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Beautiful

나를 나로 만드는 기쁜 말
라디오 PD·작가 정혜윤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보내며 문을 열었다. 사방을 꽉 채운 책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이곳은 온통 붉은 비밀의 공간,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처럼 보였다. 어디에 앉으면 좋을까 두리번대자 아무 데나 앉으라 입을 떼는 정혜윤 작가. 우리는 화려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관해 긴긴 이야기를 나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이 세상이 왜 슬픈지 궁금했다. 책을 덮고 나선 내 호기심이 둔감함의 산물이란 걸 알았고, 대화를 나눈 뒤엔 슬픈 세상에 살고 있음을 절감했다. 마음에 온통 ‘슬픔’뿐이던 첫 독서와 ‘기쁨’이란 감정에 함빡 젖은 두 번째 독서. 세 번째 독서를 앞두고 내가 만나게 될 단어를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울 ‘사랑’ 아닐까.

가장 좋은 말이

오래 살아 있도록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어요. 라디오 피디에게 말이란 무엇인가요?

라디오 피디는 남의 말을 듣는 직업이에요. 들은 말을 전하는 직업이죠. 라디오 피디는 음악과 시사 분야로 나뉘는데, 저는 주로 시사 피디를 해왔어요.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피디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뭘까요? “누군가 ‘그거’에 대해 말해줄 사람 없어?”예요. 가령, 제가 고래의 멸종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면, 고래의 멸종 위기에 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을 찾을 거고, 순천만 갈대숲에 대해 기획했다면 거기에 대해 누군가 말해줘야 해요. 제가 찾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기쁠 거예요. 라디오 피디는 누군가 어떤 말을 하고 있음을, 자기 관심사와 목소릴 가지고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이에요. 누군가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기뻐하는 직업이죠.

 

오늘 대화가 더욱 기대되네요. 최근에 출간한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읽으며 이번 주제어인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바로 직전에 쓴《앞으로 올 사랑》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책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Decameron》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책이에요. 《데카메론》은 흑사병 시대를 배경으로, 열 사람이 열흘 동안 말한 100가지 이야기를 담은 모음집인데요. 흑사병의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이야기들이고, 흑사병 시대에 꼭 하고 싶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죠. 이 책을 토대로 저도 코로나19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쓴 책이 《앞으로 올 사랑》이거든요. 《데카메론》의 목차가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차례로 흘러가는 형식인데 저 역시 이 열 가지 주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썼어요. 첫째 날 주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예요. 처음부터 참 어려운 주제지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안다면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누면서 살고 싶은지도 알 수 있거든요. 《앞으로 올 사랑》에서 좀 독특한 챕터가 있어요. 넷째 날 ‘불행한 사랑 이야기’와 다섯째 날 ‘행복한 사랑 이야기’에서만 단어들을 소제목처럼 적었거든요. 행복, 우울, 순응, 동기부여… 여러 단어를 담았죠. 대체 이 단어들은 뭘까요? 넷째 날에 담은 단어는 지금 우리가 많이 쓰는 단어들이에요. 현재 많이 하는 말이라는 거죠. 다섯째 날은 미래의 단어들이에요. 우리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산다면 앞으로 입 밖에 뱉게 될 가능성이 높은 단어들이죠.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우리 실존이 단어 위에 구축된다고 생각해서예요.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된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음, 월요일에는 미용실에 가고, 화요일엔 친구를 만나고, 수요일엔 파스타를 먹고, 목요일엔 청소하고… 맥락 없이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는 특정한 단어를 살아내요. 취준생은 취업이란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될 테고, 집안에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면 질병이란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되겠죠. 만약 사랑이 깨진 사람이라면 상실, 혹은 외로움이란 단어 위에 비밀스럽게 삶이 구축될 거고, 지금 무척 약해져 있는 상태라면 나약함 위에 삶이 불안하게 쌓여가겠죠? 특히 넷째 날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입에서 나오고, 따뜻하고,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거.” 이게 뭐 같아요?

 

…숨?

맞아요. 호흡. 근데 그런 게 하나 더 있어요. 입에서 나오고, 따듯하고,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거. 바로 ‘살아 있는 말’이에요. 살아 있는 말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요. 그럼 죽어 있는 말은 뭘까요? 그건 아무 내용도,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빈말이에요.

 

시작부터 생각이 많아지네요. 말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거군요.

사람들은 인생을 두 가지 관점으로 봐요. 하나는 탄생을 ‘고통’으로 보는 거예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시각이죠. 또 다른 관점은 인생을 ‘선물’로 보는 거예요. 삶은 소중하다고 보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둘 중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어요. 물론 상황에 따라왔다 갔다 하기도 하겠죠. 저는 인생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근데, 삶은 선물이고 소중한 것이며 내가 태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있어요. 선물이라고 생각한 삶의 선물 상자가 텅 빈 상자거든요. 스스로 채워야 하는 빈 상자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일정 정도 성장할 때까지 주입식으로 박스 안에 이것저것 채워 넣게 돼요. 이 말, 저 말을 듣고, 따라 하고, 흉내 내고, 이 말이 옳은 것도 같고, 저 말이 옳은 것도 같고… 헷갈리죠. 그래도 말은 하며 살아야 하기에 실제 아는 것보다 더 아는 척하고, 모르는 것도 아는 듯이 말하게 돼요. 그래서 가식 역시 우리의 운명인 거예요. 텅 빈 채로 사람도 만나고 대화도 해야 하고, 심지어 창조성까지 보여줘야 하니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오랫동안 시달리게 돼요. 과연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싶고요. 근데 문제가 하나 더 있어요. 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남의 말만 따라 하면서 살고 싶지가 않은 거죠. 저도 제 삶이란 걸 가지고, 제 목소리란 걸 가지고 싶으니까 내 말이 나와 남에게 모두 의미가 있으면 좋겠는 거예요. 제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요. 그래서 내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소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네 삶을 살아라.’라는 말이 그토록 힘을 얻는 거예요. 인간은요,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슬퍼하는 존재예요.

어쩐지 좀 슬퍼지네요. 살아 있는 말과 죽어 있는 말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어요?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심인가에 달려 있어요.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에 나부터 얼마나 진지한 관심이 있는가에 달린 거죠. 그런데 신기한 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말할 때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 밖으로 나간다.’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물어요. “자아 밖으로 나갈 수가 있나요?” 물론이에요. 별이 무수히 빛나는 아름다운 창공을 바라보면서 ‘별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별을 바라보는 내가 예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아름다움은 우리를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가거든요.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고 가끔은 자아 밖으로 나가요. 저는 라디오 피디로 지내면서, 사람이 제일 빛날 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거나 유명해졌을 때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때는 오히려 빛을 잃죠. 시선이란 덫에서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사람이 제일 빛날 때는 이제 막 뭔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예요. 이제 막 돌고래나 두루미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한 번이라도 그들을 더 보러 가려고 하겠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더 알고 싶어지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어지니까요. 사랑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력과 생기를 뿜어내요. 저에게도 말에 대한 고민은 많아요. 관심도 없는 것을 열렬히 말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마치 의견이 있는 것처럼 말했을 땐 자기 전에 괴로워지기도 해요. ‘오늘도 망쳤어!’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깨달음이 와요.

 

하지만 의미 있는 말만 하고 사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음, 좀더 얘기해 볼게요. 라디오 피디는 장점이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점도 있어요. 한 달 전 뉴스에 뭐가 나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날 중요하다고 온갖 언론이 1면에 다룬 내용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지금 ‘덧없음’이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요. 열정을 발판 삼아 성실하게 일했다 해도 누구나 덧없음이란 문제에 부딪히게 돼요. ‘벌써 시월이야?’, ‘뭘 했다고?’, ‘올해도 다 갔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들고 한숨을 쉬게 되는 거죠. 세상은 우리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지만, 시간과의 관계에서 덧없음은 모두가 공통으로 맞닥뜨리게 돼요. 덧없음의 반대쪽엔 ‘영원’이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영원히 좋은 것’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새의 비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들이 영원히 어디선가 날고 있기를 바라죠. 이것을 말과의 관점에서 보자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서문에 이런 문장을 썼거든요. “인간이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좋은 이야기.” 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요? 우리의 많은 것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 중 뭔가는 살아남아요. 우리는 가능한 여러 모습 중 가장 좋은 것이 영원히 살아남도록 해야 하겠죠. 저는 사람들이 가진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화가 영원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끝까지 여행하기를 바라요.

 

프롤로그는 <자기 자신을 말하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상으로 기획하면서 시작돼요.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꼽아보고, 그 단어를 제외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프로그램이었죠. 나를 말한다는 것에 대해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사실 프롤로그가 이 책 전체 주제나 다름없어요. ‘나 자신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건데요. 우리는 흔히 미래가 불안하다고 이야기해요. 내일 일은 모르니까요. 그런데 미래를 알 수 없어도, 우리 모두 아는 것이 한 가지는 있어요. 그게 뭘까요? 미래에도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는 거죠. 우리는 내일도, 내년에도 뭔가를 말하고 있을 거예요. 말하기는 우리 인류의 영혼의 형태예요. 우리 인류는 말을 하면서, 특히 자기를 표현하면서 힘과 생기를 얻는 종족이에요. 그래서 우린 늘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데요. 정작 나에게 중요한 뭔가를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고, 어렵게 느껴지죠. 제대로 말하기는 훈련이 필요해요.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전에 상상도 못 해본 엄청난 걸 얻을 수 있어요.

 

그게 뭐예요?

바로 ‘자유’예요. 말을 제대로 해낸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이야기 자체가 우리를 데리고 가요. ‘그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죠. 그런데 제가 앞서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된다고 했죠? 그 생각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프롤로그에서 <자기 자신을 말하기>를 가상으로 기획한 거고요. 이 프로그램은 집에서 혼자 해볼 수도 있어요. 이 프로그램의 규칙은 이래요. 자기 자신을 말하되 특정한 단어를 말하면 안 돼요. 그런데 그 ‘말하면 안 되는’ 특정한 단어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예요. 그 단어 없이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 단어를 빼고 나를 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그 단어를 뺀다면 나를 잘 모르는 거다, 싶은 그런 단어죠. 그 특정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어요. 이게 자신의 고유성이에요. 그렇게 우리가 알고 싶어 하던 나 자신의 고유함이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이 스스로 해보면 좋겠어요.

왜 나를 단어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요?

앞서 말했듯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말하면서 생기를 얻어요. 우리는 온갖 형태로, 언제나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죠. 몇 년 전부터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 ‘너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라.’같은 말이 많이 들리고 있는데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진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일 거예요. 자기 삶을 산다는 건 아주 어려운 문제예요. 사회는 끝없이 우리의 존재와 고유성을 지워요. 우울증 환자 몇 명, 취준생 몇 명, 실업자 몇 명, 1인 가구 몇 명… 우리는 숫자로 묶이고 있죠. 세상이 우리의 고유함을 지울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함을 알고 기억해야만 해요. 특히 지금 같은 코로나19 시대엔 더욱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지금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이 흔들리고 있어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죠. 비행기를 타거나 여행을 가는 건 물론이고, 10시 이후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어려워졌어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거죠. 이런 일들은 우리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쳐요. 불안, 우울, 강박, 예민함, 히스테리… 이 모든 것이 정신한 구석에 나타나게 돼요. 발을 딛고 있던 세계의 토대가 흔들리고요. 이럴 때일수록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설 땅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요. 얼마 전에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었는데요. 거기 “여러분은 지금 단단한 대지 위를 걷고 있습니다.”라는 표지판이 있더라고요. 안정감을 주는 문장이었어요. 발밑이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지는 느낌이었죠. 우리에게는 딛고 설 단단한 대지가 필요해요. 그 단단한 대지 같은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제안이에요. 내가 딛고 서서 앞으로 나아갈 그런 단어요.

 

나를 표현할 단어로 ‘책’, ‘이야기’, ‘시와 운명’을 꼽으셨죠.

보르헤스는 한 사람의 삶은 대략 열 개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고 말해요. 우리는 평생 열 개 정도의 단어를 살아낸다는 거죠. 그의 단어는 거울, 미로, 시간, 불멸, 시… 등인데요. 이 중 시간은 우리 모두의 단어일 거예요.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존재니까요. 저는, 말씀하신 대로 첫 단어는 책을 꼽았고 두 번째로 이야기, 그리고 시와 운명을 뽑았어요. 제게는 책이 정말 중요한 삶의 재료거든요. 책은 흰 종이 위에 인쇄된 검은 글씨일 뿐이지만, 우리는 책을 읽으며 검은 글씨 이상의 것을 봐요.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을 한 무더기의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을 펼치는 사람은 그 안에 재미있거나 좋은 것이 있기를 기대하잖아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저자가 쓴 말에 영향을 받고, 노트에 적어놓고 기억하려고 하죠. 이게 진짜 신비로운 거예요. 우리 삶 안에는 생계 걱정도 있고 온갖 근심이 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더 나아지려고 하는 의지도 있다는 거죠. 두 번째 단어인 ‘이야기’는 저의 단어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단어예요. 우리의 삶은 결국 이야기가 돼요. 우리가 늘 하는 일은, 자기 경험을 언어로, 말로, 이야기로 바꾸는 거예요. 첫째 단어인 책과 둘째 단어인 이야기도 연관이 있는데요. 책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저희는 인생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삶엔 약간의 좋은 일과 수많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요. 우리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도 아무 이야기가 없을 거예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야기도 없다는 거죠. 책은 상실, 비애, 배신, 후회, 고독, 실패, 비참함… 이 모든 것을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예요. 이렇게 비참한 재료로 좋은 결론을 낸다는 것, 이게 모든 책의 꿈일 거예요. 저는요, 우리가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일을 재료로 이야기를 만드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자기 삶에 일어난 일로 좋은 결말을 내길 원해요. 그리고 우린 모두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죠. 제가 힘을 잃을 때마다 늘 하는 마법의 주문과 질문이 몇 개 있거든요. 그중 하나는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인가?’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가?’예요. 이와 더불어,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와 ‘오늘 한 이야기가 내일도 살아남길 원하는가?’라는 문장은 늘 마음에 품고 지내지요. 지금 우리는 슬프게도 이야기가 소멸하는 시대를 살아가요. 거대한 이야기가 우리를 어둡게 감싸려고 하죠. 바이러스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한바탕 휩쓸고 있지만, 그러는 중에도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봄날의 새순 같은 작은 이야기들은 피어나고 있을 거예요. 많은 걸 포기해도 봄이 오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이야기라는 단어가 중요한 거예요.

책과 이야기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주신 것 같은데 시와 운명이란 키워드는 아직 궁금한 게 많아요.

사람들이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겠죠. “가만히 앉아서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삶의 의미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슴 아픈 단어들을 만나게 돼요. 죽음이나 질병, 상실, 외로움… 이런 나쁜 단어와 더불어 어떤 좋은 단어가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건 참 애가 타는 일이죠. 미래를 생각하면 좀 무서워요. 그러나 미래를 모른다는 건 어찌 보면 신비로움일 수도 있어요. 내가 예상도 못 한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단어와 좋은 이야기가 찾아왔을 때,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해요. “어떤 이야기가 잊히지 않고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그걸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운명이라 부를 것인가.”라는 말이 있어요. 그게 제가 말하는 운명이죠. 그런 운명을 알려주는 모든 게 저는 ‘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키워드가 운명만 있는 게 아니라 시와 운명인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시는 문학으로의 시가 아니라 시적인 순간을 말해요. 하루하루 평범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적인 순간이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거죠.

 

시적인 순간이 어떤 건지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우리 마음의 뭔가를 건드리는 순간이요.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그게 운명적인 순간이고, 시적인 순간이에요. 앞서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우리는 시간을 잃고 시간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는 영원히 머물 수 있고, 시간을 벗어날 수도 있어요. 정말 좋을 때는, 너무 재미있을 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기도 하죠.

 

어떤 시적인 순간, 운명적인 순간을 경험했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마지막 챕터에 쓴 ‘돌고래와 반딧불이’이야기도 운명적인 순간 중 하나예요. 그때 저는 정말로 슬픈 일을 겪는 중이었고 그 슬픈 마음으로는 삶의 기쁨을 맛보는 게 도무지 불가능할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야생 돌고래의 도약을 보면서 삶의 기쁨에 대한 욕망이 생겼죠. 돌고래는 다른 동물일 리가 없는 자신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그 돌고래를 보면서 ‘나도 삶의 형태를 만들고 싶다, 하루하루 흩어져 가는 것이 싫다, 파편처럼 사는 것이 싫다.’ 얼마나 간절히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 같은 챕터에서 이야기한 반딧불이 뱃사공은 ‘그런데 어떻게 내 삶의 형태를 만들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어요. 그 뱃사공은 우수에 젖은, 그러나 참 깨끗한 느낌의 청년이었는데요. 그는 처음 반딧불이를 본 날 반딧불이에 빠져서 바로 반딧불이 뱃사공이 되었대요. 제가 매일 밤 반딧불이를 보는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해요. “스틸 뷰티풀Still Beautiful.” 그 말을 듣던 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살은 찰랑거리고, 반딧불이는 팅커벨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별처럼 맹그로브 숲을 에워싸고…운명적인 순간이었죠. 그 뒤로 ‘스틸 뷰티풀, 여전히 아름다운’은 제 단어가 되었어요. 여전히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슬프지만 기쁜… 그런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서 살자, 그런 이야기를 전하자, 이런 생각이 수년의 시간이 흘러 책에 담기고 제목을 만들어낸 거예요. 아, 책에는 싣지 않았지만 한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네, 계속 들려주세요.

제 인생의 가장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는 칠레에 있는 아타카마 사막에 갔을 때예요. 두 개의 화산 분화구와 노천 탄광이 있는 황량한 곳이거든요. 거대한 트럭이 씽씽 오가고, 바람 때문에 치마를 입을 수도 없는 곳이에요. 거기서 광부들에게 “이 고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데가 어디예요?” 하고 물어봤어요. 여행지에서 항상 하는 질문이기도 한데요. 광부들이 입을 모아 그러는 거예요. “사막의 별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밤 12시에 별을 보러 갔죠. 근데… 그때 그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제 평생 앞으로도 그렇게 많은 별을 볼 일은 없을 거예요. 별이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거든요. 약간만 움직여도 별이 다 따라 움직여요. 보통, 별자리라고 하면 별옆의 별을 보고 상상하게 되는데요. 그때 본 건 별 뒤에 별, 별 뒤에 별, 다시 그 뒤에 별이 보이는 풍경이었어요. 3차원의 세계였죠. 그걸 무려 맨눈으로 경험하는 거예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하늘만 바라본 경험은 정말이지 운명적인 순간이었어요.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에게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하거든요. 그때 친구들이 “우리가 밖으로 휠체어를 끌고 나갈게.” 하고는 별이 가득한 밤을 보여줘요. 저는 이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어요. 경이로운 아타카마 사막의 밤하늘을 본 다음부터요. 

아름다움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같아요.

지구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건 지구가 아름답기 때문일 거예요. 아름다운 걸 보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거예요. 아름다움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에 한 번에 압도된 경험을 나타낸 문장이 있는데요. “삶에 별빛을 섞으세요. 그러면 다른 건 하찮아질 겁니다.” 삶에 아름다움을 섞으라는 말이기도 할 거예요. 세상은 두 번째 기회가 모여 있는 장소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도 참 아름답지 않나요? 우리 모두에게 다시 잘 해낼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겠어요.

 

아름다움이 삶과도 연결되는 게 경이롭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 삶의 열 개 단어 중에 ’경이로움’이란 단어는 절대 빠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어떤 것에 감탄해서 입을 벌리고 있을 때거든요. “당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당신은 도처에서 그 재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경이로움을 엄청 강렬하게 경험하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자꾸 말하게 되니 저도 경이로운 장면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가을에 철새가 하늘을 나는 것만 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요. 새들은 어떻게 저리 정확하게 길을 알고, 한 마리의 새는 어떻게 선두에 서며, 그 새가 지치면 어떤 새가 선두를 맡게 되는지 모든 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타카마 사막에 다녀와서 친구에게 그날 본 밤하늘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어요. 별 뒤에 별, 또 그 뒤에 별이 있었다고요. 그러고 한동안 그 장면을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우리도 별자리 만들자.” 그 말에 다시 충격을 받았어요.

 

왜요?

우리는 혼자서는 외롭다고 생각하면서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해요. 별자리가 된다는 건 연결의 감수성과 연관되는 말이에요. 별자리를 그리려면 적어도 별이 두 개는 있어야겠죠? 마음으로 상상의 선을 긋는 거죠. 별자리에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들도 연결에 대해 상상했던 거예요.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 연결은 무엇보다 중요해요. 코로나19로 외출도 제대로 못 하고, 백신을 맞고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죠. 전에 없던 무서움과 불안이 우리를 덮치는 거예요. 남들은 다들 연결되어 있는데, 나만 고립된 것 같을 때도 있어요. 길을 잃었을 때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비유가 아니에요. 당신과 나는 무엇으로 연결될 것인가? 세상과 나는 무엇으로 연결될 것인가? 다시 한번 중요한 문제가 될 시기라고 봐요.

 

지금 작가님이 이야기하는 말은 소통만을 위한 언어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소통만을 위한 언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따져봐야 할 것 같은데요. 소통만을 위한 언어라는 게 따로 있을까요? “사랑해.”라는 말엔 사랑 이상의 의미가 있죠. ‘너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줘.’라는 의미도 있을 테니까요. “물 한 컵 떠다 줘.”라든지, “올 때 빵 좀 사 와.” 같은 말은 물론 “사랑해.”랑은 좀 다를 거예요. 그러나 이 말들 또한 소중한 일상 대화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오늘 눈 온대.” 같은 날씨 이야기, “이따 봉골레 먹자.” 같은 평범한 이야기. 그 소중한 일상을 위해서라도 삶을 지속시키는 단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아요. “어떻게 이렇게 계속 쓰세요?”, “어떻게 계속 힘을 내세요?” 저도 남들에게 궁금해요. “어떻게 계속하세요?” 우리는 어쨌든 계속 살아야 하고 계속 살아갈 이유가 필요해요. 어디선가 힘을 받아야 하고요.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가 라디오에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을 듣다가 음악이 너무 좋으니까 “이봐 친구! 계속해, 계속해.” 하고 혼잣말하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요. 저도 “계속해, 계속해. 쭉 그렇게 더 가 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어떤 말을 찾고 있는 거예요.

 

말이 좀 확장되는 것 같기도 해요. 행동으로 확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소통으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시대에서는 대략 세 가지 단어로 사람이 움직인다고 해요. 하나는 ‘공포’. 불안이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가능한 빨리 안정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거죠. 그다음엔 ‘분노’와 ‘혐오’. 거기서 오는,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거든요. 자기혐오를 포함해서요. 좌절이 큰 시대엔 혐오의 말이 많죠. 어떤 때는 자기혐오가 더 크기도 하고요. 셋째 단어는 ‘쇼핑’이에요. ‘오늘이 세일 마지막 날!’, ‘핫 플레이스’,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은 말은 확실히 저희를 움직이게 해요. 부지런하게 만드는 유혹적인 말인 거죠. 소비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힘을 얻은 단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공포, 혐오, 쇼핑 말고 우릴 움직이는 단어는 없을까요? 우리 인간성을 더 풍부하게 하고, 더 살아있는 것처럼 살게 해주는 단어는 없을까요? 그 단어를 찾는 것에 우리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있을 거예요. 제가 찾은 답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전작 제목도 ‘앞으로 올 사랑’이 된 거고요. 사랑은요, 시작과 끝의 단어예요. 우리는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내고 싶어 하거든요. 사랑은 또한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싶은, 설레는, 세상이 다시 궁금해지는 단어예요. 더불어 행동의 단어이기도 하죠. 사랑한다고 하고 아무것도 안 하지 않거든요. 뭐라도 하려고 하잖아요. 자기 초월의 단어이기도 하고요. 무리해서라도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무언가를 하게 만드니까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자기중심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봐요. 우리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지만,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벗어나게 되기도 하는 거죠.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자면, 사랑은 지켜주고 싶어 하는 단어예요.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 아무것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요. 저는 가능하면 많은 것을 잘 사랑한, 사랑했던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슬픈 세상을

뚫고 가는 기쁜 말

“나에게서 어떤 새로운 말도,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늘 내가 가장 슬퍼해야 할 일”이라는 문장을 쓰셨죠. 그런 슬픔을 겪은 적이 있나요?

늘, 언제나 겪어요.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설명을 찾으려고 해요. 납득하고 싶으니까요. 여자니까, 남자니까, 젊으니까, 꼰대니까, 배운 게 없으니까…. 저는 그런 설명으로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늘 실패해요. 수많은 단순화가 이루어지지만 인간사는 정말 복잡하잖아요. 지금 누군가 이 대화를 읽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 읽기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것만 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는 소설을 옹호하면서, “삶은 아주 기다란 산문”이라고 말해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설명하는 건 늘 실패로 돌아가요. 그래서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는 알고 있어요. 누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고요. 그 이야기 안에서 제 삶이 다시 불타오를 수 있다면 그건 커다란 기쁨이죠. 인류는 누군가 새로운 생각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던 거예요. 그런 식이 아니라면 변화는 없었겠죠.

 

새로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말하기에 더해 듣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도 경청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죠.

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첫째 단어가 책이었으니까, 책에 빗대 이야기해 볼게요. 저는 독서라는 게, 처음 책을 읽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읽기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 독서는 미용실에 앉아 잡지를 후루룩 넘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봐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용이 궁금해서 처음엔 책장을 막 넘기게 되거든요. 그러다 두 번째 읽으면 그때부터 보이지 않던 게 보여요. ‘어, 이런 문장이 있었어?’, ‘이 이야기를 이런 문장으로 끝내네?’, ‘결론을 이 문장으로 내리는구나.’ 하고요. 우리는 책 속에서 좋은 이야기와 좋은 문장을 찾아 헤매는 여행자가 돼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겐 타임머신이란 단어가 필요한 거겠죠. 그러나 책 읽기는 원하면 수백 번 이상 되돌아갈 수 있어요. 돌아가서 다시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온 문장이 우리 삶의 귀도 열어주게 돼요. 전에는 모르던 것을 알게 해주니까요. 저는 지금도 독자의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있어요. ‘좋은 말이 어디에 있을까?’ 저는 매일 이 세상의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에요. 세상은 우리가 함께 쓰는 아주아주 커다란 책이거든요. 책은 우리가 듣기를 원한, 기다려 온 목소리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밝고, 온기가 넘치죠. 책 읽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좋은 말을 알아듣는 능력을 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알아듣는 능력을 발휘하려면 좋은 말을 만나는 게 먼저겠네요.

덧붙여 좋은 말을 들었을 때 좋은 말인 줄 알아야겠지요. 사실, 누군가의 말 아래는 엄청 많은 것이 숨겨져 있어요. “오늘 너무 피곤해. 쉬고 싶다.” 그 한마디 안에는 듣는 사람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단한 시간과 경험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 “행복하세요. 아프지 마세요.”라고 말했을 때, ‘저렇게 말하기까지 정말 많은 걸 겪었겠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싶을 때가 있죠. 말하지 못한 말, 침묵 속의 말. 그것은 뉘앙스나 눈빛으로도 알 수 있어요. 이것을 ‘침묵 속의 상상’이라고 하는데요. 가장 좋은 대화는 말없이도 수많은 말이 오고 가는 대화라고 하죠.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는지도 몰라요. 침묵 속의 상상은 우리 시대가 잃어가는 능력이에요. 그러나 더 슬픈 것도 있어요. 우리는 어제저녁에 먹은 음식까지도 시시콜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진짜 중요한’ 건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쩌면 중요하게 여길 만한 것을 만나지 못해서 일 수도 있겠죠. 날마다 우울하게 지내다 보면 “다 똑같지 뭐, 뭐가 중요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다 똑같은 건 없거든요. 단지 우리의 우울이 거의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끼게 할 뿐인 거죠.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관통하는 감정은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걸 보면서 특히 그랬어요.

그래요? 기쁨도 슬픔 못지않게 큰 감정이었는걸요. 저는 이 책을 쓸 때 기뻤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나눌 수 있단 사실 때문에요. ‘사실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만은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힘이 있다는 건 곁에 누군가 있다는 의미와 같아요. 혼자가 아니란 뜻이지요.

 

이 책을 쓸 때 기뻤다는 말을 들으니 가장 좋아하는 정체성을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수많은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발명하는 개발자”라고 한 것도 좀 이해가 돼요.

누구나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요. 저도 그렇고요. 저는 지금은 제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웃음) 저는 배우고 자라는 정체성을 좋아해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누구나 이 세상이 편안하게 느껴질 만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것을 말할 때 이 세상이 좋고 편안하게 느껴지거든요. 뭐가 좋다면 왜 좋은지, 내가 인간이라면 어떤 점에서 인간인지, 내가 글을 쓴다면 왜 쓰는지 알고 싶어지고, 마침내 그것을 알게 되고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정말 기뻐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다면 왜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지, 그것이 왜 그런지 딱 맞게 표현하면 ‘바로 그거야!’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그게 제 기쁨이에요. “바로 그거야! 오 예!” 이거, 참 좋은 느낌이에요.

제가 다 명쾌하네요(웃음). 그런데, 사랑을 말하려는데 듣는 사람이 없다면 좀 슬플 것도 같아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BBC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달아요. ‘이상적인 청취자는 한 명이다.’라는 거죠. 어딘가에 내 말을 듣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은 SNS가 워낙 많이 발달해서 수십, 수백만의 팔로워가 생기면서 한 명의 가치가 하락해버렸어요. 숫자보다 중요한 건 나에게 할 말이 있느냐예요. 일단은 그게 있어야 입을 열 수가 있거든요. 조회 수에 매달리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못 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조회 수를 높일까,로 생각이 번져가니까요. 그러다 원래 내가 하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점점 더 나를 잃게 될 위험성도 높아지죠. 얼마 전엔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도 글쓰기를 말하면서 “독자는 한 명이다.”라고 하던데요. 제가 글을 쓰는 한, 쓰고 싶은 말이 있는가에 일단은 더 충실해야 한다고 봐요.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하면, 그걸 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반드시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을 지키고 싶거든요. 그 누구도, 아무것도 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요. 

 

그렇다고 매일 의미 있는 말만 하면서 살아간다면 말하기가 힘에 부칠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매일 공허한 말만 하면서,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못 해보고 잠드는 것보다야 훨씬 덜 고달파요. 물론 우리는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고 웃어야겠죠. 유머는 우리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니까요. 실없는 말이나 때때로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죠. 가끔은 욕도 하고, 흉도 봐야 하고요. 그러나 우리 삶에 진짜 이야기가 없이 산다는 건 슬픈 일이에요. 농담을 하더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이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우울, 자기만의 어둠, 자기만의 슬픔이 있다고 봐요. 쉽게 잠 못 드는 밤이 없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소설가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의 말을 빌려볼게요. “슬픔에 빠지면 다른 쪽 문으로 빠져나와야 하고 그럴 수 있다면 이미 자기 자신은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저는 지금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 중인 거예요.

 

꼭 경험해 보고 싶은 순간이네요. 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읽고 책에 있는 문장 그대로 지인들에게 질문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천국에 가면 신이 딱 한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하셨죠. “너는 너의 한 번뿐인 인생으로 무엇을 한 거지?”

그건, 평생에 걸쳐 찾는 대답이에요. 이건 인간이 신에게 갈구하는 질문이에요. “신이시여, 도대체 저를 무엇에 쓰시려고 만들었나요?” 하고요. 그 답을 어렴풋이라도 아는 날은 진짜 기분 좋은 날일 거예요. 제 경우라면, ‘아, 나는 이걸 하려고 피디가 되었지.’, ‘이걸 하려고 글을 쓰지.’, ‘이걸 하려고 태어났지.’같은 생각을 할 때죠. 저는 세월호 이후에 늘 질문을 품고 살았어요. 에너지가 펄펄 넘치는 학생들이 죽었을 때,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슬퍼했어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거든요. 책에는 이렇게 썼죠. “죽음이 그토록 아쉽고, 사라지는 모든 인간적인 것이 그토록 슬픈 것이라면 삶이란 무엇일까? 삶이 이미 죽음에 도둑맞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 삶의 소중함을 지킬 수 있을까?”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 삶의 소중함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삶보다 각별하게 여기는 분위기 속에 살아요. 저는 그에 대한 대답을 《아무튼, 메모》, 《앞으로 올 사랑》,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담으려고 했어요. 많은 사람이 세월호 사건 때 이렇게 말했죠.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저는 그 말이 많은 사람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뭔가를 구하고 싶어요. 살리고 싶어요. 서로를 살리는 문화 속에서, 살리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일부로 살고 싶어요. 책을 다 쓰고 나니까 제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제 죽이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제 서로를 살리는 이야기 속에 살자.’ 저는 이 말을 하고 또 하는 것을 제 역할로 알고 있어요. 삶이 지고 스러지는 것을 사무치게 안타까운 맘으로 바라보게 된 끝에야, 그토록 큰 슬픔을 겪고서야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찾게 된 거죠. 제가 조금 전에 ‘살리는 이야기의 일부’로 살고 싶다고 했는데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서로를 살리지 않는 이야기의 일부분에 속해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이 답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시점인 거네요. 그럼, 책에 있는 질문을 하나 더 던져 볼게요. “당신은 당신 목소리로 무슨 변화를 만들었는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목소리’라는 단어 밑에 적은 문장이네요. 저 역시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내 목소리는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어 했죠. 누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사람들 관찰도 많이 했는데요. 목소리는, 자기주장을 무조건 관철한다거나, 큰 목소리로 말한다거나, 이건 나의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말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관한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이 가능해졌는가?’ 이 질문과도 연결되죠. 앞의 질문과 이어 본다면,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 목소리’가 되었으면 해요.

 

다시 질문해 볼게요. ‘내 목소리’로 어떤 것이 가능해졌나요?

‘동물축제 반대축제’를 기획한 게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기사로도 많이 보도되었고, 이 기획으로 화천 산천어 축제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죠. 우리나라에는 동물 이름을 걸고 하는 축제가 정말 많은데요. 그런데 그 많은 축제 중에 동물을 먹는 것 말고, 동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축제는 하나도 없어요. 사람에겐 축제지만 동물에게는 그날은 죽음의 카니발일 뿐이에요. 모든 동물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맨손으로 동물 잡기예요. 동물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돼지를 풀어놓고 뛰어다니게 만들곤 애들이 뛰어가서 돼지들을 잡는 걸 행사라고 하고 있어요. 부모들은 그 주변에서 우리 아기 잘하라고 손뼉 치고 있고요. 인간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를 막 쫓아오는데, 돼지 기분이 어떻겠어요? 혼이 나가는 거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쳐주고 싶어 해요. 풍요로운 자연을 만나게 하고 싶어서 동물 축제도 가는 걸 테고요. 말 못 하는 것들한테 함부로 하는 것은 다른 생명과도 모두 연결이 돼요. 어린아이, 장애를 가진 사람, 약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거죠. 그래서 동물축제 반대축제를 하면서 오징어는 어디서 알을 낳는지, 연어는 어떻게 돌아오는지, 고래가 새끼를 어떻게 기르는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제발 생명에게, 말 못 하는 것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던 걸지도 몰라요. 세상과 한 번 맺은 관계는 바꾸기가 힘들거든요.

 

주제어가 말인데 말 못 하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새롭게 와닿는 게 있어요.

그래서 말은 중요해요. 말하는 것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말을 못 하는지도 봐야 하고, 누가 말하다 슬픔을 당하는지도 봐야 하죠. 남미에는 이런 말도 있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다 당신이 어떤 말을 절대로 하지 않으려 하는지가 당신을 말해 준다.” 우리는 필요한 줄 알면서도 겁이 나서 못 하는 말도 있고, 용기가 부족해서 말하지 못하는 때도 있어요. 엄청나게 용기 내서 말했는데 아무 변화도 불러오지 못하는 말도 있고요. 특히 내 깊은 어둠에 대해선 입을 열기 힘들어하죠. 그래서 힘겹게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해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말을 해야 할까요? 하지 않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렇지만 제 대답은 어쨌든 ‘해야 한다.’는 거예요. 목소리가 있는 세상과, 목소리가 전혀 없는 세상은 다른 세상일 테니까요.

 

지금은 죽어 있는 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네요.

맞아요. 살려야 하는 말, 더 잘 들려야 하는 말들이 아직도 들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순간

직업 이야기를 다시 해보고 싶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르포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셨죠. 인상 깊은 말이었어요.

정말 라디오 피디는 우연히 된 건데(웃음) 지내다 보니 라디오 피디에 좋은 점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장 좋은 점은 앞서 말했듯 다른 사람의 장점을 제일 먼저 보고, 그걸 발견했을 때 기뻐한다는 거예요. 누가 음악에 해박하다, 기타를 엄청 잘 친다, 나무 박사 같다, 곤충을 너무 잘 안다…. 본능적으로 기뻐해요. 다른 사람의 장점에 힘입어 방송을 기획할 수 있거든요. 사람들은 타인을 볼 때 보통 뭘 입었나, 머리 스타일이 어떤가, 어떤 차를 타나… 같은 걸 보기도 할 텐데요. 피디는 이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나, 무엇을 말할 때 신이 나나, 어떨 때 빛이 나나를 발견하고 그걸로 같이 뭔가를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제가 르포 작가를 꿈꾼 건요, ‘이런 게 세상에 좀더 알려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누구나 있잖아요. 저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이런 걸 누가 알려주면 좋겠는데 왜 안 알려줬지? 왜 아무도 이 이야기를 안 했지?’ 싶던 순간이었죠. 라디오 피디든 르포 작가든 그 마음은 같아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동행하기, 세상에 더 알려져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세상의 빈 곳을 채우려는 마음, 거기서 동력을 얻죠.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면 내 한 번뿐인 삶,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같은 인터뷰에서 “이것이 내 일이다, 꼭 이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 같아요.

네, 맞아요. 그게 자기 삶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죠. 무척 행복한 순간이고요. 저에게 행복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과 떼려야 뗄 수 없는데요. 어쩌면 그런 순간을 기다리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에 밑줄을 긋는 건지도 몰라요. 그게 당장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좋다고 생각한 것들이 모여서 ‘나 이걸 하려고 그랬나 봐.’라는 발견을 할 때가 있기를 기다리면서요. 이렇게 내면의 무언가가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는 계속 ‘우리’의 가치를 이야기해요. ‘좋은 우리’라는 표현을 쓰면서요.

함께가 된다는 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질문이라도 던지지만, ‘나의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질문하기도 어렵거든요. 저는 앞으로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또, 그런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보고요. 좋은 우리는 인간과 인간일 수도 있지만, 물건이나 어떤 현상일 수도 있어요. 저랑 어떤 책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가 돼요. 아마 많은 분이 저자, 혹은 책 속의 인물과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일 수 있겠죠. 음, 제가 제비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매우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어서 제비를 보면 “안녕? 나야 나.” 하고 말을 걸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다정한 마음이 들고 제비와 즉각적으로 ‘우리’가 되곤 해요. 좋은 우리란, 내가 혼자 있을 때 나에게 그런 힘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우리가 되는 순간 숨겨져 있던 힘을 발휘하게 하는 존재예요. ‘네 덕분에 산다.’는 말이 그래서 있다고 생각하고요.

 

방금 제비에게 위로받았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경험이었어요?

어느 날, 그리스의 나우폴리오라는 도시에서 해 질 녘에 엄청나게 많은 바다제비를 봤거든요. 제비가 바다 위로 펼쳐진 살구색 일몰 위를 날고 있는데, 저에게 너무나 가깝게 날아오는 거예요. 그때 처음 어깨를 스치는 제비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어요. 제비가 너무나 눈부시게 움직이고, 너무나 많고, 너무나 생기 있어서 생명력이란 단어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죠. 저는 그때 말로 설명하기 힘든 힘을 얻었어요. 무언가가 힘차게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더라고요. 경이로웠죠. 

 

운명적이고 시적인 순간이네요.

맞아요.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처럼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만 봤어요. 모든 경이로운 순간은 생명력과도 연관이 돼요.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는 “우리는 지구에 잠시만 머무는데 우주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지금 여기 이곳에 잠시 머무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저도 어쩌면 그때 뭔가를 알았던 것 같아요. 여전히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이미 그 이야기 안에 살고 있다.” 경이로움을 한 번이라도 깊게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삶이 달라져요. 영원히…. (10초간 침묵한다.) 저, 근데요….

 

네?

저 이제 할 말을 다 한 것 같아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서 힘들어요. 지쳤어요(웃음).

 

오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웃음). 그럼 마지막 질문으로 마무리해 볼게요. 이 책의 부제를 그대로 옮겨와 보려고요.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아, 정말 많은데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가 그렇고요. 음, 지금 남기고 싶은 말은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죽는다. 꼭 필요한 일을 찾아내 그 일을 하라.”와“사랑해. 사랑한다. 끝까지.” 이 두 가지예요.

내가 살아낼 열 개 단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오래 고민해 모은 몇 개 단어를 혀로 굴리면서 ‘정말 이 말이 나를 설명할 단어일까.’ 다시 오래도록 고민했다. 그때 정혜윤 피디에게서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아, 그리고 열 단어를 한꺼번에 다 찾으려 하면 너무 힘드니까 우선 가장 중요한 거라도. 저의 단어는 시간, 라디오, 책, 경이로움, 친구, 요새는 한 흑인 가수 이름이 포함되었어요.] 당장 열 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다시 단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