대한 불만을 스케치북 한 장 가득 적나라하게 적어서, 편지봉투에 넣고 국제 우편으로 부칠 거예요. 발신인 이름에는 ‘셜록’이라고 쓸 거고요.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불만이 가득 적힌 셜록을 먼저 발견했다면? 이 스케치북을 절대 읽지 마!!! 좀 전에는 신나게 욕을 썼잖아요? 아무래도 제 감정을 일방적으로 퍼부어서는 안 되겠네요. 되도록 여백을 가질 수 있도록 띄엄띄엄 저의 일상을 적어야겠어요. 그럼 스케치북에 적어 넣을 시구를 하나 소개해주세요. “동물원을 아름답게 색칠하고 / 음악적 동기를 세계지도에 그려 넣는 / 소박한 단원들에게 // 그 우아하고 열정적인 광기를” (최예슬, <어릿광대로 변신한 첫 번째 금요일> 중)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곧 한국에 돌아갈 예정인데, 준비하는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해서 큰일이에요. 게으름은 언제쯤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다영 | 비싼 것 아무거나

 

생일 선물로 문구 하나를 고른다면 무엇을 선택할래요?팔았을 때 가장 비싼 거라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되팔 거예요? 저는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공간만 차지할 뿐이므로 팔아서 없앨래요. 그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 이를테면 ‘오디(나와 함께 사는 동물)’의 사료나 과일과 채소를 살 거예요. 문구에 특별한 애착이 없어 보여요. 없어요. 음, 그럼 그 물건에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도 별로예요? 원래 이름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되팔았을 때 그 물건을 산 사람이 새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어요. 무엇인지 모를 그 물건을 묘사해줄래요? 투명하다. 쓸모가 없어 보인다. 투명하고 쓸모없는 그것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성다영. 저 자신이에요. 아? 좀 슬퍼지는 거 같은데…. 혹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차별주의자를 싫어해요. 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머리 위로 딱딱한 그 물건이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고문하고 싶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 고문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방법이 있어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좋겠어요. 차별금지법 좋네요. 그럼 반대로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물건으로 변해버렸어요. 이때 당신의 첫마디는? 안 돼! 다시 돌려줘. 돌아갈 수 없대요. 저는 이제 그 물건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물건으로 변하기 전의 무엇이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저 자주 보기 위해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넣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둘래요. 지금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본인의 시 구절은? “세계는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다 / 어둠 속에는 어둠이 있을 뿐” (성다영, <불행한 은유> 중)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비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죄송해요. 꾸미지 않은 일상적 삶, 그것과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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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건태

일러스트 김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