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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좋은 계절
SPRING IS
THE BEST SEASON
TO RUNNING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지지 않는다는 말』
바람이 포근해졌다. 봄기운은 바람에 실려 콧속으로 들어와 몸 구석구석 문을 두드린다. ‘일어나. 달리기 좋은 계절이 왔어.’ 모처럼 운동화의 끈을 묶고 MP3 플레이어 속 좋아하는 음악들을 든든한 친구 삼아 봄의 대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달리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와 함께.
나는 어지간해서는 뛰지 않는 성격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려는 찰나에도 뛰지 않았다. 지하철이 막 플랫폼에 들어오려는 순간에도 뛰지 않았다. 길모퉁이에 강동원이 서 있다고 해도, 10분 한정으로 1등급 한우 불고기를 80% 세일한다고 해도 뛰지 않았다. 사자에게 쫓기는 영양처럼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쁜 걸까.
그런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달리기?” 그들이 상상하는 달리기란 학창 시절의 100미터 달리기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의 달리기는 그런 달리기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난 뛰는 거라면 질색이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도 않다. 나의 달리기는 짧게는 2km에서 길게는 9km까지, 집 근처 운동장의 육상 트랙 위를 슬렁슬렁 지나는 정도다. 길어야 1시간 남짓이다.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달리고 싶어졌던 이유는 간단했다. 달리기가 나에게 무엇을 줄지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종합운동장의 근사한 육상트랙이 있다. 과식으로 찢어질 것 같은 위장을 부여잡고 죄책감 완화의 목적으로 육상트랙을 빙빙 돌며 걷다 보면, 옷 같지도 않은 옷을 걸친 채로 가쁜 숨과 번들거리는 땀을 흩뿌리며 달리는 러너들을 발견하곤 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저렇게 힘든데 왜 뛸까 싶었다가, 점점 궁금해졌다. 무엇이 저들을 달리게 하는 걸까. 누가 시켜서 달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쫓겨서 달리는 게 아니라, 그저 달리고 싶어서 달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래서 어느 가을밤, 3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50미터였다. 50미터라니, 그건 달리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그런데 50미터를 다 뛰기도 전에 폐가 불타고 심장이 찢어지고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이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충격이었다. 한때는 100미터를 14초대에 주파하던 나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50미터씩, 100미터씩, 500미터씩 거리를 늘려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1킬로미터쯤 뛰다 보면 ‘아이고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 짓을…….’부터 시작해서 뛰기 싫다 걷고 싶다 앉고 싶다 눕고 싶다 죽고 싶다.’ 등등의 생각이 사방에서 죽창을 들고 내 육신을 찔러댔다. 그러다 1킬로미터쯤 뛰고 나면 조금 살 것 같았고, 3킬로미터를 넘어서면 ‘이 정도면 제법 재미있는데?’라는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가, 5킬로미터를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이고 내가 미쳤지 어쩌자…….’ 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처음에 다짐했던 거리를 기어이 달리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참 뿌듯했다.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사실 이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보통은 머리를 쥐어박거나 내 목을 조르고 싶을 때가 태반이다. 하지만 동그란 트랙의 출발지점을 거듭 밟을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메달은커녕 세상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쉽게 행복해졌다. 새로운 바퀴와 새로운 기록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으니까.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는 달리기의 마력에 푹 빠진 나는 달리기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철인삼종경기에 도전하는, 육체파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예찬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였다. 20대에 재즈 카페를 운영하며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던 하루키는 전업 작가가 되자 매일 달리기를 시작한다. 그는 매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열혈 러너가 되어 뱃살 걱정 없이 밤마다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노인으로 늙었다. 작가란 자고로 밤과 낮이 뒤바뀐 채로 술, 담배와 벗하며 무병장수 같은 것에는 가래침에나 뱉어줘야 어쩐지 폼났던 시절에, 이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에 숨은 광맥을 발굴할 수 있었던 힘으로 달리기를 꼽았다.
맞는 말이었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깨끗하고 예쁜 그릇에 담은 소박한 음식이야말로 최고의 식사라는, 이 흔해 빠진 말이 먼 길을 돌고 돌아서 30대가 되어서야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내가 좀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일까.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나의 최고 기록은 지금 9킬로미터에서 멈춰 있다. 요즘은 기분 내키는 대로 3킬로미터에서 5킬로미터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언젠가 더 달리고 싶어지면 10킬로미터까지 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는다. 달리다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진지한 자세로 달리는 진짜 러너들이 나를 휙휙 추월한다. 나는 잠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만 5초 후면 회복한다. 누구보다 잘 달리기 위해서 달리는 게 아니니까.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거니까. 소설가 김연수 역시 달리는 작가다. 그는 자신을 읽고 쓰고 달리는 사람으로 묘사하곤 하는데,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다른 누군가를 이기지 않는다면 결국 패배자가 되는 것이 스포츠’라는 편견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달리기를 통해서 내가 깨닫게 된 일들은 수없이 많다. 뛰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달리기를 하기에는 제일 좋은 때다. 아무리 천천히 뛴다고 해도 빨리 걷는 것보다는 천천히 뛰는 편이 더 빠르다. (중략)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어쩌면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는 자신이 소파에 퍼져서 TV 채널이나 돌리거나, 두둑한 뱃살을 부여잡고 치킨을 뜯는 나태한 인간이 아니라, 고된 정신노동을 마친 후 달리기로 육체를 단련하는 금욕적 지성인이라는 자기만족에서일지도 모르겠다. 뭐, 뭐가 됐든 과하지만 않으면 됐다. 달리지 않는 것보다 달리는 게 나을 이유는 없지만, 달리지 않는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와 차를 타러 걸을 때 말고는 좀처럼 몸 쓸 일 없는 현대인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머리는 완전히 방전되었지만, 몸은 조금도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부조화가 각종 질환과 정신적 피로, 우울증, 망상 같은 것들을 낳는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 까닭 없이 우울할 때, 에너지가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운동화의 끈을 묶고 밖으로 나간다. 몸속에 남은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시키자는 마음으로 달린다. 그 에너지들은 내 몸속에 남아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달리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흙탕물로 뒤덮인 유리창을 말끔히 씻어낸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남는다. 그리고 인생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내 두 다리로 이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내게도 달리기란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지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돌이켜 보면 달리기로 인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이득은, 땀을 많이 흘려 전보다 훨씬 좋아진 피부나, 온몸의 군살이 사라진 것이나, 체력이 좋아진 것을 제외하고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도시에 살면서 우리가 살아 있다고 느낄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달리다 보면 오로지 고통스럽기만 할 때가 태반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고통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폐가 몸부림치고, 종아리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달리고 나면 내 옷은 땀에 푹 절어 있다. 한여름도 아니고, 찜질방에 다녀온 것도 아닌데, 30대 여자의 옷이 이렇게 땀으로 푹 젖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 옷을 벗어서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된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피로감이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내가 달릴 때마다, 달리러 나가기 싫을 때마다, 달리기 힘들어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되뇌는 문장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달리러 나가야겠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 | 277쪽 | 188x257mm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괜찮은 이유가 되어준다. 매일 조금씩 달리다가 결국 그것을 밥을 먹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라고 말하는 그의 솔직한 달리기가 궁금해진다.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324쪽 | 128x188mm
김연수가 만든 다양한 소설의 출처는 어디일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산문집을 한 번 들여다보면 좋겠다. 소설가로서의 김연수가 아니라, 많은 것을 좋아하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남자로서의 김연수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 안에서 그가 달리기를 즐겁게 여기는 이야기는 늘 이기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위안이 된다.
사진·에디터 박선아
글 한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