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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문장을 옮겨주세요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김애란, <영원한 화자> 중에서” 내 문장 노트의 한 구절을 보여줬으니 당신의 노트도 보여줄래요?
서보 머그더, 《도어》 중에서
화자인 ‘작가’와 그녀의 집안일을 도맡은 ‘에메렌츠’라는 여성의 관계가 중심 서사인 이 책을 지난겨울 동안 품고 있었다. 많은 문장이 나를 전율하게 했지만 무엇보다 헝가리의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에 밤새 내리는 눈을 쓸고 있는 에메렌츠의 모습이 뇌리에 새겨졌다. 에메렌츠는 내 외할머니를 닮은 구석이 있다. 고집스레 평생을 세상과 싸우며 혼자 살아가는 여성.
그림에 재능이 있고 미적 감각도 남달랐던 할머니의 운명은 가혹했다. 전란으로 젊은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 힘으로 어머니와 딸을 부양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돌볼 틈이 있었겠는가. 인상이 센 편이고 괴팍하며 친구도 친척도 거의 없었지만, 아마도 그래서였을까? 하나뿐인 손녀가 외로울 때 돌봐 준 사람은 늘 할머니였다. 내가 독박육아로 고립되어 지쳐 떨어져 있다는 걸 알자, 할머니는 무작정 무랑 배추, 생닭처럼 무거운 것들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어린 증손녀를 들여다보고 싶었을 만도 하건만 할머닌 그저 부엌에서 백숙 같은 걸 끓여 놓고는 별말도 없이 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내게 생을 통틀어 그 어떤 따뜻한 말이나 격려보다도 가장 확실한 ‘사랑받음’의 증거로 남아 있다.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가끔 뭐라도 이룬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잊지는 말아야겠다. 결국 눈을 ‘쓸기’ 위해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순간 나의 ‘쓰기’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을 주려고 한다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는 것을.
여름을 좋아하고 여름에 태어난 사람. 때때로 시를 쓰는 사람. 매일 개와 산책하는 사람. 시집으로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가, 산문집으로 《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지하철 독서 여행자》 등이 있다.
최유수, 《사랑의 목격》 중에서
네가 죽었다. 지금 너는 입관을 하고 있다. 누워 있는 너의 위에 흰 천이 가려진다. 빈소에는 어색한 너의 증명사진과 향냄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어줄 것 같은 네가 유리 벽 너머 차가운 관 속에 누워 있다니. 평소 하지도 않는 화장을 곱게 하고 꽃다발 사이에 누워 있는 너는 참 비현실적이다. 저기에 네가 있지만 이 시공간에 너는 없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비음이 많은 목소리와 눈썹 스크래치, 처진 눈과 웃는 얼굴. 추웠을까? 추운 겨울이 가고 이른 봄이 오는 것을 봤다면 네가 죽지 않았을까? 슬프고 쓸모없는 가정이다.
사람의 존재는 어쩌면 기억으로 증명된다. 존재가 사라지면 각자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기억들만 연기처럼 허공에 남는 걸까. 세상에 네가 존재했었지만 이제 앞으로는 너를 볼 수 없다. 그걸 아는데 그걸 아는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나는 너를 아는 사람들 속에 있고 싶었다. 네가 기억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같이 먹은 음식, 투덜대고 우울했던 어떤 날, 자랑하고 행복했던 지난밤 같은 기억들을 품고 있었다. 나는 답장하지 못한 문자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다. 허공에 날리는 너의 존재를 잡아둘 수 있는 건 우리 각자에게 기록된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너의 세계가 완결되었음을 느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도 너의 다정한 행동도, 너에게 맺혀 있는 나라는 작은 기억도 이제 더 연재되는 일은 없구나.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너를 기억할 텐데 괜찮겠어? 왠지 괜찮겠다고 말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떤 이는 죽어 있어도 기억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아 있어도 죽은 듯이 지낸다. 너는 존재했었다. 나는 그런 너를 영원히 기억해 주면 돼. 당신이 저버린 세상을 품고 내가 살아갈게. 당신을 짐작하지 않고 다만 그 웃는 모습만 기억하며 살아갈게. 누군가를 기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더 좋은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사랑을, 사랑을 사랑할 수 있다면.
메모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차와 커피,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깨어 있는 사람. 앨범 [수잔], [7102],
[로맨스] 등을 발표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베르메르> 전문
봄에는 이소라의 [눈썹달] 앨범을 자주 듣는다. “하루 종일 그대 생각뿐입니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얼마 전엔 소취小取해서 동료들에게 내가 그만둘 때까진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로 가끔 출퇴근이 없는 삶에 관해 생각한다. 퇴직과 인생 2막에 대해 고민하는 동료를 볼 때면 ‘탈서울’을 떠올리고, 그러면 서울 떠나 속초나 제주에 가 사는 친구들이 그리워, 안부를 전한다. 봄은 이렇다.
이런 봄은 매해 어김없이 돌아오는데 이번 봄엔 생동하는 만물―무엇보다 새싹과 꽃망울―에 경탄하면서도 인류와 종말에 관해 생각하곤 한다. 전염성이 강한 질병은 인류의 문명이 자연 앞에선 하찮은 것임을 혹은 인간이 본디 자연의 설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 염려와 성찰 속에서 홀로, 한밤에, 음악을 듣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왜일까?
베르메르의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1658)은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노동이, 삶이 빛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다섯 행짜리 짧은 시 <베르메르>를 통해 예술에서 얻는 감동이 강력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먼 훗날 언젠가 끝내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 마주하는 베르메르의 그림, 쉼보르스카의 시, 이소라의 노래는 그에게 어떤 삶의 근거를 부여할까. 눈썹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은 아닐까. 봄에는 누구나 감격한다. 매우 희망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글을 쓴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이, 산문집으로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아무튼, 스웨터》 등이 있다.
토베 얀손, 《여름의 책》 중에서
나와 17년째 함께 살고 있는 늙은 개는 아프다. 늙은 개의 세상은 많이 고요해졌고 흐릿해졌으며, 앞으로 점점 더 까매지거나 하얘질 것이다. 반년 전쯤부터는 간 질환으로 인한 뇌신경 손상과 인지기능장애, 즉 치매 증상이 시작됐다. 매일의 기분을 묻고, 사랑한다고 전하며, 서로의 등을 맞대고 낮잠을 자던 우리의 일상이 멈췄다. 늙은 개에게선 이불을 들춰달라던 표정도 미끄러져 나갔다. 아마 나의 목소리도, 형체도, 온기도, 기억도 모두 사라졌을지 모른다. 타이밍이 어긋나면 항상 똥 범벅인 발로 자기 공간의 테두리를 따라 하염없이 돌고 있기 때문에, 매일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도 늙은 개를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과가 출근길을 나서는 그날의 내 기분을 결정짓는다. 나의 마지막 개가 될 이 늙은 개는, 망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중이다.
몸이 더 이상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는 기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균형이 틀어진 몸으로 느리게 걷다가 딸에게 잔소리를 듣는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온 늙은 엄마와 늙은 개는 지금의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노년과 죽음에 대해 알아가며 아픈 존재를 돌보는 게 처음인 나는 그렇지 못하다. 지친 몸과 마음은 결국 감정의 폭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미워하는 감정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게 만든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자책을 하거나 남 탓을 해야만 겨우 하루가 끝이 난다.
늙은 엄마와 함께 늙은 개를 돌보는 사이, 많은 것들이 미끄러져 나갔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중얼거리며 좋아하던 것들은 곧 뭉툭하게 변하거나,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 대신 채워진 것이 용기와 확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계속해서 나의 세상을 넓혀주고 있는 그들 덕분에, 삶에서 취향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하고 싶은 것이 아직 많은데 이제 할머니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어버렸다던 엄마는, 뒷산에 핀 봄꽃과 큰방의 햇살 한가운데서 자고 있는 늙은 개의 사진을 보내왔다. 세월이 빠르다며, 아침 햇살이 너무 좋다며. 나는 곧바로 메시지를 캡처하고 사진을 저장한다. 우리는 미끄러져 나간 각자의 자리를 이렇게 서로 다시 채워주고 있다.
민음사 미술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8년 차 북디자이너. 순간을 수집하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처럼, 단어와 이미지를 수집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익숙한 폭력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동물권 운동 또한 꾸준하고 건강하게 지속하고 싶다. 신을 믿으며, 비건의 삶을 지향한다.
권여선, 《오늘 뭐 먹지?》 중에서
어릴 적부터 나는 비릿하고 물컹한 굴을 싫어했다. 종로 뒷골목의 어느 굴보쌈 식당에 처음 갔을 때도 그랬다. ‘굴은 맛이 구리다!’는 나의 푸념에 선배들이 진한 소맥과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며 나를 연신 설득했다. 스무 살 치기 어린 마음에 속는 셈 치고 맛보았는데, 이게 웬걸. 굴보쌈을 먹으며 소주에 더 가까운 소맥을 마시자 바다 내음 가득한 굴이 소맥이라는 새로운 바다를 만나 비릿함을 벗어 던지고 향긋하게 입안을 감쌌다. 심지어 고기의 온기를 굴의 냉기가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면서 소맥과 함께 목구멍을 부드럽게 씻어주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꿀맛 같은 굴 맛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굴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었다. 차근차근 글을 배우듯, 굴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굴전에 막걸리를 먹고, 석화에 청양고추와 초장을 곁들여 소주 한 잔을 넘기고, 생굴에 위스키를 콸콸 부어 호로록 함께 마셨다. 어떻게 먹어도 굴은 맛있었다. 술과 함께라면 언제나. 굴은 술을 사랑하게 했고 술은 더 많은 안주를 사랑하게 했다. 특유의 향 때문에 싫어하던 고수를 마라탕에 넣고 연태 고량주를 곁들여 먹으니 녀석은 어느새 술의 풍미를 올려주는 고급스러운 잎사귀로 변했다. 징그럽기만 하던 매운 닭발은 탄산 가득한 맥주 덕분에 매콤 쫄깃한 별미가 되었다. 메추리구이에서 문어 이빨까지, 평소라면 알지 못하고 먹지 않았을 안주를 이제는 직접 찾아다닌다.
권여선 소설가의 문장처럼 어떤 음식이든 안주라는 핑계가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취기는 종종 용기가 되니까.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술에는 분명 존재한다. 시집은 어려운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내가 시집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팟캐스트 방송 <시시콜콜 시시알콜>을 5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술 때문인 것이다. 술과 함께라면 못 읽을 것도 없다. 다만, 지나친 술은 조심할 것! 맛있는 안주고 뭐고 열심히 먹은 것만 못하게 토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까워라….
낮에는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 ‘이승용’으로, 밤에는 시와 술을 읽고 마시는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의 진행자 ‘능청’으로 살고 있다. 동명의 책 《시시콜콜 시詩알콜: 취한 말들은 시가 된다》
를 썼다.
에디터 이주연
글 김사월, 김현, 박시하, 유진아, 이승용 일러스트 오하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