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u, Jaru, Love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

처음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고양이들이 대화를 마치고 나니 책장 한 칸에 걸터앉아 가만히 눈 맞춤을 해온다. “시루, 자루랑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나요?” 그의 요청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재민 디자이너는 본인을 ‘아빠’라고 칭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잘한다고, 예쁘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서 쏟아지던 건 총천연색 사랑이었다. 이 집에 가득한 모든 물건에 사연이 있다는 그. 아마 이 모든 기록에 시루와 자루가 함께하며 길이길이 사랑이란 흔적이 남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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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깃든 로그

물건으로 쓴 일기

황금 같은 일요일에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반갑습니다. 건배부터 할까요?

 

(맥주잔을 부딪치며) 주말엔 주로 뭘 하며 보내시나요?

원칙적으로는 쉬는 날이죠. 은근히 밀린 회사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있어서 주말이라고 매번 쉬진 못해요. 쉬는 날이더라도 기본적인 집안일들은 언제나 있으니까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죠. 음악을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해가 기우는 건 금방이더라고요. 집안일도 하고, 음악도 듣고, 고양이들과 함께 보내는 게 보통의 주말이에요. 좋은 시간이죠.

 

안 그래도 고양이들 만날 기대를 잔뜩 하고 왔는데 안 보이네요. 

손님이 오면 한두 시간은 거의 숨어 있어요. 사람에 따라 슬쩍 나와보기도 하는데, 좀 두고 볼까요?

 

제가 마음에 들면 좋겠네요(웃음). 코로나19 때문에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죠? 집의 역할도 점점 확장되는 것 같아요.

사실 코로나19가 생기기 전에도 저는 남들에 비해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어제 집을 청소하면서 집이 제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는데, 청소하던 중이어서 그런지 ‘모든 물건엔 자기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다못해 작은 손톱깎이 하나도 매번 두는 자기만의 자리가 있고, 아무 데나 내동댕이쳐놓으면 나중에 찾느라 고생하잖아요. 또 무선 청소기는 쓰고 나면 방전되지 않도록 충전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저에겐 그런 ‘자리’가 바로 집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 같은 건가요?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좀 있던 것 같아요. 줄자나 가위, 드라이버에게도 자기만의 자리가 있을 거예요. 그 자리에 있지 않다면 어딘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거겠죠? 저 역시 집에 없을 땐 어딘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걸 테죠. 그렇게 얼마간 쓰이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는 회귀본능이 작동하는 것도 같아요. 단순히 전자 제품의 충전처럼 소진된 기운을 다시 채우는 것을 넘어서는 곳,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장소가 제게는 집이에요. 쓰고 난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집에서의 시간이 가장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지금은 제자리가 신당동인 거네요.

신당동으로 온 건 제 생활 반경이나 동선, 금전적 상황 같은 것들을 따져 봤을 때 그 당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에요. 신당동 중에서도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보다가 닿은 곳이 이 오래된 아파트고요. 신당동이라는 동네 자체에 큰 매력은 없는데요. 그래도 15분이면 회사에 닿을 수 있고, 강남이나 시내도 가깝고, 근처에 청계천도 있다는 게 좋아요. 입지적으로는 꽤 살기 편한 곳이죠.

 

신당동 하면….

떡볶이 골목(웃음)? 여전히 유명하지만 쇠락한 옛 유원지를 보는 것 같은, 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골목이에요.

 

트레이드마크가 있는 동네죠. 여긴 1층인데 이전에는 15층에 살았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제가 고려한 여러 조건 중 하나가 ‘가능하면 저층이면 좋겠다.’였는데요. 함께 사는 고양이 ‘시루’랑 ‘자루’ 때문이었어요. 고층에서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제겐 썩 괜찮은 일이었지만 고양이들은 원경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근사한 경치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고층에선 우리 고양이들 눈에 보이는 게 뿌연 허공이나 회색 벽면이 전부라는 게 늘 아쉽더라고요. 더 의미 있는 창밖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왕이면 저층 집을 구하자고 생각한 거죠. 

1층에 살아보니 장점도 단점도 있는데요. 같은 평수여도 프라이버시 문제 등의 이유로 좀더 저렴하고, 내가 내는 층간 소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아요. 팬데믹 이후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만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고요. 특히 이 집은 1층이지만 경사면 위에 지어진 건물 구조상 2-3층 높이에 있다는 점이 괜찮았어요. 그리고 특히나 마음에 든 건 공짜로 갖게 된 창밖의 저 큰 나무였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나무를 소유한다는 건 꽤 호사스러운 일이잖아요.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걸 보는 것도 좋고 아침마다 새들이 앉았다가는 풍경도 좋아요. 무엇보다 찾아오는 새를 구경하는 시루랑 자루를 보는 게 즐겁죠. 사람이 티브이를 보듯 우리 고양이들이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나 공놀이하는 꼬마들, 움직이는 자동차 같은 걸 볼 수 있게 된 게 특히 뿌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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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이 아니라 꼭 하우스메이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하고서 그들에게 필요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는 게 저에겐 무척 중요해요. 공부하는 수험생에게는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고, 관절이 안 좋은 노인에겐 계단이 좋지 않은 것과 똑같아요. 고양이들에게는 높은 곳을 오르내리는 수직 운동이 중요한데 먼저 살던 집에는 캣타워나 에어컨, 냉장고 말고는 딱히 아이들이 올라 움직일 만한 높은 구조물이 없었어요. 그런 게 아쉬워서 이 집에는 높은 선반을 거실 전체에 둘렀어요. 저는 물건이 무척 많은 사람인데 그걸 또 좁고 깊게 수납하는 것보단 얕고 넓게 꺼내놓는 걸 좋아하거든요. 벽면의 선반은 그런 면에서도 필요했어요. 가구를 사서 공간을 채울 때 생기는 애매한 자투리 공간이 싫기도 했고요. 저랑 고양이들이 함께 사용할 걸 상상하며 만든 선반은 책을 꽂고 앞에 물건을 두어도 고양이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폭을 두려고 했어요. 나름대로 계산과 계획이 필요했죠.

 

우선 실용성을 생각한 인테리어였네요.

실용성과 더불어 제 생활 방식을 조금이나마 반영했죠. 그런데 계속 이 집에 살면서 사용하다 보니 아쉬운 점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어요. 선반 아래 칸의 폭이 위 칸보다 넓다면 고양이들이 계단처럼 오르내릴 수 있어서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이들이 좀더 나이가 들면 관절에 부담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음 집에서는 그런 부분을 더 섬세하게 고려해 보려 해요.

 

선반에 물건이 많은데 고양이들이 건드리진 않아요?

안 그래요. 조심조심 다니는 편이거든요. 저쪽에 세워둔 술병들은 여간 무거운 게 아니어서 아이들이 발로 친다고 넘어질만한 물건도 아니고요.

 

이쯤에서 고양이 소개를 들어봐야겠어요.

두 마리 아이들이 있는데 이름은 시루와 자루예요. 시루는 젖소 무늬 고양이로 부산에서 구조된 길고양이였어요. 고등어 무늬인 자루 역시 제 사무실 근처에서 구조된 고양이고요. 시루랑 저랑 꽤 오랜 시간 둘이서 지내다가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 용기 내서 자루를 입양했어요. 집 밖에서 일이 길어지거나 지인들과 술이라도 한잔하게 되면 집에 혼자 있는 시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일찍 귀가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났고요. 자루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제 마음이 훨씬 편해졌어요. 막상 시루는 귀찮을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이름도 꼭 자매 같아요. 어떻게 지은 이름이에요?

당연히 자매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에요(웃음). 이름에 돌림자로 ‘루’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엑셀 프로그램을 열어 루 앞에 기역부터 히읗까지, ㅏ부터 ㅣ까지 자음과 모음을 쭉 쓰고 조합을 시도해봤어요. 그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고른 거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확실히 집에서 에너지를 얻으시는 것 같아요. 역시… ‘집돌이’인가요(웃음)?

성격유형검사 MBTI에서 제 유형이 INFJ인데요. 해석을 보면 INFJ 중에 집순이, 집돌이가 많대요. 바깥보다는 안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부류인 거죠. 근데 또 한편으론 ‘여행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동의해요. 저도 여행을 좋아하고 외부 활동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집처럼 내밀하고 익숙한 공간을 선호하거든요. 친구를 만나더라도 한두 명과 각자의 집에서 보는 게 더 좋고 여럿이 우글우글 모이는 건 질색이에요. INFJ가 자기 것을 잘 안 보여주려는 성향도 있다고 하는데 모순되게도 이렇게 인터뷰하면서 집 안을 공개하고 있네요. 물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감춰두었지만요(웃음). 

 

오늘 초대받은 게 다시 한번 감사해지네요(웃음).

오늘을 위해 대청소하느라 어제 진땀을 좀 뺐어요. 최근에 바빠서 집 안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요. 꽤 열심히 했는데 그다지 티가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척 질서정연한 집이라고 생각했는걸요?

그런가요(웃음).

 

청소는 어쩌면 잘 쉬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소모된 무언가를 다시 채우는 과정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 몸의 충전만이 아니라 마음의 정화도 필요해요.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고양이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에너지를 청소한다.’고요. 저희 집에는 고양이도 둘이나 있으니까 빠르고 효과적인 정화를 기대할 수도 있겠어요(웃음). 아무튼 쉰다는 건 좀더 나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쉬는 걸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단언하긴 어렵지만 저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싶어요. 극도로 심하게 체력을 소모하여 꼼짝도 못 하고 쉬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우리는 쉬면서 먹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지내잖아요. 쉬는 데도 각자의 의지나 취향이 어느 정도는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맞아요. 누군가는 움직이고 사람 만나는 걸 쉰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그렇죠. 다시 MBTI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INFJ 특징이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제가 정말 그렇거든요. 저에게 휴식은 온전히 혼자 보내는 시간이에요. 남들이랑 있을 땐 쉴 틈 없이 페르소나를 만들어내는, 마치 중국의 변검술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간혹 있어요. 저에게 가장 이상적인 휴식은 역시 시루, 자루랑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에요. 밖에 있으면 어쨌든 제자리는 집이니까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집에 있으면 일하고 있더라도 압박이 없어서 마음이 편해요. 왜 밖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할까 생각해 봤는데 이것도 역시 고양이들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없는 사이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서요.

 

든 질문이 시루, 자루로 돌아오네요. 고양이가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나 봐요.

그럼요. 고양이들이 없던 때랑 지금은 확실히 달라요.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온다는 건 세계가 달라지는 일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공간이 사람을 대변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요. 이 집이 어떤 부분에서 나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세요?

어려운 질문이에요. 음… 일단 이 집엔 고양이도 있지만 사람은 저 혼자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저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동네나 집을 고른 것부터 시작해서 공간을 이룬 소재들이라든가…. 원래 이 집에 들어올 땐 벽도 합판을 치고 페인트칠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여서 평범하게 벽지를 발라 작업했어요. 하다못해 이런 사소한 사실도 제 경제 상황이나 취향 같은 부분들을 설명하고 있겠지요. 이 안에 있는 물건도 전부 제가 고르고, 사고, 고쳐가며 쓰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고요. 결국 아주 작은 것까지 모든 게 저를 설명하는 거죠.

 

많은 물건에서 일관된 취향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겠군요.

물건이라는 건 어찌 보면 모두 사람의 역사예요. 이 집엔 제가 산 물건도 많지만 누군가에게 받은 물건도 많아요. 저는 물건을 잘 안 버리는 편이거든요. 이건 매우 어렵게 구한 물건이고, 저건 선물 받은 거고, 또 어떤 건 할아버지의 유품이고…. 모든 물건에는 크고 작은 기억이 묻어 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죠. 망가지거나 쓸 수 없는 것들 조차도요. 그렇게 하나하나 공간 위에 일기를 쓰듯, 기억과 사연들도 함께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 위에 먼지도 쌓이고 다시 청소하고 그러면서 지내는 거죠. 지금 막 생각해 낸 말인데 집은 ‘물건으로 쓴 일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멋진 정의네요.

그렇지만 이 집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에요. 온전히 제 취향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금 필요한 부분에 더 집중했거든요.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집을 공사할 때 상황과 조건에 맞춰 타협한 부분이 많아요. 또 이 집에서 평생 살 건 아니니까 너무 과한 돈을 쓸 수도 없었고요. 당장 고려한 건 갖고 있는 레코드를 공간 낭비 없이 차곡차곡 수납할 수 있어야 했고 고양이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레이어가 있어야 했다는 거…?

 

레코드가 정말 많아요. 시디나 디지털 음원도 있는데 굳이 레코드를 사 모으는 이유는 뭐예요?

제가 어릴 땐 많은 가정에서 레코드로 음악을 들었어요. 저도 중학생 때부터 레코드를 직접 사서 들었고요. 그러다 어느날 음반 가게에 갔는데 찾는 앨범이 시디로만 발매됐다는 거예요. 레코드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적잖이 충격받은 기억이 나네요. 그 당시 등장한 시디는 물리적으로 마모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게 장점이라고 홍보되던 매체였어요. 저도 그때부터 한 15년 정도는 부지런히 시디로 음악을 들었죠. 근데 그렇게 모은 시디들은 지금 변변한 플레이어나 트레이가 없어서 듣지도 못하고, 중고 시장에 내놓아도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어서 팔리지도 않아요. 사실 요즘 누가 시디를 사겠어요. 한편 레코드는 전성기 때랑은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어요. 지금도 살아 있는 매체라는 게 재미있어요. 영구적이라고 홍보하던 시디에 비해 레코드가 수명이 더 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것들을 인지하면서 시디라는 매체에 매력을 잃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레코드 아트워크를 디자인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시디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죠. 단순히 아트워크 사이즈가 시디보다 커서가 아니라, 레코드를 만들고 감상하는 과정에 그 이상의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레코드는 시디에 비해 좀 수고스러운 면이 있잖아요. 듣다 뒤집어줘야 한다는 점에서도요.

그래서 좀더 애정이 가요. 저는 시디 한 장을 꽉 채워 담은 음악은 온전히 소화하기가 좀 버거워요. 시디 시대에 발매된 팝이나 록은 앨범 하나에 열둘에서 열다섯 곡 정도가 담기는 게 통상적인데요. 시디를 감상하다 보면 5-6번 트랙부터는 집중력이 확 떨어지더라고요. 한 번에 긴 호흡으로 음악에 집중하는 건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반면, 12인치 LP의 레코드를 예로 들면 한 면에 네다섯 곡이 들어가거든요. 저에게는 그 정도의 공간감과 시간감이 훨씬 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발매되는 버전마다 조금씩 다른 소리를 담고 있어서 보물찾기하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재미도 있어요.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말라고들 하던데 음반 아트워크 디자인을 하는 게 힘들진 않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거라도 업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순 없어요. 다만 저는 음반의 아트워크 만드는 것을 그다지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른 디자인 작업과 달리 아트워크 작업은 여러 사안을 검토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과정이 아니라 순간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속도감 있게 털어 넣는 경우가 많거든요. 뮤지션의 의도를 반영한다기보다는 동일한 이야기를 뮤지션과 제가 각자의 화법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일보다는 취향의 영역에 있는 거죠.

다시 집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거실은 일반 가정집이랑 좀 다른 구성인 것 같아요.

그렇죠, 거실 중앙에 큰 테이블을 두는 집은 잘 없겠죠(웃음)? 아파트 거실의 레이아웃이라고 하면 한쪽 벽에는 소파, 맞은편에는 티브이가 놓이는 게 일반적일 거예요. 저는 그 방식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어요. 사실 저도 소파를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공간 활용을 위해서 소파는 더 큰 집에 살 때 들이는 걸로 하고 이 집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해보자 싶었죠. 일반적인 거실 레이아웃을 만들게 되면 생활할 때 눈높이가 고정돼요. 벽 쪽에서는 소파에 앉은 상태의 낮은 눈높이로만, 거실의 중앙에서는 일어선 상태의 높은 눈높이로만 공간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그런데 30평 미만의 공간에서 그런 눈높이로 바라보는 공간이 저에겐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더라고요. 또, 아파트는 천장이 낮기 때문에 펜던트 조명을 달 수가 없어서 특히 거실에서는 조명을 선택하는 데 여지가 별로 없어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거실 중앙에 큰 테이블을 놓았더니 우려한 점들을 전부 해결할 수 있었어요. 자주는 아니지만 오늘처럼 손님이 와서 대화하거나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을 때도 유용하고요.

 

큰 테이블 덕에 감각적인 거실이 된 것 같아요. 다른 방들도 소개해 주실래요?

이 집에 방은 모두 세 개 있어요. 옷방과 침실, 그리고 제2의 거실처럼 쓰는 방이죠. 제2의 거실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와 음반을 들여놨어요. 거실은 좀더 개방적이고 밝은 느낌, 제2의 거실은 좀더 아늑한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아늑함이 넘쳐서 레코드들이 거실로도 나오게 되었네요(웃음). 그리고 거실 옆엔 주방이 있는데요. 이 집에서 가장 아쉬운 걸 하나 꼽으라면 역시 주방이에요. 집의 규모에 비해 주방이 좀 작고 좁거든요. 조리할 때 불편하고 동선도 답답해요.

 

주방에서 좀 특이한 걸 봤어요. 고양이 밥그릇이 테이블 위에 있더라고요.

방엔 식탁 대신 바 테이블을 두었는데요. 거길 고양이들이 밥 먹는 공간으로 쓰고 있어요. 같이 먹는단 의미보다는 바닥은 먼지가 쌓이니까 밥그릇을 높은 곳에 두고 싶었거든요. 근데 주방이 좁아서 조리할 때마다 아이들 밥그릇에 기름이나 양념이 튈까 봐 멀찍이 옮겨야 해요. 불편하고 번거롭죠. 다음 집에선 꼭 넓은 주방을 두어 개선하고 싶어요.

 

SNS에 요리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군침을 삼켜요(웃음). 요리도 잘하시는 것 같던데요.

절대 아니에요. 정확히는 요리보다 먹는 걸 좋아하는 거에 가까워요. 사 먹기도 많이 사 먹고, 배달도 많이 하는데 SNS에는 제가 하는 요리들만 올리다 보니 되게 잘해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웃음). 먹는 걸 좋아하니까 늘 해 먹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무튼 만들 수 있는 것의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건 꽤 뿌듯한 일이긴 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나를 위해 아주 잘 차려 먹거나 대충 먹거나 두 부류인 것 같은데….

저는 잘 ‘먹는’ 편이에요(웃음). 사 먹는 것도 만들어 먹는 것도 그렇죠. 좋은 재료에 합리적인 판단과 훌륭한 센스, 숙달된 경험을 더해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꽤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에요. 요리뿐만 아니라 디자인 작업, 그 외 모든 일에도 해당되는 얘기고요.

 

맛있는 음식에 마실 걸 빼놓을 순 없죠. 혼술도 좋아하시죠?

옛날엔 혼자 바에 가서 마시는 걸 좋아했는데 요즘엔 주로 집에서 마셔요. 제가 즐겨 다닐 때만 해도 바가 많지 않았고 유행하는 시절도 아니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바가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인기를 끌면서 운이 나쁘면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생기더라고요. 게다가 술값도 점점 비싸져서 일상적으로 들르기엔 꽤 부담스러워졌어요. 집에서는 ‘자, 이제부터 술 마시자!’라는 느낌보다는 술을 한 잔 따라 놓고 청소를 한다거나 책을 본다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술은 보통 면세점에서 사 오곤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통 못 가면서 이젠 술들이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네요.

2018년에 출간한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청소와 집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 같아서요.

앞서 쉼을 ‘좀더 나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행동’이라고 했는데 저에겐 그 대표적인 행동이 청소나 음악 감상이에요.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은 음악 에세이인데 책 서문에서도 밝혔듯 본문에 수록된 모든 음반을 청소하면서 들은 건 아니었어요. 눈길 가는 대로 꺼낸 음반을 들으면서 떠오른 단상들을 정리한 책이죠. 그러니 청소할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을 제게 묻는다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럼 청소법을 물어봐야겠네요.

이게 더 어려운데요(웃음). 봄이 왔으니 일단은 문을 열고 싶어요. 앞뒤로 활짝 열어서 바람과 공기가 한 번 순환하고 통과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거예요.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 수위의 대청소를 하기 좋은 계절이 봄인 것 같아요. 저에게 최고 수위 청소는 집 바깥 공간과 맞닿은 베란다 창틀까지 꼼꼼하게 닦는 건데요. 이런 청소를 마치고 나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집은 사는 사람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공간일 거예요. 이 집이 어떤 모습으로 낡아가길 원하나요?

이 집은… 제가 노년을 보낼 집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좋은 상태로 만들고자 노력하는데 저는 그런 것 중 하나가 집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노력이 이사라고 생각하고요.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올 땐 4-5년 정도 살게 될 거라고 내다봤어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계획대로라면 어느덧 1-2년밖에 남지 않은 셈이네요. 입주 전에 집을 고치고 수리할 때 계획한 예산도 4-5년 살 것을 생각하고 정한 금액이었어요. 만일 10년이나 20년 정도 살 집을 생각한다면 돈 쓰는 거나 인테리어를 고려하는 관점에도 큰 차이가 있을 거예요. 앞으로 어떤 집과 연을 맺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와 고양이들에게 걸맞은 환경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데는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저는 몇 번의 이사를 더 하게 될까요? 제가 마지막으로 살게 될 집의 모습은 좀 궁금하네요.

 

마지막 집이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항상 생각해요. 지금도 정착할 집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한국에서는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엔 아파트를 포기하기 어려운 여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은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제 마지막 집도 아파트일지, 단독 주택일지, 혹은 또 다른 형태일지 궁금해요. 동네는 어디일지도 자주 상상하고요. 먼 훗날 일이라 아직은 상상뿐이지만요(웃음).

 

또 다른 상상을 해볼까요? 앞으로 한 달간 방학을 드릴게요.어떻게 쉬면서 보내고 싶어요?

할 거야 많죠. 일은 안 해도 되는 건가요?

 

네(단호).

휴식이 달콤한 건 일이 있기 때문이어서 일하지 않는다고 하니 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도 아무 걱정 없이 일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역시 가장 하고 싶은 건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경제적으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순수한 취미의 영역, 예를 들면 프라모델 만들기 같은 거예요. 어릴 때는 꽤 본격적으로 만들었는데 2006년 이후로는 한 작품도 만들질 못했네요. 얼마 전에 계산해 본 적이 있는데 지금껏 쌓아둔 프라모델을 한 달에 한 개씩 만들면서 앞으로 25년 이상은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아무래도 방학이 주어진다면 프라모델상자들을 하나하나 들춰보고 싶어요.

 

프라모델들을 안전히 보관하기 위해서라도 넓은 집이 필요하겠는걸요.

그럴지도요!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에 이런 문장이 있다. “글에 등장한 음반 중 청소를 하면서 들은 건 사실 별로 없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청소할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은 뭐지? 추천은 어렵다는 이재민디자이너에게 그래도 권해 달라고 졸라 보았다. 이럴 때 집요하지 않으면 언제 또 집요해 본담!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이재민 | 워크룸프레스

Kenny Dorham Septet With Cannonball Adderley
‘It Might As Well Be Spring’

여러 뮤지션이 연주한 곡이지만, 그에서도 산들거리는 봄바람과 도발적인 꽃샘추위의 느낌이 공존하는 이 버전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大滝詠一
‘君は天然色(그대는 천연색)’

청소를 마친 뒤 쾌적한 거실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기분을 떠올리자. 그야말로 총천연색.

João Gilberto
‘’S Wonderful’

가사 노동은 끝이 없고 공간도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도 조금씩 마모되며 서로 닮아간다. 모든 나이들어가는 것들을 위한 아름다운 송가.

Niteflyte
‘If You Want It’

단순하고 우호적이며 반복적인 선율은 노동에 힘을 더해준다. 기분 좋은 노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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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