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Loves A Slow Train

작은 마음에 담은 천천한 풍경들

작가 오지은

오지은은 여행 ‘준비’ 마니아다. 심혈을 기울여 여행 블로그를 살피고 옷과 가방을 골라 담지만, 사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혼자 컴퓨터로 철도 홈페이지를 들여다볼 때다. 오지은의 여행은 무조건 기차다. 무작정 보통열차다. 아슬아슬 열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할 게 뻔해서 트렁크도 배낭도 아닌 크로스백을 선택하는 그녀의 여행에 무임승차를 시도했다. 두근두근두근….

오늘은 뮤지션이 아닌 작가이자 여행가 오지은으로 만났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작가로서의 오지은은 세 번째 책을 내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에요. 얼마 전부터 집에서 ‘흑당이’라는 개를 키우게 됐는데, 요즘은 흑당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일과의 전부죠. 당분간은 이렇게 여유 부리며 지내려고요.

작년에 세 번째 책이 나왔어요. 책 속에 담긴 여행 이야기는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워서 꼭 생활의 연장 같았어요.

사람들은 관광이나 휴식, 출장 등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잖아요. 그런데 저는 여행에 목표랄 게 없어요. 한국에서의 생활을 장소만 바꿔 외국에서 하는 거죠. 늦게 일어나고, 동네 밥집에 가서 늦은 식사를 하고, 좋은 데 갈까 말까 고민하다 그 앞에 있는 카페까지만 갔다 오는 심심한 일과예요. 여행으로 교토는 참 여러 번 다녀왔는데, 히가시야마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은각사銀閣寺(지쇼지, 긴카쿠지)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 앞에 있는 카페나 밥집만 가도 오늘 할 건 다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 그래도 은각사 앞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유명해진 산책로, 철학의 길은 가봤어요. 좋게 말하면 다른 사람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저만의 호흡으로 편하게하는 여행이고, 나쁘게 보면 돈값 못하는 거죠(웃음). 심지가 굳은 저와 가성비를 따지는 얄팍한 제가 왔다 갔다 하는 이상한 여행이에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 살기도 했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됐나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밴드 생활을 했는데 재능이 뛰어나다고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곡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운 좋게 밴드를 시작한 어린이에 불과했죠. 그런데 이십 대가 되니까 어리다는 게 더는 강점이 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걸 인지할 즈음 학점이 좋지 않아서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어요. 그때 삿포로에 어학연수를 가기로 마음먹었죠. 겨울 풍경을 좋아해서 삿포로에서 겨울을 나고 싶었거든요. 음악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으로 떠나서는 삿포로에서 1년, 도쿄 인근에서 1년을 살았어요. 도쿄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인근을 택한 기억이 나요.

일본 생활은 어땠나요? 여행자와 거주자의 마음가짐은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처음 해보는 느긋한 생활이었어요.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삿포로에서 장을 보고 동네를 거닐면서, 이런 표현은 좀 간지럽지만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일본에 가기 전까지는 기운이 뻗치기만 하는 이십 대였거든요. 마음은 편안했는데, 경제적으로는 무척 힘든 시기이기도 했어요. 타지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이자를 갚아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거든요.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빵집이나 꽃집 같은 예쁜 분위기의 가게를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그런 곳은 일본어가 유창해야 해서 외국인에게는 면접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아요. 제게 면접 연락을 준 곳은 일본식 주먹밥을 만드는 오니기리 가게뿐이었죠.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면접을 봤어요.

오니기리 가게가 더 낭만적인데요!

아니요, 아니에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주먹밥을 만드는 건 전문가의 업무고 아르바이트생은 보통 잡무를 도맡아 해요. 포장이나 판매는 할 만했지만, 20킬로그램이나 되는 감자 포대를 옮기는 건 정말이지 힘들었어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하니까 또 되더라고요(웃음). 몸을 혹사하는 와중에 일터에서 따돌림까지 당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요. 자기 사람에겐 엄격한 사장님이 유학생이라고 저를 좀 너그럽게 대했더니 매니저가 괜한 심술을 부렸거든요. 구분할 수 없는 걸레와 행주를 갖다 놓고는 행주를 찾아오라고 하는 식이었어요. 제대로 못 하면 “너 때문에 퇴근도 못 한다.”며 구박하곤 했죠. 눈보라를 맞으며 울면서 집에 간 적도 많아요. 견디고 견디다 그만둔다고 하니 매니저가 울더라고요. 그녀도 사람을 미워하는 데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예요. 

오니기리 하니까 오지은 정식이란 부제가 붙은 ‘몸 튼튼 마음 튼튼 정식’이 생각나네요. 맛있었는데.

아! 오랜만이네요. 합정동에 위치한 일본식 디저트 가게에서 팔던 식사 메뉴였죠. 일본식 오기니리와 돼지고기 미소국인 돈지루가 세트였고요. 제 이름이 붙어서 재밌었어요. 이십 대초반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곳에서 처음 시작한 것들이 지금껏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는 식단이 그래요. 요리를 하게 되면 가장 먼저 카레를 생각한다든지, 한국에서 자반 형태로 구워 먹는 연어를 찾는다든지, 인스턴트 미소시루를 항상 갖춰두는 게 그렇죠.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게 일본이어서 그런지 일본 가정식이 저에겐 일반적인 식단이에요. 일본의 전통 숙박시설인 료칸에서 일본식 아침상을 받으면 일본인도 아닌데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몰라요. 

여행이란 테마로 세 권의 책을 출간했어요. 일본과 유럽의 다양한 도시를 여행했지만, 결국엔 기차로 모이더군요.

기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거다 싶은 대답이 없어요. 걷히지 않는, 어슴푸레한 안개 같아서 말로 설명이 잘 안 돼요. 제가 좋아하는 건 고속열차보다도 시속 40~50킬로미터로 달리는 시골 기차예요. 하루에 몇 대가 채 다니지 않는 느린 열차죠. 특급이나 급행열차와는 다른 시골의 보통열차는 여행객보다 통학하는 학생들, 병원에 가는 노인 등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거든요. 고즈넉한 공기와 햇살과 현지인들의 권태로운 기운이 녹아 있는데, 저는 그걸 느끼는 게 참 좋아요. 창밖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동네 풍경을 보고 있으면 햇살 받는 남의 집 빨래 같은 게 보이는데, 그런 장면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요.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제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다들 알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제가 말하는 어슴푸레함이에요. 잡을 순 없는데 ‘너 저거 보이지!’ 하면 모두가 끄덕이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요. 사실 저는 마음이 무척 작은 사람이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별이 쏟아질 듯 빼곡한 밤하늘을 보고 겁이 나서 차에 숨을 정도죠. 기차를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거대한 풍경이 네모난 차창 크기로 수렴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의자에 앉아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요.

01. 《익숙한 새벽 세시》

“여름 하늘이 높고 바람이 서늘한, 감자와 옥수수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아참, 해산물도 끝내주는 그곳. 그래, 기차로 홋카이도 일주를 하자!”

02.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더 괴로워지는 원인은 내 단점들 때문이다. 굴속에 들어가고 싶다.”

03. 《홋카이도 보통열차》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오늘 내가 한 생각 중 가장 

멍청한 생각일 것이리라.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2017년 2월 9일, Zermatt

첫 책 《홋카이도 보통열차》는 스물아홉 여행기를 엮은 책이었죠. 내년이면 출간 10주년이 돼요. 

10년, 어마어마하네요. 마침 얼마 전에 《아무튼, 식물》이란 책을 낸 임이랑 작가와 이십 대에 쓴 책과 삼십 대에 쓴 책은 확실히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십 대에겐 삼십 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의 파장이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을 향한 큰 기대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지나치게 솔직하고 밝은 빛이죠. 이런 빛이 잔뜩 담긴 책이어서 좀 부끄러워요. 그렇지만 어떤 이에겐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비슷한 안구를 가진 이십 대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요. 이 책 작가의 말에 “내 생각의 각도가 아주 조금 바뀌어 있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지금 보면 그 문장이 참 우습게 느껴져요. “야 그거 맨날 바뀌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런 기분이랄까요(웃음). 이런 시니컬함이 삼십 대가 가질 수 있는 미덕이라면, 시니컬함이 없는 이십 대의 미덕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 한 바퀴, 무려 2,392.7km를 달렸어요. 그런데도 철덕, 그러니까 철도 마니아가 아니라고요?

저는 지금도 제가 철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철덕은 철도와 덕후의 합성어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덕후는 더 뛰어난 사람이에요. 철도를 예로 든다면, 저보다 더 많이 타봤고 관련된 지식도 훨씬 많아야겠죠. 저는 그저 철도를 즐기는 사람인데 저를 감히 어디에 견주겠어요. 하지만 세간이 절 철덕이라 한다면, 별수 없죠 뭐(웃음)

미나미치토세역에서 시작해서 삿포로역까지, 9일 동안 홋카이도 전역을 일주했어요. 어떤 역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일본 북동쪽 끝에 있는 네무로역이요. 꽤 긴 시간 동안 이동했는데 막상 그곳에서 특별히 하고 온 건 없어요. 대숲에 날아드는 새와 노을 지는 풍경을 본 게 다였죠. 어쩐지 멋쩍어서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하나 뽑았던 기억이 나요. 여행에는 가끔, 이런 허무한 성취감이 있어요. 진짜 인상 깊은 건 기차에서 만난 할머니였는데 할머니가 주신 앗케시산 훈제 굴이 엄청나게 맛있었어요. 하나를 먹자마자 왜 안 사 왔을까 땅을 치고 후회했죠.

여행은 역시 음식이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많다+그 사람이 동네 주민이다=맛집!’이라는 맛집 판별법에 공감했어요. 일리있는 말이에요.

이전에는 남들이 하는 건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샌 남들이 하는 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엔 음식에 관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자주 보는데요. 주인공인 고로 씨가 갔던 가게에 가서 그가 앉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다소 유치한 행동을 해보고 있어요. <고독한 미식가>의 배경은 도쿄인데, 이번에 교토에 갔을 때 고로 씨가 교토에 출장 가는 에피소드가 있는 것 같아서 찾아봤거든요. 특별편이 검색되더라고요. 특별편에 나온 식당이 마침 숙소에서 버스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라 예약을 하고 찾아갔어요. 그때 먹은 게 항정살 구이였는데 보통이 아니었죠. 여행 가서 먹어본 음식 중 제일 맛있었어요. 떡과 베이컨, 치즈를 무척 정성스럽게 구워줬는데 인생 음식이라고 할 법했어요. 금액은 좀 나왔지만, 얼마든지 괜찮을 정도였다고요!

2017년 2월 3일, Wien

저는 미디어에 나온 맛집은 대기가 길어서 꺼려지더라고요.

저도 줄 서는 건 체력이 안 돼서 미디어에 소개된 지 2~3년 쯤 된 곳들을 노려요. 비교적 줄 설 확률이 낮거든요. 허약 체질을 위한 팁이죠. 미디어에 기대지 않고 맛집을 찾는 또 다른 방법으론, 번화가를 벗어나 그 주변 동네에서 찾는 방법이 있어요. 홍대보다는 연남동이나 연희동을 노리는 거죠. 우선, 번화가 근처에 교통이 다소 불편한 동네를 찾아 좋은 숙소를 탐색해보세요. 그런 동네는 근사한 숙소도 제법 저렴하거든요. 그러고는 동네를 산책하며 괜찮아 보이는 식당의 리뷰를 구글맵에서 확인하는 거예요. 현지인들 후기는 믿을 만해서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아요. 

두 번째 책 《익숙한 새벽 세시》에는 서른다섯의 교토와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번아웃 신드롬으로 인한 “형편없는” 이야기까지도요. 

두 번째 책이 엮일 땐 첫 번째 책과는 다른 의미로 감정이 끓어 넘치는 시기였어요. 한없이 가라앉는 감정이었죠. 앞서 이야기한 이십 대 안구에만 보이는 빛의 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게 저 혼자만의 일인지, 일시적인 일인지, 자기 연민인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때 다다른 결론은 모두가 겪는 일이지만,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는 감정이라는 거였죠. 그런 이야기를 책에 담는 게 의미가 있는지 고민이 됐어요. 번아웃 신드롬, 그러니까 탈진 증후군이란 진단을 받기까지의 제 상태와 의사를 만나는 과정, 검사지의 목록, 약을 먹는 모습까지 낱낱이 담았거든요. 말이나 음악에 비해 글에는글쓴이가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에 저의 얕은 모습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어요.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과정을 2년 동안 반복하다가 ‘하지만 전하고 싶은 게 있어!’라는 강한 의지로 출간한 책이에요. 첫 책에 비해 열 배는 힘들었죠.

 열 배 이상 고민했을 것 같아요. 솔직하게 실패담을 쓰려고 했다던데요.

실패라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실패라고 깨닫는 그 순간에 미학이 있다고 믿거든요. 실패해본 사람만이 가진 시야라는 것은 분명히 있어요. 삼국지에 이런 일화가 나와요. 백전백승인 병사에게 사람들이 진짜 강한 병사라고 극찬을 하는데, 누군가 저 병사는 한 번 패배하면 끝도 없이 무너질 거라고 하죠. 저는 그 말이 무척 일리 있다고 생각해요. 연애도 일도 실패해본 사람이 더 잘하게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사람에게선 강인한 빛이 나오거든요. 그전에 내뿜던 빛은 환하게 반짝거리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 빛이에요. 하지만 실패를 아는 사람은 빛의 세기가 조금 약할지는 몰라도 믿음직한 빛을 내뿜어요. 이건 그런 의미에서의 실패담이에요. “오케이. 난 실패했고, 실패하는 중이고, 그런데 한 번 더 해볼 거야.” 이런 자세죠. 세 번째 책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는 여행지가 좀 달랐죠.

 

이번엔 유럽이에요. 떠나기 전에 ‘유럽, 베스트, 기차, 경치’를 검색했다던데, 꼭 오지은의 여행 키워드 같아요.

맞아요(웃음). 기차에 앉아서 최고의 경치를 보는 게 제 행복이거든요. 저는 번아웃 신드롬까지 짊어진 실패자지만, 낙지처럼 누워만 있고 싶진 않았어요.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어.’ 딱 그 마음으로, 현재 지구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행복한 행위를 떠올리며 검색을 시작했죠. 

유럽 역시 기차 여행이로군요. 유럽의 기차는 어땠어요?

좀 시시한 말이긴 한데, 카푸치노가 정말 맛있었어요. 진짜예요. 카페에서 마시는 것처럼 도자기 컵에 잘 만든 카푸치노가 나오거든요. 기차에서 놀랍도록 맛있는 카푸치노를 마시는데,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무려 알프스였어요! 이런 경험이 가능한 게 유럽의 기차죠.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요? 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화장실이요!

화장실, 엄청 중요하죠. 저는 주로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치안과 청결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혼자’ ‘여행’하는 ‘여자’는 따지게 되는 게 엄청 많아요. 그간 일본으로 자주 여행을 간 것도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해, 혼자 여행하는 여성의 안전이 비교적 보장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여행을 이어갈 수가 없거든요. 어두운 골목도 무서워하고 저녁 일곱 시면 숙소로 들어올 때도 많아요. 낭만이공포가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세 번째 책에서는 자신을 ‘작은 동양사람’이라고 칭하며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여행자는 때때로 모르는 사람의 일상에 불쑥 침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침범당한 사람에게 저는 작은 동양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예요. 제가 그 사람 시야에 머물던 시간이 좋은 순간으로 기억된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여행자로서 임무를 다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수많은 여행의 기억 중 지금 막 떠오르는 건 무엇인가요?

과테말라 출신의 40대 남자요. 오스트리아에서 묵은 숙소 주인이었는데, 꼭 털이 부숭부숭한 곰돌이 같았죠. 곰돌 씨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저의 우울감과 한심한 시절에 대해 더듬더듬 꺼내놓았거든요. 그때 곰돌 씨가 그러더군요. “나도 한때는 너처럼 모든 게 허무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앞으로 우리가 더는 보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만나서 웃고 얘기하는 이 시간은 진짜야. 여기에 있어.”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땐, 책에 쓴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손안에 복숭아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어요. 우리는 모국어에 강해서 모국어로 이야기할 땐 자신을 속이기 쉬워요. “이거 별거 아니야.”라는 말로 남도, 자신도 속이고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하지만 외국어로는 그러기 힘들어요. 투박한 단어로는 핵심만 전하게 되니까 솔직한 대화가 가능해져요. 여행 중에 만난 낯선 사람의 한마디에 위로받은 기억이 여태 묘하게 남아 있어요. 

다시 일본 얘기로 돌아와 볼까요.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셨죠. 무려 여행 다큐멘터리 <세계테마기행>이었어요.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는 것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게 가장 자유롭고 가벼운 활동이라면, <세계테마 기행>은 완전히 그 반대편에 있는 일이었어요. 여행 다큐멘터리여도 제가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저를 통해서 시청자들이 여행을 하는 거거든요. 숙소도 일정도 전부 제작진이 결정해요. 저는 다큐멘터리의 출연자일 뿐이어서 온천 코스가 있으면 온천에 들어가고, 인력거 코스가 있으면 인력거에 오르고, 폭포를 보러 가자고 하면 보러 가는 거예요. 여행이라기보단 ‘이 장소에 오지은을 데려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같은 느낌이죠(웃음).

내레이션도 직접 하셨잖아요. 기차 탈 때, 그리고 에키벤 먹을 때 특히 목소리가 밝아지더라고요.

일본 여행에선 에키벤을 빼놓을 수 없어요. 에키벤은 역에서 판매하는 지역 특산 한정판 도시락인데요. 먹어본 에키벤 중 최고는 홋카이도 여행에서 만난 거였어요. 예쁜 패키지에 보기 좋게 담긴 반찬이 아니라, 반은 게살, 반은 연어 알로 구성된 투박한 도시락이었죠. 첫술을 입에 넣었을 때의 감격이 아직도 잊히질 않아요.

<세계테마기행>을 보면서 일본 문화를 많이 엿볼 수 있었어요. 개중 하나가 신과 인간이 만나는 동네 축제, 마쓰리죠.

저는 마쓰리를 보기 위해 여행 일정을 바꿀 만큼 좋아라 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마쓰리를 보러 간 건 <세계테마기행> 제작진과 마음이 통한 부분이었죠. 마쓰리는 그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큰 행사인 셈이라 모든 주민의 크고 작은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애들은 타코야키를 사달라고 조르고, 남자들은 가마를 메거나 탈을 쓰는 등 축제에 참여하고, 가족과 이웃들은그런 모습을 촬영하고 있죠. 일본인의 생활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어요. 행사가 끝나면 불꽃놀이가 시작되는데 그게 또 엄청 멋져요. 언젠가는 보고 싶던 마쓰리에 지각하는 바람에 기차 안에서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은 잊을 수가 없어요. 기차와 불꽃놀이,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가 합쳐진 순간이었으니까요.

2017년 2월 14일, In Chinque Terre Train

민가에서 주인 노부부와 생활을 나누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잠자리나 생활은 어땠어요?

사실 저는 혼자 여행할 땐 비즈니스호텔만 이용해요.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의 방으로 구성되어서 기분 좋은 단절감을 주거든요. 차단되는 느낌은 좋은 의미의 삭막함이고, 여기서 오는 안도감은 잡생각을 물리쳐주죠. 말하자면 굉장히 도시인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감각에 익숙한 사람인데 민가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딜 가나 주인 노부부가 따라다니면서 이 방은 웃풍이 있으니 이불을 깔아두라는 등 세세한 조언을 해주시죠. 심지어 밥 먹을 땐 바로 앞에서 요리를 만든 장본인이 지켜보고 있어요. 제 여행 스타일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휴식이라면, 민박에서의 경험은 모든 게 자기주장을 하는 공간에서의 체험 같았어요. 

“좋은 여행은 다시 가고 싶은 곳,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하나를 남기고 오는 것”이라는 내레이션이 있었어요. 행복한 여행이 꼭 좋은 여행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요. 

아, 되게 좋은 말이네요(웃음). 처음에는 여행을 기쁨, 행복, 설렘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행위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행을 거듭할수록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더라고요. 어떤 시간을 보낼지 알 수 없는 채로 떠나는 그 자체요. 여행으로 얻는 게 행복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감정일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요. 여행을 갓 시작했을 때의 오지은은 가고 싶은 장소를 A부터 E까지 정해놓고 계획대로 움직이며 미션을 완수하는 성취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여행 스타일이랄까, 취향이 변하면서는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A~E가 될 수 있도록 열린 여행을 다니는 게 좋아요. 생각지도 못한 F~Z까지의 경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죠. 여행에 목표를 두면 모든 여정이 목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 되지만, 목표 없이 떠나면 모든 게 남기고 싶은 장면이 될 수 있어요. 목표가 없다는 건 전부 다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지금껏 사람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 셈인데, 반대로 들어본 여행기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무엇인가요?

정유정 작가의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여행기의 좋은 점은 독자 대신 여행을 떠나 궁금증을 풀어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책은 제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순수하게 풀어주었어요. 왜 히말라야에 가고 싶었고, 가니까 어땠고, 음식이 얼마나 안 맞았으며, 히말라야 등반이 얼마나 힘들었고, 그런데도 무엇이 좋았는지 등 제가 알고 싶던 내용이 모두 녹아 있는데다가 문체도 담백했죠.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지금 당장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면 어떤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이름하여 오지은의 유토피아!

저에게 유토피아는 확실해요. 헬싱키예요. 규모가 크지 않은데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죠. 도쿄나 런던, 뉴욕 같은 대도시는 번쩍거리고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거든요. 저는 자기주장이 강한 공간에선 생각을 잃어버려요. 그러나 헬싱키는 단아하고 옹골찬 도시죠.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지은 건물이 서점으로 쓰일 만큼, 예술이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도시예요. 예술과 생활이 평범하게 섞여 있는 건 제가 늘 꿈꿔온 삶이거든요. 헬싱키는 음식이 조금 애매하니까 헬싱키 그 자체에 전 세계의 음식이 저렴하게 제공된다면 그게 바로 유토피아겠네요(웃음).

오늘 대화는 꼭 함께 여행하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꽤 오래 글 쓰는 데만 집중하며 지냈어요. 얼마 전엔 세 번째 책도 나오고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으니 당분간은 작가이자 여행가인 오지은은 내려두려고 해요. 뇌의 어떤 부분은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굳는다던데, 그러면 안 되니까 슬슬 뮤지션 오지은의 뇌를 깨워보려고요. 최근엔 프로젝트 팀이나 피처링이 아니라 오롯이 오지은으로서의 곡도 썼거든요. 2013년에 3집이 나왔으니까 거의 6년 만이죠. 이전엔 곡이 쌓이면 정규 앨범을 내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앞으로는 곡이 만들어지는 대로 공개하려고 해요. 한 번에 여러 뇌를 사용할 순 없는 사람이어서 작가 오지은은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지만, 저는 계속 여행을 할 테고 우린 또 만날 수 있겠죠.

오지은의 걸음걸음

일본과 유럽, 그녀가 머문 흔적들

01. Kagoshima 02. Kyoto 03. Tokyo 04. Sapporo 05. Hokkaido 06. In Glacier Train

07. In Bernina Train 08. Milano 09. In Chinque Terre Train 10. Firenze 11. Sicillia 12. Nap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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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