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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의 휴가
얼마 전 서점에서 책 하나를 봤다. 쉼 없이 일만 해오던 저승사자에게 갑작스레 1년의 휴가가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쉬어본 적이 없기에 방법을 모르던 저승사자는 그동안 하고 싶던 일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면서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다. 그러니 우리도 준비해보자. 인생에 한 번쯤 예기치 못한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다. 지금부터 만나볼 다섯 엄마들의 즐거운 상상을 참고해봐도 좋다.
정인하 | 일러스트레이터
아이의 리듬에 맞추는 하루
11개월 아들이 일어나는 일곱 시쯤에 저의 하루도 시작돼요. 아이 밥 먹이고 놀아주다가 열 시쯤 엄마가 오시면 집안일을 하고 밥을 먹어요. 정오부터 여섯 시 정도까지는 일을 합니다. 저녁에는 다시 아이와 함께 있다가 집 안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요.
이왕이면 요즘 가장 궁금한 곳으로
휴가가 생긴다면 당장 타이베이행 비행기 표를 끊을 거예요. 요즘 가장 가고 싶고 궁금한 곳이 타이베이거든요. 가서 부지런히 빈둥거릴래요. 그나저나 3일을 쉬려면 참 준비할 게 많겠네요. 여행 준비 말고도 미리 일도 처리해야 하고, 이유식 같은 육아 관련 일과 집안일…. 정신없겠어요.
온전히 혼자임을 느끼며, 타이베이에서의 3일
Day1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을 거예요. 괜히 티브이를 틀어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침대에 가만 누워도 보고, 창밖도 보고요. 이런 시시한 일들을 하면서 새삼 ‘아. 잠시 혼자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숙소 근처를 느릿느릿, 길게 산책할래요. 건물의 타일과 창문의 형태, 화분과 나무의 생김새를 관찰하면서요. 사람들도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요. 그러다가 마트나 빵집에서 달콤한 걸 사고 적당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맥주도 한잔 할래요.
Day2 일단 조식을 먹고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해요. 좋아하는 옷
을 입고 편한 신발을 신고, 단출하게 노트와 펜, 핸드폰과 지갑 정도만 챙겨서 나와요. 약간 낡았지만 잘 관리된 건물과 많은 나무가 함께 있는 지역 한 군데를 찾아서 느리게 머무르고 싶어요. 차를 마시고 문구점도 구경하다가, 느낌이 좋은 옷 가게에 들러 옷도 사고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드로잉하고 두서 없는 생각을 메모하면서 꽤 오랜 시간을 쓰고 그리며 보낼 거예요.
Day3 여행 마지막 날엔 공원이나 미술관에 가고 싶어요. 눈앞에 있는 것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그곳 특유의 냄새를 맡고…. 또 어느 모르는 매력적인 골목을 걷다가 숙소에 돌아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죠.
Imagine+α 만약 다시 떠날 수 있다면 나뭇잎이 물든 깊은 가을에 료칸으로 떠나고 싶어요.
김유미 | 패션 브랜드 ‘ym store’, 사진 스튜디오 ‘드길’ 운영
비슷한 저녁이 있는 하루
남편과 저, 다섯 살 아들과 강아지 꾸미. 우리 가족은 매일 비슷한 날을 보내요. 일곱 시쯤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요. 스튜디오에서 업무와 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다섯 시에 아이를 데리러 갑니다. 그리고 아이와 놀아요. 남편과 모든 일을 같이 하고 있는데, 무조건 다섯 시 퇴근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이른 저녁부터는 가족이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편이에요.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
예전에 이틀 정도 자유시간이 생긴 적이 있어요. 종일 잠만 자려고 했는데 잠이 짧아져서 푹 자지도 못하고, 평소처럼 작업하고 집안일 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어요. 이 3일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죠! 그런데 혼자 좋은 걸 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여행을 선택할래요! 3일이면 엄청난 찬스니까요. 무작정 제주도로 떠나보려고요.
천천히 오래, 제주도에서의 3일
Day1 첫날엔 숙소 인근에서 풀과 나무들을 슬로우 셔터로 기록하고 싶어요. 아이가 생긴 뒤로는 이렇게 여유롭고 조용한 작업들을 하지 못했어요. 특히 밤에 촬영하는 걸 좋아하는데 밤에 외출을 해본 지가 오래돼서 그게 많이 그립네요. 혼자 조용히 제주도의 밤 풍경을 담고 싶어요.
Day2 좋아하는 매거진이나 책을 두세 권 들고, 가장 아름다운 카페에 가서 오랫동안 집중해 읽고 싶어요. 그리고 편한 운동화를 신고 천천히, 또 많이 걷고 싶어요. 좋아하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바다도 보고, 예쁜 옷도 구경하고, 천천히 전시도 보고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천천히 오래’예요. 다만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건 아직 어려워서,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서 숙소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며 먹을 거예요. 간단하게 술 한잔 하면서요!
Day3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아침으로 맛있는 전복죽을 먹고, 자전거를 빌려 공항 쪽으로 가깝게 라이딩할래요. 중간중간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요. 딱 3일째 되는 날엔 아쉬운 기분보다는 가족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빨리 가족을 만나서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거예요. 아주 행복하게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네요.
Imagine+α 휴가권을 양도할 수 있다면 저랑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남편에게 줄 거예요.
이나연 | 나들이 정보 공유 서비스 ‘리틀홈’ CCO
아이에 의한, 아이를 위한 하루
15개월 터울의 초등학생 남매를 둔 워킹맘이지만, 아이들과의 놀이와 나들이, 여행하는 일상을 공유하는 게 제 업무다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요.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는 함께 읽을 책과 영화를 미리 찾아보거나 나들이의 흔적을 기록하고, 다음 여행에 대한 계획을 세워요.
조용히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혼자만의 휴가라면 참으로 오랜만에 느리고 지루한 어른의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용히 걷는 걸 참 좋아하는데 아이들과 함께일 때는 언제나 운전을 해야 하고, 왁자지껄한 뒷좌석 소리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면서 편안하고 짧은 코스를 찾는 게 우선이거든요. 경북 안동은 아이들과도 여러 번 들른 곳이에요. 꼭 한 번 혼자 다시 가고 싶었는데, 이번이 기회 같아요. 먼저 걷기 여행에 관한 책부터 한 권 사야겠네요.
걸음걸음 소중하게, 안동에서의 3일
Day1 안동 여행은 서울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안동역에 도착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첫날이니 뜸하게 오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도산서원에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 옛 선비처럼 타박타박 숲길을 걸으면 휴가를 실감하게 될 것 같아요.
Day2 안동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병산서원이에요. 차로도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 하는데, 언제고 그 길을 꼭 걸어서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버스와 걸음으로만 찾아가려면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요. 병산서원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초록빛 강줄기를 끼고 있는데, 누마루에 올라 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에 오래 담을 거예요. 재촉하는 이 하나 없으니 마냥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Day3 혼자가 되겠다며 신나게 떠나왔지만 돌아가는 날엔 결국 가족 생각부터 하게 될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찜닭에 간고등어, 맘모스제과 빵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서 챙기느라 바쁠 예정입니다. 양손 무겁게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탈 때면 집에 간다는 생각으로 떠나올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 찾아오겠죠.
Imagine+α 이 휴가, 매년 한 번씩 쓰면 안 될까요?
장우림 | 세라믹 브랜드 ‘지승민의 공기’ 디렉터
피곤해도 괜찮은 하루
남편과 저, 17개월이 된 아들까지 세 식구가 함께 지내고 있어요. 아침에 아이가 눈을 뜨면 토스트나 달걀, 오트밀 같은 것들로 아침을 차려서 함께 먹어요. 간단히 집안일을 해놓은 다음 커피를 마시거나 동네를 산책하고, 오후가 되면 친정엄마가 오셔서 밀린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요. 늦어도 저녁 일곱 시 전에는 다시 엄마로 돌아와서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씻기고 재워요. 매일 반복되는 일이죠.
느긋한 물처럼
온전히 3일이 주어진다면 남해안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아직 못 가본 곳이기도 하고, 3일이면 다녀오기에 딱 좋을 것 같거든요. 멋진 수영장이 있는 리조트를 골라 느긋하게 수영하면서 쉴 거예요.
가볍게 떠나 두둑하게 채우며, 남해에서의 3일
Day1 꽤 긴 시간이지만 남해안까지 운전해서 가고 싶어요. 혼자 운전석에 앉아 그 먼 곳까지 달리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요.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과 같이 가도 재미있을 거예요. 엄청난 양의 아기 짐 없이 단출하게 싼 가방이 여행 포인트예요!
Day2 차려진 아침을 느긋하게 먹는 시간은 엄마가 된 이후 가장 그리운 순간 중 하나예요.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일어나 편안하게 조식을 먹고 쉬다가 수영장에 가서 맘껏 수영할 거예요. 그리고 선베드에 누워서 달콤한 낮잠에 드는 거예요. 그다음엔 또 수영하고 먹고, 또 수영하고를 반복할래요. 아직 둘째 날이니 시원한 까바Cava도 한 병쯤은 괜찮겠죠?
Day3 서울로 돌아갈 때 해안 도로로 드라이브할 예정이에요. 가다가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을 찾아서 먹고 싶어요. 특히 해산물이나 신선한 채소가 듬뿍 들어간 것들로요.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먹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끼니를 자주 거르거나 대충 때우는 습관이 생기니 늘 내 몸에 빚진 느낌이에요. 좋은 재료로 공들인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어요.
Imagine+α 친정엄마에게도 이런 휴가가 공짜로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보람 | 주부
돕고 도움받는 하루
매일 밤 열 살 딸아이가 아침에 읽을 책들을 정리해둬요. 다음 날 일어난 아이가 한 권을 다 읽을 때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 출근과 아이 등교를 돕죠. 저는 어지럽혀진 집을 청소하고 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어요.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아트 클래스 강의도 하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최대한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남편이 퇴근하면 저도 주부로서 퇴근할 수 있어요. 아이가 잠들면 책을 읽거나 남편과 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말 그대로 온전한 나만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요. 그래서 꼭 혼자서 여행을 가보려고요. 성격 탓이겠지만 육아도, 집안일도, 고양이를 키우는 일도 사소하게 신경을 많이 쓰면서 살거든요. 여행지를 고를 때 아이와 남편의 취향에 맞는 곳인지 고민하지 않고 목적지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고 싶어요. 지금 떠오르는 건 교토예요.
계획이 없는 게 계획, 교토에서의 3일
Day1 아이와 여행을 가면 항상 여분의 짐이 많은데 혼자라면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떠나고 싶어요. 이름하여 혼자, 가볍게, 훌훌 떠나는 여행! 교토에 도착해서는 숙소에 들어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한두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Day2 목적지 없이 낯선 동네를 산책하고, 스마트폰도 잠시 넣어두고 동네 밥집과 카페, 서점에 들어가보고 싶어요.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시간을 보내면 좋겠어요.
Day3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목적 없이 교토를 여행할 거예요. 그 시간만큼은 매일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가는 하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고민을 차분히 내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생각해보려고요.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떠올려보고요. 그러면 앞으로의 일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계획할 수 있겠죠.
Imagine+α 먼 훗날 이 시간은 ‘아무것도 안 했지만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시간’이라고 기억될 것 같아요.
에디터 이다은
일러스트레이터 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