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LL WE WALK | 같이 걸을까

에브리데이, 남쪽으로 튀어

같이 걸을까

SHALL WE
WALK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지면 영화 <에브리데이> 와 <남쪽으로 튀어>를 본다. 세상에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힘든 게, 어디 엄마와 아내뿐일까. 아빠도, 아들도, 딸도 저마다의 말 못할 어려움이 있다. 가족은 그 무거운 이름 아래에서 서로의 역할을 버겁게 견뎌낸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잘한 일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역시 가족을 만든 일이다.

영국의 시골 마을. 한 젊은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입히고 먹인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쌀쌀한 아침 속을 한참 걸어나가 그들이 버스와 기차를 타고 또 택시를 타고서 겨우 도착한 곳은, 감옥이다. 곧 여자의 남편, 네 아이의 아빠가 나타난다. 그들은 그리움의 강도만큼이나 꼭 끌어안고는 키스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면회 시간은 금세 끝난다. 여자와 아이들은 올 때와 같은 여정으로 집으로 향하고, 아빠는 비좁은 감방의 침대 위에 누워서 아쉬움과 무력함, 분노와 막막함,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장장 5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이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네 아이를 데리고 어두운 거리를 걸어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기차와 택시를 탄 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교도소의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훌쩍 자라고, 낮에는 마트에서 밤에는 펍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베개는 눈물로 다 젖었다. 아이들은 엄마 속을 썩이기도 하고, 엄마는 아이들 몰래 남편의 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짧고도 강렬한 면회는 계속된다.

영화의 제목은 <에브리데이Everyday>다. 제목 그대로다.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Michael Winterbottom은 영화 속 인물들의 실제 사는 집과 다니는 학교에서 무려 5년 동안이나 영화를 찍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들의 에브리데이, 그러니까 매일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해 서른에는 가뿐하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는데 시대 분위기와 나의 직종을 고려해 봤을 때, 꽤 일찍 결혼한 축에 속한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일찍 결혼한 이유는 단순했다. 내 주변엔 노처녀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언니들은 죄다 대체 자신이 왜 연애를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일기를 한 달만 써봐도 알 수 있을 질문을 죄 없는 타인에게 퍼부어댔다. 눈은 에베레스트 최고봉만큼이나 높았으며, 두꺼운 아이라인과 다크서클을 무슨 데칼코마니처럼 달고 다녔고, 성질들은 저마다 독창성을 인정해줄 수 있을 정도로 까칠했다. 그리고 내가 그 언니들처럼 늙을 확률은 99%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했다. 운 나쁘게 나한테 걸린 세상 물정 모르는 남자를 잡아 일단 결혼을 하고 서둘러 애를 둘씩이나 낳았다.

서른 살이 되던 날 새벽에 한쪽 팔에는 백일도 안된 둘째 아이를 끼고 다른 쪽 팔에는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첫째 아이를 끼고 앉아, ‘그래도 나는 서른의 위기’ 같은 사치스러운 고민에 빠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결혼을 안 했더라면 이제 서른이네 어쩌네 하면서 술독에 빠져 온갖 궁상을 다 떨었을 텐데, 그러기에 내게는 먹여야 할 모유와 빨아야 할 기저귀가 너무 많았다. 

‘뭣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 ‘인생에 의미도 낙도 없다.’, ‘다른 내가 되고 싶다.’, ‘진짜 나를 찾고 싶다.’라고 배부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다. “이봐, 닥치고 결혼을 해. 아이를 둘쯤 낳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워보라고. 그와 동시에 배우자가 한눈을 팔지 않게 단속해가면서 그가 회사를 때려치우거나 빚을 지거나 그 외 각종 사고를 치는 것을 수습해 봐. 적어도 10년 동안은 인생이고 자아고 뭐고 그딴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을 테니까.”

임순례 감독의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본 것은 세월이 몇 년 더 흘러 남편이 구조조정을 당한 후였다. 앞으로 건실한 중산층의 삶이 끝도 없이 펼쳐지리라 의심치 않았던 우리는 갑자기 세상에서 내던져진 코 푼 휴지 뭉치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비싼 것은 시간이다!” 겉으로는 큰소리치며 당장 배낭여행을 계획했지만, 사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공황상태에 빠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야 할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직 한 번에 지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아이들은 탈선하고, 부부는 갈라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쓰던 때였다. 

그런데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나는 우리가 누려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어 왔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남자 최해갑을 보았다. 주민등록증을 찢고 지문 날인을 거부하면서 국정원의 감시 대상이 된 이 남자, 명색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지만 사실은 작은 동네 찻집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거의 얹혀산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고 떳떳하다. 그 어떤 것의 개도 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 있고, 가족들 역시 그의 신념을 존중하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 신념 때문에 남쪽 작은 섬으로 쫓겨나듯 떠나게 된다. 그들이 살게 된 곳은 전기도, 수도도 없는 버려진 농가다. 집에서는 세금을 받으러 온 공무원에게 TV를 던지고 이웃들과 싸우고 경찰서에 단골로 불려다니던 사고뭉치 아버지 최해갑은 새로운 터전에서 뚝딱뚝딱 집을 고치고 발전기를 돌려 불이 들어오게 하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오는 능력자로 변신한다.

실직자 가정의 지옥을 헤매고 있던 나는 영화 속 그들이 새집을 다 같이 쓸고 닦은 후 비좁은 방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에 광명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저게 가족이고 저게 행복이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우리가 서로 믿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반대로 당장 실직도 당했고 앞으로 살날이 막막하지만, 우리가 서로 믿고 사랑한다면 차가운 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말이 쉬웠다. 세상엔 최해갑 같은 사람이 흔치 않고, 나 역시 최해갑의 아내 안봉희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해맑은 표정으로 남편을 보필할 자신은 없다(나는 배가 좌초하면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난리를 치다가 결국 제일 먼저 빠져 죽을 스타일이다). 당장 쓰나미처럼 닥쳐오는 나쁜 소식과 지뢰밭처럼 펼쳐진 돈 새는 구멍은 온전한 사람도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따뜻한 방 안에서 커피라도 한 잔 들고 앉아 있을 때는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라며 거만한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장 다음 달 가스 요금을 못 낼 처지에 놓이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피해의식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다정한 눈빛이나 위로의 멘트를 날리는 것도, 아이들의 실수를 그 나이 때 저지를 만한 통과의례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것도 다 내 배가 불러야 가능한 일이다. 아, 가족을 만든다는 건 진정 미친 짓일까.

<에브리데이>로 다시 돌아가서, 5년 후에 아빠는 드디어 출소한다. 이제 아이들은 주말마다 그 먼 여정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고, 남편은 비좁은 감방 침대에 누워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고, 아내는 더는 네 아이를 혼자 건사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이제 그들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건 기대했던 것처럼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아빠는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한다. 침대에 누운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돌아온 낯선 밤에 아빠의 고함을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다 같이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손을 잡기도 하고, 서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떨어졌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들은 함께 걷는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걷는다. 여섯이서 걷는다. 

이 영화의 네티즌 관람평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맞다. 그게 정답이다. 이 가족의 매일매일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이야말로,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가족이라는 것의 전부는 아닐까. 마이클 윈터바텀이 5년 동안이나 지루한 과정을 반복한 이유는 한 가족에게 있어서 평범한 일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묵묵히 반복하는, 별 의미도 없어 보이고, 특별할 것도 없고, 번거롭기만 한 그 여정들. 그런 것들을 반복하게 하는 가족의 힘 말이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난 후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 나 혼자 몸이었다면 그냥 ‘더러운 인생!’이라고 욕이나 하고 말면 됐을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n분의 1로 나눌 필요도 없을 것이고, 훌쩍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후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어도 될 것이다.

주말마다 카페에 앉아 패션잡지를 뒤적거리거나 고독을 위로해줄 달콤한 소설책을 읽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만성적 수면부족에 시달리거나, 남편 때문에 속을 끓이거나, 아내나 엄마로서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며 울고불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편하고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런 구속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구속은 어쩌면 여러 가지 것들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나라는 나약한 존재를 똑바로 걷게 해주는 보정기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모욕감을 참아내고, 피로를 이겨내고, 귀찮음을 무릅쓰며, 삶의 의미를 찾느라 정작 삶을 외면하는 실수를 면하게 된다. 막막한 인생을 같이 걸어갈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다.

행복이 추구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살다 보면 보너스처럼 떨어지는 것’이라는 정의를 믿는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가족을 꾸리는 경솔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꾸린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게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뭐든 저절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를 얻는 것보다 가족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기에 묵묵히 함께 걷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와도 묵묵히 걷는다. 잡은 손을, 바라보는 눈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걷는다. 그 와중에 가끔 행복이라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곧 저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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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수초이