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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Loves You
“당신은 제가 아는
가장 귀엽고 건강한 할머니예요.”
어두운 커튼을 두드리는 환한 기색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8시 2분. 그다지 늦은 시각도 아닌데 햇살이 지나치게 찬란하다. 눈곱을 떼고 매무새만 대강 정돈한 뒤 바깥으로 나왔다. 그건 창문을 노크하는 햇살에 대한 예의였다. 자전거에 올라 힘껏 페달을 밟으니 운동을 시작한 허벅지가 바짝 조여온다. 10여 분쯤 달린 것 같은데 금세 바닷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을 맞으며 ‘이거 약간 꿈 같은데?’ 중얼거린다. 이상할 정도로 부신 눈을 간신히 가리며 고개를 돌리니 초록빛 바다에 반사된 햇살이 문자 그대로 ‘부서진다’. 바스러지는 햇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난생처음 느끼며 자전거를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자그마한 열쇠를 꽂았다. ‘딸깍’, 소리를 신호 삼아 고개를 드니 저 멀리 부지런히 움직이는 파라솔이 하나 보인다. 뭐 하는 델까? 궁금하다.
일본어로 쓰인 간판을 더듬더듬 읽으며 느리게 의미를 짐작한다. 쥬-스ジュ-ス. 주스를 파는구나.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춘다. 왈츠처럼 느릿하고 우아하던 춤은 거세진 바닷바람에 탭댄스처럼 금방 요란스러워진다. 파라솔 아래엔 갖은 과일이 언덕처럼 높다랗게 쌓여 있다. 커다란 북극곰도 너끈히 가려낼 만큼 높고 풍성한 과일 더미다.
달큰한 향기에 넋을 놓은 채 성큼 다가가니, 과일 언덕 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짝 고갤 들이밀자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믹서가 제일 먼저 보인다. 그리고 잔꽃이 잔뜩 수놓인 앞치마를 입은 할머니.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할머니일 줄은 몰라 움찔했는데,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느리게 웃어 보인다. 벌어진 입안에 씹다 만 과일 조각이 있는 걸 보니 아침 식사 중인 걸까. 어쩐지 덩달아 웃게 된 나는 달콤한 주스가 마시고 싶어 ‘한 잔 주세요’라는 의미로 집게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게손가락으로 과일 언덕을 가리킨다. 과일을 하나 고르라는 뜻인 것 같다. 곰곰 고민하기 시작한다. 과일 언덕 중 내가 알 것 같은 과일은 다섯 개 남짓. 망고, 바나나, 키위, 파인애플, 수박…. 전혀 모르는 과일이 좋을까, 이미 아는 맛이 좋을까 몇 분쯤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재촉하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천년만년 고민하면 천년만년 기다려줄 것 같아 장난스레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그보다 침이 먼저 흐를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과일을 먹어보기로 했다.모양은 꼭 자두 같은데 빨강, 분홍, 주황, 노랑, 연두, 보라색이 다 들어 있는 무지개 같은 과일이다. 겉모습과 달리 무진장 맛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거요!” 했다. 일본어로 말할걸, 속으로 생각하는데 할머니가 묻는다. “무지개 과일이요?” 어, 한국말을 하시네?
할머니는 ‘무지개 과일’을 앞치마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뭉툭한 칼을 천천히 물에 씻는다. 잔잔한 주름이 있는 손이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손이다. 주름졌지만 지나치게 고와서, 어쩐지 내 손이 부끄러워진다. 핸드크림을 챙겨 왔던가 생각하다가 퍼뜩 깨닫는다. 눈 뜨자마자 나오는 바람에 지갑도 안 들고나왔다는 사실을, 과일 주스가 얼마든 땡전 한 푼 없는 나는 사 먹을 수 없단 사실을. 머릿속에선 분주하게 ‘외상’이란 일본어를 찾는다. 영어로는 뭐였더라. 난감하고, 아찔하다.
어쩌지 저쩌지 하는 사이 할머니는 느릿한 손길로 과일을 숭덩숭덩 썰어 믹서에 담는다.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믹서의 네 개 버튼 중 어떤 걸 누를지 궁금해 쳐다보는데, 할머니는 버튼 누르기에 앞서 두건을 다시 묶는 데 여념이 없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척이나 온화한 표정이다.
나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답이 없는 고민을 하는 것보다 할머니의 두건을 보는 게 훨씬 근사한 일처럼 느껴진다. 머리에 묶인 두건은 앞치마와 똑같은 모양의 잔꽃이 잔뜩 수놓여 있다. 그 틈을 비집고 하나둘 삐져나온 흰머리가 귀여워서 몰래 웃는다. 아직 풀리지 않은 안면 근육이 꿈틀, 다시 한번 꿈틀, 한다.
할머니는 믹서의 두 번째 버튼을 힘차게 눌렀고, 나는 할머니 집게손가락에 노란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걸 발견한다. 내 손에 끼워진 것과 몹시도 닮은 모양이다. 무지개 과일은 믹서 안에서 조각나며 흩어진다. 온갖 색이 합쳐지자 검정에 가까운 색깔이 되었고, 나는 이상한 맛일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돈이 없으니 마실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맛부터 걱정하고 있다니….
할머니는 귀여운 컵을 꺼내더니 믹서를 기울여 주스를 따른다. 색색의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진 컵이고 아무리 봐도 일회용은 아니다. 저걸 그냥 주는 건가? 할머니는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워질 즈음, 엄청나게 큰 통 속으로 머리를 폭 들이민다. 그건, 거대한 빨대의 집이었다. 그러니까 빨대가 가득 담긴 ‘빨대통’이었다. 그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빨대가 담겨 있었다.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보라, 분홍, 주황, 게다가 모양은 또 어찌나 다양한지 나는 할머니를 ‘빨대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보디랭귀지를 섞어 ‘외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 헤브 어 노 머니, 와따시와 사이후오….”
“자네는 노란 빨대가 어울려. 한 바퀴 굴려진 빨대를 줄게. 주스를 다 마시면 사탕처럼 씹어 먹으면 돼요. 사탕수수라 달콤할 거야.”
“에?”
“한국인이지?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알아. 내일 들러, 모레도 괜찮고. 나중에 다시 오키나와에 오거든 그때 가져다줘도 돼. 언제 오든 백 엔만 가지고 와요. 단돈 천 원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생과일주스를 먹는 거, 기분 좋은 일이잖아. 색깔은 이래도 무지개 과일 맛있어.”
바닷가 주변에 숙소를 잡은 건,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자전거를 타고 마음껏 달리며 바닷바람을 원 없이 쐬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튿날이 밝자 나는 바다보다, 자전거보다 할머니의 파라솔이 보고 싶었다. 잔꽃 무늬의 두건과 같은 모양의 앞치마, 바닷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던 과일의 언덕, 그리고 시원한 과일 주스가 그리웠다. 무엇보다 빨대 할머니에게 갚아야 할 돈이 있었다.
어제 할머니가 건네준 과일 주스는 팥죽 아이스크림처럼 시커먼 색이었다. 검정이 된 무지개 과일은 좀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달콤했고, 오늘은 꼭 그 과일의 이름을 묻고 싶었다. 오키나와 과일일까, 열대 과일일까, 한국에서 구할 순 없는 걸까. 나는 할머니에게 갚을 백 엔과 오늘 마실 주스 값, 총 이백 엔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그러나 알록달록 바람결에 흔들리는 파라솔을 어제처럼 쉽게 만나지 못했다.
‘빨대 할머니…, 빨대 할머니….’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필연적으로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오늘은 지갑도 핸드폰도 챙겨 왔는데 할머니가 없었다. 주머니에 넣은 이백 엔이 카랑카랑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페달을 밟았다. 마음이 급해질 때마다 경쾌하게 짤랑거리는 소리가 더욱 빠르게 들려왔다. 햇살은 어느덧 머리 꼭대기까지 떠올랐고, 초록빛 바다는 주황색이 되어 얼굴 대신 엉덩이 즈음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나는 땀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할머니는 아침에만 나오는지도 몰랐고, 어쩌면 난 엉뚱한 지점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 허벅지에 힘을 풀고 발바닥으로 땅을 짚어 자전거 속도를 줄였다. 빚을 지고 말았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졌고, 다시 주스를 마실 수 없단 사실에 마음이 크게 상했다. 어제처럼 자전거를 세워두고 작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뒤 터덜터덜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모래알을 발로 툭툭 차며 심술 난 꼬맹이처럼 구는데, 귓가에 오키나와의 꼬마들 목소리가 재잘재잘 들려온다.
“코레와 난노 쿠다모노데스카(이건 무슨 과일이에요)?”
“코레와(이거는)? 아레와(저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드니 빨대 할머니가 파라솔을 정돈하며 해사하게 웃고 있다.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서 있는 할머니는 물을 머금은 꽃처럼 밝다. 게다가 돌멩이처럼 단단해 보인다. 빨대 할머니는 내가 아는 가장 건강하고 귀여운 할머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천천히 다가가자 할머니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웃는다.
나는 할머니를 찾기 위해 헤매지 않은 사람처럼, 또다시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곤 집게손가락을 펼쳐 샛노랗고 동그란 과일을 가리킨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제처럼 과일을 숭덩숭덩 잘라 믹서에 담는다. 어제의 백 엔과 오늘의 백 엔을 건네며, 나는 할머니가 꼭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 감각에 휩싸인다. 나랑 똑같은 반지, 눈 아래 희미한 흉터, 입술 옆 작은 점….
2060년 5월, 초록빛 바닷가에 알록달록한 파라솔을 세우고 나는 과일의 언덕 뒤에 숨어 숭덩숭덩 과일을 썬다. 오래돼 보이지만 고풍스러운 믹서에 과일 조각을 넣고 두 번째 버튼을 꾹 누른다. 노란 반지를 검지에 끼고 잔꽃이 수놓인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다.
나는 주스 가게에 손님이 오면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가장 어울리는 빨대를 고른다. 커다란 빨대통에 머리를 넣고 모양과 색깔을 잘 조합해서 시간을 들여 하나를 뽑는다. 시럽도, 설탕도 없는 자그마한 과일 가게, 이곳의 이름은 ‘코너 후르츠 주스 숍’. 꿈과 사랑만 가득한 빨대 할머니의 행복한 터전이다. 저 멀리 손님이 걸어온다. 한국인인 게 분명한 여자애다. 저 애는 아마 무지개 과일을 고를 테지. 나는 천천히 칼을 닦으며 두건을 단단히 고쳐 묶고 오키나와 빨대 할머니의 일과를 시작한다.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