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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아니한가
일러스트레이터 코피루왁
여기는 경기도 안산이다. 일러준 주소로 찾아가니 오래되었지만 견고한 아파트가 보인다. 더듬더듬 단지 안을 헤매다 초인종을 누르자 “네!” 한 음절과 함께 문이 열린다. 부엌을 둘러싼 하얀 타일, 색을 맞춘 듯 새하얀 싱크대, 빈티지한 색감의 패브릭, 오직 침대만 놓인 간결한 침실… 음료를 담아 건넨 유리컵까지 마음에 들지 아니한 것이 없다. 못생긴 작업 테이블 하나 없이 일과 생활을 모두 품고 있는 이 집. 저기 작게 웅크린 게 고양이라면, 이건 정말 좋지 아니한가!
만나서 반가워요. 《어라운드》에 여러 번 함께했는데 대면하긴 처음이네요.
그러니까요(웃음). 드디어 만나게 됐네요. 그림 그리고 청소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코피루왁이에요. 요즘도 그림 그리고, 청소 일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면서 지내고 있어요. 딱 점심때 오셔서 파스타를 좀 준비했는데 면이 불 것 같아요(웃음). 먹으면서 얘기할까요?
맛있어요. 무슨 소스를 쓴 거예요?
선드라이토마토 페스토예요. 이제는 이런 소스나 향신료를 대형 마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더라고요. 집 근처에 대형 마트가 많아서 쇼핑하는 게 참 좋아요. 아, 차도 좀 드세요. 비가 와서 날이 쌀쌀하네요.
비가 올 땐 역시 면이죠(웃음). 하는 일이 많아서 하나로 소개하기가 어렵네요.
저도 저를 하나로 소개하는 게 항상 어려워요. 예전에 이른바 ‘본캐’와 ‘부캐’로 소개한 적이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 제 본캐는 청소 일 하는 사람 같아요. 일상에서 비중이 제일 크기도 하고, 제가 이슈된 것도 그 일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를 제일 많이 담고 있는 건 사실 그림 그리는 자아예요. 저는 그림으로 저를 많이 표현하고 싶어 하거든요.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코피루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추출하는 그 커피… 맞나요?
맞아요(웃음). 이 이름은 <카모메 식당>(2006)에서 왔어요.영화에서 주인공이 커피를 내릴 때 원두에 “코피루왁”이라고 주문을 걸고 내리는 장면이 있거든요. 가게의 전 주인과 커피포트로 실랑이를 하다가, 전 주인이 ‘좋은 걸 알려줄 테니 커피포트를 달라.’고 하면서 알려준 주문이죠. 저는 주인공이 드립 커피를 내리면서 주문을 외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원두 상태가 어떻든 좋은 커피를 염원하면 맛있는 커피가 내려진다는 흐름이 특히 좋았죠. 영화를 보면서 ‘저 주문을 작가명으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됐어요.
집이 안산에 있네요. 처음 와 보는 동네라 구석구석이 재미있었어요.
안산에 처음 오셨군요.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란 안산 토박이예요. 이 집에 산 지는 이제 1년이 좀 넘었는데, 독립을 계획하고 집을 구한 건 아니었어요. 이전에는 본가에 살면서 동인천에 있는 작업실을 오갔는데 주인이 바뀌면서 작업실을 정리해야 했거든요. 그때 엄마가 대출을 끼어서라도 괜찮은 집을 얻어 독립하라고 권하셨죠. 엄마도 안산에 오래 사셔서 공인중개사 아주머니랑 친분이 있어 좋은 매물을 소개받을 수 있었어요. 엄마가 먼저 집을 보고 오곤 너무 괜찮다고 당장 계약하라고 하셔서 저는 실물을 보기도 전에 계약부터 했어요(웃음).
현관을 열고 좀 놀랐어요. 오래된 아파트인데 내부는 오래돼 보이지도, 아파트 같지도 않아서요.
입주하기 전에 원하는 모습대로 리모델링을 다 하고 들어왔어요. 리모델링도 동네에 아는 사장님이 해주셨는데, 좀 저렴하게 작업한 대신 사장님 일정에 맞춰 진행해야 했어요. 업체에 맡겼다면 한 달 정도면 될 걸 3개월이나 기다려야 했죠(웃음). “예지야, 오늘 사장님 바쁘다.” 하고 미루는 날이 좀 있었거든요. 리모델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건 ‘덜어내기’였어요. 기존에 있던 우드색 몰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집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몰딩부터 바꿨고, 흰 벽에 로망이 있어서 모든 벽을 하얗게 만들었죠. 우리나라 오래된 아파트엔 볼드하고 투박한 장식이 많은 것 같아요. 벽지에도 꼭 펄이 들어가 있고(웃음).
독자들에게 이 집을 좀더 디테일하게 소개하고 싶은데 세세히 묘사해 줄 수 있나요?
해볼게요. 우선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신발장이 있어요. 신발을 신고 벗는 곳 바로 옆에는 전신 거울이 있고요. 외출하거나 돌아왔을 때 제 모습을 꼭 한 번씩 점검하게 되는 거울이죠. 이 집은 방이 두 갠데,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 바로 오른편에 작은 방이 있어요. 옷방으로 쓰는 방이죠. 이 방에는 옷을 걸어두고, 운동도 하고, 여가생활도 즐겨요. 한마디로 저를 정리해 주는 공간이랄까요. 이 방을 지나 좀더 안으로 들어오면 왼편의 벽이 뚫리면서 부엌이 보여요. 그 앞으로 거실이 있는데, 저는 여기를 작업실로 사용해요. 그리고 거실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세 개의 문이 보이는데요. 바로 보이는 문이 화장실, 창살로 된 문이 창고, 그리고 안쪽에 있는게 안방이에요. 침실로 쓰고 있죠.
‘정리의 방’에서 운동을 한다는 게 재밌네요. 옷들에 둘러싸여 운동하는 건가요?
상상이 좀 안 되죠? 말로만 들으면 좀 답답하게 느껴지실 텐데, 이름만 옷방이지 옷들이 널려 있는 건 아니어서 운동하기에 좋아요. 가운데가 뻥 뚫려 있고 전신 거울도 있거든요. 저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활동적인 사람이에요. 먹기도 많이 먹어서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해 주려고 해요. 그러지 않으면 몸이 정체돼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게 대단한 운동은 아니고요, 대부분 요가나 스트레칭이에요.
저 지금 친구 집에 놀러 온 것 같아서 자꾸 늘어지는데(웃음), ‘집’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집이 가진 보편적인 정서가 있잖아요. 편안함, 안정감… 저도 딱 그런 느낌이에요. 제가 가장 릴렉스할 수 있는 공간이죠. 밖에서는 아무리 작은 거라도 규율을 지켜야 하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기가 어렵잖아요. 밖에선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필요하다면 집에서는 모든 걸 완전히 풀어놓을 수 있어요.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가장 나다운 공간이 되는 거죠.
나다운 곳에서 작업하는 건 어때요?
너무 편안해서 솔직히 일하긴 힘들어요. 일을 하려면 집 밖에 있을 때처럼 어느 정도 긴장감이 필요한데 그게 안 될 때가 많거든요. 카페에서 작업할 땐 카페 의자에 누울 수 없잖아요. 근데 집에선 조금만 피곤해도 침대에 가서 누워버리게 돼요. 밖에선 뭐가 먹고 싶으면 돈을 내고 사야만 먹을 수 있는데, 집에선 참을 필요도 없이 요리해 먹으면 되니까 자꾸 나태해지고(웃음).
집에서 작업할 땐 원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원칙은 딱 하나예요. “졸리더라도 침대에 가지 말자.” 저는 일이 있을 땐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의 계획표를 가장 먼저 짜요. 촘촘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오늘은 여기까지 끝내자.’정도인데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큼은 채우고 움직이려는게 최소한의 원칙이에요. 물론 매일 계획표를 짜지는 않고요, 일이 있을 때만 그날그날 일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 두고 있어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요?
고양이 책을 쓰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고양이 책 쓸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닌 지 벌써 꽤 되었는데 아직도 끝을 못 냈어요. 고양이 책은 개인 작업이라 더 진도가 더딘 것 같아요. 요즘 일러스트 외주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 작업을 하다 보면 또 우선순위가 밀릴 것 같은데, 힘을 좀 내보려고요. 함께 사는 고양이 ‘콩이’ 이야기랑 콩이를 만나기까지 임보했던 고양이들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거든요.
기대되는데요! 많은 고양이가 등장하겠네요.
엄청 많이 나와요. 악! 얼른 해야 하는데!
집 안에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특히 신경 쓴 부분도 있나요?
저한테 약간 강박증 같은 게 있는데, 작업 환경 주변이 어질러져 있으면 일을 잘 못 해요. 시험 기간에 공부한다고 앉았는데 책상이 지저분하면 다 치우기 전까지 공부 못 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웃음). 그래서 효율적으로 작업하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집안일부터 싹 해요. 그래야 신경이 안 쓰이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작업하다 말고 빨래해야 하는데, 설거지해야 하는데, 하면서 집중이 잘 안 돼요.
청소 일과 일러스트레이터 투잡인 셈인데 두 작업의 비중은 어떻게 돼요?
월, 수, 금요일엔 청소 일을 해요. 이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청소 일은 엄마랑 같이 하고 있어요. 가정집보다는 주로 학원이나 사무실 같은 큰 건물 위주의 청소죠. 젊은 사람이 청소 일을 하니까 관심도 많이 받았는데 이 덕분에 그림이 알려져서 일러스트레이터로도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어요. 그림 작업은 외주 작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일하는 패턴이 달라져요. 개인 작업 내용이 어떤지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외주나 개인 작업이 없을 땐 무척 느슨해요. 시간을 정해놓고 그림 그리는 타입은 아니어서 일이 없을 땐 친구들이랑 놀기 바쁘기도 하고요(웃음).
거실이 작업 공간이라고 했는데 장비 같은 게 전혀 없네요?
대단한 장비를 가지고 그리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아이패드랑 펜슬만 있으면 돼요. 100퍼센트 아이패드로만 그림을 그리고 추가로 디테일한 수정이 있을 때만 컴퓨터로 살짝 매만지는 정도죠. 아이패드를 산 뒤에 처음 작업을 시작해서 그런지 아이패드가 제일 편하고 작업도 잘돼요. 지금은 아이패드 프로 1세대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전엔 컴퓨터 태블릿으로 작업하기도 했지만 그때랑 지금은 작업 느낌이 많이 달라요. 아이패드가 저에겐 가장 잘 맞고 편해져서 이제 다른 도구로는 작업 못 할 것 같아요.
실은 집에 초대해 주셨을 때 고양이 만날 생각에 엄청 설렜어요. 지금도 신경이 자꾸 고양이에게로 쏠리네요(웃음).
콩이요? 얌전하죠? 콩이는 입양을 마음먹고 데려온 건 아니었어요. 아까 고양이 책 이야기하면서 언뜻 말했지만 저는 한동안 길고양이들을 임보하면서 지냈거든요. 제가 청소일하는 사무실 작은 방엔 사장님이 살고 계시는데요. 따님이 유학 가면서 키우던 고양이를 사장님께 맡겨서 사무실에서 함께 지냈어요. 근데, 그 모습을 본 어떤 분이 사장님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오갈 데 없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사무실로 데리고 온 거예요. 중성화가 안 된 아이들이었고 장소도 좁다 보니 교배되어 새끼가 나와 작은 사무실에 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지내게 되었죠. 근데 끔찍하게도 근친교배가 되어서 또 새끼가 생긴 거예요.
으아….
그때 제가 충격받고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서서 임보를 하게 됐어요. 이 집에서 한 마리, 한 마리 좋은 주인에게 보내주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그러는 중에도 계속해서 고양이를 데려오시는 거예요. 키울 마음도, 준비도 안 되어 있으면서 ‘이 고양이는 직접 키울 거’라며 데려오는 걸 보고 화도 많이 냈어요. 장문의 편지를 쓴 적도 있고요. 애인한테도 안 쓰는 편지인데 세 장을 빽빽하게 채웠어요. ‘제발 좀 이러지 말아라.’,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냐.’… 결국엔 고양이들을 빼앗다시피 집으로 데리고 와선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입양을 보냈죠.
아휴, 꼭 용사 같아요. 그럼 콩이도 임보했던 건가요?
맞아요. 그 일이 있은 뒤로 계속 임보를 해오다가 나중엔 사장님 따님이 맡기고 간 콩이까지 데려오게 됐어요. 전부 입양 보내고 사무실에 다섯 마리만 남았는데 다른 고양이들이 콩이를 너무 많이 괴롭히더라고요. 어느 날은 다툼이 커져서 콩이가 심하게 다쳤는데 그때 사장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콩이가 많이 다쳤다고, 입양을 보내야겠다고요. 입양 보낼 생각으로 집으로 데려온 건데 사무실에 있을 때부터 예뻐한 애여서 그런지 데리고 오자마자 빠르게 정이 들더라고요. 콩이를 위해 고양이 용품을 하나하나 사들이다가 캣타워를 결제하는 순간 ‘이걸 들인 이상 콩이는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은 왜 콩이가 됐어요?
사장님 따님이 지은 이름 그대로예요. 콩이가 이 집으로 온지 아직 1년이 채 안 돼서 아직 조심스러운 점이 많은데요, 일단은… 제가 너무 좋아요. 사실 콩이를 키우겠다고 다짐하기 전엔 겁이 많이 났어요. 고양이 키우는 친구한테 상담하다가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콩이랑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너무 큰데 한 번도 해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없었고 감당할 수 없을까 봐 겁이 났거든요. 참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막상 키우기로 결심하고 나니까… 와, 너무 좋아요(웃음). 콩이가 얌전하고 성격이 좋아서 어려운 점이 없는 것 같아요. 예쁜 짓도 잘하고요. 매일매일 키우길 잘했다는 생각만 들어요.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데는 《저 청소일 하는데요?》의 영향이 클 텐데, 요즘 청소 일은 어때요?
어느덧 청소 노동자로 살아온 지 7년 차가 되었어요. 이제는 반사적으로 일하는 정도가 됐죠. 왜, 계속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생각 없이 하게 되잖아요. 거의 그 수준까지 왔죠. 제가 몸 쓰는 걸 좋아하고 경제적으로도 좋은 수입원이어서 청소 일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종종 매너리즘을 느껴서 지루할 때도 있어요. 제가 기계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최근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끝은 늘 청소 일로 돌아와요. 여전히 저에겐 좋은 직업인 데다가 엄마랑 하고 있어서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거든요.
내 집을 청소할 때랑 다른 점도 있나요?
가정집은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잡다한 물건이 많아요. 저는 주로 학원이나 회사 같은 큰 건물을 청소하고 있는데 보통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어서 개인 물품이 거의 없어요. 집에선 작은 것들을 조심조심 조금씩 치워나가는 느낌이라면 일터에선 팍팍 치우고 정리하는 느낌이죠. 저는 일이 아니더라도 청소를 좋아해요. 청소로 스트레스를 푸는 스타일이라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정리하고 청소하는 걸 즐기거든요.
저희 에디터 중에서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대청소하고, 일하다 말고 “빨리 집에 가서 빨래하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이해가 잘 안 돼요(웃음).
아휴, 저는 그 마음 알아요, 이해돼요. 치우고 나면 기분이 얼마나 좋아지는데요.
깨끗해지는 걸 보는 게 좋은 거예요?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아요. 더러운 공간이 제 손을 스치면서 깨끗해진다는 거.
남이 청소하는 걸 봐도 좋아요?
남의 집은 더럽건 말건 크게 신경을 안 써요. 남보단 제가 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깨끗해지는 과정과 깨끗한 상태도 좋고, 그걸 제가 해서 더 좋고. 아, 이렇게 말하니까 약간 청소변태 같네요(웃음).
청소 노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한번은 영어 학원을 청소한 적이 있는데 교실이 여러 개인공간이었어요. 아마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던 것 같은데, 불을 켜고 들어갔더니 칠판에 메시지가 써 있더라고요. “얼굴은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항상 깨끗하게 청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옆엔 초콜릿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순간 기분이 무지 좋았어요. 사실 청소 노동자는 ‘돈 주고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청소 노동자까지 신경 쓰진 않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챙겨 주는 분을 만나니 대면한 게 아닌데도 너무 감사했죠. 그 기억이 오래도록 남더라고요.
SNS에 이런 문장을 썼죠.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요리하고, 운동하고, 작업하며 혼자로 지내는 단단함이 생겨났다.” 혼자 지내는 건 어때요?
독립하고서 저는 완벽히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가족이랑 살 땐 생활이 너무 불편했거든요. 고의는 아닐지라도 침범당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고요. 생각보다 제가 공간에 대한 소유욕이 크더라고요. 저는 공간을 가지고, 그 안을 꾸리고, 꾸미는 거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엄마가 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소꿉놀이 하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혼자 구석구석을 꾸미고, 청소하고, 수납하고, 정돈하는 게 즐거워요. 혼자만의 공간을 채우는 게 매순간 기뻐서 앞으로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될 정도예요(웃음).
나만의 공간에 친구들도 많이 초대하는 것 같아요.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이야기 나누고, 함께 웃는 시간을 좋아해요. 친구들이 한 가지만 지켜준다면요(웃음). 누군가 이 집에 놀러 오면 꼭 하는 말이 있는데요. 아,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민망하지만 “변기 뚜껑을 꼭 닫고 물을 내리세요.”가 그거예요. 엄청나게 강조하는 한 가지죠. 오래전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는데, 변기 뚜껑을 열고 물을 내리면 그 세균들이 공간 곳곳으로 퍼진대요. 그게 워낙 임팩트가 커서 변기 뚜껑 내리고 물 내리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죠. 친구가 화장실에 갔다 나왔는데 변기 뚜껑이 올라가 있으면 “변기 뚜껑 올라가 있잖아!” 하고 한마디씩 하게 돼요. 우리 집에선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에요.
이것도 청소랑 연관되는 규칙이네요(웃음). 여기는 과거보다 미래의 힘이 훨씬 강한 집이 될 것 같아요.
아직 이 집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구나 물건들이 새것 같아요. 낡은 느낌이 전혀 없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물건들도 저와 함께 늙어가겠죠. 고장나고 해질 텐데 아무리 낡아도 제 손을 따라 곱게 낡으면 좋겠어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기성품이더라도 제 손때가 묻어 저만의 느낌이 나길 바라는 거죠. 방치된 낡음과 관리된 낡음은 그 분위기와 느낌이 확실히 달라요. 이 물건들이 제 손에 길들어 곱게 낡아가는 것처럼, 저도 이 집에서 품어진 채로 잘 늙어가고 싶어요.
시간이 지난 뒤에 이 집이 어떻게 낡았는지 확인하러 오고 싶네요.
꼭 초대할게요(웃음). 저는 요즘 집에서 화상 미팅을 하는 일이 참 많은데, 화상 시스템을 활용해서 수업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나 책 만들기수업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중이죠. 코로나19 때문에 작년에는 친구들이 저희 집에 많이 놀러 왔는데요. 제가 비건 지향의 식단을 유지하다 보니 친구들에게 비건 요리를 대접할 일이 많았어요. 앞으로도 이 집에서 친구들에게 비건요리를 많이 해주고 싶어요. 집 밖에선 다양한 음식을 먹더라도 저를 만났을 땐 비건 음식을 접하면서 그 맛과 멋을 알아가길 바라요. 저는 앞으로도 건강하고 기분 좋게 이 집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에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송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