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아지는, 작은 것들

Small, Good Things

행복은 가까운 데 있다. 누구나 안다. 기억하지 못할 뿐. 복습하자.

버스가 끊겨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50미터쯤 가다 차를 세웠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깐만 멈추겠습니다. 전 매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캔 커피를 마십니다. 택시 운전 15년째인데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손님한테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뭐로 드시겠습니까? 미터기는 출발할 때 켜겠습니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고 택시 기사는 운전석에, 난 뒷좌석에 앉아 동시에 캔 뚜껑을 땄다. 몇 모금 마시자 택시는 출발했다.

 

앞선 택시 기사 일화는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모월모일》 중 <스무 살 때 만난 택시 기사>를 읽다 퍼뜩 떠올랐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은 최고다. 이토록 촐랑거리면서 그윽할 수 있다니. 주근깨 빨강 머리 앤이 자라면 이런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내 멋대로 스승으로 모셨다.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계산하는데 주인아저씨가 물었다. “주말에 우리 집에서 배달시키셨죠?”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저씨는 아줌마한테 “거봐, 내 그랬잖아.” 하더니 나한테 시선을 돌렸다. “너비아니 구이 소스 빼달라고 적혀 있길래 바로 알았지. 앞으로 주문할 땐 이름 한 글자라도 적으셔. 그래야 뭐라도 더 보내지.” 그 주말에 또 배달시키면서 “너비아니 구이 소스는 빼 주세요.(ㅎㅎㅎ)”라고 적었더니 에그 타르트, 호두 타르트 등 달달한 것들이 딸려 왔다. 뭘 더 달라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잘 먹었습니다!

 

같이 사는 고양이 두 녀석 중 연희는 매일 새벽 베개 근처로 올라와 울어댄다. 그러면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무릎을 가슴께로 올리고 한쪽 팔에 이불을 걸쳐 동굴을 만든다. 연희는 동굴로 쏙 들어와 몸을 돌려 머리를 입구로 향하고는 털썩 쓰러져 제 몸을 내 품에 기댄다. 그 작은 어깨가 닿는 감촉이 애잔하다. 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통통 치다 손가락으로 미간을 쓰다듬다 한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면 연남이가 어디선가 달려와 9킬로그램짜리 몸뚱이로 동굴을 덮쳐 무너뜨린다. ‘이 쟈식, 또!’ 이 난리 통에도 여자 친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잘만 잔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다시 읽었다. 정말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다. 여자 친구와 나는 요새 거의 매주 택시 타고 다른 동네에 간다. 오직 커피 한잔 마시러. 그 집의 커피는 유일무이하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식은 온도를 올리려는 것인지, 포트를 가스레인지에 올려 재가열한다. “뜨거우니까 식히면서 드세요.”라는 친절한 한마디와 함께 앞에 놓이는 진한 국물. 여기에 챙겨 간 책을 곁들이면 주중에 낀 공휴일처럼 피로가 풀린다.

 

카페 탁자에 매화가 있었다. 주인장은, 가지를 꺾어 물에 담가 두기만 했는데 새싹이 움텄다며 기뻐했다. 매화 앞에 자리 잡았는데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들자 꽃잎 몇 개가 나풀거렸다.

음악은 슬프게 좋을 수도 우울하게 좋을 수도 넋이 나가게 좋을 수도 불쾌하게 좋을 수도 있다. 추워도 코트는 입을 수 없는 시기가 오면 떠오르는 기분 좋은 음반이 있다. 셸리 맨Shelly Manne의 장난꾸러기 같은 실험 정신이 봄바람처럼 찰랑거리는, [Sounds!].

 

그런가 하면 보기에 황홀한 음반도 있다. 한동안 빈터운트빈터Winter&Winter의 골판지 시디를 모았다. 골판지에는 인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작 방식이 제한적이다. 그 제한된 상황을 뒤집어 황홀경을 만들어냈다. 거친 골판지에 매끄럽고 반짝이는 박을 쳐 시각과 촉각의 대비를 이루고, 간혹 따로 인쇄한 작은 종이를 붙이고 오목하게 눌러 우아함을 더한다. 트레이 재질 역시 플라스틱이 아니라 검은 판지다. 몇몇 음반은 음악이 아니라 디자인 때문에 샀다. 물질로 번역된 음악을 보고 만지는 일 역시 둘도 없는 재미다.

 

나이젤 피크Nigel Peake의 드로잉에 매혹되었다.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를 그린 드로잉을 엮은 《빌라Villa》를 근처에 두고 펼쳐 보곤 한다. 어떤 풍경이 눈앞에 있다. 그 풍경을 이루는 선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다른 선으로 샤샤샥 변환된다. 이 샤샤샥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어째서 내겐 이 샤샤샥이 오지 않는 걸까. 고난을 각오하고 찾아 나선들 도달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일까.

 

책장에 마호가니 나무를 깎아 만든 여우 조각이 놓여 있다. 물 흐르듯 넘실거리는 몸통은 붉은 갈색으로, 탐스러운 꼬리는 흰색과 금색으로 칠했다. 우리 고양이들한테도 탐스러워 보였는지 여우의 뾰족한 귀는 반쯤 갉아 먹혔다. 요 여우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살짝 일렁인다. 지난달 선물 받은, 붉은 여우와 흑백 여우가 나란히 자수 놓인 티셔츠를 입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호가 나오면 여우 셔츠를 입고 펼쳐 볼 수 있길.

 

《꼬마 안데르센의 사전》은 그림과 글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 준다. 글만 읽으면 어쩐지 맹숭맹숭하고 그림만 보면 수수께끼 같다. 같이 봐야 작가의 상상이 비로소 손에 잡힌다. 게다가 그림은 독자의 시선을 그림 너머로 이끌면서 카메라 렌즈가 거리를 가늠하듯 본 것과 보지 못할 것 사이에서 노닐게 한다. 한쪽이 없으면 반쪽이 되는, 둘이라야 온전해지는, 말하자면 1+1=11이 되는 관계랄까.

 

《Small Collecting Book》이라는 손바닥만 한 책을 샀다. 여행지에서 취득한 자질구레한 쪼가리를 엮은 소박한 책인데, 별것 아닌 것들을 그러모으니 그럴듯해 보인다. 모은 사람이 실낱만큼 엿보여서일까?

 

금색 연필이 있다. 심은 무지개색이다. 황금 연필인가, 무지개 연필인가!

 

매일 할 일이 있고, 인간 파트너와 고양이 파트너가 곁에 있고(심지어 사이도 좋고), 몸도 성한 편이고, 마음은 극히 편하고, 책 만드는 일로 생계를 잇고, ‘지나치게’ 비굴할 일 없고, 출퇴근 시간대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고, 늘 맛있게 먹고 마시는 편이고, 그저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안경을 들였고, 자전거 정비도 마쳤고, 날씨는 따뜻해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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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