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Records Make Clear Footprints

일러스트레이터 정인하

꾸준한 기록은 꼭 마라톤 같다. 나는 지금껏 그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한 적이 없다. 출발선에서 신발 끈을 묶으며 시간을 끌다가 기권하거나 중간에 잠깐만 쉬려다 영영 주저앉아 버렸다. 일러스트레이터 정인하는 기록에 관해서라면 끈기 있는 마라토너다. 무려 10년 동안 말로 뱉지 않은 내밀한 이야기와 흘러가는 생각들, 여행의 생생한 추억과 자라나는 아이의 변화를 모두 노트에 옮겨 왔다. 적당한 거리에서 관찰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습관처럼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면서 진짜 그리고 싶은 게 뭔지 명확히 깨달아 갔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걸음걸음 내디딘 발자국은 돌아볼수록 선명하게 빛난다.

보통의 동네

평범한 사람들

지하철역에서 내려 댁까지 걸어왔어요. 여기가 바로 《부드러운 거리》에 나오는 그 동네인가요?맞아요.

 《부드러운 거리》는 결혼 전 신림동에 살 때 대부분 작업하긴 했지만 이곳 산본과 동네 사람들도 등장해요. 2015년에 결혼하면서부터 산본에서 살고 있는데, 아파트와 나무가 많아서 아이 키우기 참 좋은 동네예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잖아요. 저도 대부분 집에서 보내요. 하루 한 번 아이와 집 근처 놀이터나 산책로에 다녀오고 장 보러 후다닥 마트 가는 것 말고는 외출이랄 게 없어요. 월요일부터 목요일엔 아이를 보고 금, 토, 일엔 일을 해요.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엄마가 와주셔서 그때 주로 밖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하고요. 남편은 게임 회사 프로그래머인데 요즘 들어 야근이 너무 심해서 주중에는 거의 아이 자는 모습만 보고 일요일에 아이랑 같이 할머니 집에 가서 놀아 줘요. 평일에 못 보는데도 일요일엔 아이가 아빠한테만 가 있는 게 신기해요. 양반다리하고 앉아 있으면 가운데 빈 공간에 엉덩이를 대고 앉더라고요. 사이즈가 딱 좋은가 봐요.

 

저기 무언가 빼곡하게 들어찬 방이 보이는데, 작업방인가요?

네. 예전에는 카페에서 작업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여러모로 갈 수가 없어서 집에서 일해요. 주로 그림책과 어린이 읽기 책에 그림을 그리고, 단행본 작업도 해요. 요즘에는 ‘모닝 페이지’도 틈틈이 하고 있어요.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서 창작자의 창조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권하는 프로젝트인데 아침에 눈뜨자마자 의식의 흐름대로 종이 세 장을 채우는 거예요.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는데 아이 낳고는 못 하다가 이제 금, 토, 일 시간이 생겨서 일주일에 3일이라도 쓰고 있어요. 일어나서 바로는 아니더라도 시간 날 때 꼭 하려고 해요. 생각나는 대로 쓰고 그리죠.

혼자 있더라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계속 쓰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해야 할 일만 하기에도 벅차서 개인 작업은 거의 못 하고 있어요. 육아 일기도 그래요. 아이랑 너무 달라붙어 있으니까 오히려 덜 쓰게 되더라고요. 뭔가를 생산해 내려면 ‘일단은 모닝 페이지 먼저 하고 난 다음에 처리하자.’ 생각하면서 당장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기술이 필요해요. 꼭 필요한 일은 먼저든 나중이든 하게 되어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종이세 장 채우기나 육아 일기나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안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래서 더 의식해서 하려고 해요. 당장은 별거 아닌 생각 같아 보여도 나중에는 다르게 받아들여져요. 작업으로 확장할 만한 것도 나오고요. 그게 좋아서 계속하는 것 같아요.

 

외면하는 기술 덕분에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었군요. 더 오래된 습관도 있다고요.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노트에 생각나는 걸 적거나 그려요. 꽤 오래된 습관인데, 지금 사용하는 B6 사이즈의 노트를 꾸준히 쓰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인 것 같아요. 남편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어디에 가든 어떤 상황이든 노트와 펜만 있으면 괜찮아.” 호기롭게 한 얘기지만 정말 어딜 가든 그 두 개만 있으면 마음가짐이 아주 나빠지진 않을것 같아요. 심심하거나 슬프거나 혼란스럽거나, 글로 적으면 한결 나아지니까요. 그래서 외출할 땐 꼭 노트와 펜, 읽을거리를 챙겨요. 자연스럽게 기록이 습관이 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린 지는 7~8년쯤 됐어요.

ⓒ정인하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음… 내 그림을 찾아가는 과도기였던 것 같아요. 처음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했을 때는 패션 잡지와 자기계발서 위주의 단행본 표지, 내지 작업을 했어요. 트렌디하고 진취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작업이 많았죠. 사실 저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아닌데 초반에는 할 수 있는 일은 거르지 않고 다 해내려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 점점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뭘 원하는지 고민하게 됐고 그런 고민과 함께 그림도 변하더라고요. 선이 좀 구불구불해지고 힘이 빠진 듯하게 바뀌었어요. 그림체가 포트폴리오와 점점 달라지니까 편집자님이 이 방향은 아닌 것 같다고, 수정을 여러 번 하다가 그대로 일이 엎어졌어요. 

그때 한창 신림동의 한 카페에서 일을 하던 시기였는데, 카페 2층 창가 쪽 긴 테이블에 앉으면 맞은편에 횡단보도가 보였어요.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리기 딱 좋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서 있었죠. 일하다가 지루해질 때쯤 창밖의 사람들을 노트 귀퉁이에 하나둘 그리기 시작했어요. 목적도 부담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 낑낑대며 공들여 그린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어요. ‘아. 드로잉이 이렇게 즐거운 거였지.’ 하고 새삼 느끼곤 했죠. 그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자꾸자꾸 그리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서,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면 아쉽기도 했어요. 주변을 잊고 그림에만 몰두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고요. 그렇게 노트 위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나중에는 사람들을 그리러 일부러 나가게 됐어요.

 

그 그림들을 모아 만든 책이 《부드러운 거리》죠?

맞아요. 《부드러운 거리》는 2014년에 독립출판물로 먼저 만든 책이에요. 제가 직접 책방을 돌면서 입고시켰는데, 그 당시 책방을 운영하셨던 편집자님이 이후에 출판사에 들어가셨고 같이 책을 만들어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정식으로 출간 했어요. 

 

그림체가 무척 러프하면서도 사람마다 특징이 잘 잡혀있는 것 같아요. 관찰하면서 특히 눈에 잘 띄는 사람들이 있나요?

사람마다 흥미가 생기는 부분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릴 사람들을 미리 생각해 놓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딱 떨어지는 체형보다는 노인의 느슨한 몸이나 아주머니의 두툼한 몸통, 아저씨의 허리가 없는 통짜 몸매를 종이에 옮기는 게 즐거워요. 우리 머릿속에 이상화된 모습은 큰 키에 늘씬한 몸에 티브이 광고에나 등장할 법하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체형, 키, 옷차림, 걸음걸이, 서 있는 포즈 모두 다르죠. 언뜻 보면 평범한 사람이 그림이 되는 순간 매력이 살아날 때가 있는데 아마 고유의 것을 간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어여쁜 모델들을 그리곤 했어요. 더 어릴 때는 공주님이나 순정만화 주인공을 그리길 좋아했고요. 그림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알아가면서 그리고 싶은 대상도 바뀐 것 같아요.

그런 변화가 그림책 《밥.춤》에도 나타난 것 같아요. 세탁소, 호떡 가게,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의 몸짓을 경쾌하게 춤추듯 표현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시작할 때는 역동적인 사람의 몸을 그리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어요. 《밥.춤》은 원래 전에 다니던 일러스트레이션 학교의 졸업 전시 작품으로 낼 캘린더용 그림이었어요. 캘린더는 2011년에 작업했는데 책은 2017년에 나왔으니 엄청 오래 걸렸죠. 출판사에서는 그림이 있으니까 글만 붙여서 책을 내자고 했고 저도 너무 좋다고 금방 나오겠다고 그랬는데, 5년 넘게 걸렸어요(웃음). 글이 안 나왔어요. 글 붙이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림만 나열한다고 그림책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 오래 고민했어요. 완성된 책의 글은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번뜩 떠오른 걸 막 적고 나서 다듬은 거예요. 다행히 거의 수정 없이 갔지만 그림책 작업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그림 순서를 바꿔볼까,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해볼까 고민하다 보면 몇 달이 훌쩍 가버려서 할수록 세심한 작업이란 걸 느꼈어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궁금해요.

담백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자주 생각해요. 빈 공간이 있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림을 좋아하고, 더하기보다는 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사람을 그릴 때도 무조건 닮게 그리기보다 제가 끌린 부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그런 담백함은 사람 사이의 거리감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거리감이요?

만약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했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기운을 강하게 느끼거나 정서적인 관계를 형성했을 거예요.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귀엽게 보여요. 느슨하게, 덧붙이지 않고 덜어내도 괜찮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걸 그렸을 때 독특한 나만의 분위기가 나온다는 걸 깨달으니 익숙한 것들을 좀더 멀리서 보게 되었어요. 그런 시선이 동네와 사람들을 좋아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